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74화 (174/653)

제174화

여덟 살에 공방에 들어왔다.

열둘에 망치를 잡았고, 열넷에 처음 검을 만들었다.

사실 그건 검이 아니었다. 달군 쇠를 두드려 얇게 핀 고철일 뿐이었다.

정말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검을 만든 건 열다섯 겨울. 이름난 검사가 마음에 든다며 손에 금화를 쥐여 주었다.

망치질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만류를 거절하고, 직접 공방을 열었다.

처음으로 만든 검을 사간 검사가 점차 명성을 쌓아갔기 때문인지 손님들이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

공방을 확장하고, 미숙한 대장장이를 받아들여 일거리를 늘렸다. 수많은 단체에 무기를 납품하며 어린 나이에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공방은 점차 커졌고, 금화는 산처럼 쌓여갔다. 점차 망치를 잡는 날은 줄어들고, 밖으로 나다니며 돈만 쓰고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성공한 인생. 그야말로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다.

그렇게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을 때 사고가 터졌다.

시한에 맞추느라 제대로 검수하지 못하고 대량으로 납품한 검과 방패의 품질에 문제가 생겨서 몬스터를 토벌하러 간 병사들이 죽거나 크게 다친 것이다.

왕국에서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해왔고, 그동안 모은 재산의 대부분 바쳐서 간신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쌓아둔 돈이 날아갔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만든 어설프게 만든 무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

지금까지 만들어 온 건 장사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무기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장사꾼이 아니라, 대장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빨리 공방을 떠나는 걸 반대했는지 이해가 갔다. 실력은 있지만, 정신이 갖춰지지 않아 이런 사고를 치리라 예상하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매일을 술로 지새웠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내 무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정뱅이로 십 년을 살며 얼마 남지 않은 재산도 다 까먹고 목숨을 끊자고 생각하며 폐허가 된 공방으로 돌아갔다.

직접 세운 공방에서 죽으려고 할 때 화로 위에 올려진 망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망치. 10년 넘게 잡아 온 망치이니, 마지막으로 잡아보고 죽자고 생각했다.

망치를 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그 사건 이후로 쌓인 감정이 폭발한 듯 홀로 주저앉아 하루종일 울부짖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흐느낀 후에 일어섰다. 신기하게도 죽겠다는 마음은 눈물과 함께 지워졌다.

아버지의 망치를 쥐고, 녹이 슨 화로에 불을 지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고철과 잡념을 집어넣었다.

내게 남은 것은 망치질을 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였다.

쇠를 두들겼다.

쇠를 두들겼다.

쇠를 두들겼다.

돈, 명성, 감정, 삶 그 모든 것을 용광로에 녹이며 그저 쇠를 두들겼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게는 대륙 장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고,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무인에게 검을 만들어 주었다.

젊은 날의 후회를 넘어 대성을 이뤘고, 가정까지 생겼다.

이제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되건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알 수 없는 결핍이 마음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건 심마였다. 진천검 이상의 검을 만들 수 없다는 절망이 전신을 짓누른 것이다.

오랜 기간 잡아 온 망치를 다시 내려놓고, 금탄을 만들겠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노력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하며 십 년 동안 허무한 세월을 보냈다.

슬슬 다 포기하려고 돌아가려 할 때 금발의 꼬맹이가 찾아왔다.

나이에 비해 키도 작고, 바싹 말랐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을 느끼겠다고 하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차피 견디지 못할 건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금발의 꼬맹이는 숙련된 대장장이들도 학을 떼고 도망간 열기를 몇 달 동안 버티며 결국 오러를 만들어냈다.

전설의 금탄이 탄생했지만, 자신의 눈이 쫓는 건 금탄이 아니라 그 꼬맹이였다.

누군가에게 검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열망이 몇십 년 만에 생겨나 먼저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 몸을 만들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5년을 보냈고, 그 꼬맹이가 찾아왔다. 기꺼울 정도로 성장한 꼬맹이는 여러 인연을 거쳐 최고의 재료와 상황을 만들어 왔다.

검을 만드는 당일. 금탄으로 화로의 열기를 극한으로 키운 뒤 쇳덩이들을 집어넣었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금속들을 보며 마음의 불순물을 태웠다.

진천검을 넘겠다는 야망, 죽기 전에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열망마저 불길 속에 녹였다.

그 아래에 남은 건 쇠를 두드리고 싶다는 대장장이의 본능이었다. 화로에서 잡념과 함께 녹여낸 쇳덩이를 꺼내고 망치를 들었다.

