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라온은 발칸을 따라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잡동사니가 널려 있던 테이블 위에 세 개의 상자가 있었다.
“이 상자들이 준비입니까?”
“그래.”
발칸이 옅게 웃으며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금결석에서 나왔던 금결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도 네가 이미 본 거다.”
두 번째 상자에서는 예전 북망산 숯가마에서 만들었던 금탄이 들어 있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발칸이 살짝 입맛을 다시고서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첫 번째 상자에 들어 있던 것보다 조금 더 큰 금결이 들어 있었다.
“…구하셨군요.”
라온은 세 번째 금결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저걸 구했을 줄은 몰랐는데.’
금결은 가장 귀한 금속이다 보니, 미르탄 마을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넘겨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구해와야 하나 걱정했는데, 발칸은 이 짧은 시간에 금결을 구해놓았다. 괜히 대륙의 칭호가 붙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에엥?”
하랜이 세 번째 상자의 금결을 보며 고개를 크게 틀었다.
“이게 마을에 있었다고?”
그는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금결을 툭툭 건드렸다.
“이 정도 크기의 금결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는데. 영감. 이거 진짜 여기서 구한 거 맞아?”
“마, 맞다.”
발칸은 살짝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진짜 이상한데, 표정이 왜 그래? 이거 누구한테 얻은….”
“시끄럽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끄억! 또 왜 때려!”
하랜은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진짜 돌대가리 된다고!”
“네놈은 원래 돌대가리라 괜찮아!”
발칸이 하랜을 걷어차고 물러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금결은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라온이 세 번째 상자에 든 금결을 보며 물었다. 처음 가지는 검이다 보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훔치거나, 뺏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장인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익명의 후원자다. 본인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다더군.”
“익명의 후원자?”
“네 정체와 사정을 듣고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혹시 나중에 이상한 요구를 한다던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네가 이 금결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발칸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긴 했지만, 표정은 당당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 정도 되는 장인이 이상한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비밀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믿기로 했다.
“음, 그리고….”
발칸이 아래에 있던 큰 상자를 열었다. 루난이 가져온 냉혈이 2개로 나뉘어 있었다.
“루난.”
그는 그중 큰 냉혈과 테이블 위에 있던 금탄 하나를 루난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가지고, 바로 아래에 있는 촌장의 공방으로 가거라. 미리 말을 해놓았으니,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발칸이 언덕 바로 아래에 있는 마름모꼴 형태의 공방을 가리켰다.
“지열이 돌아오려면 이틀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미리 가서 네가 원하는 검의 크기와 형태를 잡아놓거라.”
“네.”
루난은 냉혈과 금탄 하나를 챙기고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라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라는 신호 같았다.
“다녀와,”
“응.”
라온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루난은 기분이 좋은지 폴짝 뛰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발칸이 상자들을 덮고 라온을 보았다.
“전에 너는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생각은 아직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을뿐더러 더 견고하게 세워졌다.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
“일관된 모습이 좋군.”
발칸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빨간색 철을 올려놓았다.
“이게 화인철이다. 네 검의 반쪽이 될 철이지. 냉혈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새로운 재료를 더하면 될 것 같구나.”
“새로운 재료라고 하신다면….”
“네가 가져온 거북이가 있잖느냐.”
그는 공방 안에서도 보이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걸 이용하면 화인철이 냉혈에 밀리지 않는 재료가 될 거다. 냉혈에 화인철 그리고 중심을 잡을 금결까지. 제대로 된 검이 탄생하겠군.”
발칸이 주먹을 꽉 말아쥐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가 원하는 형태를 말해보아라.”
“이것과 비슷했으면 좋겠습니다.”
라온은 가지고 온 검을 꺼내서 내밀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일반적인 검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긴 검. 앞으로 수많은 검술을 배우고, 익혀야 하기에 자신의 검은 모든 검술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만검의 형태여야 했다.
“만검이라. 하긴, 네게는 잘 어울리겠구나.”
발칸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이틀 뒤 새벽에 다시 와라. 열기가 돌아오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하지.”
“그럼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라온은 발칸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루난이 걱정되었는지 곧바로 촌장의 공방으로 향했다.
“아부지.”
하랜은 라온의 등을 보다가 다시 공방으로 들어갔다.
“뭐냐. 징그럽게 왜 그렇게 부르는 게냐.”
