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71화 (171/653)

제171화

“쯧.”

미르탄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공방으로 향하는 발칸이 혀를 찼다.

‘하긴 여기에 금결이 있을 리 없지.’

금결로 무구를 제작하는 건 대장장이에게 꿈과도 같은 일이다. 마을의 누군가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진즉에 무언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어쩐다….”

발칸이 본인의 공방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의 검은 평범한 걸로는 안 되는데.’

라온은 화속성 오러와 수속성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특별한 검사다. 그 두 가지 기운 모두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금결만으로 검을 만들던가, 금속 두 개를 조합한 뒤 그사이에 금결을 엮어야 한다.

루난이라는 아이가 냉혈을 준다고 했으니 금속은 충분하지만, 금속을 연결할 금결이 너무 부족했다.

‘복잡하군.’

성격상 대충 상황에 맞추거나, 어설픈 검을 만드는 짓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검사에게 맞는 최고의 검을 만들어야 한다.

“흐음, 경매라도 참여해야 하나.”

상업 도시의 카멜룬 지하 경매라면 금결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제대로 된 검을 만들어주는 게 좋겠지.’

일단 라온을 돌려보낸 뒤에 금결을 구해서 다시 부르기로 마음먹고 공방의 문을 열었다.

“음?”

발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잠가서 텅 비어 있어야 할 공방 안에 키가 큰 금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업 안 하니… 허억!”

나가라고 말하려던 발칸은 남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부, 북멸왕을 뵙습니다!”

너무 놀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공방에 홀로 있던 남자는 이 땅의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였다.

“오랜만이오.”

글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기운이 일어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과한 인사는 할 필요 없소.”

“가, 감사합니다.”

발칸이 고개를 꾸벅였다. 글렌을 여러 번 보았지만 만날 때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망치를 잡았다고 해서 와보았소. 젊은 시절의 열기를 되찾은 듯하니 부럽구려.”

글렌이 벽과 테이블 위에 가득한 철 조각을 쓸어내리며 눈을 빛냈다.

“부끄럽습니다. 다 늙고 나서야 제가 정말 무엇을 원했는지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오.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발칸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더 강해지신 건가.’

글렌의 기질 자체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선 것 같았다.

‘이젠 어떤 경지에 오르셨는지도 모르겠군.’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를 보아온 자신의 눈으로도 글렌의 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구름을 넘어 하늘의 끝에 도달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검을 봐주었으면 해서 들렸소.”

글렌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붉은 색 검집을 내밀었다. 검부터 검집까지 직접 만들었던 진천검이었다.

“알겠습니다.”

발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진천검을 뽑았다.

치이잉!

어둠을 오려낸 듯한 시꺼먼 칼날이 오싹할 정도의 예기를 피워낸다. 대륙 제일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완성도. 이 검이 바로 발칸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검 진천검이었다.

“음.”

발칸은 스스로 만들어낸 걸작을 차가운 눈으로 훑어내렸다.

“확실히 심마를 벗어났구려.”

글렌이 진천검을 살피는 발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을 보는 눈이 달라졌소.”

“저도 방금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자괴감이 들어 진천검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검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떤 것 같소?”

“완벽합니다. 검신 전체를 금결로 만들었으니, 손상된 부분도 전혀 없습니다.”

발칸은 검을 닦는 비단을 가져와 아래부터 위까지 천천히 닦아 내렸다. 다시 보아도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검이다.

“사실 제가 심마를 벗어난 이유는 가주님의 손자 덕분입니다.”

“손자?”

“라온 말입니다.”

“음….”

“그 아이는 냉기에 고통받으면서도 매일 같이 숯가마에 찾아와 지독할 정도의 열기를 버텨냈습니다. 평생 화로 앞에서 사는 대장장이들도 견디지 못한 열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죠.”

발칸이 어린 라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그 아이의 열정과 노력을 보니, 제 옛날 모습과 목표가 떠오르며 자연스레 심마를 벗어날 수 있었죠. 수많은 검사를 봐왔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높이 올라갈 겁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글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차가운 말을 흘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지금까지 가라앉아 있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저런 표정을 지으시다니.’

