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66화 (166/653)
  • 제166화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라온은 가벼운 짐을 챙겨서 별관을 나섰다. 방향은 평소와 같은 5연무장. 글렌의 배려 덕분에 광풍단은 수련생 때 머물렀던 5 연무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크흠, 꼭두새벽부터 움직이는 건 똑같군.

    라스는 하품을 쩌억 하며 새벽 공기보다 차가운 냉기를 뱉어냈다.

    -네가 수련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만, 아침은 좀 챙겨 먹었으면 하는데.

    ‘연무장 가서 먹으면 되잖아.’

    -거긴 맛이 별로지 않느냐. 음식의 맛과 신선함은 별관이 최고이니라.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요새 물이 오른 유아와 헬렌의 요리 실력 덕분에 별관에서는 매일 같이 맛 좋은 신메뉴가 나오지만, 5 연무장의 식사는 훈련을 위해 짠맛과 단맛, 매운맛을 줄여 맛 자체는 떨어졌다.

    ‘훈련을 위해서는 이쪽이 더 좋아.’

    음식의 맛은 평상시에 즐기면 되고, 수련할 때는 가벼운 식사로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 빨리 강해져서 할 일을 줄여나가야 하는데, 언제 맛만 즐기고 있겠는가.

    -한심하군.

    라스가 쯧쯧 혀를 차며 턱을 모로 틀었다.

    -네놈은 풍류라는 것을 모른다. 무식하게 강해지기만 하지, 낭만이라는 것이 없느니라.

    ‘낭만 없는 놈이니까. 앞으로 나딘 빵으로만 배를 채우면 되겠네.’

    -나, 나딘 빵?

    녀석은 당황한 듯 푸른 눈을 부릅떴다. 맛은 없고, 식감은 고무이며, 배만 차는 나딘 빵은 라스의 천적과도 같은 음식이었다.

    -지, 지금 본왕을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낭만 없는 놈이라 편한 대로 움직일 뿐이야.’

    -감히 인간 따위가 마계의 군주를 협박하다니!

    무시무시한 냉기가 전신으로 차오른다. 라스가 넘겨주었던 분노들이 감정의 틈을 찢고 나와 영혼의 이곳저곳을 지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냉기와 분노에 걸음이 저절로 멎었다. 막대한 기운이 벽을 뭉개면서 달려들어 손발이 덜덜 떨렸다.

    -네놈이 성장하듯 본왕도 성장한다. 까불다가는 큰 코 다칠….

    ‘그 말은 잘못됐어.’

    라온이 주먹을 쥐어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멈췄다.

    -뭐라?

    ‘네가 성장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성장했으니까.’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여섯 개의 고리가 청명한 울림을 만들어내며 분노를 짓누르고, 만화공과 글래시아가 마나 회로를 질주해오는 라스의 냉기를 찢어발겼다.

    -크윽! 아직이다! 본왕의 전력은 이게 아니야!

    라스는 포기하지 않고, 더 짙은 냉기와 분노를 끌어 올렸다. 영혼에 박혀 있는 분노 25를 믿는 듯 비처럼 냉기를 떨어뜨렸다.

    쿠구구구!

    분노가 25나 되어 확실히 그냥 버티기는 버거운 수준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성장한 불의 고리로 그 악의로 찬 기운을 가라앉히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라스와 힘겨루기를 하며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라스가 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제에에엔장!

    라스는 본인의 패배를 믿고 싶지 않은 듯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체력 좋지.’

    라온이 메시지를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라스에게서 능력치를 얻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가 이겼으니, 오늘부터 식사는 나딘 빵 하나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녀석이 바람처럼 달려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보, 본왕이 다 잘못했느니라! 차라리 굶어라! 그 빵만은 안 된다! 그건 배만 부르게 하는 죄악에 가까운 음식이니라!

    라스가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앞으로 잘해. 또 까불면 한 달 동안 나딘 빵이니까.’

    -크윽, 본왕이 미식가만 아니었다면 네놈의 마수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고귀한 영혼을 가진 죄인가….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겠지.’

    라온은 라스의 헛소리를 수정해주고, 연무장 문을 열었다.

    “어?”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수련생들. 아니, 이제 광풍단의 단원이 된 검사들이 모여 있었다.

    “도련님!”

    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먹던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달려왔다.

    “늦으셨네요?”

    “너희들이 빨리 온 거 같은데?”

    평소 이 시간이라면 5 연무장에 아무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라온. 늦었어.”

    아침잠이 많은 루난도 어느새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눈 비비며 다가와 소매를 잡았다.

    “흥.”

