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라온과 루난은 발칸의 안내를 받아 그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계속 작업을 해왔는지 내부는 용광로에서 뿜어진 열기로 가득했다.
“거기 앉아라.”
발칸이 공방 구석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영광으로 알아. 아버지의 공방에 들어간 외부인은 2년 만이니까.”
하랜이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팔짱을 꼈다.
“더럽히지 말고, 시끄럽게 굴지도 말고 조용히 있다가… 억!”
발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랜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악! 아버지! 왜 이래요!”
“네가 제일 시끄럽다. 손님들이 있는데 네놈이 거길 왜 앉는단 말이냐! 가서 차나 가지고 와!”
그 말과 함께 하랜의 머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끄아아악! 말로 좀 해요!”
“네가 말로 들어 먹을 놈이냐.”
“어휴! 이놈의 집구석 나가든가 해야지.”
하랜이 얻어맞은 머리를 마구 비비며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저놈이 실례했다면 내가 사과하마.”
발칸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본래 저 정도 망나니는 아니었는데, 도박쟁이 한 놈을 만나고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도박쟁이요?”
“그래. 너도 잘 아는 그 엘프 놈 말이다.”
“응?”
“예?”
잘 아는 엘프라는 말에 라온과 루난이 동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도박까지 나왔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었다.
“저, 저희 단장이 무슨 사고를 쳤기에….”
“단장? 그놈이 이제 단장이 되었다는 것이냐.”
“예.”
“하아. 말세로구나.”
“대체 리메르 단장이 뭘 하고 간 겁니까.”
“리메르. 그놈이….”
발칸이 허공을 올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놈이 내 멍청한 아들 녀석과 도박해서 모조리 졌다!”
“…….”
라온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도박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졌다는데 왜 화를 낸다는 말인가.
“으음?”
루난도 드물게 이마를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멍청이가 리메르를 이긴 후에 본인에게 도박 재능이 있는 줄 알고, 망치를 내팽개치고 도박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가진 재산을 모조리 날려 먹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망나니로 살고 있지.”
“아!”
이제야 발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하랜이 리메르와의 도박에서 전부 이긴 뒤 본인에게 도박 재능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도박에 빠졌다는 뜻이었다.
-즉, 호구 중의 호구를 이기고 본인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다는 말이로군.
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솔직히 리메르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가 관계되면 항상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다. 불운과 불행을 이끌고 다닌다고 할까.
“리메르가 몇 판만 졌어도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15판을 내리 졌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놓고 하랜을 데리고 다니며 좋지 않은 건 다 가르치고 다녔어!”
발칸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라온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아, 그래. 뭐,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 됐고.”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라온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도박쟁이에게 듣기는 했지만 아주 제대로 컸군.”
“단장님이 제 이야기도 했습니까?”
“그 망할 놈이 네 이야기를 해줄 테니, 돈 좀 빌려달라고 했었다.”
“…….”
리메르의 일대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제, 제가 죄송합니다. 그 인간이 얼마나 빌렸죠?”
라온은 당장 갚겠다는 듯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냈다.
“되었다. 그 정도는 상관없어. 다만 듣던 것 이상이구나. 쌓아 올린 검기가 이미 벽을 반 이상 넘었어. 5년 만이 이 정도라니, 기껍기 그지없다.”
발칸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리메르를 이야기할 때는 죽일 듯 인상을 찌푸렸고, 라온을 이야기할 때는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이쪽의 검사는 누구지?”
발칸의 시선이 루난을 향했다.
“제 동료입니다. 검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루난 슬리온이에요.”
루난은 바로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였다.
“슬리온 가문답게 검기가 날카롭다 못해 차가울 정도로군. 지금 지그하르트에는 인재밖에 없는 건가.”
발칸은 루난의 기운을 읽고서 탄성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미르탄의 촌장을 소개해주지. 그 친구라면 네가 어떤 검을 원하든 완벽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게다.”
“고맙습니다.”
루난이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바로 제작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싶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라고 하신다면….”
“지금 미르탄 마을 주변의 지열이 평소보다 많이 내려간 상태다. 보통 일주일이면 원상태로 돌아오는데, 2주가 지난 지금도 계속 지열이 낮은 상태지.”
