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63화 (163/653)

제163화

“부탁이라.”

글렌의 턱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올라갔다. 좁혀진 눈매는 리메르의 진의를 밝히려는 듯 날카로웠다.

“네가 요즘 미친 짓만 골라 하고 다니는 걸 알고 있으니, 듣고 싶지 않군.”

“저라고 항상 장난만 치는 건 아닙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슬쩍 웃었다. 호를 그린 눈동자에서 진중한 빛이 아롱거렸다.

“일단 말해보아라.”

“라온에 관한 일입니다.”

“라온….”

라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옥좌에 기대고 있던 글렌의 등이 살짝 올라왔다.

“라온의 무력 수위는 익스퍼트 최상급. 본래 경지를 뛰어넘는 녀석이다 보니, 다른 최상급을 일방적으로 팰 정도로 강합니다. 마스터가 아닌 이상 현재 녀석을 이길 사람은 없죠.”

“알고 있다.”

글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모르게 살짝 올라간 입술은 손주를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라온에게 단을 하나 맡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을?”

“라온의 무력이 다른 단주들에 비해 조금 달리긴 하지만 단주를 맡아 여러 임무를 완수하다 보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글렌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뜬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주, 대주, 부대주는 유사시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에 최소 마스터 이상이어야 한다. 부단주라면 모를까. 아직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애송이를 지그하르트의 단주로 세울 수는 없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 안에는 손주를 걱정하는 따스한 음성이 얕게 깃들어 있었다.

“거기다 그 아이는 아직 누군가의 보호 없이 홀로 선 적이 없다. 이곳에서는 너, 그리고 하분 성에서는 밀랜드 성주가 있었지. 부단주로서 차근차근 경험을 키운다면 모를까. 단주 자리를 주는 건 무력적인 면에서나, 경험적인 면에서 무리다.”

“역시 그렇군요.”

리메르가 입맛을 쩝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어쩌지? 라온이 걱정되는데….”

“라온이 걱정된다고?”

라온이 걱정된다고 하자 글렌이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요. 걱정되죠!”

리메르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탁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라온을 얻겠다고 지그하르트 이곳저곳에서 벌써 손을 뻗어왔지 않습니까. 아이언드와 세레나는 직접 라온을 찾아가기도 했구요.”

“그게 나쁜 일이 아니지 않느냐.”

“사람에 따라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죠.”

“음?”

“라온이 별관에서 자라서 순수한 녀석이라는 건 아시죠?”

“그렇지.”

글렌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이 본관에서 이뤄지는 냉정한 정치 싸움에 대해 모릅니다. 하분 성에서 1년간 살기는 했지만, 그곳 사람들도 외부의 적 때문에 내부에서 싸우는 경우는 많지 않죠. 즉, 라온은 단체 내부의 정치 싸움에는 백지 그 자체라는 뜻이에요.”

리메르는 실이 달린 인형을 조종하듯 팔을 쫙 펼쳤다.

“본인들이 가주가 되고 싶어서,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서 대주가 된 사람들이 라온을 잘 이끌 수 있을까요? 잘못된 방향으로 데리고 가거나, 어긋난 교육이나 임무를 시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리메르는 걱정이 되어서 잠도 못 잤다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로엔이 그 말에 동의하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로엔 님. 대주나 단주들이 본인의 목표와 성장을 위해 라온을 이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이럴 때 출세 욕심 없이 라온을 제대로 이끌어 줄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흐음….”

“훌륭한 인품에, 무력도 뛰어나고, 높이 올라간 경험도 있고, 얼굴까지 잘생긴 그런 사람 어디 없나? 분명 있을 텐데?”

“…….”

글렌은 말없이 리메르를 지그시 굽어보았다.

“이제 알겠군. 라온이 아니라, 네가 단주가 되려는 것이었나?”

“저요? 제가 어떻게 단주를 노리겠습니까. 훌륭한 인품, 뛰어난 무력, 높이 갔던 경험 그리고 잘생긴 얼굴? 어? 잠깐만! 저 맞네요? 여기 있었네! 단주는 내 거였네!”

리메르는 헤헤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하아,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글렌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노리는 게 무엇이냐. 리메르.”

“저는 그저….”

“솔직하게 말하라.”

글렌의 목소리가 벼린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말을 잘못하면 이대로 베일 듯한 기세였다.

“조금 민망하지만 제대로 말씀드리죠.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

“라온이 홀로 광혈귀의 앞을 막고, 수련생들을 구한 그날. 저는 그 아이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짙게 반짝이는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에 그의 굳은 의지가 함께 했다.

“그 아이의 등에서 가주님의. 아니, 가주님보다 더 높고, 완성된 옥좌를 보았습니다. 당신을 왕으로 만들고 지켰듯이, 이번에는 그 아이를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그런가….”