발칸이 오물이라도 묻은 듯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저 녀석이 아버지라고 부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부탁이 있슴다.”
하랜이 무릎을 꿇었다.
“부탁?”
“나도 그 검을 만드는 걸 돕게 해주쇼.”
“네가 미친 것이냐.”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끝날 거라고!”
“하루종일 술 퍼먹고, 도박질만 하던 놈이 무슨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제발 부탁해! 잡일이라도 좋아. 검에 닿지 못해도 좋아! 그저 그 공방 안에라도 있게 해줘!”
그는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박았다.
“너… 라온의 무얼 보고 온 것이냐.”
“그릇.”
고개를 든 하랜의 눈빛에서 탁한 빛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거대한 그릇을 봤어.”
“음….”
“그 그릇이 더 두껍고 단단해지는데, 내 힘을 보태고 싶어! 제발 도와줘!”
“후우.”
발칸은 진지함이 깃든 하랜의 눈과 눈을 마주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틀 뒤 새벽이다. 그때까지 몸에 남은 술 냄새와 어긋난 정신을 바로 잡고 와라. 그리고 라온이 거부한다면 바로 쫓아낼 거다.”
“알겠어! 고마워!”
하랜은 넙죽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 참.”
발칸은 2년 만에 뛰는 하랜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정신을 차리길 바랐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밝은 불이 들어온 촌장의 공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에게 빚이 하나 생긴 건가….”
* * *
지그하르트 남부에 있는 카지노 입구.
흐흐흥.
리메르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 나왔다. 오전에만 해도 어깨에 가득하던 쭈구리 기질은 사라지고, 개선장군 같은 당당함만 가득했다.
“으흠.”
리메르는 손에 든 금화 주머니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이게 잘 된 건지 모르겠네.”
항상 돈을 따가는 그 영감이 없어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에게 찰지게 돈을 땄다. 이 정도라면 한동안 등 따숩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돈부터 갚고… 아니지! 내일 더 따고, 더 불려서 돌려주면 되잖아.”
그는 모든 도박꾼들이 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중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일도 오늘의 끗발만큼만….”
“어이, 도박쟁이.”
리메르가 주점으로 가려 할 때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퉁명스러움 한 국자에 정 한 스푼이 담긴 이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자 팔짱을 낀 천검대주가 서 있었다.
“우리 천검대주 아니야!”
“네놈에게 줄 정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헛소리하지 마.”
천검대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와! 오랜만이네!”
“흥.”
리메르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고, 천검대주는 콧방귀를 끼었다.
“오늘 좀 땄는데, 한 잔 어때? 내가 살게.”
그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주점에 가자고 말했다.
“일단 대화 좀 하지.”
“대화 좋지. 임무에 대해서나 좀 말해봐.”
“따라와.”
천검대주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번화가 외곽으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별거 없는데, 그냥 주점에서 말해도 되잖아.”
“닥치고 오기나 해.”
“우리 귀염둥이 천검대주께서 오늘 왜 이리 날카로우실까?”
“그 귀염둥이에게 목이 날아가야 입을 닥치려나?”
“으윽.”
리메르가 목을 쓰다듬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까지 가! 내일도 열심히 따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
“다 왔어. 여기니까.”
천검대주는 아무도 없을 만한 번화가 뒤편의 공터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무슨 대화를… 억.”
리메르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천적의 기운이 느껴진다. 온몸이 경고를 보내온다. 당장 도망치라고.
“서, 설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없어야 할 사람. 이곳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가, 가주님!”
글렌 지그하르트가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내 경고를 무시했더군.”
“아니, 그게….”
“그래서 ‘대화’를 하러 왔다.”
“대화하자는 사람의 눈빛이 아닌데요….”
당장 살을 씹어먹을 듯한 글렌의 서늘한 눈빛이 온몸을 짓눌렀다.
“대화가 꼭 말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 몸의 대화도 있지.”
글렌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쿠르르릉!
훤하게 뚫린 밤하늘에 시꺼먼 먹구름이 돋아나는 신비가 이루어졌다.
“후우, 잠시만요.”
리메르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럴 줄 알고 있었지.’
로엔에게 돈을 빌릴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했었다. 예측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었고.
‘난 바보가 아니거든.’
멍청하게 저 벼락을 그냥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준비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멀쩡하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제 말 좀 들어주시지요.”
