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68화 (168/653)

제168화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주인으로 있는 현무전의 화중정원.

수채화 빛의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가다듬은 정원의 중심에서 마르타와 데니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르타는 데니어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현무전으로 불러주셨는데, 광풍단에 들어갔으니 화내셔도 할 말이 없어요.”

그녀는 발끝을 내려보며 모은 손을 꽉 쥐었다.

“괜찮다.”

데니어는 상관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누구보다 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널 이해해주지 못하면 안 되겠지.”

“…죄송해요.”

“죄송은 됐고, 오랜만에 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고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아, 아버지.”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항상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렇게 예쁜 얼굴로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는 게냐.”

데니어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마르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윽….”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데니어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거두고 친딸처럼 키워준 사람이다. 그 앞에서만큼은 감정을 속일 수가 없었다.

“막내딸이 다른 곳에 간 건 아쉽지만, 현무전과 백혈교가 부딪칠 일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니, 네가 광풍단에 들어간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데니어가 마르타의 눈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너는 네 스스로 복수하고 싶은 게로구나.”

“네.”

마르타가 처음으로 힘 있게 대답했다.

“제 손으로 엄마를 찾고, 그놈들을… 죽이고 싶어요.”

“복수를 해도 네 생각만큼 시원하고, 기분 좋기만 하진 않을 거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래도 해야 해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그런가.”

데니어는 옅은 한숨을 뱉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 채로 뽑아 마르타에게 내밀었다.

“청운이라는 이름의 검이다. 날카로움은 말할 필요도 없고, 파마의 기운이 있어 정신을 맑게 유지해주지.”

“네? 이걸 왜….”

“네 졸업 선물이다.”

“저, 저는 현무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마르타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청운은 데니어가 가장 아끼는 검 중 하나. 이런 보물을 넘겨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비가 딸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아….”

데니어는 마르타에 손에 청운검을 건네주고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광풍단은 신규 단체이니, 기본 임무는 물론이고 이곳저곳에 많은 지원을 나가게 될 거다. 그 모든 것들이 네 격을 세워줄 경험이 될 테니, 임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거라.”

“알겠습니다.”

마르타가 손에 움켜쥔 청운검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검을 준 대가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약속 하나 하자꾸나.”

“약속이요?”

그녀가 데니어의 입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검의 대가라면 무슨 말이 나와도 받아들여야 했다.

“너나 나나 바쁘더라도 반년에 한 번씩은 꼭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하자꾸나.”

“하아, 정말….”

“대답해야지?”

“알겠어요.”

마르타가 화사한 웃음을 피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이 보았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그리고 항상 라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거라.”

데니어가 마르타에게서 손을 떼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아이의 무력과 판단력은 부대주급에 필적한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 항상 지켜보고 그가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를 생각하도록 해라.”

맞는 말이다. 라온은 15살에 녹전귀를 베고, 17살에 부단주인 호라인을 꺾었으니까. 그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가 그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마르타가 청운의 검병을 꾹 잡은 채 데니어의 눈을 보았다.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라온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지. 네 재능은 지그하르트 직계에도 밀리지 않는다만 그 아이는 그 지그하르트 직계에서도 드물디드문 수준의 재능이니까. 하지만….”

데니어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많은 경험을 겪으며 네 토대를 다져라. 라이벌이 바로 옆에 있으니, 꾸준히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네.”

마르타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에게 진 이후로 그를 매일 봐왔기에 관찰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보다가 반하지는 말고. 피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가족이잖냐.”

“아, 아버지!”

“농담이다. 농담.”

데니어는 손을 빙글 돌리고 현무전으로 들어갔다.

“끄응….”

마르타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녀의 귓불은 본인도 모르게 살짝 붉어져 있었다.

*     *      *

미르탄으로 출발한 라온과 루난은 첫째 날 밤을 이름 모를 작은 숲에서 보내고 있었다.

“루난. 여기서 쉬고 있어. 난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응.”

라온은 루난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숲속으로 들어갔다.

-식은 음식조차 맛있다니, 파인애플 소녀의 요리 솜씨는 날이 갈수록 느는구나.

라스는 파인애플과 살라미 햄이 들어간 유아 특제 햄버거를 먹고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표정을 보니 크게 만족한 것 같았다.

-다만 양이 좀 부족 하느니라. 햄최열인 이 몸에게는 한참 부족해.

‘햄최열?’

-그것도 못 알아듣다니, 유행에 뒤떨어지는구나. 햄버거를 최대 열 개까지 먹는다는 말이니라.

‘별걸 다 줄이는군.’

이젠 마왕이 아니라, 동네 꼬마 같았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나무 사이의 간격이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자리를 잡고 검을 뽑았다.

-주변을 둘러본다더니 결국 수련이냐. 지겹도다.

‘글래시아로 경계를 했으니까.’