쇠를 두드렸다.

쇠를 두드렸다.

쇠를 두드렸다.

50년 전 홀로 폐허가 된 공방에서처럼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그저 쇠를 두드렸다.

칼날처럼 다듬은 집중력에 답하듯 결이 다른 세 종류의 철이 뒤섞이며 천천히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짙은 흑색. 금결로 만들었던 진천검처럼 검신 전체가 흑색이었다.

검을 화로에 집어넣었다가 꺼내 다시 두드렸다. 점차 형태가 잡히고, 날이 세워졌지만, 검신을 덮은 검은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크란 가루를 뿌리고 다시 화로에 넣었다. 분명 설원처럼 하얗게 반짝여야 할 검은 아직도 검은빛을 지우지 못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이게 마지막 작품이 되어도 좋았다. 시간조차 잊고 계속 망치를 내리쳤다.

만검의 형태가 잡히고, 소름이 돋을 정도의 예기를 뿜어냈지만, 칼날을 덮은 검은 빛은 그대로였다.

“모르겠군.”

수십 년 동안 망치를 들고, 철을 두드린 자신도 이 검이 완성된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우우우웅!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망치를 내렸을 때 검이 홀로 울음을 터트렸다. 주인과 호흡하는 검명과는 다른 울림. 주인을 부르는 울부짖음이었다.

“아, 아부지!”

“기다려.”

당황한 하랜을 뒤로 물리고, 검의 울음을 지켜보았다. 검이 거친 진동과 함께 허공에 떠올랐다.

고오오오.

스스로 떠오른 검은 끈이 달린 것처럼 공방의 끝에 앉아있는 라온에게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거꾸로 선 검은 라온의 코앞까지 이르러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힘을 다한 듯 바닥에 떨어지려 할 때 죽은 듯 앉아있던 라온이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찌이이잉!

라온의 손에 붙잡힌 검이 강렬한 진동을 일으킨다. 흔들림이 격해지며 검신에 묻어 있던 검은빛이 재가 되어 흩날리고, 눈처럼 새하얀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태양을 비친 설원처럼 찬란한 빛이 검신에서 아롱질 때 라온이 눈을 떴다. 푸름과 붉음. 각기 두 색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우며 신비로운 광명을 뿜어냈다.

그제야 깨달았다.

저 검은 그야말로 라온을 위해 태어난 검이라고.

*     *      *

라온은 손에 잡힌 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처음 잡아보지만, 신기할 정도로 손에 딱 달라붙는다. 잃어버린 반쪽은 찾은 기분이다.

우우우우웅!

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이 달아오른다. 금결과 화인철 그리고 냉혈에 있다는 오러 증폭 능력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허, 나 참.”

발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이 스스로 주인을 찾겠다고 날아가는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단숨에 깨달았다. 검이 스스로 날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손에 이 검이 잡혀 있지 않았을 테니까.

“완성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주인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구나.”

발칸이 탄성이 어린 숨을 뱉어냈다.

“그게 네 검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너만을 따르고, 너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이야.”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백색으로 반짝이는 검신을 훑어내린 뒤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의 최고 걸작이지.”

“이 녀석이 진천검보다도 위라는 겁니까?”

“그건 다른 이야기다. 진천검의 재료는 모두 금결이니까. 이긴다고 하기는 힘들지. 다만 나의 모든 것이 들어간 검은 진천검이 아니라, 아직 이름이 없는 그 검이다. 그때로 돌아가 그저 망치만을 두드렸어.”

발칸은 원과 한을 풀었다며 홀가분하다고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지만 옛날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시 생각해둔 이름이 있나?”

“아뇨. 아직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어줘도 될까?”

“물론입니다.”

라온이 발칸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검을 만든 장인이 이름을 붙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진천은 하늘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는 제천(提天)이 어떠하냐.”

“하늘을 이끈다는 뜻입니까?”

“그래. 꺾이지 말고, 네 스스로 하늘을 이끌어 보아라. 그 검이 함께 한다면 가능할 것이야.”

“거만한 이름이지만 마음에 드는군요.”

“다행이구나.”

발칸과 라온이 검을 보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제천검.’

라온이 검을 꾹 잡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열기를 모두 흡수하셨습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내부에서 정리되지 않은 기운을 받아들였다는 메시지였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최초로 자신만의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설급 무구 <제천검>이 당신을 주인으로 여깁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했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를 가졌다며 능력치를 상승시켜주었다.