철면 같았던 글렌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발칸이 진천검을 다 닦은 뒤에 검집에 넣어 글렌에게 돌려주었다.

“고맙소.”

글렌이 진천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단순히 검을 착용할 뿐이었지만, 너무도 우아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럼 값을 치러야겠지.”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발칸은 필요 없다고 말하며 손을 빠르게 저었다.

“나를 염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오.”

글렌이 허공에 손가락을 긋자, 금빛으로 공간이 갈라졌다. 그는 그 안에 손을 넣은 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목갑을 하나 꺼냈다.

“이건….”

“내게는 별 필요 없는 물건이니 받으시오.”

“가, 감사합니다.”

발칸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고 상자를 받았다. 예상과는 달리 꽤 무거웠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그럼… 허억!”

발칸은 글렌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서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 금결!”

상자 안에는 금결이 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있던 것보다 더 큰 크기의 금결이.

“이걸 왜….”

당장 필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검을 조금 봐준 것으로 이런 귀한 물건을 받을 수는 없었다.

“말했잖소.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하….”

발칸이 금결을 보며 숨을 골랐다.

“평소라면 절대 받지 않겠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

“라온의 검에 넣을 금결이 필요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곧 라온이 돌아올 테니, 그 녀석에게 가주님이 내리는 선물로….”

“오다가 주웠소.”

글렌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오가다 주었다니,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예에?”

“오다가 주웠으니, 생색내고 싶지 않소.”

“아니, 그게….”

“오다가 주웠소.”

“아무리 그래도….”

“오다가 주웠다니까.”

글렌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알았다. 금결을 준 걸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이것도 받으시오.”

글렌이 두 번째로 작은 상자를 넘겨주었다.

“이건 또 무슨….”

“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작은 영약이오. 복용이 쉬우니, 그저 삼키기만 하면 되오.”

“이런 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발칸이 목갑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글렌은 이미 공방을 벗어나 있었다.

“나중에 또 봅시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허….”

발칸이 손에 든 글결과 영약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     *      *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를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산에 진동이 일고, 바닥에서 솟구친 염화의 벽이 퍼져나갔다.

후우우웅!

라온은 십(十)자로 검풍을 내리쳐 전방에서 뻗어 나오는 불꽃을 갈라버리고 시야를 열었다.

‘꽤 뜨거운데.’

화속성 저항력이 있는 자신에게도 열기가 영향을 미칠 정도다. 익히 알고 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화력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인데, 뭘 그리 놀라는 것이냐.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까지 지열이 낮았다는 건 저 거북이가 몇 주 동안 땅에 주둥이를 대고 열기를 흡수해왔다는 뜻이다.

‘그게 가능한 건가?’

-본래라면 열기를 담다가 그릇이 터졌겠지만, 저놈은 그걸 견디고 진화한 거지. 거의 하급 영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니라.

‘하급 영물이라….’

-저 거북이의 육체에는 네놈의 검도 먹히지 않을 테니, 잘 싸워 보거라.

라스는 얄밉게도 팔찌 위로 머리만 내민 채 키득거렸다.

‘어디 보자고. 먹히는지 안 먹히는지.’

라온이 만화공을 끌어 올리며 레드 드래곤 터틀을 향해 내달렸다.

“쿠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은 식사를 방해한 것에 화가 났는지 긴 주둥이를 벌렸다. 무저갱 같은 목구멍에서 시뻘건 화염을 토해냈다. 플레임 브레스였다.

콰아아아아!

일반적인 레드 드래곤 터틀의 브레스라면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지만, 저 괴물의 브레스는 숨쉬기 힘들 정도의 열기를 담고 있었다.

“흐읍!”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검을 내질렀다. 검신에 어린 만화공의 기운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시뻘건 톱날을 형성했다. 만화공 십화 회천이었다.

콰아아아앙!

라온과 레드 드래곤 터틀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며 열기가 깃든 용오름이 일어났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전력을 다한 회천과 맞먹을 정도라니,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다만 어설퍼.’

갑자기 화력이 강해졌기 때문일까. 놈은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 회천을 꺾어 브레스의 방향을 비튼 뒤 가람 보법을 밟았다.

