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아이언드 님.”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대주이자, 한참 전에 마스터에 오른 강자 앞에서도 당당했다. 조금의 주눅도 들지 않은 채 아이언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백련대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백련대의 주 임무가 무엇인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정리해서 오십시오.”
“허….”
그 말에 아이언드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마스터는 육체와 정신 모두 안정화된 극강의 무인. 저런 표정 변화는 쉽게 보기 힘든데, 정말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다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나니까.’
버렌이 말했듯 연수가 끝났으니, 여러 단체에서 신입 검사들에게 영입 제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언드는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서 연수가 끝나자마자 직접 찾아왔다. 그런 사람이라면 한 번 거절했다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듣던 것보다 당돌하군.”
아이언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도 안정화된 듯하다. 괜히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 아니었다.
“당돌한 게 아니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너무 대충 오긴 했으니.”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철벽같은 얼굴과 달리 성격은 시원시원한 것 같다.
“다만 내가 널 원하는 건 진심이다.”
아이언드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번쩍였다.
“뛰어난 무력, 동료를 생각하는 의리, 강자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에 대놓고 미친 짓을 벌이는 배포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그의 진심을 담은 기세가 압력이 되어 번져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식을 치렀지만, 내가 직접 움직인 건 처음이다. 다시 말하지. 라온 지그하르트. 백련대로 오라. 내가 위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마.”
아이언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앞길을 찢어서라도 열어 줄 것만 같았다.
“뭐, 뭐야! 백련대주가 직접 영입하는 거야?”
“대주가 나서는 건 처음 봤어.”
“라온 지그하르트….”
옆길에 있던 검사들이 자신과 아이언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진지한 만큼 라온도 이번에는 제대로 된 거절을 내놓았다.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군. 다른 곳의 제안도 들어보겠다는 건가?”
아이언드가 기세를 꺼뜨리고,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우위에 있을 때 얻을 걸 제대로 얻어야죠.”
“다른 놈이라면 그 입을 부숴놓겠지만, 익스퍼트 최상급의 신입검사라면 오히려 겸손한 말이로군. 좋다. 이쪽도 제대로 준비해서 찾아가지.”
그는 그 말을 하고 뒤를 돌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감각에서는 느껴지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보법. 역시나 마스터다운 무력이었다.
-끄응….
라스는 아이언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네놈을 잘 봐주었다고 좋아하지 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매년 수만이 넘는 마족들이 찾아와 재물을 바치고, 충성 서약을 했느니라. 본왕에 비하면 네놈의 수준은….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제대로 들으란 말이다! 본왕이 마계에서 지낸 일을 듣는 건 기연과도 같은….
‘예이.’
라온은 이번에도 라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별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냄새는….’
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향긋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오오!
라스는 별관의 문을 부여잡은 채 손을 바르르 떨었다.
-애, 애플 미트 파이와 파인애플 피자의 향이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의 냄새도 가득 하느니라!
끝없이 마계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녀석은 입을 닫고 코만 흥흥거렸다.
‘미리 준비해놨나 보네.’
오늘이 연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안 실비아와 시녀들이 파티 음식을 준비한 것 같았다.
-라, 라온 빨리! 빨리 들어가라!
‘어휴.’
음식 냄새만 맡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마왕이라니, 창피해서 같이 다닌다고도 말 못 할 것 같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문을 열었다.
“헉! 도련님!”
“마님! 도련님이 오셨어요!”
“라온!”
“라온 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우르르 나와 현관 앞에 모였다. 주방에 있던 유아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왔어.”
라온은 모두와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 * *
가볍게 샤워하고 나온 라온의 앞으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주르륵 깔린다. 자주 먹던 음식도 많았지만, 처음 보는 요리도 상당했다.
“이 신작은 헬렌이랑 유아가 함께 만든 거야.”
실비아가 중앙에 있는 냄비를 가리켰다. 고기와 해산물, 야채들이 맛깔스럽게 끓여져 있었고, 아래에는 볶은 쌀이 깔려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고. 토마토랑 소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수프인데 정말 맛있어.”
이번에는 널찍한 대접에 있는 붉은 수프를 가리켰다.
“그리고 요거는….”
그녀는 바닷가재가 들어간 피자나, 바싹 말린 뒤 빵에 길게 깔아놓은 햄, 새우가 들어간 투명한 스튜를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이것들 전부 유아의 손이 들어갔지.”
실비아가 옆에 있는 유아의 어깨를 잡았다.
“유아야. 잘 지냈어?”
“네!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재밌었어요!”
유아는 양 갈래머리를 펄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가라앉은 눈동자에 할아버지를 두고 온 아쉬움이 비치지만, 즐거움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동생이나 딸처럼 잘 대해준 것 같았다.
“우리 유아는 왜 이리 귀엽나 몰라!”
실비아가 손을 펼쳐서 유아를 꼭 끌어안았다.
“요리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귀엽기도 하고! 못하는 게 없어!”
그 말과 함께 유아에게 볼을 비벼댔다.
‘많이 당했지.’
라온은 유아와 실비아를 보며 옅게 웃었다. 저건 실비아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잘 지내는 두 사람을 보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끄어어억! 라온.
유아와 실비아 그리고 시녀들을 보며 웃고 있을 때 라스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래를 보니,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전신을 떨며 입에서 냉기를 줄줄이 흘려대고 있었다.
-무, 무얼 하는 것이냐. 음식들이 죽어가고 있다! 어서 무기를 들어라!
