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78화 (178/653)
  • 제178화

    라온은 당황하여 전신을 부르르 떠는 이닐드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익스퍼트 상급 수준인가.’

    이닐드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내부에서 퍼져나오는 기운은 익스퍼트 상급에 필적한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괜히 모렐이 결투를 허가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이닐드는 물론이고, 모렐도 자신의 무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이 드러낸 기세 그대로 익스퍼트 중급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력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무언가 어설퍼.’

    이닐드의 기세에 비해 그가 가진 격 자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많은 실전을 겪지 않은 것 같았다.

    “이익!”

    이닐드는 라온이 든 거대한 몽둥이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날 무시하는 거냐! 당장 검을 뽑아라!”

    그는 라온의 허리춤에 매달린 제천검을 가리켰다.

    “내 검은 아직 개시 안 했거든. 너랑 싸우는 데 쓰기엔 아까워.”

    “너 이 새끼! 정말 죽여 버….”

    그는 욕을 하려다가 뒤에 있는 왕녀를 힐끔 보고 억눌렀다. 이 상황에서도 왕녀를 신경 쓰다니, 안 좋은 쪽으로 보통 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사람이 이리 몰려 있어?”

    “결투를 한다는데? 그것도 지그하르트와 발카르가!”

    “육황의 둘이? 미쳤는데!”

    “우와아아아!”

    가득이나 왕래 많은 시청 앞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변을 둘러쌌다.

    “누가 이길까?”

    “아쉽게도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어.”

    “무조건 발카르지.”

    “왜? 지그하르트도 같은 육황이잖아.”

    “저쪽 긴 금발이 이닐드잖아. 모렐의 제자이자, 5서클의 끝에 이른 마법사. 두 가지 속성이 담긴 주먹을 기가 막히게 다룬데. 반면 저쪽 잘생긴 친구는 나이도 어리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자자, 떠들지만 말고! 여기 와서 돈부터 걸어! 이런 끝장나는 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잖아!”

    사람들이 몰라다 보니, 자연스레 도박판도 열렸다. 다만 대부분이 이닐드의 명성을 듣고, 그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후우, 좋다. 검을 꺼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닐드는 구경꾼들이 본인을 칭찬하는 걸 듣고서 빙긋 웃었다. 칭찬 조금 들었다고,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는 걸 보면 참으로 일관성 있는 놈이었다.

    “패배한 뒤에 왕녀님께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준비나 해라!”

    이닐드가 전투용 장갑을 끼고서 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주문을 외우자 마나의 흐름이 가속되며 그의 전신에 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시작한 거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닐드의 앞에 이르러 성인의 몸통만 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뭐, 뭐야! 실드!”

    버프 마법을 외우다가 당황한 이닐드가 다급하게 실드 마법을 운용했다. 푸른 막이 그의 앞을 덮었지만 아무 의미 없었다. 몽둥이 앞에서는 모든 게 평등하니까.

    꺄아아아앙!

    한 겹의 실드가 유리장처럼 깨져나가고, 둔탁한 몽둥이가 이닐드의 허리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바위가 깨지는 듯한 살벌한 소리와 함께 이닐드가 공처럼 튕겨 나가며 머리를 땅에 꼬라박았다.

    후우욱….

    주변을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들은 라온의 몽둥이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방금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

    “어떻게 저 큰 걸 들고….”

    구경꾼들만이 아니라,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도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닐드!”

    모렐이 마나가 깃든 소리를 지르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닐드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몽둥이에 맞은 것치고는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역시.”

    라온은 이닐드가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티팩트인가.”

    몽둥이로 이닐드를 쳤을 때 콩으로 꽉 찬 보자기를 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티팩트로 유명한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답게 물리 방어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냐!”

    이닐드는 눈을 붉게 물들이며 악을 질렀다.

    “뭐가?”

    “준비하고 있는데 공격하다니! 이 비겁한 놈!”

    “준비? 무슨 준비?”

    “버프 마법을 걸고 있었잖느냐! 그 틈에 공격하다니, 네놈에게는 명예도 없는 것이냐!”

    그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며 비겁하다고 떠들어댔다.

    “비겁?”

    라온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모로 틀었다.

    “전장에 나가서도 그딴 소리를 할 건가?”

    “뭐?”

    “네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준비가 안 되었으니, 멈춰달라고 할 거냐고.”