    익숙해진 콧소리에 옆을 보니, 마르타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까지 33명. 자신을 포함한 광풍단 전부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왜들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오늘이 창단식이잖아!”

    “오늘부터 광풍단의 전설이 시작될 텐데, 기대돼서 잠을 잘 수가 없더라구요!”

    “크으, 이제야 진짜 검사가 되는구나.”

    광풍단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미소를 흘렸다.

    “흐음….”

    라온은 광풍단원들의 들뜬 눈빛을 마주하며 입맛을 다셨다.

    ‘기대했다가 피 볼 텐데.’

    어제 리메르를 보고 확신했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리메르도 단주가 되었으니, 무언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큰 착각이었다.

    “그럼 단주님 오실 때까지 각자 수련이나 하고 있어.”

    “옙!”

    “알겠어!”

    광풍단원들은 활짝 웃고서 연무장 곳곳에 퍼져 수련하기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잡담에는 앞으로의 임무와 실적에 대한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으함….”

    “…….”

    라온은 하품하는 루난과 날카로운 눈으로 하늘을 보는 마르타까지 확인한 후 빈 공간으로 향했다.

    ‘나도 시작해볼까.’

    수련검을 뽑아 들고, 연성검술을 펼쳤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검로였지만, 불의 고리와 만화공 그리고 검술의 성장으로 이젠 상승 검술보다 더한 위력이 피어났다.

    콰아아아!

    강물처럼 도도하게 질주하던 연성검술의 기세가 거세게 차오른다. 멈추지 않는 흐름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력과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쿠구구구!

    뭉툭한 수련검에서 퍼진 오러의 파도가 5 연무장 전체를 울렸다.

    “우와아….”

    “저, 저게 연성검술이라고?”

    “나도 똑같이 배웠는데, 이 차이는 뭐지?”

    “미, 미쳤어. 최상급 검술이라고 해도 믿겠네.”

    “검술의 등급은 결국 사람이라더니. 결국 재능이….”

    검사들은 연무장 전체에 영향을 주는 라온의 연성검술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눈 감고도 펼칠 수 있는 초식이었지만, 라온의 손에서는 처음 보는 절대의 검술처럼 압도적인 파동이 일어났다.

    “또 멍청한 소리를 하네.”

    마르타는 허공으로 솟구치는 라온의 기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너희들이 더 높은 수준의 검술을 쫓을 때 저 녀석은 오직 연성검술만을 수련했어. 재능의 차이 이상으로 수련의 차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나 역시 멍청했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수련검을 뽑았다.

    “와아.”

    루난은 라온이 그어내는 검의 궤적을 모두 담아낼 것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다.

    “으흠. 여전하시네.”

    도리안은 수련은 안 하고 꺼낸 과자를 계속 씹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이 각자 시간을 보내며 단주인 리메르를 기다렸지만, 그는 예상대로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하하! 처, 첫날이니까.”

    “그래. 그렇게 멋진 연설을 하셔놓고, 많이 늦으실 리가 없지.”

    “맞아.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오실 거야.”

    “달라졌을 단주님을 믿자고.”

    검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한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리메르의 모습은 연무장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고, 곧 오겠지? 아마도?”

    “그 자식. 아니, 그 엘프도 양심이 있다면 와야지!”

    “그렇게 멋진 말로 꼬셨으면 좀 달라졌을 거야.”

    검사들이 이를 바득 갈며 억지로 참고 있을 때쯤 연무장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셨다!”

    “단주님!”

    “너무 늦었…어?”

    리메르에게 달려가던 검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어제만 해도 진중한 빛을 발하며 멋짐을 뿜어내던 붉은 머리 엘프는 하루 만에 100년은 늙은 듯 바싹 말라버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으허헉! 단주님!”

    검사들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는 리메르를 부축하며 입술을 떨었다.

    “아, 안녕….”

    리메르는 기력이 아예 없는지 눈동자는 허공만을 훑었고, 손은 갈대처럼 허우적댔다.

    “쯧.”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다 잃었군.’

    표정을 보니 뻔하다. 어제 반만 남은 돈을 불리겠답시고 카지노에 가서 모조리 잃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인간이 저리 망가질 리가 없었다.

    ‘미리 빼두길 잘했어.’

    어제 절반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돈도 먼지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근데 그 카지노에 대체 누가 있는 거지?’

    표정 관리를 못 하기는 하지만, 리메르는 눈썰미도 좋고, 얍실하며 능글맞은 사람이다. 매번 누구에게 잃는 건지 이젠 궁금해졌다.

    “후웁….”

    리메르가 단상의 중심으로 올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 지금부터 광풍단의 창단식을 여, 열겠다. 우리의 목표는 내 돈. 남들이 걷지 않은 명예와 내 돈. 너희들은 앞으로 실적과 내 돈….”