리메르는 진정하라고 말하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라온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글렌은 명실상부 손자 바보다. 라온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멸왕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녀석이 뭘 하는지 듣고 싶다면 일단 구름부터 지우시고… 어?”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없어지거나, 가늘어져야 할 하늘의 먹구름이 더 짙어지고, 붉은 뇌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아니라고!
“가, 가주님! 라온이라니까요! 라온이 어딜 갔는지. 무얼 하려는 건지 다 알려드릴게요! 라온 좋아하잖아!”
다급하게 외쳐보았지만 글렌의 눈빛은 더 차갑게 가라앉았고, 뇌기를 머금은 구름은 사라지긴커녕 무시무시한 벼락을 만들어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손자 바보가 이런 반응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남은 방법은 도망뿐이었다.
“젠장!”
리메르가 극성의 보법을 밟아 물러서려 했지만 어느새 움직인 천검대주가 앞을 가로막았다.
“야! 저거 맞으면 진짜 뒈져!
“잘 가. 도박쟁이.”
천검대주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콰르르릉!
리메르는 쏟아지는 벼락 줄기를 보며 손에 든 금화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 * *
이틀 뒤 새벽.
마을의 지열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라온은 발칸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발칸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공방에는 하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역처럼 휘날리던 머리를 빡빡 밀고, 눈동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틀 만에 보는 것 치고는 극적인 변화였다.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잡일을 시켜도 좋고, 없는 사람 취급해도 좋습니다. 제발 이 공간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진심인지 목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죠?”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라온이 발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마음대로 해라. 저놈이 있든 없든 난 상관없으니까.”
“음, 그럼 잡일 정도는 시키죠.”
어차피 하랜은 정신 차리게 한 뒤 광풍단 전용 대장장이로 쓸 생각이었다. 여기서 무언가를 깨닫는다면 이득이었다.
“고맙구나. 고마워.”
발칸은 라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옅게 웃었다. 대륙 장인도 혈육의 정은 떼지 못했는지 고맙다는 말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럼 시작하자. 얼마나 걸릴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하랜!”
“예!”
하랜이 공방으로 달려 들어가 화로에 불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치솟는 온도. 지열이 회복한 덕분에 공방의 열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여기 있는 두 금속에 네가 사용하는 오러를 밀어 넣어라.”
발칸이 테이블 위에 있는 냉혈과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강화한 화인철을 가리켰다.
“예.”
라온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화인철과 냉혈을 잡았다. 냉혈에는 글래시아, 화인철에는 만화공의 기운을 동시에 주입했다.
치이이이이익!
화인철은 타오르는 듯이 붉어지고, 냉혈은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설원처럼 새하얗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찌지직!
더 짙고 순수한 오러를 밀어 넣어 빛과 열을 올리려고 할 때,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범인은 뻔했다.
‘라스,’
-왜, 본왕이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라스의 냉기 때문인지 맑은 은빛을 발하던 냉혈에 탁기가 끼기 시작했다.
-네놈은 너무 빨리 강해진다. 본왕이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주도록 하지.
이틀 전 레드 드래곤 터틀을 잡고 얻은 보상에 화난 걸 지금 풀려는 듯 계속해서 탁한 기운을 뿜어냈다.
‘후우….’
라온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 어설픈 마왕에 대한 대비를 해놓기 잘했다.
‘미르탄 마을 외곽 드워프의 망치라는 주점이 있어.’
-무슨 망치? 갑자기 헛소리를….
‘그 주점에 우탄 돼지 통구이라는 음식을 파는데, 껍질은 쿠키처럼 바삭하고, 살결은 야들야들 부드러우며 소스에는 50가지 재료를 넣어 진하기 그지없다더군.’
-워….
라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냉기를 밀어 넣는 걸 멈추고 입에서 냉기로 된 침을 줄줄 흘렸다.
‘요즘 네가 조용히 있어서 그거나 먹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야겠네.’
-보, 본왕은 관대하다. 네놈이 좋은 검 좀 얻는다고 본왕을 위협할 리가 없지.
녀석이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탁기를 빼내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그 주점에는 언제 갈 것이냐?
‘검을 다 만들면.’
-크흠, 본왕은 자비롭게 기다리고 있겠노라.
라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팔찌로 들어갔다. 안에서 군침을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참 쉽다니까.’
