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64화 (164/653)

제164화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카룬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메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가 어떻게 단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만이 아니라, 단상 위에 있는 대주와 단주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들 그러십니까. 단주가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리메르는 카룬을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네놈처럼 단전이 망가진 폐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싯적에 해놓은 게 워낙에 대단해서 폐인이 되었어도 단주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더라구요.”

“우연으로 광혈귀를 잡았다고 네가 예전처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기전을 할 수도 없는 반쪽짜리 주제에!”

카룬은 이 자리에 리메르가 있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워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는데, 이미 결정 난 사항입니다.”

“누가 결정을 했다는 것이냐!”

“뻔하잖아요.”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중앙에 놓인 옥좌를 가리켰다.

“그의 말이 맞다. 내가 허락했다.”

글렌이 느긋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가 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건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 칼질 좀 한다고 저 도박쟁이를 단주에 끼워 넣었다간 가문 망신만 시킬 겁니다! 저놈이 하는 짓이 망나니나 다름없습니다!”

발데르가 의자를 부술 듯 거칠게 일어서서 리메르에게 삿대질을 했다.

“발데르. 내가 허락했다고 말했다.”

“으읍….”

글렌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발데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굽혔다.

“크윽….”

홀로 이 공간을 압도하는 기세에 카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직접 광풍단주의 무력을 확인하고, 허가한 일이다. 불만이 있다면 내게 직접 찾아오도록.”

“으음….”

“아, 아닙니다.”

눈앞에서 전주 두 명이 기세만으로 찌그러지는 것을 보았기에 다른 대주와 단주들은 벌어지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후욱!”

“이익….”

리메르는 좋다며 히죽 웃었고, 카룬과 발데르는 그를 노려보며 소리 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가주님. 제 소개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소개?”

“예. 신입검사들이 저를 알긴 하지만, 광풍단을 어떻게 운용하고, 무엇을 할지를 말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짧게 끝내라.”

“옙!”

리메르는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 단상의 끝에 섰다.

“반갑다. 광풍단주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들어 리메르를 보았고, 버렌을 비롯한 다른 검사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저 가볍고, 경박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너희를 가르쳤던 교관의 모습은 잊고, 신입 단주로만 생각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진중했고, 어조는 격식 넘쳤다.

“너희들은 이미 들어가고 싶은 단체를 어느 정도 정해놓았을 것이다. 그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 대주들의 명성, 무력 단체의 힘, 다양한 지원 혹은 뛰어난 무학까지. 하지만!”

리메르의 침착한 말에 검사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5년간 봐왔지만 거의 처음 보는 진지한 모습이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이곳의 선배들이 깔아놓은 도로이고, 너희는 그 도로에 올라탈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강한 단체에 속해봤자, 이룰 수 있는 건 어설픈 명성과 업적밖에 없다. 모두가 경탄할 만한 업적들은 전부 너희들의 선배가 가져갔으니까.”

그의 말은 의외로 정확한 사실을 꼬집고 있었다. 벌써 무력 단체에 속한 듯 웃음을 짓던 검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너희들에게 그런 것을 줄 수 없다. 광풍단은 며칠 전에 만들어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장점?”

“그게 무엇입니까?”

리메르의 말에 빠져든 검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광풍단에서 너희들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이미 우뚝 선 단체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이룰 수 있는 것….”

마르타가 홀린 듯 눈을 빛냈다.

“우리의 여정은 위험할 것이고, 임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몇 달간 어둠이 지속될 테고, 위험은 끊이질 않겠지. 안전하게 살아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과 고난을 이겨냈을 때 우리는 영광과 명예를 가질 수 있다.”

영광과 명예. 어떻게 보면 허구적인 단어였지만, 그 말을 듣는 검사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나와 함께 한다면 내 뒤에 서서 너희들을 굽어보는 자들처럼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

리메르가 손을 뻗었다. 텅 빈 손이었지만, 값비싼 보석과 장비를 내밀었던 대주들의 손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가, 가주님. 너무 길어집니다.”

“예, 그만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검사들을 빼앗길까 봐 조급해진 대주들이 리메르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글렌은 별다른 반응 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나만큼 너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마! 나를 믿고 따라와라.