주변 경계와 탐색은 이미 글래시아로 끝냈다. 지금은 새벽에 연습했던 이중검격을 더 다듬고 싶었다.

‘그걸 써볼까.’

이동하면서 연성검술과 광아검에서 쾌의 구결만을 따로 뽑아냈었다. 오직 빠름만을 추구하는 구결을 외우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라온의 막강한 육체 능력과 쾌의 구결만으로 엮어낸 새로운 검술이 어우러지자 밤이 녹아내린 어두운 하늘을 비틀어내는 듯한 검격이 솟구쳤다.

‘빨라.’

오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익스퍼트 하급 정도는 단숨에 목을 날릴 수 있는 속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이 수준이 아니었다.

고오오오!

라온이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검을 뒤로 젖혔다. 꽉 조여진 근육과 마나 회로를 내달리는 글래시아의 냉기를 폭발시키며 검을 그었다.

콰아아아아!

눈으로 겨우 포착할 정도의 검격이 지평선을 따라 질주하고, 맹렬하게 얼어붙는 냉기의 파도가 그 뒤를 따라 허공을 수놓았다.

단 한 수로 라온의 앞에 수평으로 흐르는 얼음의 폭포가 생겨났다. 수속성 저항력이 있어도 몸이 뜯겨 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생각보다 더하네.”

그저 새롭게 만들 쾌의 구결을 다듬었을 뿐인데, 그 속도와 위력이 오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이대로 계속 발전시킨다면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검술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기본 검술을 계속 연습해놓은 보람이 있네.’

기본 검술에는 대부분의 검술 속성이 얕게 들어가 있다. 남들이 고급 검술을 배우고 있을 때 그 얕은 물에 잠수까지 한 보람이 있었다.

‘어때?’

-크흠, 조, 조금 하는구나. 아주 조금! 본왕이 인정할 정도는 아니고, 정말 눈곱만큼!”

라스는 인정하기 싫은지 조금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 눈곱이 눈덩이가 될 정도로는 만들어봐야겠지.’

라온은 피식 웃으며 글래시아의 냉기가 동이 날 때까지 새로운 쾌검을 연습한 뒤에 루난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늦어서 미안. 새로운 검술을 좀 시험해보느라.”

“응. 알아.”

루난은 그게 뭐 별거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거 재밌어서 지루하지 않았어.”

“설마 느꼈다고?”

루난의 경지로는 아직 느낄 수 없는 거리였는데, 어떻게 알았다는지 모르겠다.

“정글에서 새로운 눈을 열었거든. 나중에 라온도 알려줄게.”

그 말을 하며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눈?’

루난이 다녀온 카탐 정글의 주민들은 오러 없이도 먼 곳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던데, 그 능력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다 했으면 아이스크림 먹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배낭에서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오오! 역시 본왕의 첫 번째 시녀!

라스가 입에서 냉기를 줄줄이 뿜어내며 아이스크림들을 쭉 살폈다.

“너부터 골라.”

“응.”

루난은 민트초코를 골라서 입에서 쏙 넣었다. 맛있는지 하얀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크흠, 미, 민트초코를 고르다니….

라스가 민트초코가 사라진 공간을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 본왕이 아이스크림 소녀라서 봐주는 것이니라. 다른 놈이었다면 당장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야!

‘웃기고 있네. 공짜로 얻어먹으면서.’

라온은 혀를 차고서 검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신상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허….”

달콤한 아이스크림 사이에 바삭한 쿠키가 박혀 있어서 서로 결이 다른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허어어….

라스는 새로운 맛에 전율을 느꼈는지 파리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이 무슨 마신의 장난인가! 인간계에 이런 맛이 남아있었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이번만큼은 라스의 호들갑이 이해되었다. 실제로 이 아이스크림은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이 좋았으니까.

“이거 이름이 뭐야?”

“쿠키앤크림.”

-쿠키앤크림이라. 그 이름은 본왕의 영혼에 새겨졌느니라! 아아, 위대한….

라스는 찬송가라도 부를 것처럼 손을 모은 채 쿠키앤크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거.”

루난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집어넣고, 연무장에 가져왔던 은색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뭔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새벽 내 쏟아진 눈을 뭉친 듯한 새하얀 쇳덩이가 상자 안을 밝혔다.

“냉혈이라는 철이야.”

루난이 냉혈을 손가락으로 툭툭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이걸로 검을 만들면 냉기를 사용하는 검사에게 큰 도움이 된대. 라온에게도 나눠줄게.”

“이걸 나눠 준다고?”

“응.”

루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보답해야 하니까.”

그러면서 조금 더 깊어진 미소를 지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걸 나눠준단다. 조건도, 이유도 없이 그저 보답하겠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시리아를 한 번 물러나게 한 대가는 넘치게 받았다. 계속 챙겨주는 루난이 고맙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렵군.’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알아갈수록 어려운 것 같다.