라온은 피식 웃고서 라스의 기운을 지우고 다시 두 금속에 오러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거기까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담듯이 금속에 오러를 밀어 넣고 있을 때 발칸이 손을 들었다.
“금속에 어린 기운을 보니, 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이는구나.”
발칸은 두 금속에 담긴 기운을 느끼고서 크게 탄성을 흘렸다.
“충분하다. 이제 뒤에 가 있거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발칸은 두꺼운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화로 속에 첫 번째 금탄을 던져 넣었다.
콰아아아아아!
손가락 두께였던 아지랑이가 팔뚝만 한 크기로 부풀고, 화로의 열기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졌다.
“후욱!”
“크으으윽!”
평생을 화로 앞에서 살았던 발칸과 하랜도 그 열기에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뒤에 떨어진 자신에게도 자극이 올 정도의 열기였으니, 두 사람은 화상을 입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발칸은 두 덩이의 금결을 화로 속으로 던지고 뒤로 손을 뻗었다.
“정신 차리고, 화인철부터 가져와!”
“옙!”
발칸은 하랜에게 화인철을 받아 화로의 중간에 집어넣었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열기가 작열하며 새빨간 쇳덩이를 녹이기 시작했다.
“다음!”
“예!”
발칸이 화로에서 반쯤 녹은 화인철을 꺼낸 후 냉혈을 화로에 집어넣었다. 강대한 열기 속에서 한 줄기 순수한 냉기가 피어난다.
“이제 한 번에!”
“옙!”
발칸과 하랜이 어중간하게 녹은 화인철과 냉혈을 동시에 화로에 집어넣었다.
화로조차 녹여버릴 듯한 강대한 화력에서도 화인철과 냉혈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우우우웅!
한참을 지져 쇳덩이들의 형태가 무너졌을 때 발칸이 두 금속을 꺼내고 망치를 들었다.
쩡! 쩡! 쩡!
발칸의 망치질이 시작된다.
강하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어긋남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호흡하듯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흐름. 수십 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망치질이 열기로 가득 찬 공방을 울렸다.
꿀꺽.
라온은 혼이 깃든 망치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망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섰다. 눈을 떼지도, 숨을 쉬지도 못한 채 그저 발칸의 망치질만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
망치질이 흐름을 타기 시작했을 때 만화공이 스스로 일어나 화려한 춤을 추고, 글래시아가 올곧이 서서 우아한 노래를 부른다.
쩡! 쩡! 쩡!
두 기운은 발칸의 망치질과 호흡 하는 것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를 질주하며 스스로가 가진 기운을 끝없이 증폭시켰다. 제대로 통제하기도 힘들 정도의 폭주였다.
“후욱.”
라온은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해야 할 건….’
어설프게 두 기운을 운용해보았자, 폭주를 막기 힘들다. 지금은 그 바탕을 다져야 할 때다.
치이이잉!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모두 내려놓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여섯 개의 불의 고리가 진동하며 폭주하는 기운을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쩡! 쩡! 쩡!
금속이 아니라, 혼을 직접 두드리는 듯한 발칸의 망치 소리에 맞춰서 불의 고리와 만화공, 글래시아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쩌엉! 쩌엉!
이전보다 조금 더 힘이 깃든 망치 소리. 발칸이 세 번째 금속 금결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금결과 호흡하는 건 불의 고리다. 금속의 왕의 울음에 답하듯 여섯 개의 고리를 공명하며 강물처럼 도도한 흐름을 펼쳐냈다.
불의 고리, 만화공, 글래시아의 기운이 끝없이 이어지며 다 흡수하지 못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열기가 버터처럼 전신으로 녹아내렸다.
근육과 뼈가 더 단단하게 여물고, 마나 회로와 단전이 약동하며 더 크게 부풀었다.
쿠구구구.
라온은 외부의 기와 내부의 기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듯 공명하는 희열을 느끼며 깊은 연공 속으로 빠져들었다.
쩌엉! 쩌엉! 쩌엉!
발칸 역시 라온과 다르지 않았다. 집중을 넘어선 극한의 몰입. 푸른 눈동자에 귀화를 피워내며 끝없이 쇠를 두드렸다.
혼이 담긴 망치질이 계속되자, 화인철과 냉혈 그리고 금결이 본래 하나의 금속이었던 것처럼 어우러지며 섬뜩할 정도의 검은빛을 뿜어내는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