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라온은 새로운 검을 소중하게 끌어 안은 루난과 투탄 돼지 통구이를 먹지 못해서 삐진 라스를 데리고 지그하르트에 복귀했다.
이제 소속이 있다 보니, 별관에 가기 전에 먼저 5 연무장에 들렀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검사들을 보이지 않았고, 리메르 혼자 단상 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단주님. 검을 만들고 복귀했습니다.”
“어? 어어.”
리메르가 술 취한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일어섰다. 가기 전에 비해 얼굴이 비쩍 말랐고,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붉은 머리칼은 불에 탄 듯 그을렸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일은 무슨.”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손을 저었지만, 표정에서 다 티가 난다. 아무래도 도박장에서 사고 쳤다가 누군가에게 된통 당한 것 같았다.
“또 돈 잃고 난동을 부리신 겁니까.”
“이, 잃기는 무슨! 이번에는 땄어!”
“그런데 왜 그 모양이 되신 겁니까.”
“못된 노인네가 있어서….”
리메르는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못된 노인네?”
“그래. 아주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 속을 드러내지 않고,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봐…크흑!”
“네….”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들을 때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제천검을 만들어 오는 동안 리메르는 또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암….”
루난은 지루한지 하품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보고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깐!”
리메르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할 때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 검을 써보기는 했어?”
“받자마자 복귀했는데, 써봤을 리가 없죠.”
“그럼 한 번 써봐야지.”
그는 씩 웃으며 라온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제천검을 가리켰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검을 보는 눈이 좀 있잖냐.”
“모르는데요.”
“어, 어쨌든 내가 봐줄 테니까. 한 번 뽑아봐.”
라온은 고개를 저었지만, 루난은 검을 자랑하고 싶은지 바로 검을 뽑았다.
치이잉.
샛노란 달빛을 받은 은빛 검신이 어둑한 연무장을 밝혔다.
“오호!”
리메르가 루난의 검을 쭉 훑어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냉혈로 만든 검다운 예기와 냉기야. 제대로 만들었군.”
그는 루난의 검을 이리저리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미르탄의 현 촌장이 두드린 모양인데? 무늬가 딱 그 영감 취향이야.”
검을 잘 본다는 말이 진짜인지 그는 단숨에 제작자까지 파악했다.
“검의 이름은?”
“설화.”
“이름도 좋고. 균형이 완벽해서 네 검술과 오러에도 잘 맞겠어. 좋은 검을 얻은 걸 축하한다.”
리메르는 검신 중앙에 그려진 꽃을 보고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루난은 리메르의 칭찬이 마음에 드는지 설화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네 차례다.”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빨리 검을 꺼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신에서 진중한 기운과 서늘한 예기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어…?”
웃고 있던 리메르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영감이 또 괴물을 만들어냈군.”
리메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신음을 흘리며 제천검을 노려보았다.
“만검을 담는 형태에 극상의 예기와 묵직한 기운이 실렸어. 오러 증폭 능력 이상의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는 이런 검은 오랜만에 본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초년 검사가 지니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검이다. 이름이 뭐지?”
“제천검입니다.”
“하늘을 이끄는 검이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봐온 검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
지금 리메르는 게으른 도박쟁이에 불과하지만, 이전의 그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불굴의 검사다.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최고의 칭찬이나 마찬가지였다.
“음, 둘 다 잘 맞는 검을 얻은 것 같네. 축하한다.”
리메르가 라온과 루난을 번갈아 보며 박수를 보냈다.
“그럼 이제 써봐야지?”
“쓰다니요?”
제천검을 넣으려고 할 때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오러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는 명검을 기검이라 하는데, 너희가 가진 검은 모두 기검이다. 아직 그 효과가 익숙하지 않을 테니, 지금 여기서 한 번 써봐.”
그는 연무장 중앙으로 가라는 듯 손짓했다.
라온과 루난은 그 손짓을 따라 연무장 가운데로 이동했다.