글렌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다. 네 진심도 알겠고, 라온이 잘못 클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다만….”

그의 눈빛이 다시 한번 싸늘한 빛을 뿜어냈다.

“단전을 다친 네가 단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잘생기고, 현명하고, 잘생기고, 애들도 잘 키우고, 잘생기고, 도박도 잘하는데요?”

“그런 쓸데없는 것들 말고, 네 무력이 어디까지인지 봐야겠지.”

“그럼 여기서 시험해보시죠.”

리메르가 씩 웃으며 검병을 잡았다.

“자신감은 좋군.”

글렌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흥겨운 듯 미소가 그려졌다.

“오라. 네 전부를 보여봐라.”

“안 그래도 갑니다.”

리메르가 검을 뽑았다. 섬광처럼 뻗어 나간 칼날로 하늘을 가리키고, 곧게 세운 두 손가락으로 땅을 겨누었다.

“검계현신.”

그날 알현실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     *      *

“전검대의 라테인이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 말투마저 평범한 녹발의 남자가 씩 웃었다.

다만 무력은 범상치 않다. 단전에 가득 찬 기운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자 역시 아이언드처럼 벽을 넘어선 괴물이었다.

“네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전검대는 널 원한다. 이쪽으로 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키워주마.”

“키워주신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다. 무력, 정신력 혹은 인맥이나, 원하는 자리도 만들어 줄 수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해주지.”

라테인은 가볍게 웃으며 모든 면에서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분위기 자체는 리메르처럼 가벼웠지만, 이자는 실제로 가벼운 성정이라기보다는 그 가벼움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당신에게 주어야 하는 건 무엇입니까?”

“…….”

라테인이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서 절 원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걸 잘 알고 있네. 그저 재능만 있는 꼬마는 아니라는 건가. 더 마음에 드는군.”

목소리도 변했다. 경쾌함을 담아내던 음성에 비틀림이 실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쪽도 네게 원하는 게 있지만 그걸 지금 말해줄 수는 없지. 궁금하면 전검대로 찾아와라. 네가 싫어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건 장담하지.”

그는 본래의 가벼운 표정과 목소리로 돌아가며 가지고 온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작은 선물이다. 전검대에 온다면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비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해주지.”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별관을 나섰다.

-있는 척하는 놈이지만 속이 텅 비었느니라. 볼 것도 없군.

라스는 허접한 놈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너한테 안 허접한 놈이 어디 있겠냐.’

라온은 정원을 벗어나는 라테인을 보다가 뒤를 돌았다. 자신의 방을 넘어 별관 복도까지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생각보다 좀 많은데.”

리메르와 버렌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사람들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몰릴 줄은 몰랐다.

무력 단체만이 아니라, 정보 단체, 행정 단체, 거의 나오지 않는 호법전까지 움직였다. 선물이 너무 많아서 별관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우후후후!”

“호호호!”

즐거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웃음소리에 위쪽을 보았다. 실비아와 헬렌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선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별관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온 건 처음이야.”

“다 라온 님이 잘난 덕분이죠.”

“그러게 이런 게 자식 덕을 본다는 건가?”

“마님의 복이죠. 복.”

실비아와 헬렌. 아니, 저 둘만이 아니라 시녀들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무시만 받고, 욕받이를 하던 별관이 화제의 중심에 섰고, 그걸 이뤄낸 게 라온이라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입이 아주 귀에 걸렸구나.

‘저들이 좋아하면 나도 좋거든.’

거짓말이 아니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행복해하면 자신도 행복하고 기뻤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감정이 그렇게 움직였고, 그렇게 따라갔다.

-이런 사소한 일로 좋아하다니, 네놈은 크게 되기 글렀느니라. 본왕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건 헛소리지.’

-헛소리라니! 본왕만큼 냉정한 존재가 어디 있다고! 쓰는 힘도 냉기가 아니더냐!

‘그게 제일 미스테리야.’

사소한 도발에도 걸려드는 다혈질이 어떻게 냉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본성은 탐식에, 다혈질이지만, 쓰는 기운은 냉기라니 어그러짐도 이런 어그러짐이 없다.

-이 건방진. 본왕의 본체 앞에서는 쭈구리고 일어서지도 못할 놈이….

‘그럼 본체 가져오세요.”

-끄으윽….

라온은 이를 라스를 놀려주고, 방으로 들어가 선물이 쌓인 벽으로 다가갔다.

‘뭐가 있나 좀 볼까.’

방 안에 있는 선물을 열어보았다. 대부분은 장갑이나, 부츠, 벨트, 검의 수실이나, 검병을 묶는 끈처럼 전투에 사용하는 물품이었다.

물건들을 대충 정리한 뒤 책상에 있는 세 상자를 보았다. 직접 만났던 대주들이 보낸 선물이었다.

