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67화 (167/653)
  • 제167화

    라온의 눈이 저 멀리 보이는 북망산으로 향했다. 붉은 눈에 비치는 건 현재가 아니다. 리메르를 따라간 숯가마에서 발칸과 처음 만났던 그 날이다.

    ‘그분 덕분에 만화공을 익힐 수 있었지.’

    5 연무장에서 홀로 오러를 익히지 못해 불안해할 때 그의 숯가마에서 힌트를 얻어 만화공을. 그것도 단번에 2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금탄이 나와서 발칸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말 고마운 건 이쪽이었다.

    ‘검을 만들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하셨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 금탄은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자신은 발칸 덕분에 만화공을 익히고, 냉기마저 손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발칸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다시 연락을 해왔다.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갈 테냐?”

    리메르도 라온의 시선을 따라 북망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야죠.”

    라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연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대장장이 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들을 대륙 장인 혹은 대장인이라 칭한다. 드워프와도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는 대륙 장인이 직접 검을 만들어준다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확실히 지금의 너라면 꽤 재밌는 검이 만들어질 거 같네.”

    리메르는 라온의 눈과 팔, 단전을 쭉 훑어내리고 히죽 웃었다.

    “그럼 대장장이들의 마을로 가라. 그 영감이 거기서 몸을 만들고 있으니까.”

    “몸을 만드신다구요?”

    “제대로 된 검을 만들려면 체력이 필요하거든. 너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더라고. 미르탄에 가면 깜짝 놀라게 될 거야.”

    “미르탄….”

    들어본 곳이다. 지그하르트 세력권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 지열이 강해서 많은 대장장이들이 터를 잡고 좋은 무기와 장비를 만든다고 했었다.

    “저기 근데 라온….”

    리메르가 눈동자를 뒤루룩 굴렸다.

    “그 영감 소개해준 게 누구인지 기억하지?”

    “단주님이시죠.”

    “그래! 그걸 잊으면 절대 안 되지. 나님 덕분에 무려 대륙 장인의 검을 얻게 되었으니까!”

    그는 전부 본인의 덕분이라며 턱을 치켜올렸다. 사실 발칸이 검을 만들어주는 건 리메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겠지만 일단은 말을 아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네가 가져간 금화 중에 조금만. 아주 일부만 나한테….”

    “안 됩니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그래도 난 단주라고!”

    “도박을 안 하신다고 약속하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아, 안 할게! 도박장 근처에도 안 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단주님은 못 믿습니다.”

    “흐윽, 진짜 안 가는데, 정말 술값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허….”

    주저앉아 흐느끼는 리메르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이 정말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리던 검사가 맞나 싶었다.

    “하아….”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품에서 금화 10개를 꺼내 내밀었다.

    “이 정도면 한동안 술값으로 충분하실 겁니다.”

    “오오! 충분하지! 충분해!”

    리메르가 벌떡 일어나 금화를 챙겼다. 당연히 눈가에 눈물 자국 따위는 없었다.

    “그럼 다들 지시한 대로 제복이랑, 검을 구해서 다시 보자. 오늘은 먼저 간다!”

    그는 보법까지 사용하여 순식간에 연무장 담벼락으로 올라갔다.

    “아, 라온! 미르탄은 지그하르트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니까. 조심해서 다녀와라!”

    리메르가 손을 빙글 돌리고서 번화가가 있는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멀리서 이번에는 복수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도박장에서 날려 먹겠군.

    라스가 리메르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혀를 찼다.

    ‘뻔하지.’

    -그걸 알면서도 주는 거냐?

    ‘이건 시험이었어.’

    -시험?

    ‘그래. 저 모습을 보았으니, 다시는 저 사람에게 돈을 맡기지 않을 거거든.’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리메르는 모를 것이다. 본인의 행동이 본인의 발목을 부러뜨릴 정도로 잡게 될 거라는 걸.

    “라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검 만들러 갈 거야?”

    “그렇게 됐어.”

    “나도 같이 가.”

    “너도 검을 만든다고?”

    “응.”

    루난은 아버지인 로칸 슬리온에게 검을 선물 받을 거라 생각했기에 예상외였다.

    “아빠가 검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줬어. 라온도 나눠줄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선물인가 뭔가를 나눠준다고 말했는데, 그게 검을 만드는 재료인 것 같았다.

    “내일 바로 갈 건데 괜찮겠어?”

    “응!”

    “그럼 내일 아침에 여기서 보자.”