“기검에는 결이라는 게 있다. 마나 회로처럼 검 내부에 오러가 지나가는 선이 있고, 그 선을 통해 오러를 넣는다면 너희들이 가진 오러가 증폭되어 뿜어지지. 한 번 해봐.”
“네.”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화에 오러를 집중했다. 은빛 칼날 위로 꽃가루 같은 서리가 흩날리며 그녀의 기세가 크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와….”
루난 역시 본인의 기세에 놀란 듯 흐린 눈에 반짝이는 빛이 올라와 있었다.
“역시 잘하는군. 오러 소모가 심하지만, 더 강한 위력의 검세를 펼칠 수 있을 거다. 수련을 통해서 네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둬.”
리메르가 루난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 라온을 보았다.
“너는 왜 안 하냐?”
“전 그런 거 없습니다.”
“뭐?”
“검에 마나 회로 같은 거 없다구요.”
“그게 말이 돼? 그렇게 강한 기운을 가진 검이?”
“진짜입니다. 그냥 잡으면 바로 기운이 증폭됩니다.”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다. 제천검을 쥐고 오러를 끌어 올리기만 하면 바로 기운이 증폭되었다.
바로 증폭되다 보니, 오러 소모가 심해지지도 않았다.
“어? 어어?”
리메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저, 정말로?”
“정말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천검에 오러를 주입했다. 만화공의 불꽃이 선명하게 타오르며 검신을 휘감았다. 예전보다 그 크기와 열기가 훨씬 진해졌다.
“미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적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한 번 잡아봐도 될까.”
“네.”
“고마워. 한 번 보고… 아 뜨거!”
리메르가 제천검을 잡으려고 한 순간 검병 부분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주, 주인도 가려?”
그는 열기에 닿을 뻔한 손을 뒤로 물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에고가 있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라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인께서 말씀하시길. 금결에 남아 있던 본능이 제 오러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에고라기보다는 그저 주인의 오러만을 원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넌 그걸 알면서!”
“불을 뿜을 줄은 몰랐습니다. 장인님은 잡으실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이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잡았다고 불을 뿜어댄 것 처음이었다.
“허, 참 별일이 다 있군.”
리메르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제천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러를 운용해서 억지로 만질 수 있지만, 귀찮은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검에 깃든 오러 증폭 능력도 정상적인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할 수 있는 최대로 검사를 만들어봐라.”
검사는 얇게 저민 검기 다발을 검에 두르는 무학의 기예 중 하나다. 검강에는 한참 떨어지지만 검기보다는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전력으로 끌어 올린 만화공의 기운을 제천검에 담아냈다.
우우우웅!
청아한 검명이 어둠이 깔린 연무장에 울려 퍼지며 칼날 위로 선명한 화염의 오러가 치솟았다. 유형화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수준. 검이 태양처럼 스스로 열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미…친….”
리메르는 타오르는 칼날을 보며 턱을 떨었다.
“이게 검사라고? 거의 검강 수준이잖아!”
“음.”
라온은 검에서 치솟은 유형화 되어가는 불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전력의 오러를 담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 정도로 기운을 증폭시켜줄 줄은 몰랐다.
“잠깐 그대로 들고 있어봐라.”
리메르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칼날에 바람이 깃든 녹색의 오러가 가득 모여들었다. 자신의 검에 담긴 것처럼 검사를 한참 뛰어넘은 기운이었다.
“정면에서 쳐볼 테니, 막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치이이잉!
라온은 떨어지는 광풍의 검격을 향해 제천검을 쳐올렸다.
콰아아앙!
적검과 녹검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열풍이 연무장 전체로 번져갔다.
후우우욱.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열기 속에서도 라온과 리메르는 서로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 영감탱이. 지독한 검을 만들어냈군.”
리메르는 불길이 살짝 줄어든 라온의 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라면 검강도 몇 번은 막을 수 있을 거다. 뭔 놈의 검이… 아니, 잠깐!”
그가 벙찐 눈으로 검을 보다가 손을 떡 올렸다.
“이거 검만 좋은 게 아닌데? 너 그사이에 또 강해져서 온 거냐?”
“어쩌다 보니….”