화악!

불꽃의 벽을 가르고 뻗어나가는 왼발. 찰나의 순간에 레드 드래곤 터틀의 옆구리가 보였다.

육체에 깃든 가속력을 그대로 담아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바위조차 부숴버릴 맹렬한 검격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허리에 쏟아졌다.

푸아아악!

세차게 뻗어나간 칼날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살을 얇게 가르고, 붉은 피를 뿌렸다.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짜증 어린 비명을 지르고 주둥이를 뻗어왔다. 입에서 뿜어지는 화염을 피한 뒤 다시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찌이이잉!

레드 드래곤 터틀의 전신이 붉은빛으로 물들고, 조금 전 베었던 상처가 실로 꿰맨 듯 맞물렸다.

“가, 갑각화야! 치면 안 돼! 검이 부러질 거다!’

뒤에서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각화.’

갑각화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특성 중 하나로 등껍질과 같은 강도를 피부에 옮겨 오는 방어 능력이었다.

‘그래도 가야 해.’

공격하지 않는다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만화공의 불꽃을 검신에 가득 담아 내리쳤다.

쩌어어어엉!

막강한 반탄력에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살이 아니라, 수없이 두드린 쇳덩이를 친 듯한 감각. 그저 화력만이 아니라, 방어 능력마저 비할 수 없이 강해진 것 같았다.

“크오오오오!”

고통이 없는 건 아닌지 레드 드래곤 터틀이 살벌한 눈빛을 발하며 발을 굴렀다. 대지가 사정없이 갈라지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화아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끊임없이 불꽃을 뿜어내자, 나름 열기에 내성이 있는 스켈레이 산의 수풀과 나무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일어날 것이다.

“루난!”

“응!”

루난은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하랜의 멱살을 쥐고 옆으로 빠져서 냉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

은빛 냉기가 눈송이처럼 쏟아지며 퍼져나가는 화염을 지워냈다.

-본왕이 말했잖느냐. 저 거북이도 네놈처럼 돌연변이다. 쉽게 꺾지는 못할 것이야.

‘오히려 좋아.’

-뭐?

‘연습 상대로 딱이라고.’

라온이 웃음을 흘리며 레드 드래곤 터틀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하며 뿜어내는 불꽃을 흘려낸 뒤 만화공을 가라앉히고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차디찬 냉기가 깃든 칼날에 쾌의 구결을 담았다.

캬아아앙!

은빛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격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피부를 조금 더 가르고 들어갔지만 역시나 갑각화를 완전히 부수지 못하고 밀려났다.

“크르르륵!”

레드 드래곤 터틀이 분노한 듯 몸을 마구 휘저으며, 긴 꼬리를 내리쳐왔다. 꼬리에 휘감긴 불꽃의 철퇴가 대지를 터트렸다.

‘공격이 단순해.’

열기와 위력은 받아치기 어려울 정도지만, 그 궤도가 단순하다. 그저 눈으로만 쫓는 움직임. 폭발하는 불기둥을 밀어내며 레드 드래곤 터틀의 후방으로 다가갔다.

치이이잉!

새로운 쾌검의 구결을 조합하여 두 번째 검격을 쏟아냈다. 검신에서 미끄러지듯 피어난 냉기의 선이 열기로 번들거리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피부를 노렸다.

찌지직!

레드 드래곤 터틀의 인지를 벗어난 속도의 검격이 놈의 살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 거대한 육체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상처였지만,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크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육중한 몸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꼬리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쾅! 콰아앙!

화염에 타오르는 꼬리가 대지에 닿을 때마다 산이 무너질 듯 흔들리고, 밟을 곳이 사라져 구석으로 몰렸다.

“크르륵!”

레드 드래곤 터틀이 승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히죽이며 두 번째 브레스를 토해냈다.

콰아아아아아!

모든 것을 녹여낼 것 같은 화염의 숨결이 닿기 직전. 라온이 주먹보다도 작은 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태화보. 밟을 공간만 있다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절대의 보법이 불타는 대지를 질주했다.

“크어어어어!”