    “응.”

    루난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연무장을 나갔다. 바로 준비하러 가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소녀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군.

    ‘그러게.’

    그날 이후로 시리아를 만나지 않았는지 루난의 감정 표현은 조금씩 늘어났다. 물론 자신 앞에서만 보여줘서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가야겠군.’

    검을 만들기 전에 먼저 제복 의뢰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연무장에 남은 검사들과 함께 오화단으로 향했다.

    *     *      *

    “후후.”

    고귀함과 간드러짐이 섞인 듯한 웃음. 라온은 바로 앞에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는 중년의 귀부인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검사들과 함께 오화단으로 찾아왔지만, 어느새 전부 떨어지고, 자신은 오화단주의 사무실에 홀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대로 소개도 해주지 않고, 바로 단주의 사무실에 집어넣다니, 여기도 정상적인 곳이 아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풍단의 부단주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오화단주 시란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알고 있었는지 우아함이 깃든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광풍단의 라온이 오화단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지우고,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지그하르트 분들이 외모로도 유명한 건 알고 있지만, 라온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실비아 님도 대단하셨지만, 정말 감탄만 나오네요. 후후.”

    시란은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끝없이 감탄을 흘렸다. 예술 작품 보듯이 눈을 빛내니 부담스러워 죽을 맛이었다.

    “…제복을 만들려고 왔습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오늘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뒤로 물러나며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아, 물론이죠. 리메르 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혹시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을까요?”

    시란이 본인의 뒤에 있는 마네킹을 가리켰다.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바른 듯 눈에 심하게 띄는 제복들이 가득했다.

    “저는 저렇게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형태가 좋습니다. 대신 기능은 여러 가지로….”

    “음, 너무 아쉬운데요?”

    시란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다가왔다.

    “얼굴이 너무 화려하셔서 심플한 제복을 입으시면 디자인이 죽어버려요. 그건 검에 죽는 것보다 더 아쉬운 일이죠.”

    “그런 건 별 상관없습니다.”

    “제작자인 제가 상관있어요. 예술은 예술로서 승화시키는 법. 디자인을 제게 맡겨주시면 그 얼굴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시란은 춤을 추듯이 방을 휘돌며 방긋 웃었다.

    ‘이 동네에는 왜 정상이 아무도 없는 거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집구석에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화려하지만, 최대한 간편하게 해주시고, 기능은 가벼우면서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 주십시오.”

    “기능 쪽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검기에도 몇 번은 버틸 수 있도록 운령사를 최대한 촘촘히 사용하니까요.”

    “운령사….”

    운령사는 운령이라는 나방을 이용해서 만드는 실에 마법적인 가공을 하여 그 강도를 최대한으로 올린 기물이다.

    그 실로 옷을 만든다면 검이 잘 들어가지 않고, 사대속성에도 저항력이 생겨서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그러면 꽤 비쌀 텐데요?”

    “본래는 급소 부위에만 운령사를 사용하지만, 리메르 님이 추가금을 내셨기에 광풍단원분들의 제복에는 운령사가 최대한 많이 들어간답니다. 웬만한 부위는 전부 운령사로 덮일 거예요.”

    “단주님이?”

    “이건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부단주님은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씀드렸어요.”

    시란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비밀을 지켜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군요.’

    리메르는 미리 이곳에 돈을 주면서 가장 좋은 제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 같다. 도박에 미친 건 맞지만 그 이상으로 제자들을 아끼는 것도 확실했다.

    ‘하여튼 미워할 수 없다니까.’

    라온은 시란이 꺼내놓은 운령사 뭉치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럼 치수를 좀 잴게요.”

    시란이 줄자를 가지고 라온에게 다가왔다. 그의 팔과 다리를 만지며 길이를 재는 그녀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뭐지?’

    팔과 다리의 길이와 근육의 밀도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뤘다.

    이 일을 하며 수많은 사람의 체형을 확인했지만, 이리도 육체가 완벽함에 가까운 인간은 글렌 이후 처음이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라온의 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

    라온은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음에도 완벽한 무인의 몸에 근접해 있었다.

    오러도 없이 중무전 무인들을 꺾었다기에 믿지 않았는데, 이런 신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과 속도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놀라운 건 무력만이 아니다.

    눈빛과 오러도 완벽하게 그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살에 이런 무력을 가진 검사는 지그하르트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전설이 헛것이 아니었단 말이지?’