발칸이 발로 땅을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였군.’
미르탄 마을은 북쪽에 있는데도 꽤 덥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지그하르트보다 조금 열기가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열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지열이 낮으면 금탄을 사용한다고 해도 원하는 온도를 맞추기 힘들어. 아무래도 스켈레이 산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이번 주까지도 지열이 돌아오지 않으면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잖아. 그냥 부르라고.”
하랜이 테이블 가운데에 찻잔과 주전자를 쿵 내려놓으며 옆에 앉았다.
“그럼 제가 다녀올까요?”
라온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스켈레이 산을 보며 말했다.
“음, 그러면….”
“뭐? 아서라!”
발칸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하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여검사라면 모를까. 너 같은 녀석은 가자마자 죽어. 거긴 열기를 먹고 사는 몬스터들이 가득하니… 커억!”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발칸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뱉으며 하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네가 가줄 수 있겠느냐?”
“저와 루난이면 가문에서 지원을 나온 것과 별 차이 없을 겁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역시 익스퍼트이니, 산의 몬스터를 정리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 그만 좀 때려요! 이 녀석이 대체 누군데요!”
“이 아이가 지그하르트의 미래다.”
“예? 에엑?”
머리를 문지르던 하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그하르트의 미래? 자, 잠깐만 그럼 영감이 말했던 약속이….”
“그래. 너희들이 제멋대로 가주님이라고 착각했지만, 내가 약속을 한 검사는 이 녀석이다.”
“어? 아,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설마 이 어린 녀석이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라고?”
“네놈이 2년 동안 도박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발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익!”
하랜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안내인 정도만….”
“아,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발칸이 손을 들어 일어서려는 라온을 막아섰다.
“너희에게 맞는 재료부터 알아놔야 작업이 빠르거든.”
“재료요?”
“검술에도 종류가 많듯이 쇳덩이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너희들의 오러와 기질에 맞는 쇠를 찾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지. 하랜! 금결석을 가져와라!”
“내가 하인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으윽!”
차를 홀짝이던 하랜은 발칸의 부리부리한 눈을 보자마자,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손자국이 찍힌 금이 간 돌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이 돌 속에는 금결이라는 이름의 철이 들어 있다. 세상 그 어떤 기운이라도 증폭시켜주는 금속의 왕이지.”
“금결….”
들어본 적 있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전설급의 급속이 바로 금결이었다.
“금결로 만든 이 금결석은 오러를 먹고, 검사에게 가장 적합한 금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한 번 해보겠느냐.”
“금이 가 있는데 오러를 넣으면 깨지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안 깨지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금결석에 손을 올리려다가 우측을 보았다. 흥미가 있는지 루난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루난. 너부터 해볼래?”
“응.”
금결석을 밀어주니 루난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손을 얹고, 그 틈으로 오러를 밀어 넣어라.”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의 중앙에 손을 얹은 뒤 오러를 집어넣었다.
우우웅!
금결석의 갈라진 틈에서 옅은 은빛이 몽글몽글 새어 나오고, 돌 위로 냉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음.”
발칸은 돌을 툭툭 만져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러도 특별하군. 이렇게 순수한 냉기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는 루난에서 손을 떼도 된다고 말하며 턱을 긁적였다.
“가장 좋은 건 냉혈. 그게 안 된다면 은형철이라고 냉기를 잘 받아들이는….”
“냉혈 있어요.”
루난이 품에 꼭 껴안고 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호오!”
발칸은 루난에게 받은 상자를 열어보고 탄성을 흘렸다.
“이 크기와 강도. 완벽하군. 냉혈 중에서도 상급이야. 좋은 검이 나오겠구나.”
그는 냉혈을 만져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네 차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온이 금결석에 손을 얹다 말고 하랜을 보았다. 나가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왜! 잘생긴 사람 처음 봐?”
그는 눈싸움을 하자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더 노려보았다.
“너 나가라잖냐!”
발칼이 테이블 옆에 있던 나무 조각을 하랜에게 던졌다.
“아오! 진짜! 오러가 무슨 비밀이라고!”
“시끄러우니까. 문 앞이나 지키고 있어!”