올라간 능력치, 그리고 성취가 상승한 불의 고리와 오러들로 미루어봤을 때 마스터의 벽을 칠부능선 가까이 넘었다. 이제 그 벽 너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

늦어도 내년에는 마스터의 벽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끄으윽!

라온이 기대감에 주먹을 움켜쥘 때 팔찌에서 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또! 또 시작이니라!

분노가 치민다는 듯 메시지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본왕의 본체를 얼마나 거덜 내야 속이 시원한 것이냐! 너란 놈은

‘투탄 돼지 통구이.’

-어? 음?

‘투탄 돼지 통구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끄으응….

투탄 돼지 통구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라스의 뾰족한 냉기가 솜털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 빌어먹을.

화가 나지만 통구이를 기대하며 꾹 참는 것 같았다. 분노로 위장취업 한 탐식의 마왕다운 모습이었다.

“너도 수고했다.”

발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하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라온도 몰입해 있었는데, 네가 그 집중을 깨지 않고 움직여준 덕분에 살았어.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니더구나.”

“쯧, 좋은 말 많은데, 빨빨거린다가 뭡니까.”

하랜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확실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과 자신 둘 다 몰입해 있는 상황에서 집중을 깨지 않으며 적시적소에 움직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발칸이 칭찬한 대로 하랜에게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크흠….”

라온이 눈인사를 보내자, 하랜은 민망한지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화, 환기 좀 시키죠! 이틀 동안 여기에만 갇혀 있었더니 아주 뒤지겠… 억!”

그는 꽉 닫힌 철문을 활짝 열다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문 앞에는 은발을 왼쪽 어깨로 내린 루난이 있었다. 눈이 살짝 빨간 걸 보니 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끝났어?”

루난은 품에 처음 보는 은빛 검을 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끝났나 보네.”

“응.”

루난이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은빛을 띠는 고고해 보이는 칼날에 서늘한 예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굉장한 명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집에는 푸른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새겨져 우아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루난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살짝 볼이 빨간 걸 보니, 굉장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딱 그 녀석다운 검이다. 제대로 만들었군.”

발칸은 루난의 검에 감탄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네 검집은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만들 생각이다. 화려하면서도 단단하게 붙여서 몽둥이처럼 쓸 수 있게 해주마.”

그는 확연하게 지친 모습을 보이면서도 걱정 말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랜. 너도 도와라.”

“응. 아니, 예! 알겠습니다!”

하랜이 맡겨달라는 듯 꽉 움켜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발칸과 하랜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인님을 만난 기연 덕분에 이런 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연?”

되묻는 듯한 발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검을 만들기 위한 재료 중에 우연히 얻은 게 있더냐. 저 아이가 네게 냉혈을 준 것도, 금탄이 만들어진 것도, 내가 검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도 전부 너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

“제천검은 기연이 아니라, 너의 인연으로 만든 것이다.”

발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까지 걸어온 네 길을 잘못되지 않았어. 앞으로도 정진하거라.”

인연이라는 단어 그리고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전생의 지옥 같은 삶마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네.”

라온은 떨리는 입술을 깨문 채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     *      *

이틀 뒤.

라온의 허리에는 제천검이 납검된 검집이 달려 있었다. 여명과도 같은 금빛과 노을의 검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늘을 이끄는 검을 담는 검집의 모습으로는 제격이었다.

그저 단단하기만 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이런 작품을 만든 발칸과 하랜에게 감탄이 나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라온이 공방 앞에 있는 발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쉽군. 조금 더 있어도 되는데.”

“곧 임무가 시작될 테니, 부단주로서 준비를 해놔야 할 거 같습니다.”

“하긴 단주가 그 망나니이니, 네가 바쁘긴 하겠어.”

발칸이 세상이 말세라며 혀를 찼다.

“예. 그렇죠.”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건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발칸이 공방 안에 있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과 손톱, 발톱, 이빨을 가리켰다.

“나는 이제 힘들어서 저걸로 뭘 할 기력이 없다.”

그가 부채질하듯 손을 저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게 검과 검집을 만든 이후 그는 10년은 늙은 것처럼 주름이 늘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내가 검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니까. 충분히 만족했고.”

발칸이 가감 없이 웃었다. 미련이 없어진 표정이었다.