    선택식에서 나온 가주의 전설.

    오화단의 주인이자, 원로원의 중진 중 한 명인 시란은 글렌에 이어 두 번째로 목격한 가주의 전설을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정말 이 아이가 입을 가주의 코트를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어제보다도 이른 시간에 5 연무장으로 나왔다. 이전과 달리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크흠, 한동안 별관의 식사를 못 할 텐데, 아침이라도 먹고 가면 안 되는 것이냐.

    라스가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새로운 미식을 찾는 것도 좋잖아?’

    -새, 새로운 미식?

    ‘그래. 미르탄은 야장들의 마을이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나름 발전되어 있거든. 거기서 괜찮은 식당을 찾는 것도 재밌지 않겠어?’

    -음! 나쁘지 않군. 알겠노라.

    사실 지금 별관에서 식사하는 것과 미르탄에서 식당을 찾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라스는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음식만 끼어들면 사고회로가 좁아지는 위장취업 마왕다웠다.

    “그러면….”

    라온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올려보며 검을 뽑았다.

    평소처럼 연성검술로 시작하지 않고 그보다 더 기본으로 내려가 수평 베기와 수직 베기, 찌르기를 차례로 연습했다.

    촤아아악!

    검신에 어린 강대한 힘이 찬 공기를 가르고 라온의 의지를 펼쳐냈다. 쾌. 빠름이라는 무학의 기본 원리가 담긴 검격이 허공을 사정없이 갈랐다.

    ‘나쁘지 않군.’

    연성검술이나, 가람보법 모두 균형이 잘 잡힌 무학이었기에 그동안 쾌검을 깊게 파고들지 않았음에도 빠름을 담아낼 수 있었다.

    -요즘은 왜 빠름을 추구하는 것이냐.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홀로 있을 때마다 쾌검만 연습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걸 써먹을 구석을 찾아보려고.’

    라온이 검날 위로 글래시아의 기운을 피워냈다.

    -글래시아를 운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건가?

    ‘그래.’

    만화공으로 강함과 변화, 그리고 환상을 검에 담아냈으니, 글래시아로는 그와 관계가 한참 떨어진 빠름을 운용해보고 싶었다.

    -흥. 머리를 제법 썼다만 인간이 글래시아를 그리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라스가 주제를 모른다며 혀를 찼다.

    ‘네가 말해줬잖아. 글래시아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라고. 계속 머리로 그린다면 가능하겠지.

    -끄으윽! 제엔장!

    비웃던 라스가 예전의 발언을 후회하는지 스스로 입을 후려쳤다.

    ‘이 녀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라스는 제대로 된 그림만 그린다면 글래시아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검술의 속성을 발전시키는 것도 분명 가능할 것이다.

    고오오오!

    글래시아를 운용하자 바닥으로 은빛 서리가 깔리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다시 몸속으로 가뒀다.

    글래시아의 심상을 통해 그리는 건 오직 속도. 바람조차 베어버릴 쾌검을 바라며 광아검의 초식 중 가장 빠른 경류아의 구결을 담아 검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

    마나 회로를 질주하던 글래시아의 냉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격을 뻗어냈다.

    하지만 진짜는 그게 아니었다. 지나간 검의 궤적 위로 은빛 선이 이어졌다.

    강대한 힘과 속도가 담긴 검격이 먼저 쏘아지고, 그 뒤로 글래시아가 만들어낸 냉기가 따라간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2번의 쾌검격이 이루어지는 신묘한 검술이었다.

    -허….

    라스조차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이걸 생각한 것이냐.

    ‘아니. 우연이야.’

    그저 글래시아의 냉기를 이용하여 쾌검을 운용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2단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생에서 사용했던 기술 때문인가.’

    암살자로 살아갈 때 검 뒤에 은밀한 오러를 숨기는 암경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잘만 이용하면 큰 도움이 되겠어.”

    라온은 서리가 피어나는 검과 허공에 깔린 얼음 조각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이중검격으로 이름을 지어놓자.’

    훗날 제대로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고 임시로 이중검격이라는 검술명을 만들었다.

    “라온.”

    연무장 밖에서 루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힘이 빠져 있었다.

    후우욱.

    라온은 만화공으로 허공에 핀 얼음 조각들을 지우고, 은색 상자를 든 루난을 향해 걸어갔다.

    새로 성장할 길을 찾은 그의 얼굴은 떠오르는 햇살을 담은 듯 화사하게 아롱졌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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