    위엄있고, 장엄해야 할 창단식 연설에 자꾸 이상한 단어가 끼어든다. 리메르의 표정을 보니, 본인도 모르게 줄줄 나오는 것 같았다.

    “목표가 내 돈?”

    “명예와 내 돈?”

    “실적과 내 돈?”

    “저 인간 설마….”

    광풍단원들도 이제 약간의 상황을 파악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망할…. 내가 왜 여기에 왔지?”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문 채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하암.”

    루난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하품하며 눈만 꿈뻑였다.

    “…우리 광풍단은 그렇게 운영이 될 것이다.”

    리메르도 정신을 차렸는지 더 이상 내 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에…. 현 인원이 33명이니까. 3개 조로 나누겠다. 1번 조장은 마르타 지그하르트, 2번 조장은 루난 슬리온. 3번 조장은 일단 공석으로 두고. 라온 지그하르트는 부단장의 위치에서 단원을 지휘한다. 앞으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를 부르겠다. 먼저 1조에는 세트라이, 얀덴….”

    리메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검사들의 조를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공석으로 있는 3번 조장은 누구입니까?”

    “곧 들어올 모자란 놈의 자리다.”

    그 들어올 놈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광풍단의 첫 번째 임무를 말해주겠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리메르가 입맛을 쩝 다시며 단상 아래에 있는 검사들을 살폈다. 검사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쉬어라.”

    “예?”

    “쉬, 쉬라니요!”

    “이제 만들어졌는데 쉬어요? 그게 무슨!”

    잠깐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쉬라고 하자 검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쉬는 게 쉬는 거지. 뭐긴 뭐야.”

    리메르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탁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돈을 몽땅 잃은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 녀석이 없으니 조금 불편하긴 하네.’

    이럴 때 앞에 나서서 리메르의 멱살을 쥐던 버렌이 보이지 않으니 상황이 귀찮게 흘러갔다. 그가 없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다.

    -본래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지.

    ‘음?’

    라스에게서 나오기 힘든 말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 눈깔이 정도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왕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없어졌으니 세상은 지금 슬픔에 잠긴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조만간 망하게 될지도….

    이번에는 좋은 말 좀 하나 싶었는데, 결국 본인 자랑이다.

    다만 녀석은 마계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말을 했다. 슬로스 때도 그렇고 마계의 마왕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 나도 몰라. 알아서들 해.”

    리메르는 배를 째라는 듯 단상 위에 드러누웠다.

    “이이익!”

    “이 엘프가 정말….”

    “내가 미쳤지!”

    검사들은 맹한 눈을 한 리메르를 노려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쉬라는 건 조만간 임무에 나갈 테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해 두라는 말씀이시죠?”

    “어, 그거. 그거야. 역시 부단주네.”

    리메르가 풀린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님의 말을 전하겠다. 쉬라는 말은 단순히 휴식을 취하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임무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우리끼리 사용할 신호와 검진을 비롯한 전투와 전략을 재정비할 시간을 가져라.”

    라온의 진중한 목소리에 검사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근데 단주님은 왜 저러는 겁니까?”

    “어디 아프신 건가?”

    “어제 단주님이 도박장에서 돈을 잃으셔서….”

    “야! 인마!”

    사실을 말하려고 하자, 리메르가 어깨를 잡았다. 창백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손아귀에는 힘이 넘쳤다.

    “소, 소문이라는 게 말 한번 잘못하면 이상하게 퍼지거든. 이런 건 좀 조심해서 말해줘….”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검사들을 보았다.

    “어제 단주님이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잃으셔서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부터는 내가 지휘한다. 먼저 기본적인 신호부터 시작한다. 전부 수련복으로 환복하고 다시 모이도록.”

    “아….”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했지.”

    “쯧.”

    검사들은 라온의 뒤에 있는 리메르를 한심한 눈으로 흘낏 본 뒤에 탈의실로 향했다.

    “단주님.”

    라온은 뒤를 돌아 리메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을 잘못해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안 되니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어억….”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턱이 바닥에 닿도록 입을 벌렸다.

    “그, 그런데 내가 어제 도박장에 가서 다 잃은 건 어, 어떻게 알았냐? 너 먼저 갔잖아.”

    “똥파리가 똥을 그냥 두겠습니까. 뻔하지요.”

    “누가 똥파리야!”

    리메르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똥파리라는 말은 글렌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조손들이 세트로!’

    *     *      *

    중무전 서쪽에는 별채가 하나 있다. 한참 동안 관리되지 않아 먼지만 가득한 그 별채에는 오랜만에 사람의 손길이 닿고 있었다.