리메르는 그 말을 외치고서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주저앉았다. 의자가 없어서 단상에 걸터앉았음에도 그의 웅혼한 기세는 줄지 않았다.

“이거….”

“어, 어떻게 하지?”

“갑자기 확 끌리는데….”

“으음!”

검사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럽게 끌리는 곳이 나타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듯했다.

“…….”

반면 라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평온한 눈빛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과는 본인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다.

“크흠….”

리메르는 그런 라온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다른 애들한테는 잘 먹힌 것 같은데, 저 녀석은 표정이 왜 저래.’

가장 중요한 녀석이 저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속이 갑갑해졌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지만, 넌 꼭 와줘야 한다고!’

광풍단의 목적 자체가 라온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만든 단체이니, 그가 꼭 와주어야 한다. 녀석이 오지 않는다면 광풍단의 의미가 없다.

‘거기다….’

리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박에 전 재산을 걸었단 말이야!’

라온이 어떤 단이나 대를 고를지가 초유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도박도 굉장히 유행하고 있었다.

라온이 기본의 단체가 아니라, 새로운 단을 고른다고 걸었기 때문에 녀석은 무조건 광풍단에 와주어야 한다.

‘제발! 그거 날리면 나 진짜 뒈져! 도토리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리메르는 거친 숨을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신에게 기도까지 하며 라온이 이곳에 오기만을 바랐다.

“왠지 오늘 교관님 멋있어 보이는데?”

“그러니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어.”

“영광과 명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이야.”

“저게 진짜 모습 아닐까? 이제 보니 눈빛도 깊고….”

신입 검사들은 우수에 잠긴 리메르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이 도박으로 가득 찼다는 걸 보았다면 침과 욕을 뱉었겠지만, 다행히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명이 있긴 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

*     *      *

라온은 리메르와 눈을 마주치고 옅은 미소를 흘렸다.

‘꿍꿍이가 있군.’

리메르의 표정을 보니, 폼만 잡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들어오기를 절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가 단을 만들어서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자신을 영입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도박이라도 걸었나 보네.’

저 양아치스러운 엘프 교관이 진지할 때는 도박뿐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본인의 단에 들어가는 것에 전 재산을 걸었을 것 같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까의 그 발언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리메르가 본인과 함께 영광과 명예를 얻자는 말은 확실히 무인의 가슴을 움직였다. 예상보다 많은 검사들이 광풍대로 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저 귀때기의 말이 마음에 드는구나.

라스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마족이라면 남의 명성에 기대서는 안 되지. 본인의 능력으로 시련과 고난을 뛰어넘어야 강해질 수 있느니라.

‘우린 마족이 아닌데?’

-그건 중요하지 않느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그저 성에만 박혀 있지 않고 마계 전역을 돌며 다른 왕들과 싸움을….

“지금부터 선택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된 신입 검사는 단상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라스가 주절거리기 시작할 때 사회자가 선택식의 시작을 알렸다.

-저, 저놈 감히 인간 주제에 본왕의 말을 끊어?

‘가야겠네.’

라온은 잘 됐다고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다가 라온의 옆에서 잠시 멈췄다.

“난 광풍단으로 가겠어. 저 망나니 교관은 안 믿지만, 내가 해야 할 일에 가장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그녀는 그 말을 바람처럼 흘리고서 앞으로 나갔다.

“마르타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고 싶은 수장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상 위에 선 대주와 단주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데니어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이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아이언드나 세레나 역시 그녀를 원하는 듯 단번에 손을 들었다.

“흠!”

리메르는 여전히 똥폼을 잡으며 손가락 두 개만 들어 올렸다.

“저는 광풍단에 들어가겠습니다.”

마르타는 본인을 원하는 단체들을 전부 훑어내린 뒤 인상을 찡그리며 리메르를 가리켰다.

“음….”

데니어가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렇게 될 걸 예상한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마르타 지그하르트의 소속은 광풍단입니다! 모두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우와아아아!”

“도전하는 모습이 좋다!”

소속이 확정되자, 관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다음 루난 슬리온. 앞으로.”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 역시 라온의 옆에 멈춰서서 잠시 뜸을 들였다.

“라온. 광풍단?”