“어떻게 검을 만들러 갔는데, 네가 강해져서 오는 거야! 너 대체 뭐 했어!”
“거북이 좀 잡고, 검을 만드는 걸 조금 도왔죠.”
“거, 거북이? 거북이를 잡아?”
리메르는 이해되지 않는지 거북이라는 단어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허….”
그는 제천검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오러와 진중한 눈빛의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내가 대체 뭘 키우고 있는 거지?”
괴물이 괴물을 만났어….
* * *
로베르트 가문의 음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루샤인 산의 지하 공동.
108명의 아이들이 앉아있던 공동에 남은 사람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눈빛은 이전과 달리 독기를 품은 듯 뻘겋게 물들었고, 살기가 깃든 숨결을 뱉어내고 있었다.
“좋군.”
데루스 로베르트는 아이들이 피워내는 살기를 안주로 즐기며 와인을 들이켰다.
“가주님.”
가슴에 세 개의 작대기가 있는 덩치 큰 복면인이 그 앞에 부복하고 머리를 숙였다.
“지시하신 대로 아이들을 걸러냈습니다. 독종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숫자는 어떻게 줄였지.”
“한 방에 세 사람을 집어넣고 한 명만 나올 수 있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작은 고독 항아리였죠.”
고독이란 항아리 속에 수많은 독충을 넣고, 한참 뒤에 뚜껑을 열어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곤충 하나를 만드는 주술이다.
라온의 실패 이후 로베르트의 그림자는 더 지독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고독이라, 괜찮은 생각을 했구나.”
“감사합니다!”
데루스의 칭찬에 복면인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눈빛들이 마음에 들어.”
그는 살기가 가득 깃든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교육은 얼마나 따라가지?”
“지금까지의 기수 중 최고입니다. 빠른 녀석은 벌써 교관 수준의 암살기술을 익혔습니다.”
“역시 직접 피를 봐야 본능이 살아나는 모양이군. 다음 기수에도 같은 방법을 쓰도록.”
“예!”
칭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복면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 라온 이상으로 성장할 거라 생각되는 아이들도 세 명이나 있습니다.”
“라온 이상이라….”
데루스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고, 손등을 위로 들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검흔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시꺼먼 구멍을 드러냈다.
“그 세 녀석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의 기세가 섬뜩할 정도의 예기를 뿜어내는 가시가 되어 이 지하 공동 전체를 짓눌렀다.
“아, 아니 그건….”
복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을 따라잡을 암살자들을 키우라고 해서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인데, 그는 역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안 되겠지. 그놈은 그림자에서 역대 최고의 실적을 올린 암살자였고, 내가 상처까지 입혔으니까.”
“그, 그놈 정도의 살기는 모르겠지만, 암살기술만큼은 놈을 능가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예! 믿어 주십시오!”
“알겠네.”
데루스가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뚝.
그의 손등에 벌어진 검흔에서 소름 끼치도록 새빨간 피가 떨어졌다. 이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순백의 검이 낮은 울음을 터트렸다. 흡사 누군가에게 이를 드러내듯이.
“어….”
복면인은 처음 보는 현상에 당황하여 손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이교.”
“아, 예!”
“북방을 조사하러 간 그림자들에게 연락은 왔나?”
“특이사항이 있긴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조금 더 모은 뒤에 수석 집사에게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특이사항?”
데루스가 당장 말하라는 듯 턱을 살짝 틀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리던 리메르가 복귀했다는 소식입니다. 정확한 단체 이름은 모르겠지만, 단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쓸데없는 건 됐다. 한 번 날개가 꺾인 새는 다시 날아오르지 못해. 그 라온이라는 아이와 글렌에 대한 것은?”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아무래도 라온이라는 아이는 소문과 달리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흐음….”
그는 손등에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는 핏물을 털어버리고, 아직도 낮은 울음을 흘리는 검을 보았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데루스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가라앉았다.
“리메르 따위에 대한 보고는 필요 없으니, 글렌과 직계들의 움직임이나 확실하게 조사해.”