    “그, 그것과는 다르지 않냐! 이건 결투잖아!

    “마법사가 결투에서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그게 시작 신호 아닌가? 오히려 내가 선수를 당한 건데?”

    “그, 그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떠는 이닐드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운용한다는 건 검사가 검을 뽑은 것과도 같다. 소꿉놀이처럼 기다려주는 대결을 하려면 집에 가서 해.”

    “바, 발카르를 모욕하지 마라!”

    “발카르가 아니라, 널 모욕했다니까.”

    “네가 한 말은 내가 아니라….”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라온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강대한 풍압이 이닐드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할 거야. 말 거야.”

    “끄으윽, 이젠 방심하지 않는다!”

    이닐드가 뒤로 훌쩍 물러서서 빠르게 버프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스트렝스, 아이언 스킨에 각종 버프가 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

    라온은 이번엔 그가 버프를 전부 걸 때까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멍청한 놈! 이제 와서 명예를 지켜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명예 때문이 아니라, 또 주절대면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입만 살아서!”

    이닐드가 오른손에 불꽃, 왼손에 바람을 뭉친 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기척이 나타난 건 자신의 뒤쪽. 빠른 움직임이 아니라, 아예 기척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근접 거리 이동 마법 블링크였다.

    “죽어!”

    정립된 투로로 뻗어진 이닐드의 주먹에 바람과 불꽃이 휘몰아쳤다. 강대한 공격이 향하는 곳은 라온의 허리. 당했던 대로 갚아주겠다는 듯한 유치한 공격이었다.

    “너무 뻔하게 보이잖아.”

    라온은 조금의 당황도 없이 진각을 밟으며 몸을 돌렸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괴력에 허리의 회전력을 담아 몽둥이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강대한 힘이 깃든 몽둥이가 바람과 불꽃으로 어우러진 이닐드의 마권과 맞부딪쳤다.

    “멍청한 놈!”

    이닐드는 뻗어오는 라온의 몽둥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검사답게 반응은 빨랐지만, 5서클 마법 바람의 폭류와 화령의 비수를 결합시킨 조합 마법을 저딴 몽둥이 하나로 뚫으려 하다니 머리가 텅텅 빈 검사다웠다.

    ‘이대로 태워주마!’

    저 잘난 얼굴을 지져버리기 위해 더욱 마력을 집중시키려고 할 때였다.

    ‘어?’

    한참 전에 다 타버려야 했을 몽둥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몽둥이가 크긴 했지만, 그 재료는 나무에 불과하다. 이 뜨거운 화력에서 타지 않고 오히려 마법을 짓이기며 들어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저기에 오러를 담았다고?’

    무기가 크면 클수록, 모양이 둔탁하면 둔탁할수록 오러를 담기는 쉽지 않다. 소드 마스터는 많아도, 해머나, 모닝스타 마스터는 극소수인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저 미친놈은 저 몽둥이에 마나를 담아낸 것 같았다. 입심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름 실력도 있는 것 같았다.

    “크아아아!”

    이닐드가 비명을 지르며 마력을 집중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몽둥이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5서클 조합 마법을 뚫고 들어왔다.

    “브, 블링크!”

    이닐드는 결국 경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일단 후퇴한 뒤에 다른 마법을 사용해서 빈틈을 노려야 했다.

    ‘자, 잘 빠져나왔어. 저기 있었다가 또 얻어 맞… 어?’

    녹아내리는 자신의 마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태양을 가리며 거대한 몽둥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머리가 하얘진다. 블링크나, 실드를 쓴다는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입만 떡 벌렸다.

    “블링크는 이제 안 통해.”

    라온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몽둥이를 찍어 내렸다.

    콰아아앙!

    바닥이 파여나갈 정도의 충격파가 터지고, 이닐드가 땅에 꼬꾸라졌다. 아직도 아티팩트가 운용되는지 상당한 양의 충격이 흡수되었다.

    “좋네. 때릴 맛이 나.”

    라온이 살벌한 눈빛을 발하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잠깐만! 내가 졌… 크아아악!”

    이닐드의 입에서 포기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다시 몽둥이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바닥에 깔린 모래들이 용오름이 될 정도의 광풍과 함께 이닐드가 하늘로 치솟았다.

    “힘껏 때려도 죽지 않는다니, 얼마나 좋아.”