“글쎄.”

“응.”

두리뭉실하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슬리온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수장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로칸 슬리온을 필두로 많은 수장들이 손을 들었다. 마르타보다 더 많은 숫자. 루난을 마르타보다 편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큰 착각이지.’

루난은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 고집은 마르타 이상이다. 받아들인다면 고생 꽤나 하게 될 것이다.

“루난 슬리온. 네 차례다. 가고 싶은 단체를 선택하도록.”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옅은 미소를 짓는 리메르가 있었다.

“루난 슬리온의 소속은 광풍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루우우우우나아아안!”

로칸 슬리온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루난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선택식은 계속되었고, 본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던 1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입 검사들이 광풍단을 선택했다.

리메르가 괴짜지만 사람을 키우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는 걸 겪었고, 그의 말대로 그들만의 영광과 명예를 얻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 왜 저, 전 손든 사람이 없습니까?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아, 안 보이나?”

도리안이 단상 위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를 데리고 가겠다고 거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겁이 많아서 하분 성에서도 맨날 도망만 쳤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거 너무하네! 잠깐만요! 보급대도 안 들었잖아! 작은 실수 좀 했다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작은 실수? 보급품을 모조리 들고 나르려고 해놓고?”

보급대의 수장인 중년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혀를 찼다.

“이, 이런 일이 있다니….”

도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턱을 떨었다.

“신입 검사 도리안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이대로 종료….”

“후우, 이게 스승의 책임감인가.”

사회자가 도리안의 선택식을 끝내려 할 때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우왁! 저기요! 저 광풍단에 들겠습니다!”

“크흠, 도리안의 소속은 광풍단으로….”

“감사합니다!”

도리안은 여전히 배 주머니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갔다.

“도련님! 살았어요! 앞으로 리메르 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그러냐….”

“네! 아아, 스승의 은혜는….”

녀석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예.”

버렌은 녹색 눈에 진중함을, 묵직한 걸음에 자신감을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풍단이 끌리는 건 사실이지만, 난 처음 목표대로 가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당당하게 단상 앞에 섰다. 많은 수장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았다.

“버렌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고 싶은 수장들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에 단상 위 사람들이 우르르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대부분의 수장들이 거수하여 기뻐해야 할 버렌의 표정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굳어져 있었다.

“아, 아버지. 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믿고 있고, 가고 싶었던 중무전의 수장. 카룬이 차가운 눈빛만 발할 뿐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으니까.

“으음….”

“뭐, 뭐지?”

“버렌이 눈에 차지 않는다고?”

“무력과 정신이 저리 출중한데….”

사회자나 다른 수장들도 이 상황에 당황했는지 카룬과 버렌을 번갈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버, 버렌 지그하르트는 거수한 수장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사회자가 단체를 고르라고 말했지만,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축 내린 어깨를 떨며 그의 아버지만을 바라보았다.

“…….”

라온은 아들이 아니라, 쓰레기를 보는 듯한 카룬의 눈동자를 살피며 비웃음을 흘렸다.

‘역시 저 인간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버렌은 그의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훌륭하다고 했지만, 저자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다. 밴댕이 이상으로 속이 좁은 협잡꾼에 불과하다.

-의외로군. 저 눈깔이의 무력과 성격은 눈에 띌 정도로 성장했는데.

‘그 성격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성격?

‘버렌이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 냉정하고, 기계 같은 성격이 대범하고 여유롭게 변한 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전생에서 데루스라는 괴물을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다. 카룬은 장기 말로 사용해야 할 아들이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버렌. 선택하도록.”

“…….”

사회자가 말을 해도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을 세지. 그 안에 선택하지 않는다면 네 소속은 정해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넷….”

사회자가 버렌을 배려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녀석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후우, 다섯. 버렌 지그하르트의 소속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

끝났다는 말에도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검사들이 나와서 데리고 가고 나서야 부서진 인형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럼 저놈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한 달 안에 소속을 결정해야 해. 직접 찾아가서.’

-참 별일이 다 있구나.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라스는 조금이지만 버렌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오늘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5 연무장의 수석 라온 지그하르트. 앞으로!”

라온은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카룬 지그하르트는 비틀거리며 들어가는 막내아들을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쓸모없는 녀석.’

