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갑자기 임무라니, 제 예상보다 조금 빠르네요.”
리메르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이 버렌을 일으켜 세웠으니까.”
글렌은 점차 걸음이 당당해져 가는 버렌을 가리켰다.
“그럼 저희가 할 임무는 뭡니까?”
“본래 다른 단에 넘기려 한 임무인데, 지금의 광풍단이 처리하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글렌이 뒤를 돌았다. 모든 것을 꿰뚫는 붉은 눈으로 리메르를 굽어보았다.
“포르반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포르반은 지그하르트와 발카르 왕국 사이에 있는 중립 도시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큰 강이 지나고 있어서 교역과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포르반에서 실종 사건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다.”
“실종….”
리메르가 실종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실종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 숫자가 줄어들질 않고, 조사하던 병사나, 고용한 기사와 용병들도 사라졌다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다.”
“기사까지 실종될 정도면 심각하네요.”
실종 자체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걸 조사하는 병사들까지 사라진 건 기이한 일이었다.
“집단 인신매매나 비밀 세력 혹은….”
“오마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글렌의 말에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나 병사까지 건드릴 정도면 뒤를 생각하지 않는 미친놈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광풍단의 임무는 포르반에 가서 실종자들을 구하고, 실종의 이유를 제거하는 것이다. 할 수 있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난기로 가득 차 있던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예에? 버렌이 내일 돌아온다고 해도 아직 정비가 안 끝났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루라도 빨리 막는 게 좋다. 그리고 출발하기 직전에 알려주는 건 네 녀석이 자주 하는 짓이 아니더냐.”
“어억!”
글렌은 당황하는 리메르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믿고 있겠다. 광풍단주.”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북망산을 내려갔다.
“가문을 망신시키고 돌아오면 내가 직접 목을 베어주지.”
천검대주는 퉁명스러운 말을 흘리고는 글렌을 따라갔다.
“흐음….”
리메르는 두 사람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할 건 별로 없잖아?”
그는 글렌이 알면 벼락을 떨어뜨릴 말을 중얼거리며 주점으로 향했다.
“잘난 부단주에게 다 떠넘기면 되겠구만.”
* * *
다음날.
라온은 별관에서 새벽 수련을 마친 뒤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광풍검진의 완성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까 생각하며 연무장의 문을 열었을 때 검사들이 입구에 우르르 모여 있었다.
“왜 여기에 모여 있어?”
“부단주님! 저길 보세요!”
어벙하게 서서 과자를 먹고 있던 도리안이 다가와 연무장을 가리켰다. 평소보다 깔끔하게 정돈된 연무장의 중앙에 버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라온이 버렌의 뒤통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오지 않을까 했는데, 버렌은 예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역시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다.
“새벽부터 와서 연무장을 전부 다 치우고,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대요.”
도리안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속삭였지만, 주변에도 다 들렸다.
“광풍단에 넣어달라고 온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단원을 넣고 말고는 단장님이 결정하시는 거니, 나는 모르지.”
리메르라면 분명 넣을 테지만.
“이제야 마빡에 피가 돌다니, 참 한심해.”
마르타는 버렌을 보며 혀를 찼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욕이 없는 걸 보면 나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
루난도 반가운 듯 설화를 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구경 났어?”
라온은 연무장 안쪽으로 들어가 검사들을 돌아보았다.
“곧 단주님이 오실 텐데, 훈련 준비가 하나도 안 됐잖아! 빨리 움직여!”
“아, 예!”
“알겠습니다.”
멍하니 있던 검사들이 탈의실 쪽으로 달려갔다.
라온도 무릎을 꿇고 있는 버렌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연무장에서 몸을 풀었다. 버렌도 이쪽을 보지 않고, 텅 빈 단상만을 바라보았다.
-아는 척도 안 하는 거냐.
라스가 너무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아는 척 안 하는 게 돕는 거야.’
버렌이 마음을 크게 먹었다고 해도 부끄러울 거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일이다.
“정렬.”
“정렬.”
라온은 검사들을 연무장에 모은 뒤 리메르를 기다렸다. 잠시 후 훈련 시간이 되기 직전 연무장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지각하지 않았을 때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는 요상한 버릇은 그대로였다.
“좋은 아침!”
리메르는 휘적이는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근데….”
그는 버렌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는 왜 저러고 있다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버렌은 고개를 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수련생 시절로 돌아간 듯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저를 광풍단에 받아주십시오.”