레드 드래곤 터틀이 다급히 브레스를 멈추고, 꼬리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꼬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전력을 다한 극쾌의 검격이 그 앞에 닿아 있었으니까.

쩌어어엉!

꼬리에도 갑각화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베는 건 무리였지만 한층 발전한 쾌검식에 이전보다는 확연히 커진 상처가 돋아났다.

치이이익!

직선으로 갈라진 상처에서 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키아아아악!”

레드 드래곤 터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앞발을 휘둘렀다. 바위가 그대로 떨어지는 듯한 압력과 뼈조차 녹여버릴 열기가 동시에 짓쳐 들었다.

‘이 정도야.’

뒤늦게 뻗어내지만 먼저 닿는 건 냉기의 검이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앞발이 힘과 속도를 받기 전에 튕겨냈다.

“크르르르!”

그 거대한 육체가 뒤로 밀려난다. 작디작은 인간에게 막힌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날카로운 눈동자에 지독한 살의가 어렸다.

“이게 다는 아니지?”

라온이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내며 들뜬 미소를 흘렸다.

“난 아직 할 게 많아.”

저 단단한 몸에 새로운 쾌검결을 박아넣을수록 검이 빨라지고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더 발전할 구석이 무궁무진했다.

“크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하늘을 올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대지에서 용암처럼 끈적한 화염이 치솟아 놈의 육체를 휘감았다.

화아아아아!

바닥에서 솟구친 어마어마한 화력의 불꽃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전신을 뒤덮었다. 존재의 격 자체가 크게 상승했다. 저게 지열을 먹어 치운 놈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많이도 처먹었구나.

‘그러게.’

그동안 대지의 열기를 아주 쪽쪽 빨아먹었는지 느껴지는 기파가 마스터급에 가까웠다.

“가, 가지 마! 저 괴물을 베려면 강기 정도는 써야 한다고!”

초를 치는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없다고 손을 흔들어주고, 자세를 낮췄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면 그만이야.”

라온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 화염 그 자체가 된 듯한 레드 드래곤 터틀을 향해 돌진했다.

*     *      *

레드 드래곤 터틀이 불타는 앞발을 휘두른다. 도달하기 전에 먼저 검을 그어 튕겨냈다. 뇌리에 하나의 구결이 돋아난다.

화염의 철퇴를 매단 꼬리를 향해 검을 올려 쳤다. 강대한 충격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구결이 하나 지워진다.

등껍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지금까지 그려온 쾌검식을 모조리 퍼부었다. 두 개의 구결이 사라지고, 네 개의 구결이 어우러진다.

불과 얼음의 부딪침에 수증기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눈으로 보고 움직여서는 늦는다. 집중하는 건 감각. 만화공을 감각의 바다처럼 운용하며 냉기의 칼날을 뻗어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집중력이 돋아난다. 나와 적의 호흡. 그 모든 흐름이 피부에 와닿았다.

불꽃을 베고, 철퇴를 베고, 등껍질을 베었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검이 빨라지고, 냉기가 짙어진다. 구결이 뒤섞이고 어우러져 이제 무엇을 펼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크르르륵….

태양조차 가렸던 레드 드래곤 터틀은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도 작고 얇은 검에 연신 밀려났다. 본능만을 담은 괴수의 눈동자에 두려움과 공포가 어렸다.

“크아아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를 터트리며 온 대지에 불꽃을 일으켰다. 목을 뒤로 젖혔다가 뻗으며 쌓아둔 화염의 숨결을 모조리 토해냈다.

화아아아아!

지금까지가 장난이었다는 듯 시야 전체가 요동치는 화염으로 가득 찼다.

찌이잉!

불의 고리가 공명하며 세상이 느리게 흐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쾌검의 구결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뇌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세상을 가르는 하나의 선. 그 무엇보다 빠르고, 그 누구보다 먼저 닿을 수 있는 극쾌의 일섬이었다.

깨닫기 전에 먼저 손이 나아간다. 작렬하는 불꽃의 폭풍 앞에 은빛 궤적이 솟아올랐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1형 서리연.

라온의 검에서 명멸하는 푸른빛이 시뻘건 세상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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