‘이건….’

먼저 아이언드가 보낸 작지만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었다. 안에 얇은 장갑이 들어 있었는데, 눈으로 보아도 다른 것과는 질이 다른 물건이었다.

장갑을 껴보았다.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듯 가벼우면서도 손에 딱 달라붙었다. 검을 쥐는 감각도 맨손과 비슷할 정도인데, 질기기는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았다.

“괜히 직접 찾아온 게 아니었군.”

이런 물건을 그저 선물용으로 보내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을 데려가고 싶은 것 같았다.

“이쪽은….”

이번에는 세레나가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이쪽은 부츠다. 갈색 가죽 부츠가 들어 있었는데,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와….”

부츠를 신자, 몸무게도 줄여주는 듯 몸이 가벼워졌고, 조금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도 범상치 않은 장비였다.

마지막으로 라테인이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금색 반지가 들어 있어서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근력 강화인가….’

엄청나다고 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힘이 더 강해진 듯한 감각이었다. 근력 강화 마법이 걸린 반지인 것 같았다.

“나쁘지 않네.”

확실히 대주들이라 그런지 선물들이 보통 수준이 아니다. 장비들의 상태를 확실히 체크 하려고 할 때 문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대답 없이 문이 열리고, 주디엘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선택식에 나올 단체를 조사해왔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전처럼 직접 만들어 온 것 같았다.

“고마워.”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자를 쭉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가문에 속한 대부분의 단체가 적혀 있었다. 모르던 내용도 꽤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선택식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건데 미신 같은 게 하나 있더군요.”

“미신?”

“예. 선택식에 참여한 모든 무력 단체의 수장에게 선택을 받는 검사는 예외 없이 가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 가주님도 모든 단체의 선택을 받았다고 적혀 있더군요.”

“가주라….”

딱히 가주가 목표는 아니었기에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엘. 네 생각은 어때? 어디가 제일 낫다고 보지?”

책자를 다 읽은 뒤 주디엘을 보았다.

“일단 저희의 선택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직계나 직계를 따르는 방계 단체는 가기 힘들죠. 그 외의 선택을 찾아야 합니다.”

“저희라….”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던 주디엘이 저희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저 조금 대견했을 뿐이다.

“사실 지그하르트에서 핏줄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죠. 무력 단체의 상위는 대부분 직계가 가져가니까요.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주디엘이 책자의 중앙 부분을 펼쳤다.

“먼저 아이언드가 이끄는 백련대. 전장을 제집처럼 노니는 실전형 검사들이 주로 소속되어 있고, 많은 임무에 나갑니다. 아이언드의 무력은 직계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쪽도 괜찮다며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는 어제 찾아왔던 세레나가 대주로 있는 공검대.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녀는 욕심이 많은 만큼 많은 임무와 의뢰를 받아 날로 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오늘 왔던 전검대는 조금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나서면 실패 없이 모든 임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주디엘은 책자를 움직여가며 추천할만한 단체들을 하나씩 읊었다. 다만 결국 갈만한 곳은 아이언드와 세레나, 그리고 라테인이 이끄는 단체였다.

“리메르 교관은 인원이 적은 곳으로 가라고 하던데, 그래야 공을 세울 일이 많다고.”

라온은 리메르가 했던 말을 전했다. 물론 잘생겼느니, 도박을 잘하느니 했던 헛소리는 모두 제외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규모가 작은 곳은 그만큼 여러 곳으로 지원을 나가고, 단원의 대부분의 임무에 참여할 수 있기에 공을 세울 기회가 많습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고 바쁘겠죠.”

“그렇군.”

실비아를 직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실적을 쌓아야 한다. 큰 곳에 가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느니, 작은 곳에 가서 많은 임무에 참여하고, 다른 단체에 지원을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작은 곳도 자세히 알아볼까요?”

“아니, 알아볼 필요 없어.”

라온이 책자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갈 곳은 정해져 있거든.”

그 도박쟁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홍보를 해줬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선물만 넘치게 받았네.”

라온은 가득 쌓인 선물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     *      *

선택식 당일.

대연무장에는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비번이나, 휴가를 받은 인원들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연무장으로 나와 꽉꽉 찬 자리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범한 수련생과는 격이 다른 성장세를 보인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의 어떤 단체로 갈지가 지그하르트 내부 초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괴물 기수의 수석인 라온 지그하르트.

하분 성에서 어린 검귀와 화벽이라는 이명을 얻고, 돌아오자마자 중무전을 때려 부순 그가 어디로 갈지는 도박이 이루어질 정도로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대연무장에 모인 사람 중 절반은 라온의 선택식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관객석이 가득 차서 미어터지려 할 때 연무장의 단상 위쪽으로 사람들이 올라온다.

