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이제 디저트를 먹어야 하는데, 어떤 놈이 방해하는 것이냐!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던져두고, 로비로 나갔다. 회색 머리칼을 곱게 넘긴 노인이 서 있었다.
‘이름이 티아스였던가.’
중무전의 집사 중 하나로 버렌을 담당해서 수련생 시절에 자주 보았던 사람이었다.
“라온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티아스가 손을 꼭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네요.”
라온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많이 마주치고, 서로 머리를 숙였지만, 이렇게 육성으로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라온은 식당 쪽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실비아와 시녀들의 시선을 등으로 가리면서 물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티아스가 주름진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정말 염치없지만, 지금 도움을 청할 사람이 라온 도련님밖에 없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숙이는 티아스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버렌 때문이군요.”
“맞습니다. 선택식 이후 버렌 도련님은 별채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으십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티아스의 눈동자에 씁쓸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틀 뒤면 신입 검사 추가 등록 기간이 마감되는데도 나올 생각을 안 하십니다.”
그는 이 상황이 절망스러운지 말라붙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버렌 도련님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은 라온 도련님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티아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제가 버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버렌 도련님은 평소에 라온 도련님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십니다. 본인을 우물에서 꺼내주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하시며 언젠가 꼭 따라잡아 그 빚들을 갚을 거라 다짐하셨습니다.”
“…….”
정신을 깨워준 은인, 목숨을 구해준 보답 그리고 따라잡겠다는 말. 전부 버렌이 매일 하던 말이었다. 의외로 안과 밖이 똑같은 녀석이었던 것 같다.
“그런 라온 님이기에 버렌 도련님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티아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은 바들바들 떠는 티아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움이라….’
전생이라면 티아스가 뭐라고 하든 도와주지 않았을 거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로 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인연.’
냉혈이라는 보물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넘겨준 루난. 마찬가지로 귀한 금탄과 금결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모든 기력을 바쳐서 검을 만들어준 발칸. 그들이 말했던 인연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선택식 전에 버렌이 예복이 비어 보인다며 보석이 달린 수실을 주었던 게 생각났다. 보석에 연결된 수식처럼 그와 자신 사이에는 작은 인연의 끈이 하나 정도는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후우….”
라온이 무릎을 꿇고 티아스와 눈을 마주쳤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잘했어!”
실비아가 뒤에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야지.”
그녀는 아들 하나 잘 키웠다며 뒤에 있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캬아!”
“역시 도련님!”
헬렌과 시녀들은 힘을 내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티아스가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이는 걸 참으로 좋아하는 인간이다. 본왕의 마음에 쏙 드느니라.
라스는 본인이 인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는지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하지만 디저트 시간을 방해한 건 용서할 수 없느니라!
좋다더니, 금세 화를 낸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럼 가죠.”
“바, 바로 가주시는 겁니까?”
“지금 가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추가 등록 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나오겠죠.”
라온이 티아스를 일으켜 세웠다.
“아, 알겠습니다!”
티아스는 안내하겠다며 벌떡 일어나서 별관 밖으로 나갔다.
“다녀올게.”
“잘하고 와.”
“다녀오세요. 도련님!”
실비아와 시녀들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저트가 아직인데….
배가 푸른 라스만 홀로 식당 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눈깔이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니라!
* * *
라온은 티아스를 따라 북망산 아래에 세워진 중무전 별채로 향했다. 중무전의 별채라 그런지 자신이 사는 별관보다 훨씬 컸다.
“이곳은 주인님이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쳐 주셨던 곳입니다. 이제 주인님은 오시지 않지만, 도련님은 가끔 들러서 쉬다 가셨죠.”
“중무전주와의 추억이 남은 곳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와서 문을 잠그시고 나오질 않으십니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별채 안에서 버렌의 기척이 느껴졌다.
“버렌.”
내부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오러를 실어 버렌을 불렀다. 한참을 불러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흐음.”
라온은 입맛을 쩝 다시고 별채를 쭉 훑어내린 뒤 티아스를 보았다.
“여기 좀 부숴도 됩니까?”
“예? 아… 예!”
티아스는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러워질 테니, 조금 떨어져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꾸벅이고 열 걸음 정도 물러섰다.