버렌은 절을 하듯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머리로 땅을 짓눌렀다.
“흐음….”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부단주가 보기에는 어때?”
“버렌의 잔소리가 그립다고 말씀하셔놓고 왜 제 의견을 물어보십니까. 자리까지 비워두셨지 않습니까.”
라온이 덤덤한 목소리로 3번 조장 자리가 공석이라고 중얼거렸다.
“얌마! 그런 걸 말하면 멋이 떨어지잖아!”
리메르가 당황하여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받으실 거 빨리 받으세요. 저 녀석에게 가르쳐 줄 게 산더미니까.”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버렌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 늦게 왔지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겠지. 널 광풍 3조의 조장으로 받아들이겠다.”
리메르는 씩 웃으며 버렌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가입비는 얼마나 가져왔니?”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의 모습은 도박에 미친 자의 심리상태가 어떤지를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와….”
“정말 사람인가?”
“사람은 아니지. 엘프잖아.”
“어우, 꼴사나워.”
라온 그리고 광풍단의 모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심한 눈빛으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끄응….”
버렌은 리메르에게 잘 보여야한다는 것도 잊고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 장난이야. 장난!”
리메르는 웃으며 버렌을 일으켜 세웠다. 기막을 펼치고 그의 귀에 한 마디를 속삭였다.
“농담 아닌 거 알지? 적절한 성의 표시를 가지고 단주실로….”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은 라온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리메르를 쏘아보며 다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박과 돈에 있어서는 저 엘프를 믿지 않기로.
* * *
라온은 버렌을 따로 불러서 지금까지 진행된 교육 내용을 모두 알려주었다. 검진과 신호 모두 복잡했지만, 녀석은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외워버렸다.
“외웠다고 해도 실제 검진을 운용할 때는 다를 거야. 확실히 연습해놔.”
“알겠습니다.”
버렌은 그 깐깐한 성격답게 바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수련생 때로 돌아간 듯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럼 3조와 검진 연습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어왔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도 수련 좀 해볼까.’
“주목!”
라온이 개인 수련을 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단상 위에서 손뼉을 쳤다.
“모두 모여.”
도박광이라고 해도 단주는 단주. 그의 부름에 광풍단 전원이 단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도 끝난 것 같으니, 본론을 말하마.”
“본론?”
“무슨 본론?”
리메르는 단주가 된 이후 교관 때보다 더 놀고먹었기 때문에 검사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에게 첫 번째 임무가 들어왔다.”
“임무!”
“정말입니까?”
“드디어!”
임무라는 말에 광풍단원들의 눈에 열기가 차올랐다.
“어떤 임무입니까?”
버렌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역시 저 녀석이 있어야 편하다.
“포르반 마을에서 연쇄 실종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실종자를 찾고, 그 원흉을 제거하는 게 우리의 임무다.”
“오오!”
“실종자 수색….”
“원흉 제거!”
“이제야 진짜 지그하르트 검사 같네.”
“긴장되는데….”
하급 몬스터 토벌 때와 달리 있어 보이는 임무였기 때문에 검사들 모두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추, 출발 시간? 이게 출발 시간이 좀 빨라.”
리메르는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언제입니까?”
“오늘 저녁.”
오늘 저녁이라는 말에 기대감을 풀던 검사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빨라도 내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저녁이라는 말에 광풍단원 전체가 경악했다.
“크으윽,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이지!”
오늘은 조용히 지내겠다고 한 버렌이 이를 갈며 뛰쳐나올 정도였다.
“실종 사건이 급한 건 알지만 훈련도 아니고 임무인데, 준비할 시간을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특히 버렌은 오늘 들어왔습니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봐.”
라온의 날카로운 말에 리메르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촉박한 임무는 맞지만, 오늘은 진짜 내 탓이 아니라고! 위에서! 저 위에서 어젯밤에 내려왔어! 나랑 상관없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주전을 가리켰지만 그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고! 그래요?”
“눼눼. 그러시겠죠.”
“아주 대단하시네요.”
검사들 모두는 리메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흥! 차라리 개똥이 약이 된다고 믿겠노라.
라스도 멍청한 핑계를 댄다며 혀를 찼다. 그 라스조차도 믿지 않을 정도로 리메르라는 사람의 신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 진짜라고!”
“단주님. 어차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일단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광풍대는 두 시간 내로 임무 준비를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모인다. 포르반은 대륙 중앙 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두꺼운 옷은 많이 챙기지 말도록.”