“그럼 저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라온이 말을 하려고 할 때 뒤에 있던 하랜이 앞으로 펄쩍 뛰며 나왔다.

“제가 맡겨주신다면 저 재료들로 최고의 무구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난 모르겠구나.”

발칸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내기 아직 정산하지 않았죠?”

“히익!”

하랜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뭐든 들어주기였으니,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마음에 찰 검을 만들 때까지 광풍단 전속 대장장이로 일하세요.”

라온은 진중한 빛이 돋아나기 시작한 하랜의 눈을 보며 웃었다. 하랜은 발칸이 인정할 정도의 재능이 있고, 지난 나흘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으니, 분명 뛰어난 야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그를 광풍단의 전속 대장장이로 쓴다면 큰 도움이 될 게 확실했다.

“무, 무조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랜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임무를 드리겠습니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재료들로 34명의 검사들이 사용할 기본 방어구를 만들어 주세요.”

“기본 방어구….”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얼마든지요.”

그가 믿어달라는 듯 씩 웃었다.

“나도 살펴보마. 이 멍청이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발칸이 하랜의 머리를 통통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올게요.”

라온과 루난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새로운 검을 잡고 언덕을 내려갔다.

“흠….”

발칸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보았을 때 얼마나 발전할지 기대가 되는구나.”

마스터가 가시권에 든 17살짜리 검사라니,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대륙 전체가 뒤흔들릴 것이다.

앞으로 라온이 휘두를 제천검의 위용이 기대되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부지! 거기서 뭐해!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이거 혼자 못 들어!”

공방 안에서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년 동안 폐인으로 살던 녀석이 고작 나흘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전의 자신 같은 열정을 보이니, 힘이 없어도 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고맙다고 했지만 정말 고마운 건 이쪽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발칸은 멀어지는 라온과 루난에게 무운을 빌어주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공방으로 들어갔다.

*     *      *

라온은 루난과 함께 미르탄 마을 구석에 있는 드워프의 망치로 향했다. 하랜의 말대로 유명한지 마을 외곽에 있었는데도 내부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후욱, 향부터가 끌리는구나. 그 50가지 재료로 만들었다는 소스의 향이 느껴지느니라.

라스는 입구에서부터 흥분하여 혀를 날름거렸다.

‘좀 진정해.’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데 진정하게 생겼느냐.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느니라.

‘그럼 좀 참아. 곧 먹을 테니까.’

라온은 라스를 억지로 잡아서 진정시키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점원이 달려나와 방긋 웃었다.

“두 분이신가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 안쪽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주문을 뭘로 하시겠습니까?”

점원은 메뉴판을 건네주고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뭐 먹을래?”

“라온 먹는 거.”

루난은 같은 걸로 시켜달라는 듯 눈만 깜빡였다.

“그러면 투탄 돼지 통구이 2인분으로….”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점원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재료가 떨어졌습니다.”

“재료가 떨어져요?”

“최근에 레드 드래곤 터틀을 잡았다는 소식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재료가 동이 났습니다.”

-어어억!

재료가 떨어졌다고 하자마자 라스의 목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음, 그럼 재료는 언제쯤….”

“못해도 일주일은 걸릴 거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여기까지다. 일주일이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대, 대체 왜….

라스의 전신에서 냉기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대체 왜 본왕이 먹으려고만 하면 없는 것이냐!

‘어쩔 수 없잖아. 재료가….’

-다 네놈 때문이지 않느냐! 네가 그 거북이를 데리고 와서 이 사달이 벌어졌어! 진작 다 팔아버리던가!

‘음….’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걸로라도 풀어줘야겠네.’

투탄 돼지 통구이 대신 다른 음식이라도 먹어야 라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그럼 추천하시는 메뉴가 있나요?”

“통구이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명한 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장장이 정식! 따뜻한 양파 스튜에 부드러운 빵, 달콤한 소스를 덮은 닭볶음까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메뉴죠!”

“어….”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라스가 가장 싫어하는 게 정식이었는데, 식단마저 하분 성과 똑같았다.

-정식. 또 정식. 어딜 가든 정식이 있으니라….

‘그거야 당연히….’

-닥쳐!

예상대로 라스의 눈에서 시퍼런 뇌전이 폭발했다.

-이런 제기랄! 다 짜기라도 한 것이냐! 어떻게 메뉴까지 그 망할 성의 정찰병 정식과 똑같은 것이냐!

녀석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악을 내질렀다.

-세상이 본왕을 미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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