“망할 영감탱이!”
하랜은 투덜거리면서도 공방 밖으로 나가 문 앞에 섰다. 일단 시키면 말은 잘 듣는 성격인 것 같았다.
“저리 멍청하게 보여도 본래 망치질에 열정과 재능도 있던 놈이다. 네 검을 만들고 나면 저놈의 머리를 깨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 생각이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놀아 놓고, 루난의 검기를 알아차렸다는 건 보통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다. 발칸의 아들답게 하랜에겐 확실한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금결석에 손을 얹었다. 발칸은 자신에게 불과 냉기의 오러가 동시에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테니, 그에게는 보여도 상관없었다.
철그렁.
금결석에 두 가지 오러를 주입하려고 할 때 밖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말 문이 열렸잖아….”
“우리가 열흘 동안 찾아와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더니, 어린놈에게 문을 열었다는 게 사실이오?”
“이건 우리를 무시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제툴 왕국이 우습게 보이는 거냐!”
분노가 실린 목소리와 갑옷의 쇳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이곳에 오면서 계속 들었던 제툴 왕국의 기사들인 것 같았다.
“아, 왜들이래. 손님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 영감 맘이지!”
“닥쳐라! 제툴 왕국을 무시해놓고, 그냥 조용히 넘어갈 거라 생각한 것이냐!”
“무시가 아니라, 예약한 손님이 온 거라니까! 이거 영업방해니까. 돌아들 가십쇼!”
하랜은 의외로 도망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후우, 귀찮아서 안 만난 건데 일이 이렇게 되는군.”
“커헉!”
발칸이 한숨을 내쉬고 나가려고 할 때 하랜이 비명을 토해내며 안쪽으로 날아왔다.
“크윽, 저 자식들이….”
하랜이 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비틀거리고 다시 자빠졌다. 강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지만, 턱과 배를 얻어맞아 중심을 못 잡았다.
“쯧, 잠시 나갔다가 오마.”
“저도 가겠습니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린 발칸과 함께 공방 밖으로 나갔다. 왼쪽 가슴에 세검의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살벌한 눈으로 이쪽을 본다. 예상대로 제툴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설마 이 애송이라고?”
가운데 서 있는 20대 중반의 청발 청년이 이를 바득 갈았다. 느껴지는 기파가 상당하다. 익스퍼트 중상급에 오른 강자였다.
“발칸 장인! 너무하십니다! 저희에겐 얼굴조차 보여주시지 않고, 이런 어린 녀석을 선택하셨다는 겁니까!”
“선택이 아니라, 약속이오. 나는 5년 전에 이 아이에게 검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오, 오 년 전? 그때는 아예 꼬마였을 거 아닙니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쯧.
라온은 얼굴이 붉어진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곱게 컸군.’
저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열흘 동안 찾아와도 얼굴 한번 못 본 대륙 장인이 어린 검사에게 문을 열었다고 하면 열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속으로 삼켜야 할 일. 화가 난다고 찾아와서 지랄을 떨면 본인만이 아니라, 왕국의 이름에도 먹칠하는 것이 된다.
제툴이라는 이름까지 꺼내고 저러는 걸 보면 어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체 저 애송이의 무얼 보고 검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신 겁니까!”
“듣는 사람 짜증나게 왜 자꾸 애송이 거려.”
라온이 눈썹을 내리며 앞으로 나왔다.
“어린놈은 빠져라! 네놈이 낄 자리가 아니니까!”
“빠질 사람은 너겠지.”
“뭐?”
“주인이 예약된 손님의 주문을 받겠다는데, 아무 상관 없는 너희들이 왜 감 내놔라, 배 내놔라하는 거냐고.”
“그, 그건….”
“주인의 아들까지 후려 패면서 무엇을 얻겠다고 여기에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닥쳐라! 발칸 장인의 검은 지고의 예술. 너 같은 버러지가 가져가야 할 물건이 아니다!”
중앙의 청년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왔다.
“네 이름을 밝혀라!”
“그럼 네가 누구인지부터 소개해야지.”
“무엄하다!”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청년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피워냈다.
“여긴 제툴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영역이다. 줄무늬 자랑을 하려면 다른데 가서 해.”