“예!”
라온의 지시를 들은 검사들이 부리나케 연무장을 나섰다.
“진짠데, 진짜라고….”
홀로 남은 리메르는 멍하니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양치기 소년의 마음인가….’
* * *
연쇄 실종이라는 다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광풍단원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바로 포르반을 향해 출발했다.
라온과 검사들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면서 중간중간 휴식 시간에 광풍진이라 명명한 새로운 검진을 계속 다듬었다.
버렌이 광풍진에 적응을 끝내고, 3조를 지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포르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포르반은 북쪽의 지그하르트와 대륙 중앙의 오웬 왕국, 발카르 왕국 사이에 위치한 중립 도시로 세르티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레이블 강이 지나서 관광과 교역으로 유명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일단 시장에게 가서 사정 청취부터 한다.”
이동에도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라온과 검사들은 도시를 구경할 새도 없이 도시 중앙 대로를 타고 올라가 시청으로 향했다.
성처럼 고고한 자태의 시청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문이 열리고, 로브와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네 개의 오브. 발카르 왕국의 표식이었다.
“어?”
계속 뒤에서 농땡이를 치던 리메르는 가장 앞에 있는 적발의 중년인을 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모렐?”
“리메르?.”
모렐이라 불린 중년인 역시 리메르를 알아본 듯 이마를 찡그렸다.
‘모렐 카잔인가….’
라온은 키가 조금 작은 적발의 중년인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어쩐지 가진 기운이 범상치 않다 했어.’
모렐 카잔은 수많은 화속성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발카르의 명성 있는 마법사였다. 살라만이라는 마법단을 운용하는데, 모렐의 뒤에 있는 자들이 살라만 소속인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가 여긴 무슨 일이지?”
“그러는 너희는 왜 여기 있는 건데?”
“임무 때문이다.”
“우리도 임무 때문인데. 볼일 다 봤으면 비켜.”
“너! 너어!”
리메르가 입구에서 비키라는 듯 손짓을 할 때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보라색 머리칼의 여성이 튀어나와 라온의 앞에 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 사기꾼 자식!”
그녀는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음? 누구시더라?”
라온은 평온한 눈빛으로 분노를 담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 도련님. 그때 그 왕녀잖아요.”
도리안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카멜룬 경매장에서 만난 싸가지.”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곳에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모두가 싸가지라는 단어를 들었다.
“아, 그 왕녀님.”
라온이 피식 웃었다. 물론 앞의 마법사가 발카르 왕국의 왕녀 제이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일부러 까먹은 척했는데, 도리안 덕분에 제이나를 더 열받게 만든 것 같았다.
“사기꾼 주제에 또 나를 모욕하는군.”
레이나가 금방이라도 마법을 뿌릴 것처럼 마나를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으로 푸르고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모욕? 무슨 모욕을 했다는 거지?”
“네놈이 지그하르트의 직계라고 속였잖느냐!”
“난 내 입으로 직계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 그건….”
제이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는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 네가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서….”
“분위기? 분위기로 속는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난 거짓말한 적이 없는데, 어쩌라는 거지?”
“이익! 닥쳐! 속임수를 써놓고 뭐가 그리 당당해!”
“속임수를 안 썼다니까. 혼자 착각해놓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이이익!”
라온이 어깨를 으쓱이자, 제이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왕녀님께 함부로 말하지 마라!”
제이나를 조금 더 자극할까 고민할 때 그녀의 뒤에서 키가 훤칠한 금발의 사내가 나왔다.
빨간색 무복을 입고, 어깨에는 로브를 망토처럼 걸친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에 덕지덕지 바른 기름 때문에 굉장히 느끼한 모양새였다.
‘전투 마법사인가.’
다만 외모와 달리 그의 복장은 발카르가 자랑하는 전투 마법사의 의복이었다. 저 남자는 모렐이 키우는 전투 마법사인 것 같았다.
“제이나 님이 발카르의 왕녀이신 걸 알고도 조롱하다니!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것이냐!”
그는 로브를 손으로 펼치고 중앙으로 나왔다. 멋을 내려는 것 같았지만, 정말 없어 보였다.
“뭐래. 귓속말을 훔쳐 듣는 쥐새끼 같은 것들이.”
마르타가 팔짱을 낀 채로 코웃음을 쳤다.
“음.”