“후우.”
라온은 별채의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악당이 좀 되어야겠군.”
피식 웃고서 별채의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힘을 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과 벽이 산산조각으로 터지고, 별채가 크게 뒤흔들렸다.
“이익!”
모락모락 솟구치는 회색 먼지 속에서 당황한 버렌이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야!”
“두더지를 끄집어내려면 땅부터 파야지.”
“두더지? 너 대체….”
대답하지 않고, 힘을 꽉 준 손을 휘둘렀다. 손등에 닿은 별채의 기둥과 벽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하지 마!”
버렌이 무너진 벽에서 튀어나오며 악을 질렀다.
“넌 날 볼 때마다 따라잡겠다고 떠들어댔었지.”
라온이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막고 싶으면 덤벼.”
그 말을 하며 이번에는 왼쪽 벽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거인의 철퇴를 맞은 듯 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하지 말라고!”
버렌이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흥분에 가득 찬 주먹. 어떠한 무학도, 흐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뻐어억!
라온은 손등으로 가볍게 쳐낸 후 버렌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크헉!”
버렌은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검을 가져와서 제대로 덤벼.”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버렌을 걷어찼다.
퍼어어엉!
버렌은 버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다시 별채에 처박혔다.
쿠구구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는 별채에서 검을 든 버렌이 걸어 나왔다.
“크으윽! 망할 놈이!”
버렌이 오러를 극성으로 운용하며 검을 뽑았다. 바람이 깃든 오러가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강대한 기파를 펼쳐냈다.
라온은 버렌의 기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성장했군.’
따라잡겠다고 했던 게 그저 허세만은 아니었는지 오러의 크기와 질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전의 나와는 다르니까!”
버렌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좌측으로 짓쳐 들어 검을 내뻗었다. 빠르기와 속도 모두 예전과는 격이 달라졌지만, 자신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쩌어엉!
제천검의 검집으로 버렌의 검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흐읍!”
버렌은 예상했다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다음 검격을 날렸다. 처음보다 더 빠르고 웅장한 검식이 세찬 파도처럼 이어졌다.
쩌어엉!
라온은 물길처럼 연결되는 버렌의 검격을 검집만으로 모조리 차단하고 그의 옆구리를 후려 찼다.
뻐어어억!
불의의 공격에 당한 버렌이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크허헉!”
버렌은 충격에 비틀대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호흡을 고르며 검을 겨눈다.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했던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는 걸 보면 확실히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 자격이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가 검을 양손으로 잡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폭주하듯 솟구치는 기세. 하지만 그저 기운만 강해진 게 아니다. 조금 전의 오러와는 다른 기운이 버렌에게서 스멀스멀 피어났다.
“삭풍검.”
그 말과 함께 버렌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내린다.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다가와 검을 내리쳐왔다.
‘빨라.’
감각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정도의 빠르기.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이미 감각에 잡혔다면 속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쩌어어엉!
라온은 버렌의 검격을 향해 가볍게 검을 쳐올렸다. 이번에도 버렌의 검격은 자신의 공간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찌이이잉!
하지만 버렌의 검에서 기이한 기운이 치솟으며 검집에 두른 오러를 가르기 시작했다.
“이건….”
버렌의 검을 두른 오러가 작은 알갱이처럼 변해 끝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 오러의 회전력으로 자신의 오러를 찢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너라도 삭풍검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버렌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원을 그리는 보법을 밟으며 삭풍검이라는 검술을 펼쳐냈다.
평소처럼 단단하면서도 웅장한 검세에 삭풍이라는 기운이 담기니 톱날 앞의 나뭇조각처럼 만화공의 오러가 갈려 나갔다.
“그렇군.”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그리며 검을 휘돌렸다.
“이제 알겠어.”
“허세 부려 봤자다!”
버렌이 발을 구르고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지금 펼칠 수 있는 삭풍검의 절기로 라온의 허리를 노렸다.
쩌어어엉!
라온은 이번에도 정확한 순간에 검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소용없다. 삭풍검은 방어한 오러를 뜯어버리니까.
‘도망치면 바로 쫓아야…음?”