다만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나도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걸 찾아야겠어.’

라온은 냉혈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틀 뒤.

라온과 루난은 미르탄 마을 입구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포도덩굴처럼 좌우로 꼬여 있는 언덕길 사이로 둥글거나, 각이 지거나 혹은 기묘하게 비틀어진 공방들이 가득했다.

개성 넘치는 형태의 대장간들이 자유롭게 펼쳐진 이곳이 바로 야장들의 마을 미르탄이었다.

‘생각보다 덥지는 않네.’

미르탄은 휴화산 스켈레이 바로 밑에 세워져 있어서 북쪽에 있음에도 따스하다고 했는데, 다른 곳과 큰 차이는 없었다.

‘사람이 많군.’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리메르의 경고처럼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을 사람과 상인, 다른 곳에서 온 검사들로 마을이 가득 차 있었다.

쩌엉! 쩌어엉! 쩌정!

공방으로 꽉꽉 들어찬 언덕길을 오르자, 이곳저곳에서 망치와 풀무질, 용광로에서 불을 일으키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땀을 줄줄 흘리며 바쁘게 일하는 장인들을 보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더 열심히 살면 죽느니라.

‘난 아직 최선을 다 안 한 거 같아서.’

-네놈 말고 본왕이 죽는다. 잠을 못 자겠으니, 수련 좀 적당히 해라!

라스가 툴툴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르탄까지 오는 도중에 불침번을 서며 쾌검 연습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라온. 우리 어디로 가?”

“글쎄….”

라온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 극도로 집중한 채로 일하고 있어서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며 움직일 때 우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

고개를 돌리니, 곰방대를 물고 있는 남성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불에 그을렸는지 피부는 갈색이었지만, 장인 특유의 강직함은 없었고, 가벼운 기세만 가득했다. 이곳에 와서 본 사람 중 가장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공방을 찾나 보네?”

“그렇습니다.”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르탄 토박이인 내가 하나 추천해줄까? 재능이 넘치고, 모든 물건을 대작급으로 내놓는 명장을 아는데.”

“음….”

발칸과 약속이 된 자신과 달리 루난의 검을 만들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누구죠?”

“하랜.”

“못 들어본 이름인데….”

“아직 크게 뜨지 않았거든. 곧 난리가 날 테니. 미리 잡아두는 게 좋을 거야.”

“음, 그분은 어디에 있죠?”

“여기!”

그가 씩 웃으면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내가 바로 미래의 대륙 장인 하랜이다!”

“…….”

라온, 루난 그리고 라스까지 한심한 눈으로 하랜을 흘겨보았다.

“거기 예쁜 여검사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한 번 맡겨 보슈. 검기가 보통이 아니니, 나 정도는 되어야 그 수준에 맞춰줄 수 있을 거야.”

말이 완전 허세는 아닌지, 하랜은 기세를 드러내지 않은 루난의 실력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물론 내 실력까진 눈치채지 못했지만.’

라온은 피식 웃으며 그가 나온 공방을 살폈다. 용광로의 불은 꺼져 있었고, 바닥은 너저분했으며 천장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쯧, 됐습니다.”

혀를 차고서 루난을 데리고 나왔다.

“아, 잠깐! 저것만 보면 곤란해! 나보다 실력 좋은 사람 여기에 없다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만날 분이 당신보다 무조건 뛰어나니까요.”

“웃기고 있네! 누군데! 이름이 뭐야!”

“발칸 님입니다.”

“바, 발칸? 크하하하하!”

하랜이 배를 잡고 웃으며 땅을 굴렀다.

“그 꼰대 영감이 너희를 만나주기나 할 거 같아? 그 인간은 4년 전부터 지그하르트의 가주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너희들은 그 영감 얼굴도 못 봐!”

그는 문전박대 수준도 안 될 거라고 떠들어댔다.

“그냥 나한테 맡겨. 돈이 좀 비싸긴 한데, 정말 좋은 물건을 만들어 줄 테니까. 이 기회를 놓쳤다간 후회할걸?”

“됐으니, 발칸 님의 공방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려주시죠.”

“말을 못 알아듣네. 안 된다고. 제툴 왕국의 왕족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도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영감이 너희들에게 잘도 문을 열어주겠다.”

그는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

“저희가 발칸 님의 공방에 들어가면 제가 이기는 거고, 말씀대로 얼굴도 못 본다면 당신이 이기는 걸로 하시죠. 조건은 상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는 걸로”

“내기할 필요도 없지만 좋아!”

발칸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놈 하나가 낚싯바늘을 물었군.

라스는 또 희생양이 늘었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조건은 간단해. 저 여검사의 검을 내가 만들겠다. 재료도, 가격도 내 마음대로 해서!”