* * *
라온은 기검에 대해 알려줬으니까 돈 좀 빌려달라는 리메르를 떼놓고 별관으로 돌아왔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별관 내부는 침이 고이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흐어어….
라스는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흥분이 깃든 음성을 흘렸다.
-이 향이다! 투탄 돼지 통구이를 먹지 못한 때부터 본왕은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녀석은 강아지처럼 냄새를 쫓아 허공을 부유했다.
“어서 와!”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실비아와 시녀들이 주방에서 나오며 방긋 웃었다.
“다녀왔어.”
“그 검이야?”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제천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당장 보고 싶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쩌다 보니 과분한 걸 받게 되었어.”
라온은 검집을 툭 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정도야? 그럼 조금 이따가 모두가 있는 곳에서 보여줘. 지금은 밥부터 먹자.”
그녀는 빨리 씻고 오라며 손짓했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는 것이냐.
라스가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빨리 씻고, 식당으로 달려가라! 본왕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느니라!
‘알겠다. 알겠어.’
라온은 어깨를 북처럼 두드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세면을 끝낸 뒤 식당으로 향했다.
한층 넓어진 식당에 시녀들이 앉아있었고, 식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스튜와 닭튀김부터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이 보였다.
-라, 라온. 저기 저 돼지 통구이 같은 것부터 먹어라! 어서!
‘아직 앉지도 않았어!’
라스는 이미 정신을 놓았는지 의자에 앉지도 않았는데, 음식부터 먹으라고 재촉했다.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진수성찬이네.”
“네가 처음으로 너만의 검을 가진 날이잖아. 이런 날 축하를 안 하면 언제 하겠어.”
실비아는 팔을 쫙 벌려서 음식들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오늘도 헬렌이랑 유아가 대부분 만들었어. 둘이 모이기만 하면 음식 이야기를 하고, 맛있는 걸 만들어대니까. 먹다가 죽겠다니까.”
“아이디어가 많기도 한데, 그게 전부 유용해요. 유아는 가수가 아니라, 셰프가 되어도 크게 될 아이예요.”
“헤헤….”
헬렌과 실비아의 칭찬에 유아가 부끄러운 듯 양 갈래머리를 잡아 얼굴을 가렸다.
“유아야. 오늘 메인 요리는 직접 소개해줘.”
“아, 네! 저기 가운데 있는 돼지 구이는 껍질은 기름에 튀기고, 살은 데쳐서 바삭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을 거예요. 소금이랑, 소스가 있으니까. 취향에 맞게 드시면 되고, 그 옆에 있는 스튜는 파인애플이랑 사과를 갈아 넣어서 소고기랑….
유아는 본인이 만든 음식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이 평소에 자신이 많이 먹는 음식 재료들로 만든 요리들이었다.
“그럼 식기 전에 먹자!”
“잘 먹겠습니다!”
라온은 시녀들의 식사 인사에 립싱크만 하고서 스푼을 들었다.
-돼지구이부터 먹어라! 껍질을 바싹하게 튀긴 게 본왕이 먹지 못한 투탄 돼지 통구이가 생각나느니라!
‘일단 수프와 스튜로 배부터 따끈하게 데우고.’
-이런 멍청한! 미식의 미 자도 모르는 놈! 일단 맛있는 것부터 먹는 것이 진리….
‘난 멍청하니까. 오늘은 수프와 스튜로만 배를 채우련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개인 그릇에 스튜를 한가득 펐다. 정말 스튜만으로 배를 채우겠다는 듯 팍팍 퍼서 삼켰다.
-자, 잠깐! 잠깐만!
라스가 분노했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서 라온의 손목을 잡았다.
-본왕이….
‘본왕이?’
-본왕이 자, 자….
‘자?’
-잠을 좀….
‘그럼 가서 자.’
-끄으윽! 잘못했느니라! 그러니 저 돼지구이부터 먹어다오!
녀석은 한참 동안 맛 좋은 음식을 먹지 못했다며 손을 싹싹 비볐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라온은 물러가라고 손짓하고서 두꺼운 돼지구이를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오.”