“크윽!”
“이놈이!”
“그만.”
청년이 검을 뽑으려는 기사들을 만류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지그하르트 소속이겠군. 나는 제툴 왕국의 왕자 타르칸. 제툴의 청색매다!”
타르칸이 턱을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그하르트도 지그하르트 나름. 난 네게서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
“흐음.”
라온이 타르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왕자였군.’
20대 중반에 익스퍼트 중상급에 오른 왕자이니 머리에 열이 차서 달려드는 것도 이해는 갔다.
다만 아주 약간 이해가 간다는 거지 봐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툴은 쾌검과 정검으로 유명했지.’
갑옷에 그려진 세검이 괜히 박힌 게 아니듯 제툴은 빠르고, 정확한 검술로 이름 높았다.
‘검술 좀 뽑아먹어 볼까.’
이렇게 된 거 저 왕자를 도발해서 제툴 왕국 검술의 묘리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놈도 호구가 되는 건가….
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은 라온을 보고 어깨를 떨었다.
“왕자? 하는 짓이 더러워서 건달인 줄 알았는데, 제툴 왕국은 후계자를 그따위로 키우나 보네?”
라온은 왕자를 모욕하듯 빙글거렸다.
“다, 닥치고 네 이름이나 말해!”
“라온 지그하르트다.”
“라온? 못 들어 봤는데. 역시나 방계인가.”
“그런데?”
“하, 직계도 아닌 방계, 그것도 명성 하나 없는 놈이 어찌 발칸 장인의 검을 받는다는 거냐!”
지그하르트는 외부에 정보를 퍼뜨리는 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분 성의 명성도 이름이 아니라, 어린 검귀나 화벽이라는 이명으로 퍼져서 이들이 자신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직접 시험해보던가.”
“뭐?”
“내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시험해보라고.”
“바라던 바다!”
타르칸이 잘 되었다는 듯 검을 뽑았다. 일반적인 장검보다 얇고 날카로운 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가 이긴다면 여기서 당장 물러나라.”
“그럼 내가 이긴다면 무릎을 꿇고 건방 떤 걸 사과하도록.”
“얼마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덤벼. 선수를 양보하지.”
“이 자식!”
라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타르칸이 눈을 부라리며 땅을 박찼다. 가슴으로 쏘아지는 섬전 같은 검격. 검술을 허투루 닦은 건 아닌지 화를 내면서도 첫 공격이 깔끔했다.
캬앙!
라온은 불의 고리를 휘돌려 다가오는 타르칸의 검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튕겨냈다.
“흥. 한수는 있다는 건가.”
타르칸이 코웃음을 치며 무릎을 살짝 굽힌 뒤 연속으로 검을 뿜어냈다. 빗줄기가 대지를 스치듯 빠르면서도 유기적인 흐름을 휘감겨 있었다.
컁! 캬앙! 캬갸걍!
라온은 공명하는 여섯 개의 불의 고리와 극한으로 단련한 안력으로 타르칸이 이루어내는 쾌의 검격을 낱낱이 분해했다.
‘빠름에 정확함을 섞었어. 오직 급소만을 노리는 상승의 검술.’
타르칸이 뿜어내는 검격은 그저 빠른게 다가 아니었다. 작은 급소에 칼날을 박아 넣는 정확성까지 이뤄내고 있었다. 폭급한 성격과 달리 명문의 검술을 제대로 익혔다.
“어디까지 막나 보자!”
제 실력을 발휘하기로 한 건지 타르칸에게서 피어나오는 기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검날에서 뿜어진 기운이 빛살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웅!
위력만이 아니라, 검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허공이 갈라지는 듯한 재빠른 검격이었다.
“후우우….”
라온은 끝없이 쏟아지는 타르칸의 검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아내며 새롭게 만드는 쾌검의 구결을 다듬었다. 이 정도로 빠름만을 추구하는 검술은 보지 못했기에 큰 공부가 되고 있었다.
“왕자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쳐서 검도 제대로 못 들고 있어요!”
“끝을 내십시오!”