“…….”
“으으, 마, 망했다!”
버렌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고, 루난은 관심 없다는 듯 설화만 안고 있었으며,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도리안은 라온의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쥐새끼? 대놓고 말했으면서 무슨 귓속말이야!”
“누가 들으래?”
“극지에서 사는 무식한 검사 놈들!”
“툭 치면 부러질 허약한 마법사 놈들!”
광풍단과 살라만은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실종자 수색 임무인가.”
모렐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에도 여유롭게 리메르만 보았다.
“그걸 묻는 걸 보니, 너희도 마찬가지겠네.”
“실종자 수색은 우리가 끝낸다. 너희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라.”
모렐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다 크지도 못한 애송이들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뭘 하겠다고.”
그는 광풍단원을 차례로 훑어내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리메르는 버렌을 놀릴 때 사용하는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할까?”
모렐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제이나 왕녀를 보고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애들끼리 가벼운 대련을 해서 진 쪽이 이긴 쪽의 말을 따르는 거 어때?”
살라만이 광풍단보다 나이와 경험이 위라는 걸 알고 기세를 잡겠다는 듯 대련을 하자고 말했다.
“대련? 갑자기?”
리메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지만, 라온은 그가 어색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러니 도박에서 지고 다니지.’
하지만 모렐에겐 통한 것 같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신 없으면 이대로 물러나던가.”
“임무를 받았는데 칼도 못 뽑아보고 돌아갈 수는 없지. 좋다!”
리메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 광풍단을 쭉 돌아본 뒤에 중앙에 서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라온. 너로 정했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갔다.
“단주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앞에서 까불던 금발의 전투 마법사가 앞으로 나왔다. 표정을 보니, 왕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이닐드. 너라면 충분하겠지. 믿겠다.”
“예!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모렐이 청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발카르의 왕국의 전투 마법사이자, 염화의 뱀 모렐의 제자 이닐드다. 왕녀님이 네게 당한 모욕을 갚겠다!”
이닐드는 최대한 멋져 보이는 표정과 자세로 라온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미안하지만.”
라온은 차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닌데, 자리를 잘못 찾아온 거 아닌가?”
“그, 그건….”
이닐드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다 저 싸가지. 아니 왕녀가 뭘 했는지는 알고 옹호하는 건가?”
“왕녀님께서 잘못하셨을 리가 없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왕녀의 눈치를 살폈다.
“마법사면서 생각 없이 사는군.”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모든, 지위든 왕녀에게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나에 대한 모욕은 얼마든지 참겠지만, 왕녀님을 모욕한 건 참지 못한다!”
“방금은 왕녀가 아니라, 널 욕한 건데?”
“닥쳐라!”
이닐드는 왕녀만이 아니라, 루난과 마르타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예쁜 여자의 관심은 모두 좋은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널 쓰러뜨리고, 이번 임무에서 너희 모두를 하인으로 쓰겠다!”
“하인이라….”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네 이름을 밝혀라. 나는 전투 마법사답게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너를 꺾고….”
“싸우자고 나온 놈이 혓바닥이 드럽게 기네. 입 튀어나온 애들은 원래 저래?”
마르타가 이닐드를 보며 이죽거렸다.
“으으….”
“….”
왕녀는 이닐드를 보지도 않고 라온에게만 이를 북북 갈고 있었고, 루난은 처음부터 아예 관심이 없었다.
“으음….”
이닐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여자들 앞에서 멋을 부르러 나왔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당황한 것 같았다.
“가, 각자 세력을 대표하는 대결이다.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밝혀라! 나는 발카르의 전투 마법으로 널 상대하겠다!”
마르타에게 조롱을 받아도 이닐드는 똥폼을 잡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기름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말이 많긴 하네.”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도리안.”
“옙!”
라온의 부름에 도리안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몽둥이.”
“옙!”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오크가 들고 다닐 만한 커다란 몽둥이를 꺼내주었다.
“어?”
“뭐, 뭐야!”
“왜 주머니에서 저런 몽둥이가 나와!”
“허억….”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주머니에서 거대한 몽둥이가 나온 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을 밝히고, 무엇을 할지를 말하라고 했지?”
라온은 도리안에게 몽둥이를 받아 어깨에 걸쳤다.
“내 이름은 라온 지그하르트. 지금부터 몽둥이로 널 패겠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
머리에 똥만 찬 놈들은 예로부터 몽둥이가 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