바로 감탄이 흘러나온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그 뒤로는 부드러운 버터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평소 미식을 따지지 않는 자신조차도 계속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어….
라스는 돼지구이의 맛에 감동했는지 선 채로 기절하여 입을 부르르 떨었다.
-신. 신이니라. 본왕은 방금 마신을 영접하였노라. 무엇을 하는 것이냐! 본왕이 마신께 문안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더 먹지 않고!
녀석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어서 더 먹으라고 재촉했다.
‘점점 심해지는데. ’
라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서 돼지구이를 소스에 찍어서 먹었다.
‘이것도 좋네.’
속이 촉촉하고, 겉은 바삭한 돼지고기와 매콤한 소스가 어우러지니 또 다른 맛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스가 취향이었다.
-소스도 괜찮지만, 본왕은 순수한 맛이 있는 소금이 더 좋구나.
‘난 소스.’
-이래서 무식한 놈들이 안 되는 것이니라. 요리라는 건 그 순수한 맛을 즐겨야….
‘이제 안 먹어.’
-아악, 보, 본왕이….
라온은 라스와 투닥거리며 모두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 자체를 즐겼다. 역시 자신이 가장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었다.
-크흠, 만족하느니라.
라스도 즐거웠던지 볼록 솟아오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본왕이 몸을 얻는다면 저 파인애플 소녀와 아이스크림 소녀는 꼭 챙겨줄 것이니라.
녀석은 유아를 보며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소고기가 앞에 놓여 있었는데, 나중에 마르타에게 고맙다고 전해주렴.”
실비아는 입을 닦으며 라온에게 소고기가 들어간 스튜를 가리켰다.
“그리고 놓고 가지만 말고, 밥 먹고 가라고 해.”
이제 그녀도 마르타가 고기를 놓고 가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음? 소고기 소녀가 다녀갔다고?
라스는 맛이 좋았던 소고기 산적과 스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어쩔 수 없지. 소고기 소녀도 챙겨주겠노라. 본왕의 세 시녀는 세상이 멸망해도 데리고 가겠노라.
녀석은 인심 썼다는 듯 세 사람은 꼭 살리겠다고 중얼거렸다.
지랄한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라스가 또 발작을 일으킬까 봐 참았다.
“이제 라온의 검을 구경해봐야지.”
실비아의 손짓에 시녀들의 시선이 모두 라온의 허리로 향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부끄럽긴 한데….”
라온이 천천히 일어서서 제천검을 뽑았다. 곧게 뻗은 검신이 식당의 주황빛 조명을 받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와아아아!”
“멋있다….”
“축하드려요! 도련님!”
시녀들은 검이 멋있다며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새, 생각보다 더 굉장한 검을 얻은 것 같네.”
실비아는 제천검의 가치를 읽었는지 붉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실려 있었다.
“유아야.”
“아, 네.”
헬렌의 부름에 유아가 다가와 하얀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보자, 금색과 빨간색의 선이 이어진 수실이 들어 있었다.
“다 같이 만든 거예요.”
“아….”
수실에 연결된 줄의 개수는 지금 식당에 있는 사람의 숫자와 같았다. 모두 하나씩 만든 것 같았다.
“…고마워.”
라온은 조금 민망해서 턱을 긁적이다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으니 달아봐.”
“맞아요. 잘 어울리나 보고 싶어요.”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집에 수실을 달았다. 금색과 검붉은색이 어우러진 검집과 모두가 만든 수실이 연결되자 거칠면서도 귀족스러운 멋이 살아났다.
“앞으로도 네가 너만의 길을 걷기를 바라며 만들었어.”
“길….”
“가문도, 우리도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네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가렴.”
실비아가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이젠 자신보다 키가 작아졌지만, 그녀의 품은 여전히 따스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익! 오랜만에 가족끼리 감동적인 시간을 보내는데 누구야!”
“아, 제가 나가볼게요!”
문과 가까이 있던 유아가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가 당황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저기….”
“왜? 누군데?”
유아는 현관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떨었다.
“중무전에서 오신 분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