    라온은 몽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떨어져 내리는 이닐드를 날려버렸다.

    콰아아앙!

    공기가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이닐드가 대지에 대자로 처박혔다. 그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두 개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끄으으윽….”

    반지를 끝으로 충격 흡수 아티팩트가 더는 없던 것인지 이닐드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만 줄줄 흘렸다.

    “사, 살려….”

    “안 죽여.”

    라온은 몽둥이를 어깨에 걸친 채 이닐드를 내려보았다.

    “근데 넌 쓸데없는 말이 좀 많더라고. 한동안 묵언수행 좀 하자.”

    그 말을 하며 입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닐드의 입에서 옥수수가 다발로 쏟아졌다.

    “끄르르륵….”

    이닐드는 목을 뒤로 넘긴 채 눈을 까뒤집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라온은 몽둥이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시원하네.’

    이성을 좋아하든, 관심을 끌든 알 바 아니지만, 이닐드는 왕녀의 시선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했다. 말도 더럽게 많고, 하는 짓도 유치해서 마음껏 패주었더니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해졌다.

    -지독하군….

    라스는 걸레짝이 되어버린 이닐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왕은 저리 고통을 주지 않고, 일격에 끝을 냈을 것이다.

    ‘이래 봬도 힘 조절한 거야.’

    정말 온 힘을 다했으면 첫 일격에 이닐드는 죽었을 것이다. 이것도 상당히 봐준 것이다.

    -하여튼 인간은 약한 주제에 잔인하기만 하노라.

    ‘잔인은 무슨. 죽이는 게 더….’

    라온이 고개를 저을 때였다.

    [<분노>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오.’

    시스템이 능력치를 올려주고 돌아갔다.

    -무, 무슨 소리냐! 본왕이 언제 감탄을 해!

    ‘감탄했잖아. 잔인하다고.’

    -아, 아니. 그건 그냥 한 소리지 않느냐!

    ‘너 왕이지? 그것도 위대한 마계의 왕.’

    -그, 그렇다.

    ‘그런 위대한 왕이 그냥 하는 소리가 있어? 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어쨌든 좋네. 이런 놈을 잡고 능력치가 오르다니.’

    라스는 능력치를 확인하는 라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제, 젠장. 정말 입 하나는 더럽게 잘 놀리는구나.

    이닐드라는 느끼한 놈은 단순히 말이 많은 거고, 라온 놈은 말을 잘 굴린다. 매번 느끼지만,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상대해서는 안 될 놈이로다….

    *     *      *

    찌직.

    구경꾼들은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닐드가 박힌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지,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가 이겼는데? 그것도 압도적으로….”

    “허억!”

    “이거 꿈 아니지?”

    “내 평생 몽둥이에 오러를 씌우는 건 처음 본다….”

    “요즘 지그하르트는 몽둥이 쓰는 법도 가르치나?”

    “미쳤군. 미쳤어. 아직 20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들은 여유롭게 이닐드를 꺾은 라온을 쭉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닐드 님이 졌다고?”

    “그것도 검이 아니라, 몽둥이에….”

    “바, 방심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블링크까지 썼잖아! 피하질 못한 거라고!”

    “어떻게 이런….”

    발카르의 마법사들 역시 쓰러진 이닐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자자, 대결이 끝났으니, 판돈을 나눠야지. 지그하르트 쪽에 건 사람들은 이쪽으로 오슈! 배율은 자그마치 4.2배요!”

    처음 도박판을 벌였던 사람이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대박 터졌다!”

    “앞으로 지그하르트 쪽에 매일 절해야겠어!”

    “지그하르트의 잘생긴 검사님! 제가 오늘 술 한잔 사겠습니다!”

    “나, 나요! 나야!”

    돈을 따고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광풍단이 잘 아는 경쾌한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으하하하! 대박!”

    어느새 도박에 참여한 붉은 머리 엘프 하나가 낄낄거리며 손에 든 금화 20개를 보고 있었다.

    “역시 돈을 빌려오길 잘했어. 라온에게만 걸면 잃지를 않는다니까! 판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완벽했….”

    “리메르.”

    리메르가 히죽이며 금화를 챙길 때 모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저 녀석은 뭐냐.”

    모렐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담고 있었다.