라온이 물러날 거라 생각하고 따라잡을 준비를 했는데, 그는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삭풍검을 그대로 견뎌냈다.
“어, 어떻게!”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회전하는 삭풍검의 검격이 라온의 오러를 가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분명 돌아가고 있는데?’
모래 알갱이 같은 오러가 거칠게 회전하고 있건만, 라온의 오러는 조금도 갈라지지 않았다.
“너 뭘 한 거야!”
“간단해.”
라온이 당황하는 버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오러가 내 오러를 갈라내기 전에 새로운 오러를 밀어 넣었을 뿐이야. 네 회전과 반대 방향으로.”
강물에 칼질해 봐야 물이 다시 차오르듯, 오러가 갈라지기 전에 새로운 오러를 밀어 넣어 삭풍검이라는 검식을 막아낸 것이다.
“그, 그렇게 빨리 오러를 운용한다고?”
버렌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사, 삭풍검조차 안 먹히다니….”
“삭풍검이 안 먹힌 게 아니라, 네가 약한 거다.”
“커헉!”
라온이 입술을 떠는 버렌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삭풍검이라는 기술의 회전이 더 빠르고, 컸다면 내가 아무리 오러를 밀어 넣어도 갈라졌겠지. 이건 네 숙련도의 문제다.”
“으윽!”
“고작 그 정도 성취로 나를 꺾겠다고 말하고 다닌 건가.”
“그건….”
버렌은 고개를 숙인 채 턱을 바르르 떨었다.
“내 검집조차 벗기지 못하면서 따라잡는다니, 선택받지 못했다고 다 포기한 채 꼬리를 말고 도망친 녀석 답네.”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그래. 난 네가 중무전주와 무슨 감정으로 엮여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알아.”
라온이 엉망진창이 된 별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개집에만 처박혀 있다면 그는 널 절대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걸.”
“크윽….”
버렌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나한테 삶의 목표를 말해주었으니, 나도 내 목표를 하나 말해주지.”
“목표?”
“내 목표는 어머니를 다시 직계의 위치로 올리는 거다.”
“미친!”
버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건 불가능해! 너를 싫어하는 직계들, 그리고 상위 방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라온은 불신을 비치는 버렌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실적. 그들의 입을 모두 다물게 할 정도의 실적이 있다면 가능해. 그래서 난 가장 많은 임무를 뛰게 될 광풍단을 골랐다. 물론 너처럼 힘들다고 처박혀 있다면 평생 걸려도 불가능하겠지.”
“아….”
라온에게 그런 목표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버렌이 손을 떨었다.
“넌 네 아버지와 마주 보고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지?”
“그, 그래. 하지만 다 끝났어. 아버지는 냉정하신 분이야. 이제 돌아 봐주시지 않을 거다….”
“네 아버지와 마주 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야.”
라온은 이마를 찌푸린 버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네 아버지가 널 돌아보게 하지 말고, 네가 그를 넘어 앞으로 가라. 네가 앞서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중무전주를 돌아보는 거다. 그러면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아버지를 뛰어넘으라고? 그건 불가능해!”
“이것도 불가능. 저것도 불가능. 평생 그렇게 살 거냐?”
“그, 그건….”
“어렵겠지. 분명 죽을 정도로 힘들 거다. 하지만 정말 불가능할까?”
“…….”
되묻는 말에 버렌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약체에서 가장 강해진 산증인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네 목표와 내 목표 중 뭐가 더 힘들까?”
“…….”
이번에도 버렌은 입을 떼지 못했다. 라온을 싫어하는 직계와 상위 방계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라온의 목표가 더 불가능에 가까운 건 당연했다.
“도끼를 휘두르지 않으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대로 처박혀 있을지. 지금이라도 나와서 도끼를 쥘지는 네 선택이다.”
라온이 뒤를 돌았다. 별관으로 돌아가려다가 멈춰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와 루난은 검을 만들었고, 마르타는 검을 받았다. 모두 앞으로 걸어가고 있지. 선택한다면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는 걷고 싶어도 걸을 길이 없어질 테니까.”
