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70화 (170/653)

제170화

라온은 바스러진 금결석 조각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방금은 만화공과 글래시아만 움직인 게 아니야.’

직접 움직인 두 가지 기운만이 아니라, 허리 뒤편에 매고 있는 진혼검의 요기까지 금결석에 스며들었다.

그 세 가지 기운이 금결석 내부에 흘러갔을 때 마지막으로 움직인 건 불의 고리.

심장을 휘도는 여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만화공과 글래시아 그리고 요기를 합일시키려 했고, 그 강대한 힘을 견디지 못해 금결석이 깨져버린 것이다.

“으음….”

발칸은 번쩍이는 구슬을 주우며 손을 떨었다.

“내 평생에 금결이 스스로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그의 오색으로 번쩍이는 금결을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렇게 당황하는 발칸은 처음 보았다.

“이게 금결이군요.”

라온은 발칸이 쥔 구슬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괜히 금속의 왕이 아닌지 반짝이는 구슬에서 신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그래. 이 녀석이 모든 기운을 증폭시킨다는 금결이다. 이게 이렇게 빛난다는 건 네 기운이 마음에 들었….”

“으허헉!”

발칸이 금결을 내밀며 말을 할 때 옆에 눕혀놓았던 하랜이 벌떡 일어나서 기어왔다.

“내, 냉기와 열기를 동시에 사용하다니 너 대체 뭐야! 금결석은 어떻게 부순 거고!”

그는 잘게 쪼개진 금결석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기절한 줄 알았는데.”

맞은 곳이 아프다고 발버둥 치길래 잠시 기절시켜놨는데, 하필 금결석이 깨질 때 일어났던 것 같다.

“영감! 대체 무슨 괴물을 데리고 온 거야!”

“닥치고 앉아!”

“커헉!”

발칸이 하랜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너 어디 가서 오늘 본 거 말하고 다니면 정말 내 손으로 대가리를 깨버릴 거다.”

“아, 아니…. 아들한테 너무 살벌한….”

“시끄럽고 빨리 대답이나 해!”

“안 해!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하랜이 빽 소리를 지르며 환자 좀 패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 녀석이 멍청하지만, 입 하나는 무겁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발칸이 금결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옅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툴란 왕국의 왕자와 기사들을 홀로 막아섰던 걸 보면 나름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긴 했다.

“남의 약점을 잡는 치사한 짓은 안 해!”

하랜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픈지 뒤통수를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그럼 계속하지. 조금 전 넌 냉기와 열기 그리고 또 하나의 기운을 움직였지?”

“예. 다만 제가 움직인 건 아니고….”

라온이 허리 뒤편에 차고 있는 진혼검을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요검인가….”

발칸은 한 번 본 것만으로 진혼검이 요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쿠베러드 장인께서 만드신 검입니다.”

“뭐? 그놈이 요검을 만들었다고?”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진혼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꽉 막힌 녀석이 어떻게 요검을 만들다니….”

“사정이 있었습니다. 대륙 남부에 있는 시렌 마을에서….”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쿠베러드가 진혼검을 만들었던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랬군. 그렇다면 이해가 돼.”

발칸은 이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검은 자고 있는 건가?”

“제가 부탁하거나 백혈교를 만나지 않는 이상 조용히 있습니다.”

오늘 스스로 움직인 걸 제외하면 진혼검은 잠이 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백혈교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미물이 힘을 모아 봤자다. 본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바로 짓누를 정도의 저급한 격밖에 되지 않아.

라스는 진혼검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우우웅!

진혼검이 웃기지 말라는 듯 검신을 떨며 요기를 일으켰다.

-흥!

라스는 코웃음을 치며 진혼검의 요기를 냉기로 짓눌러 버렸다.

-이게 바로 격의 차이이니라. 본왕에게 부탁한다면 복수를 대신 이루어 주마.

‘힘에서 밀리면 격이 낮은 거야?’

-당연하다. 힘이 곧 격이자, 존재의 급이니라.

‘그럼 너도 나보다 격이 낮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본왕이 어째서 인간 따위에게!

‘너 항상 나한테 밀려서 찌그러지잖아.’

-어억….

할 말이 없는지 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급 낮은 마왕님. 쭈구려 계십쇼.’

라온은 진혼검을 쓰다듬어주며 라스을 굽어보았다.

-이, 이 자식!

라스는 참지 못하고 냉기와 분노를 일으켜 마나 회로를 밀고 들어왔다.

고오오오!

라온은 그 강대한 공격을 불의 고리와 만화공, 글래시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며 진혼검을 검집에 넣었다.

“요검은 ‘요사하다’라는 기질을 담고 있는 검이다. 다만 그 사용에 따라 요검은 신검이 될 수도 있고, 마검이 될 수도 있지.”