    “지그하르트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괴물인가?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의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런 표정은 처음 보네.”

    리메르가 금화를 품에 넣으며 헤죽 웃었다. 모렐은 화염 마법사인 주제에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간인데, 저렇게 당황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혹시 하분 성의 검귀라고 들어봤어?”

    “웨이브 때 무너진 성벽을 아래에서 지켰다는 그 미친놈 말인가?”

    “그래. 그 미친놈이 저 녀석이야.”

    “그랬군. 하분 성의 검귀는 예상대로 지그하르트의 검사였어. 다만 저리 어릴 줄은 몰랐다.”

    모렐은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결에서 패한 제자도, 내기도, 다 잊고 그저 라온에 대한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녀석이지. 잘 봐둬 조금만 지나도 훨씬 유명해질 테니까.”

    “잘난척하지 마라.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발카르에도 비슷한….”

    “난 인정 못 해!”

    갑작스럽게 울린 뾰족한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이런 대결 인정 못 한다고!”

    제이나 왕녀가 붉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라온의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라온은 앞을 가로막은 제이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인정 못 한다는 거지?”

    “이 승부!”

    제이나는 발밑에 깔린 이닐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인정하지 않았어!”

    “너희 일행의 대표가 인정한 대결인데.”

    라온은 놀라움이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보는 모렐을 가리켰다.

    “대표는 그가 아니라, 나야!”

    제이나는 당당하게 본인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명가에서는 후계자들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이름만큼은 대표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다.

    “그건 말이 안 돼.”

    “뭐?”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승부를 내기 전에 했어야지.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못 받아들이겠다? 스스로 그릇의 크기가 작음을 증명하는 짓이다.”

    “아, 아까는 말을 꺼내기….”

    “거기다 이자는 발카르의 이름과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담았다.”

    라온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이닐드를 턱짓했다.

    “서로의 소속을 입에 담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건 당신도 암묵적으로 허가를 했다는 의미지. 발카르의 이름으로 승부를 내고서도 우기겠다는 건가? 그쪽 왕국의 이름은 그리 가벼운 모양이지?”

    “맞지. 멈추려면 진즉에 멈췄어야 했어.”

    “그러니까. 다 끝났는데, 왜 저러는 거야.”

    “다 끝나고 우기는 건 너무 추잡하잖아.”

    구경꾼들은 제이나에게 살짝 들릴만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으윽….”

    제이나는 구경꾼들의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다 닥쳐! 이건 잘못된 승부였으니까!”

    “좋아.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그녀가 구경꾼들에게 소리를 지를 때 라온이 바닥에 내려놓은 몽둥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네가 나와 싸워서 이긴다면 이전의 승부는 무효로 해주겠다.”

    “스, 승부? 너랑 내가?”

    “뭘 그리 당황하는 거지? 설마 그냥 봐줄 거라 생각했나?”

    “나는….”

    제이나의 시선이 피 묻은 몽둥이로 향했다. 조금 전 이닐드를 개패듯 두드린 몽둥이를 보자 싸우자는 말이 나오질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모렐을 보았지만, 그는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이대로 패배를 받아들이라는 뜻 같았다.

    “안 돼!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게 질 순 없다고!”

    “그걸 인정하기 싫으면 덤비면 된다. 거기서 입으로만 떽떽 거리지 말고. 와라.”

    차게 웃으며 몽둥이를 들었다. 제이나를 향해 겨눈 몽둥이에서 이닐드를 후려 팰 때보다 강대한 기류가 치솟았다

    “으윽….”

    제이나는 그 막대한 기세에 짓눌려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손만 떨었다.

    “저쪽은 주둥이만 놀리는 게 특긴가? 다 입으로만 떠드네.”

    “그거 제가 해도 될까요?”

    마르타가 차게 웃을 때 발카르 왕국 기사들 사이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가 또 있는 건가.’

    또 어떤 멍청이가 본능에 이끌렸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키가 그리 크지 않지만, 체격이 단단한 20대 중후반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이닐드와는 다른 맑고 곧은 눈. 왕녀보다 오히려 자신의 무력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발카르 왕국 영수 기사단의 자티스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라온님의 검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검례를 취했다.

    “자신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자티스는 당당하게 자신 없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이라고 했다. 즉, 언젠가는 막겠다는 뜻이었다. 익스퍼트 중급도 되지 않는 무력이지만 그 이상의 굳건함이 느껴졌다.