하랜이 멍하니 선 루난을 가리켰다. 히죽이며 손을 비비는 모양새가 딱 삼류 양아치 같았다.

“흠….”

이런 곳에서 루난의 검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질 수가 없는 내기였다.

“루난.”

“괜찮아.”

루난은 이유도 듣지 않고, 믿겠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라온이 루난에게 싱긋 웃어주고서 하랜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죠. 제 조건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내가 안내하지. 가자!”

하랜이 앞장서서 언덕을 올랐다. 당당한 표정을 보니, 절대 지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어이, 하랜! 오늘은 웬일로 해 떨어지기 전에 일어났냐?”

“이 시간에 술에 안 취한 걸 보니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이제 일 좀 제대로 해! 공방이 썩어간다! 이놈아!”

장인들은 하랜을 보며 쯧쯧 혀를 차거나, 정신을 차리라고 외쳐댔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남자가 이 마을의 망나니라는 것을.

“이 친구들이 영감이 나오게 할 수 있다길래. 데려다주는 중이니까. 다 닥쳐!”

하랜이 이마를 팍 찡그렸다.

“그건 안 되지. 무슨 수로 전 촌장을 봐.”

“헛 시간 쓰지 말고, 우리한테 와! 싸게 해줄 테니까!”

“10일 연속으로 찾아온 왕족들도 머리털 하나 못 봤는데. 어떻게 들어가.”

“쓸데없는 짓 말라고!”

구경꾼들과 장인들도 발칸을 볼 수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들었지? 지금 와서 물러달라고 해도 안 돼.”

“그런 말 안 할 테니, 빨리 가기나 하시죠.”

“건방지긴….”

하랜은 입을 삐죽이고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공방 앞에 멈춰 섰다. 대접을 엎어둔 것처럼 반원형 건물이었고, 중앙에는 꽉 닫힌 두터운 철문이 하나 있었다.

쩡! 쩡! 쩡!

공방 내부에서 일정한 속도와 힘으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농익은 망치 소리만으로 장인의 실력이 느껴졌다.

“크흠. 아아.”

하랜이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들려준 목소리가 아니라, 톤을 높여서 아예 다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본인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 같았다.

“어이 전 촌장! 손님 왔어! 댁 찾는 손님 왔다고!”

그가 철문을 부술 것처럼 두들겼지만 안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손님 왔다고! 문 열어!”

“쯧, 돌아가라. 지금은 손님을 받지 않아.”

그제야 내부에서 발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보다 굵어졌지만, 그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봐. 올 필요도 없다고 했잖냐. 일단 선수금부터 받도록 하지. 일단 그 상자부터 줘봐.”

하랜은 키득거리며 루난이 든 상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어.”

“괜히 대륙 장인이 아니야. 고집이 쇠심줄이라니까.”

“왕족이 왔어도 문을 안 열어줬는데, 저 꼬마들이 무슨 수로 들어가.”

“괜히 저 망나니에게 돈만 생기겠네.”

뒤따라온 구경꾼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제가 해보죠.”

라온은 손을 펼친 하랜을 지나 문 앞에 섰다.

“아, 소용없다고! 영감 방해하지 말고 이쪽으로….”

“어르신.”

라온은 북망산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발칸의 웃음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우고 왔습니다.”

그 나지막한 음성에 계속해서 울리던 망치 소리가 우뚝 멈췄다.

쿠구구구!

대륙이 무너져도 닫혀 있을 것 같은 철문이 활짝 열리고, 강렬한 열기와 함께 발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가득한 주름살은 여전했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넘쳤고, 부푼 근육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오랜만입니다.”

라온과 발칸은 달라진 서로를 마주하며 반가움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어어? 어어억?”

하랜은 라온과 발칸을 번갈아 보며 찢어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저 영감탱이가 왜 나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본인의 뺨을 꼬집었다.

“저, 정말 나왔어!”

“어억! 진짜 손님이 올 때까지는 문을 안 연다고 했는데?”

“저, 저 청년이 누구길래. 발칸 님이 저런 표정으로….”

뒤를 따라온 구경꾼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모두 깜짝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싱겁게 끝났네요.”

라온은 경악하는 하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기는 제 승리입니다.”

“이익!”

하랜이 입술을 꾹 깨물고 뒷걸음질 칠 때 발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정지.”

“읍!”

그 말에 하랜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우뚝 멈췄다.

“네 녀석. 작업은 안 하고, 여기까지 왜 온 것이냐.”

“치, 친절하게 안내를….”

“헛소리! 실력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되먹지도 않는 호객행위나 했겠지!”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닥치거라!”

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니, 하랜은 발칸의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심부름을 시키거나, 만든 물건 중에 괜찮은 걸 받으려고 했는데, 발칸의 아들이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다.

‘호구가 하나 늘었군.’

라온이 발칸에게 멱살이 잡힌 하랜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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