“결국 제게 달렸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 검에 어린 원한은 내게도 보일 정도로 짙다. 그 기운에 먹히지 않고, 이름대로 진혼을 이루고 본래의 길로 갈 수 있게 네가 도와주거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진혼검을 꽉 잡아준 뒤 허리에 찼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게다.”

발칸이 부드럽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흥, 누가 보면 저쪽이 아들인 줄 알겠네.”

하랜이 팔짱을 낀 채 입을 삐죽였다.

“시끄러!”

“으윽!”

발칸이 눈을 부라리자, 하랜이 어깨를 움츠린 채 옆으로 물러났다.

“라온. 이걸 한 번 만져보겠느냐.”

발칸이 손에 쥐고 있던 금결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와 달리 오색 빛은 없었고 시꺼먼 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금결을 손에 쥐었다.

우우우웅!

손을 데자마자 금결에서 다섯 가지 빛이 번쩍이면서 검명처럼 청명한 소리와 떨림을 일으켰다.

“허억!”

“허, 역시….”

하랜이 경악하여 손을 떨었고, 발칸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이러는 거죠?”

“금결이 네 기운에 빠져든 것이다. 널 주인으로 삼고 싶다는 뜻이지.”

“설마 자아가 있는 겁니까?”

“자아까지는 아니다. 꽃이 태양을 향해 잎을 벌리듯 본능적인 거다.”

“음….”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금결을 보았다. 지금 라스를 막아내기 위해 내부에 세 가지 기운을 휘돌리고 있는데, 금결은 그 기운들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 빛과 떨림을 일으켰다.

“이걸 제 검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값은 얼마라도….”

“필요 없다. 이 녀석아.”

발칼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미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니, 네게 주는 건 상관없어. 다만 양이 좀 부족하다.”

“양….”

그의 말이 맞다. 손 하나로 쥘 수 있는 크기의 구슬이었으니, 단검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검을 만들기는커녕 네 기운에 맞는 금속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에도 적은 양이지.”

“조화라고 하신다면….”

“너는 냉기와 열기를 모두 사용하지 않느냐. 그 두 기운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금속을 섞고, 그 사이를 금결로 마무리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열기 쪽은 화인철이 있고, 냉기 쪽은 은형철이 있지만, 그 둘을 접합시킬 금결이 모자라.”

발칸이 아쉽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형철 말고, 이거 써도 돼요!”

조용히 있던 루난이 가슴에 안고 있던 냉혈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제 검을 만들고도 남은 건 전부 라온에게 줄게요.”

“저, 정말인가? 이건 냉혈 중에서도 상급인데….”

“괜찮아요,”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혈을 주겠다고 말했다.

“본인이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발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온을 보았다. 무슨 관계냐고 묻는듯한 표정이었다.

“동료입니다.”

라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커흠, 그럼 금결과 지열만이 남았군.”

발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폈다.

“일단 금결은 내가 한 번 알아보마. 너희는 스켈레이 산에 가서 지열이 낮아진 이유를 보고와 다오.”

“알겠습니다. 그럼 안내인 한 명만….”

“거기 있잖느냐. 할 일 없는 놈이.”

그가 기어서 밖으로 나가려던 하랜을 가리켰다.

“억!”

“그놈이 어려서부터 빨빨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녀서 지리 하나는 잘 알고 있다. 데리고 가라.”

“아, 내가 왜 가요! 지금 굉장한 영감이 떠올라서 일을 하려고….”

“씁.”

“가, 가겠습니다!”

하랜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응.”

라온은 루난과 함께 공방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조심해서 다녀와라.”

“예.”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이 자식아! 언제까지 무시할 것이냐!

‘무시 안 했어.’

온몸을 찔러오는 냉기와 가슴을 울컥이게 만드는 분노를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세 가지 기운을 휘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좋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네놈에게 본왕의 격이 얼마나 드높은지 알려주겠노라!

‘소용없어.’

라스가 가진 기운을 모조리 일으켜서 마나회로에 만든 벽을 공격했지만,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더 견고하게 가다듬어 모조리 차단했다.

쿠구구구!

신체 내부에서 수 싸움과 힘 싸움이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라스는 그중 하나도 이기지 못했다.

-크으윽! 본왕은 포기하지 않는….

녀석이 남은 기운까지 폭발시키려 할 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감각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대범한 모습으로 고통을 견뎌내셨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라스의 패배를 선언하는 심판의 등장이었다.

-또? 이런 빌어먹으으으을!

라스가 까무러치며 뒤로 자빠졌다.

‘격이 낮으면 쭈구려 계시라구요.’

라온은 팔찌 위에 널브러진 라스를 보며 차게 웃었다.

*     *      *

“흐흐흥.”

리메르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주전 알현실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평소와 달리 글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안에서 로엔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은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예? 그 양반 외출하면 죽는 병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리메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허우적댔다.