자신이 아들에게 원하는 모습은 친구든, 스승이든 찔러 죽일 수 있는 독기를 가진 검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독기와 악의를 가질 수 있게 키워놨는데, 수석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머저리가 되어 돌아왔다. 저런 건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 없었다.

“이야, 독하시네요.”

옆에서 들려온 짜증 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히죽 웃고 있었다.

“뭐라?”

“버렌의 무력과 정신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시험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성장했는데, 쳐다도 보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문제다.”

카룬이 코웃음을 쳤다.

“자식이란 내 분신일 뿐이다. 정신적 성장 따위는 필요 없어. 시키는 일을 그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와, 재수 없는 발언.”

“네놈 때문이다.”

리메르가 피식 웃자, 카룬을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 맡은 이후로 버렌이 망가졌으니까.”

“저건 망가진 게 아니라, 성장한 겁니다. 중무전주님 눈깔이 잘못되신 거 아닌가요?”

“네놈….”

두 사람의 불편한 기운이 경합하며 단상 위에 기이한 기운을 흘러내렸다.

“둘 다 입 닫아라.”

“음….”

“죄송합니다.”

글렌의 시선이 닿자, 카룬과 리메르가 침음을 삼키며 동시에 기세를 꺼뜨렸다.

“마지막이니 집중하도록.”

그는 쓸쓸하게 걸어가는 버렌을 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반대편에서 앞으로 나오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번 선택식 최고의 대어가 나왔네요.”

리메르는 언제 입을 다물었냐는 듯 바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직계분들은 손을 안 들겠죠?”

“뭐?”

“그게 무슨 말이지?”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방계 출신 수장들이 눈을 흘겼다.

“이번 연수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리메르는 누군가를 놀리듯이 긴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연수 후반기부터 중무전이 라온을 겁내서 무조건 물러나기만 했다고. 부단주, 단주, 대주들을 모조리 빼고, 라온이 무엇을 하든 놔두었다고 하던데. 그거 라온에게 털릴까 봐 겁나서 그랬다고 소문이 쫙 퍼졌던데요.”

그는 턱을 살짝 들어서 직계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직계분들이니 라온을 받아들이기 무서우시겠죠? 손을 안 드셔도 저는 추우웅분히 이해합니다.”

“너 이 새끼!”

“리메르!”

“정말 미쳐버린 것이냐!”

카룬과 발데르를 비롯한 직계들이 벌떡 일어섰다.

“아직 선택식이 안 끝났는데, 그러시면 안 되죠.”

리메르가 슬쩍 옆을 가리켰다. 글렌에게서 불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으음….”

“이익….”

직계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리메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망할 새끼….’

카룬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단상 앞에 선 라온을 보았다. 스승과 제자 둘 다 지랄맞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겁? 이 내가 겁을 먹었다고?’

리메르가 말했던 겁먹고 물러났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벌레에게 겁을 먹을 리가 있겠는가. 훗날 놈을 죽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부딪침을 피하려 했을 뿐이었다.

‘망할….’

한 번 머리에 떠오르자, 라온 놈이 중무전에서 부순 물건들과 제자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좋다. 들어주지.’

카룬은 라온에게 거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라온이 온다면 뼈와 살 그리고 핏방울 하나까지 이용하고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수장분들은 거수하여주십시오.”

천둥벌거숭이 같은 라온이 다시 한번 멍청한 짓을 하기를 바라며 눈을 내리감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음?’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주변이 고요했다. 자신이 손을 들었다면 이것과 반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야 했다.

‘무슨 일이….’

카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라온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관객과 검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단상 위를 보고 있었다.

“허억!”

주변을 돌아보자마자 신음이 터졌다. 자신만이 아니다. 손을 올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직계의 수장들이 눈을 부릅뜬 채 거수하고 있었다.

이 단상 위에 있는 모두가 라온을 원한다며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이 무슨….”

“지그하르트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 이런 게 있었죠.”

카룬이 당황하여 손을 내리려 할 때 리메르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식에서 모두의 선택을 받은 검사는 훗날 가주가 된다.”

그가 진중한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히죽 웃었다.

“제 제자를 챙겨주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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