    “여긴 참 오랜만이군요.”

    카룬 대신 어려서부터 버렌을 키워온 집사 티아스가 거미줄로 가득한 벽난로를 치우며 빙긋 웃었다.

    “…….”

    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측 기둥을 바라보았다. 기둥 아래에는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낙서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 소년이 손을 잡은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티아스가 눈매를 좁혔다. 그건 어렸을 적 이곳에 왔던 버렌이 그렸던 낙서였고,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버렌은 웃고 있는 그림 속의 아이와는 반대되는 눈빛으로 낙서를 쓰다듬었다.

    먼지에 붙어나오는 색소 조각들이 아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그림 속 아이는 사라지고, 손이 떨어진 두 남녀만이 그 안에 남았다.

    “티아스.”

    버렌이 고개를 돌렸다. 따스한 바람이 깃든 듯한 녹색 눈동자는 잿빛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 먼저 돌아가서 쉬어.”

    그는 그리 말한 뒤에 청소도 하지 않고 불이 꺼져 시꺼먼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티아스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서부터 그를 봐왔지만, 지금처럼 허무를 담은 눈동자는 처음이다. 살아갈 목표 그 자체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라온 도련님에게 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복수를 다짐하며 더 열을 냈었는데, 지금은 장작이 모조리 타버린 듯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19일 남았나.’

    선택식 이후 20일 동안은 선택받지 않은 신입 검사가 소속을 정할 수 있는 추가 등록 기간이다. 버렌만 움직이면 받아줄 곳이 여럿이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얼마 없군.’

    버렌이 지금의 감정을 스스로 극복하길 바라지만 그건 힘들지도 모른다. 카룬에게 인정받는 건 그의 삶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으니까.

    ‘홀로 일어서지 못하신다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자신으로서는 버렌을 일으킬 수 없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티아스는 스스로 다짐하며 폐허처럼 더러워진 별채를 계속해서 청소했다.

    *     *      *

    선택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라온은 검사들의 수신호 체계를 정비하고, 33명이 함께 싸울 수 있게 검진의 안정성을 가다듬었다.

    검사들도 실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단체 수련과 개인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콰앙!

    라온과 검사들이 새벽 수련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메르다. 제시간에 온 것으로 모자라 검붉은색의 제복을 멋들어지게 입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틈만 나면 시비를 거는 녀석이 없으니 좋기도 하면서 심심하기도 하네.”

    리메르는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누구를 이야기하는 건지 알고 있었기에 광풍단원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뭐,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그는 특유의 손뼉을 쳐서 검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수신호와 검진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으니, 이젠 개인적인 준비를 할 때다.”

    “개인적인 준비요?”

    “수련은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리메르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이제 질 떨어지는 보급 장비를 버리고, 지그하르트 검사로서 당당하게 개인 장비를 챙길 때라는 거지. 개인 검과 제복을 입을 때가 되었다.”

    그가 본인이 입고 온 지그하르트 제복을 쓸어내렸다.

    “일단 제복은 개인 커스텀으로 만들어지니까. 오화단에 가서 직접 주문하도록. 처음에는 공짜니까. 넣을 수 있는 옵션은 전부 넣어.”

    리메르는 두 번째로 허리춤의 검을 툭 쳤다. 평소에 사용하던 보급용 검이 아니라, 광혈귀를 벨 때 사용했던 명검이었다.

    “검도 마찬가지. 선물을 받거나, 물려받아 놓고 지금까지 쓰지 못했던 검을 사용해도 되고, 새로운 검을 만들어도 된다. 남은 대기 기간 동안 알아서 준비하도록!”

    “예!”

    광풍단원들이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로 웅장하게 대답했다.

    “드디어 나의 다크 피닉스를 쓸 수 있게 되었군.”

    “후우, 대화운검을 쥐고 싸울 수 있다니, 벌써 들뜨네.”

    “나의 본검 슈퍼 학사르가 피 맛을 보고 싶어서….”

    대부분의 검사들은 미리 검을 준비해두었는지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히죽거렸다.

    “흐음….”

    “부단주는 이쪽으로 와라.”

    라온이 제복을 어떻게 맞출지 고민할 때 리메르가 손짓을 했다.

    “너에게도 연락이 왔다.”

    “연락이라면….”

    “그 영감이 너를 불러오라고 하더군.”

    리메르가 영감이라고 말하니, 한 사람이 생각났다. 만화공을 익힐 때 지독한 열기의 가마를 지키던 고집 센 노인 발칸. 대장장이의 정점에 오른 그의 웅혼한 눈빛이 떠올랐다.

    “발칸 님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 영감이다.”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의 때가 왔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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