    ‘발카르의 기사라….’

    발카르는 마법 왕국답게 기사보다 마법사가 주가 되는 세력이다. 기사들은 마법사의 방패막이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힘과 열의가 없다는데 저 자에게선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몽둥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자티스는 자세를 낮추고, 두꺼운 검을 사선으로 세웠다. 피하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말했던 대로 받겠다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네.’

    다만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닐드 때보다 더 강한 힘과 오러를 실어 몽둥이를 내리쳤다,

    콰아아아!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몽둥이가 떨어져 내릴 때 자티스의 자세가 살짝 변했다. 반은 견디고, 반은 흘리려는 것 같았다.

    ‘어딜.’

    라온이 찰나의 순간에 몽둥이를 살짝 틀었다. 절대 흘릴 수 없는 궤도였다.

    “흐읍!”

    자티스의 집중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몽둥이가 틀어지는 걸 보자마자 흘리기를 포기하고 방어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콰아아아앙!

    장대한 기운이 깃든 몽둥이와 단단한 오러가 어린 검이 맞부딪치며 압축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후우우욱.

    가라앉는 회색 기류 속에서 조각난 검을 들고 있는 자티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이 깨지고, 무릎은 꿇었을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부러진 검을 붙잡은 채 이를 꽉 물고 버텨냈다.

    “제, 제가 졌습니다.”

    자티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다만 눈빛은 처음보다 더 반짝인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전부 머저리는 아니로군.’

    승부를 겨루고, 정당하게 패배를 인정한다. 이름 난 왕국답게 전부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다. 이 자티스라는 남자는 더 높이 올라갈 무인이었다.

    “이익! 또 졌어! 이 멍청이들은 왜 다 나서서 일을 망치는 거야!”

    다만 제이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는 자티스를 노려보며 안정되어가는 분위기에 재를 뿌렸다.

    “이것도 저 놈이 홀로 나서서 그런 거니 난 인정 못해!”

    그녀의 애새끼 같은 반응에 짜증이 확 돋아났다.

    “제이나 왕녀.”

    라온이 몽둥이를 내려놓고 제이나의 앞에 섰다.

    “지그하르트 광풍단의 부단주로서 말하겠소. 한 번 더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 순간 지그하르트에 싸움을 건다고 생각하고 검을 뽑겠소.”

    검집을 툭 친 순간 지금까지 숨겨둔 기파가 해일처럼 치솟았다.

    콰아아아!

    제이나의 기세만이 아니라 감정마저 찌그러뜨리는 압도적인 기운. 지금 이 공간을 지배하는 건 라온이었다.

    “아으윽….”

    제이나가 입술을 깨물다가 그래도 주저앉았다. 라온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대답하시오.”

    “허어억….”

    라온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제이나가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할 때 뒤에 있는 모렐이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후우우욱!

    그의 손짓에서 피어난 열기가 깃든 바람이 라온의 기세를 밀어내고, 제이나를 움켜쥐고 있던 오러의 밧줄을 끊어냈다.

    “거기까지만 하게.”

    모렐이 바들바들 떠는 제이나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기절한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흐으윽….”

    이쪽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니 공포가 뇌리에 깊게 박힌 것 같았다.

    “왕국의 금지옥엽으로 자라시다보니, 아직 철이 없으시네.”

    “그걸 저희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그의 눈동자에는 미안함보다는 놀라움과 당황의 빛이 어려 있었다. 첫눈에 자신의 무력을 파악하지 못한 것에 어지간히 놀란 것 같았다.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약속대로 이번 일에서 물러나도록 하지.”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라온이 물러나려던 모렐의 앞을 막았다.

    “음?”

    “전 아직 승부에서 이긴 뒤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 쪽이 물러나는 거 아니었나?”

    “이번 대결의 조건은 모렐 님이 직접 진 쪽이 이긴 쪽 말을 따르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끄응.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거지?”

    “제자분이 아주 좋은 걸 알려주셨잖습니까.”

    발카르 왕국의 기사들이 업고 있는 이닐드를 가리켰다.

    “저희 광풍단은 이번 의뢰가 끝날 때까지 발카르 왕국의 마법단 살라만을 하인으로 쓰겠습니다.”

    라온이 씩 웃으며 도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반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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