강대한 기파와 섬뜩한 위엄을 두른 검사들의 가슴에는 모양도 색도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단주 혹은 대주. 지그하르트의 진정한 힘이라는 무력 단체의 수장들이 높디높은 단상 위에 차례로 앉기 시작했다.

라온에게 직접 찾아갔던 아이언드나, 세레나만이 아니라 중무전이나, 진무전, 성현전 같은 직계 전주들도 단상 위에 세워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듯 약간의 안부 인사만 나눈 뒤 아래의 연무장을 굽어보았다.

“다들 라온을 노리고 있죠?”

대주와 단주들이 누구를 데려갈지 생각을 정리할 때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검대주 라테인이다. 단상 위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직접 보고 오니까. 더 대단하더군요. 무학을 익히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세가 옅은데, 내부의 완성도는 이미 마스터에 근접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더 강해질 겁니다. 가주님만이 아니라, 원로들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겠어요.”

직계 출신 대주들은 불편한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외부 출신 대주들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내가… 아, 오늘의 주인공이 들어오네.”

라테인은 말을 멈추고, 문을 넘어오는 5 연무장의 검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검붉은색 예복에 지그하르트의 휘장을 달고, 연무장 중앙으로 차례차례 걸어왔다.

그 끝에 라온이 있었다. 금색 수실이 달린 검붉은 예복을 입고, 태양 빛이 어린 듯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라온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무슨 놈의 얼굴이….”

“더 강해진 느낌인데?”

“설마 또?”

“17살에 부단주급이면 불가능한 일까진 아니지.”

대주들은 라온의 외모에 감탄하고, 그가 피워내는 검과 같은 섬뜩한 예기에 경악했다. 그들의 눈빛은 각자 다른 의미로 먹잇감을 노리듯 새파랗게 번들거렸다.

*     *      *

대연무장에 입장한 라온은 다른 검사들과 함께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라온!”

“도련님!”

“라온 님!”

우측 끝에서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서 검사들의 가장 앞에 섰다.

“라, 라온 님. 결정하셨어요?”

도리안이 쫙 벌린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

“결정은 일단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 하는 거지.”

라온이 단상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단주와 대주를 가리켰다.

“그래도 마음은 정하셨을 거 아니에요.”

“대충은.”

“어디에요?”

“저기엔 없어.”

“네?”

그 말에 도리안만이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루난과 마르타, 버렌도 움찔 놀랐다.

“없어?”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다 왔는데!”

“그래. 무력 단체의 수장은 외부에 나가 있는 월하전만 제외하면 다 와 있다고! 설마 행정 쪽으로 가려는 건 아니지?”

세 사람 아니. 검사들 모두가 옆으로 다가와서 어디로 갈 건지를 캐물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평범하게 좀 가자.”

“미친 짓은 내가 아니라, 그 게으른 인간이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라온은 달려드는 검사들을 진정시키며 픽 웃었다.

“게으른 인간? 리메르 교관?”

“그 도박쟁이가 왜?”

“기다려보면 재밌는 일이…음!”

살짝 힌트만 주려고 할 때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가문의 주인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의 절대적인 기파다. 성장할수록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기세에 오싹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그하르트의 진정한 하늘!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천검대의 외침에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벅.

글렌은 연무장을 울리는 그 거대한 목소리를 발걸음 하나로 짓누르며 단장의 중심으로 올라가 금빛 옥좌에 앉았다.

“모두 일어서라.”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대주들도 신입 때로 돌아간 듯 웅장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외쳤다.

“아, 그, 그럼 지금부터 5 연무장 졸업생들의 선택식을….”

“잠깐.”

사회자가 선택식의 시작을 알리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한 놈이. 아니, 한 명이 안 왔다.”

“예? 어? 졸업생 43명은 전부 왔습니다.”

사회자는 직접 숫자를 세보고,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글렌은 단상 아래가 아니라, 단상 위. 대주와 단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 저쪽도 숫자는 이상 없….”

“아, 미안 내 자리야.”

사회자가 당황하며 서류를 확인할 때 좌측의 담벼락 위로 녹색 질풍이 치솟았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훤칠한 남성이 담벼락을 가볍게 박차고 단상 위로 단번에 올라섰다.

“리메르!”

“감히!”

“네놈이 여길 왜 오는 것이냐!”

“지금 이곳은 단주와 대주만이 올 수 있는 자리다!”

카룬과 발데르를 비롯한 직계의 대주들이 죽일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지. 그래서 온 거야.”

리메르는 여유롭게 발을 까딱이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리메르가 아니라, 광풍단의 단주 리메르 님이라고 부르도록.”

“헉!”

“다, 단주?”

“단주가 되었다고?”

그의 선언 같은 말에 대연무장의 모두가 당황하여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은 이런 날도 늦는군.’

다만 라온은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모두가 모였으니, 진짜 선택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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