머리를 숙인 버렌을 두고, 티아스가 있는 나무 둔치 근처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겐 이런 거친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라온은 멀리 떨어져 있던 티아스에게 다가가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티아스가 손을 모은 채 허리를 굽혔다. 그의 주름진 목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라온은 눈물을 글썽이는 티아스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서 별관으로 향했다.
티아스는 돌아가는 라온의 등에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무릎 꿇은 버렌을 보았다.
“아….”
절망에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피어나고 있었다.
* * *
뿌드득.
버렌이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멍청한 새끼!’
강해지자고, 성숙해지자고 그렇게 다짐해놓고 정작 성장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온의 말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척을 하기 위해서 그저 입으로만 주절거렸을 뿐이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5 연무장에서 아집에 휩싸여 있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 당시보다 더 겁쟁이가 된 것 같았다.
“직계가 된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지그하르트의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불가능하다고 떠들 그 목표를 라온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녀석이 말하니 정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한 놈이야.’
자신은 아버지께 선택받지 못한 절망감에 방에 처박혀 지냈는데, 방계에서 직계로 올라간다니. 같은 나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아버지보다 앞에 가서 뒤를 돌라니….’
앞서가는 아버지를 돌아보게 만들려고만 했지, 아버지를 추월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발상 자체가 라온과 자신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주마.’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를 추월하고 그가 후회하는 걸 꼭 봐야겠다. 라온이 직계로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아버지를 따라잡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기다리십쇼.’
꼭 찾아갈 테니까.
* * *
북망산 중턱에 서 있던 리메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대박!”
그는 별채를 떠나는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설픈 조언이나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상처를 후벼판 뒤에 약을 발라줄 줄은 몰랐는데요.”
“음….”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라온이 저런 식으로 버렌을 끄집어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신기하단 말이죠. 어떨 때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는데 또 어떨 때는 저보다 더 세상을 많이 아는 것 같고.”
리메르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내가 다 잘 가르친 덕분인가. 역시 스승을 잘 만나야….”
“네놈 제자이기 이전에 내 손자이니라.”
“에이, 그래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저죠.”
“저 아이를 더 많이 챙겨준 건 나다.”
“뒤에서 챙겨주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알아주기를 바란 게 아니니,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다.”
글렌이 리메르를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억….”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천검대주가 글렌의 반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처음 보는 가주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크흠!”
글렌은 천검대주의 눈빛을 느끼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버렌이 곧 일어나긴 하겠네요.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내기?”
“예. 버렌이 언제 일어나는지. 모레까지가 추가 등록 기간이니까. 전 내일 일어난다에 다음 달 월급을 걸겠습니다.”
리메르는 손가락을 흔들며 무릎을 꿇은 버렌을 가리켰다.
“그럼 나는 오늘에 걸지.”
“한번 말하면 끝인 거 알죠?”
“물론이다.”
글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오늘은 이제 얼마 남지도…헉!”
입을 가리고 웃던 리메르가 신음을 흘렸다.
“저, 저 녀석 왜 벌써 일어나! 얌마! 좀 더 누워 있어!”
버렌은 검을 쥔 채로 일어나서 별채로 다가갔다.
“으아아아아!”
그는 괴성을 지르며 별채를 향해 남은 오러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콰아아아앙!
라온의 의해 반쯤 부서졌던 별채가 폭삭 무너졌다.
“후우….”
버렌은 할 일을 했다는 듯 시원한 표정으로 중무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티아스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가, 가주님? 저희 아직 내기 확정을 안 했….”
“리메르.”
“아, 예!”
“네가 하나 착각한 게 있다.”
“착각이요?”
방긋 웃던 리메르의 눈은 글렌의 다음 말을 듣고, 지옥을 마주한 듯 시꺼멓게 굳어졌다.
“넌 이미 다음 달 월급을 가불 받았다. 지금 날아간 건 다음 달이 아니라, 다다음달 월급이다.”
“어억! 젠장!”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리메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멍청이.”
천검대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진짜 먹고살 돈도 없어요! 이제 애들도 안 빌려준다구요!”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방법이요?”
“임무를 완수한 후에 포상을 받아라.”
글렌이 멀어지는 라온과 버렌을 차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에 첫 번째 임무를 내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