“저도 직접 움직이신 건 오랜만에 봅니다.”

로엔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가셨는데요?”

“목적지는 밝히지 않으시고, 잠시 나갔다가 저녁쯤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보내면 안 되죠! 가주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구나.”

리메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글렌을 건드릴 사람도 없고, 만약 건드렸다간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천검대주와 함께 움직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그러면야.”

천검대주는 자신과 로엔처럼 글렌과 처음부터 함께 한 무인이자, 초강자다. 그녀와 함께 갔다면 믿을 수 있었다.

“가주님은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이런저런 보고를 하려고 왔죠. 라온과 루난이 떠났고, 버렌은 틀어박혀 있고, 마르타는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고….”

“그게 다라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리메르가 돌아가려던 로엔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다, 단주 월급을….”

“그건 미리 지급되었을 텐데요.”

“가불로 주셨으면. 아니면 돈을 조금만 빌려주셔도 됩니다!”

“음, 사실 가주님께서 전언을 하나 남기고 가셨습니다.”

로엔이 빙긋 웃으며 리메르의 손을 뗐다.

“전언이요?”

“혹시라도 리메르 님이 가불 이야기를 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직접 찾아가서 ‘따스한 대화’를 하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대, 대화….”

리메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말이 대화지. 분명 주먹이 먼저 날아올 게 뻔했다.

“로엔 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비밀로 해주실 수는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비밀로 해드릴 수 있죠, 하지만….”

로엔이 슬쩍 위를 가리켰다.

“저분들은 괜찮을까요?”

“아….”

리메르가 천장에 숨어 있는 천검대 검사들을 살펴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천검대는 글렌의 말만 듣는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맞는 건 나중. 재미는 현재이니. 저는 나중의 대화를 선택하겠습니다.”

리메르는 물러나지 않고, 손을 뻗었다.

“흐음, 제가 가불을 해드려도 그분에게 따는 건 불가능하실 텐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무인 아니겠습니까!”

“후후.”

로엔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옅게 웃으며 리메르의 손에 금화 주머니를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승전보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리메르는 몸을 돌리고 보법까지 사용하여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사신이 보이는군.”

로엔은 멀어지는 리메르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왠지 사신의 그림자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로엔이 다시 알현실의 문을 열며 웃음기가 섞인 음성을 흘렸다.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으려나.”

*     *      *

하랜은 라온과 루난을 이끌고 스켈레이 산을 올랐다.

“조용히 올라오십시오. 큰 소리가 들리면 주변의 몬스터가 몰려올 테니까.”

몬스터가 오지 않는 지리는 훤하게 꿰고 있지만, 소리에 민감한 녀석들이 있어서 조용히 올라가야 했다.

‘그건 그렇고….’

슬쩍 뒤를 돌아 라온을 보았다.

‘금결이 직접 선택한 검사라니.’

금속 중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생명 없는 철일 뿐이다. 어떠한 혼도 깃들지 않은 철 조각이 직접 주인을 고르고 싶다고 진동을 일으킨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음, 그건 어떻게 할 거요?”

대장장이의 전설 같은 광경을 보았기 때문일까. 한참 어린 녀석이지만 이젠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거라뇨?”

라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내기한 거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한 거니까.”

“그,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하거나 오래 걸리는 건….”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무엇이든’이죠.”

“이익,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소! 내기 한 번으로 목줄을….”

하랜이 고개를 흔들려고 할 때 라온이 검을 뽑았다.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 잠깐! 거절 좀 했다고 칼을 휘두르는 게 어디 있어! 다 할게! 다 한다고… 으헉!”

손으로 앞을 막고, 눈을 감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머리 위로 끈적한 흙탕물 같은 것이 몇 방울 떨어졌을 뿐이다.

“뭐….”

눈을 뜨니, 라온의 검에 녹색 핏물이 흐르고 있었고, 옆에는 거대한 파리 형태의 괴물 세 마리가 반으로 갈라진 채 죽어 있었다.

“레, 레드 플라이….”

사막이나 화산지대처럼 열기가 깃든 땅에 사는 곤충형 몬스터로 생명체의 체액을 빨아먹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하랜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 있던 레드 플라이를 막아주었던 거였다.

“안내인이 죽으면 귀찮아지니까요.”

라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말을 흘리고선 미소를 지었다.

‘무. 무서운 놈이야.’

방금 그 한 수로 목숨을 구해주었음은 물론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날렸다. 17살이 할 수 있는 심리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하랜이 레드 플라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이쪽에는 오지 않는데….”

지금 가는 길은 10여 년 넘게 몬스터가 다니지 않던 곳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3마리가 함께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다.

“지열에 변화가 생겼듯이 몬스터들의 생태에도 변화가 생겼을 겁니다.”

뒤에 있던 라온이 앞으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곳의 지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지리는 모르지만, 기운은 느낄 수 있으니까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거 같습니다. 꽤 심각하긴 하네요.”