제툴 왕국의 기사들이 왕자를 응원하며 미소를 지었다. 라온이 타르칸의 검을 피부에 닿기 직전까지 살펴보다가 막았기에 옆에서는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싸우는 타르칸은 죽을 맛이었다.
‘이, 이놈 대체 뭐야!’
처음에는 거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서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앞에서 검을 맞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슨 철벽을 때리는 듯 놈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렸고, 손목이 부러질 듯 흔들렸다.
‘거기다….’
처음에는 쾌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자신보다 더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착각이겠지만, 이놈은 이 결투를 통해 발전하는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겠어.’
타르칸이 이를 악물고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검과 팔에 휘감았다. 검을 휘두르는 부위에 오러를 집중한 뒤에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조르킨 검술의 절기, 일주살이었다.
치이이잉!
자신의 눈으로도 보기 힘든 쾌속의 검격이 라온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이건 절대 못 막…어?’
타르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할 거라 생각했던 라온의 입술이 가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어.”
그 소름 끼치는 음성과 함께 라온의 손이 벼락처럼 치솟았다.
쩌어어엉!
라온의 검에 얻어맞은 타르칸의 검이 유리처럼 부서져 허공에 흩날렸다.
“아….”
타르칸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라온의 검이 훨씬 나중에 움직였는데 먼저 닿다니, 마스터에게서나 나올 법한 극쾌의 검격이었다.
“잘 배웠다.”
“배, 배워? 무엇을 배웠… 커헉!”
타르칸이 턱을 떨며 고개를 내렸을 때 라온의 검이 그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빠아악!
턱과 입을 동시에 후려 맞은 타르칸이 옥수수 알갱이 같은 이빨 네 개를 뿜어내고 쓰러졌다.
“와, 왕자님!”
“이런!”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호위 기사들이 달려와 왕자를 안아 들고, 라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정당한 승부 아니었나. 왜 검을 겨누는 거지?”
“그, 그건….”
“으윽….”
기사들의 눈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왕자가 졌다는 걸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만이 있다면 지그하르트에 와서 나를 찾아라. 물론 그 전에….”
라온이 축 늘어진 타르칸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깨어나면 내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과부터 하라고 해. 그걸 잊진 않았겠지?”
“크으….”
“두고 보자….”
기사들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다가 등을 돌렸다.
‘두고 본다라….’
저들은 제툴 왕국이라는 배경을 믿겠지만 자신의 뒤에도 지그하르트라는 거대한 이름이 있다. 머리에서 열이 빠진다면 찾아올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너…. 그 왕자의 검에서 쾌검을 배운 거냐?”
발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배웠다기보다는 참고를 좀 했습니다.”
“허, 못 본 사이에 괴물이 다 되었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겁니다.”
라온이 검을 집어넣으며 옅게 웃었다.
“흠, 네 배려가 고맙다만 네가 이렇게 나설 필요는 없었다.
“예? 뭘요?”
“나와 내 멍청한 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들의 시선을 전부 네가 가져가지 않았느냐.”
“음….”
라온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발칸은 일부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반복한 걸 알고 그럴 필요 없었다고 손을 저었다.
“전에는 감정 없는 인형 같더니, 인간적인 면도 배우고 온 건가.”
발칸이 피식 웃으며 라온의 등을 두드렸다.
“들어가자. 네 녀석에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빨리 확인해보고 싶구나.”
* * *
다시 공방으로 들어간 라온이 금결석 위에 손을 얹었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운용하여 금결석의 틈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먹물을 빨아들이는 도화지처럼 돌 전체에 붉고 푸른 오러가 스며들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이 빛과 색이라면 현철과…어?”
발칸이 금결석에 다가가다가 눈을 부릅떴다.
붉은 열기와 푸른 냉기 사이로 새로운 빛이 새싹처럼 돋아나더니, 세 가지 기운이 처음부터 하나인 것처럼 나선으로 모여들어 상서로운 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뿌드드득!
깨지지 않는다는 금결석에 거미줄 같은 금이 그어지고, 금색 서기는 더욱더 짙어졌다.
콰아아앙!
결국 금결석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조각나 부서지고, 그 안에서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작은 쇠구슬 하나가 튀어나왔다.
“허억!”
발칸은 그 구슬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금결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