그는 스켈레이 산 위쪽을 올려보고서 눈매를 좁혔다.

“루난. 뒤를 지켜줘.”

“응.”

인형이라고도 생각될 정도로 조용하던 은발의 검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라온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말도 하지 않았고, 지도를 보여주지도 않았건만, 이 복잡한 곳에서 그는 화산의 열기가 내려오는 지맥을 똑바로 따라갔다.

‘허.’

하랜이 헛바람을 흘렸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느꼈다고?’

이곳에서 평생을 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처음 온 녀석이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았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거, 거짓말이겠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라온의 발걸음에는 자신이 넘쳤다.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산을 똑바로 올라갔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다.

라온은 주변의 모든 기척을 느끼는 것이기라도 한지, 몬스터가 나타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검에 목을 갈랐다.

흉폭하기로 이름 높은 지카 오크가 도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고, 불을 내뿜는 플레임 스네이크 역시 몸통이 여덟 조각으로 갈라져 낙엽처럼 떨어졌다.

뒤에 있는 루난이라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열기의 독을 가지고 있는 그레이 스콜피온 다섯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강렬한 냉기를 뿌려 단숨에 얼려버렸다.

‘17살에 이 수준이라니. 이게 진짜 지그하르트인가?’

하랜이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처럼 나사가 빠진 인간만 보다가 어리지만 제대로 된 지그하르트의 무인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영감탱이가 왜 제대로 봐두라고 한 이유를 알 거 같네.’

아버지가 라온과 루난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지켜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어린 녀석들의 무력을 보자, 당장 망치를 잡고 아무 쇠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하랜은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도박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망치를 쥐고 있는 것처럼 손아귀를 꼼지락거렸다.

*     *      *

라온은 산을 오르고, 몬스터를 베면서도 계속 쾌검의 구결을 떠올렸다.

‘뭔가가 모자라.’

연성검술, 광아검, 만화공의 검술, 조금 전에 만났던 툴란 왕국의 왕자 타르칸의 검술에서도 쾌의 구결을 뽑아내 머리에 그렸지만, 원하는 속도의 쾌검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겠어.’

구결과 검술의 형태를 살짝만 더 다듬으면 극한의 쾌검식이 탄생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크라락!”

우측에서 지카 오크 네 마리가 나타나 거대한 도끼를 세운 채 돌진해왔다. 인간을 단숨에 찢어버리겠다는 살기로 가득했다.

촤아악!

라온은 손목을 살짝 올린 채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검극에서 피어난 기운이 공간을 갈라버릴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라라라….”

오크들은 자신에게 닿지도 못하고 땅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표정을 보면 본인들이 칼에 베인 것도 모른 채 죽은 것 같았다.

감각이 뛰어난 지카 오크가 베인 줄도 모를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지만, 라온의 눈빛은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방향이 틀어졌어.’

빠름만을 생각했다가는 정확한 위치를 베지 못하고, 반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 빠름과 정확성은 자석처럼 함께 움직여야 했다.

라온은 쾌검의 구결을 하나하나 조합하고 엮어내며 지열의 흐름을 따라 산을 올랐다.

그렇게 반나절 가까이 산을 오르고 나서야 아래에서 느꼈던 폭발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웅크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너무 많이 올라갔다니까요. 항상 지맥에 문제가 있던 곳은 좀 더 아래….”

“조용히.”

평소 문제가 있다는 곳으로 가자는 하랜의 입을 막고 앞을 가리켰다.

쿠구구구.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산등성이 중앙에 날카로운 바위를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작은 바위 언덕이 있었다. 언덕은 호흡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꿀렁거렸다.

“음? 여기에 저런 언덕이 있었던가?”

하랜은 이상하다며 턱수염을 긁적였다.

“언덕이 아니니까.”

라온은 호흡을 고르며 검을 뽑았다. 살기를 일으킨 순간 언덕이 몸을 일으키며 강대한 불꽃의 폭풍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산등성이 전체로 퍼져나간 막대한 불꽃의 파동 위로 무언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개의 뿔이 달린 드래곤의 머리에 거북이의 등껍질을 두른 거대한 화마의 존재였다.

고오오오!

저물어 가는 태양을 가린 채 시뻘건 안광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이미 몬스터의 그것을 한참 뛰어넘어 있었다.

“레, 레드 드래곤 터틀!”

거대한 괴물과 눈을 마주친 하랜이 본이도 모르게 뒤로 자빠졌다.

“저, 저렇게 큰 건 처음인데. 무슨 몬스터가 산만하냐고!”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입술을 덜덜 떨었다.

“산만 한 레드 드래곤 터틀이라….”

검을 어깨에 걸친 라온의 두 눈에 푸른 서기가 번쩍였다.

“얻을 게 많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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