‘식으니까 빨리 먹으라는 표현이 너무 세잖아.’
음식들이 나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다.
“라온. 연수 수고했어.”
실비아가 토마토 수프를 떠주며 방긋 웃었다.
“응. 어, 엄마?”
수프를 받으려 했지만, 그녀가 손에서 그릇을 놓지 않았다.
“근데 왜 매번 위험한 짓을 하는 거야? 중무전을 다 때려 부쉈다며!”
“음, 그건….”
“네가 생각이 있는 것도 알고, 강하다는 것도 알지만, 중무전이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
“맞아요. 도련님. 잠도 제대로 못 잤다구요.”
실비아가 살짝 눈썹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시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
카룬이 실비아와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니, 혹시나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할까 봐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다 도망칠 구멍은 만들고 움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라온은 목소리에 만화공의 기운을 담아 모두를 안심시켰다,
“네가 현명한 건 알고 있지. 다만 카룬 오빠는 그렇게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야. 웬만하면 부딪치지 마.”
“응.”
“항상 대답은 잘한다니까.”
실비아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수프를 떠주었다.
-다 됐느니라. 빨리, 빨리….
라스는 정말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서 먹으라고 손짓을 하는 게 꼭 저승사자 같았다.
‘징해.’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들었다. 실비아가 떠준 수프부터 먹으려고 할 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끝에 있던 주디엘이 식당을 나갔다. 다만 그녀는 10초도 되지 않아서 돌아와 창백한 얼굴로 라온을 불렀다.
“도, 도련님을 찾아오신 손님입니다.”
“손님?”
“예. 직접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누구길래 저런 표정이지?’
-방해꾼은 죽인다! 그 누구라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라스와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큰 조명이 꺼진 별관 입구를 화사하게 밝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이년이냐! 본왕이 당장에 얼려 버리겠느니라!
냉기를 뿌리려는 라스를 팔찌에 억지로 밀어 넣고, 여자를 살폈다.
머리는 타오르는 듯 붉었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투명한 푸른빛이었다. 이목구비 역시 화려하여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녀였지만 라온이 보는 건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강해.’
끝을 모르는 강대한 기파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마스터. 조금 전에 본 아이언드에게도 밀리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듯한 강자였다.
“수련생 입문 시험에서부터 널 봐왔다.”
목소리도 그 눈빛처럼 맑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뒤에 말을 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정신과 상황을 이용하는 재치 그리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천재적인 무재에 반했다.”
그녀가 길쭉하고 하얀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은 세레나 칼빈. 공검대의 대주이며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 사람이다. 내 힘이 되어다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공검대주 세레나님이 직접 오시다니….”
“이, 이게 꿈이 아니죠?”
“대주님들 중에서도 상위에 계신 분인데….”
“도, 도련님!”
뒤에 있던 시녀들은 세레나의 정체를 듣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레나 칼빈이라….’
들어본 이름이다. 직계도, 방계도 아닌 봉신가문 출신으로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선언한 여걸. 얼음장처럼 냉정하면서도 불처럼 화끈한 무력을 뽐낸다는 무인이었다.
‘이 사람도 날 원한다는 건가.’
세레나도 아이언드처럼 자신을 무력대에 넣고 싶어서 이 시간에 찾아온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의 무력 단체들은 직계나 최상위 방계가 아니라면 차별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내가 대주로 있는 공검대는 달라. 실력과 실적으로 평가하지. 너에게는 가장 좋은 보금자리가 될 거다.”
“차별이라….”
실제로 하위 방계들은 실력과 상관없이 대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눈빛이다. 이전부터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어.”
세레나는 그저 담담한 눈빛을 발하는 자신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와 함께 이 가문의 정점에 서지 않겠나?”
“라온. 대체 누가…아!”
현관으로 나오던 실비아는 세레나를 마주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세레나 님?”
“오랜만이군. 실비아.”
세레나는 실비아를 보고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은 그저 인사다. 다음에 선물을 챙겨서 다시 찾아오지.”
그녀는 잠시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대로 별관을 나섰다.
“그대로시네.”
실비아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꼭 모았다.
“아는 사이야?”
“그래. 엄마가 신입검사일 때 부단주셨거든.”
그녀는 그때를 그리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똑같으셔.”
“부단주일 때도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했다고?”
“응.”
실비아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네.’
지금처럼 대주라면 모를까. 부단주 때 그런 말을 하다니, 간이 보통 큰 게 아니었다. 호걸이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닌 것 같다.
‘멋있군.’
-멋은 모르겠다만, 맛은 죽고 있다!
대단하다고 감탄을 할 때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빨리 가서 먹자고!
* * *
다음날.
라온은 성공리에 연수를 끝냈다는 보고를 위해서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안은 이미 수련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리메르는 역시나 지각이었다.
“라온! 호라인 님을 이겼다며!”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미쳤다! 미쳤어!”
“너 때문에 내 활약은 다 묻혔다고!”
“이 자식은 진짜 물건이라니까!”
“혼자 드래곤 하트라도 먹은 거야?”
라온을 본 수련생들이 다가와 살갑게 웃었다. 더 이상 질투나, 시기는 없었다. 뛰어난 활약에 대한 감탄과 미소만 가득했다.
“…….”
“흥. 수석이면 그 정도는 해야지.”
버렌은 별말 없이 이마를 찡그렸고, 마르타는 5 연무장의 수석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팔짱 낀 채 콧방귀를 끼었다.
“라온. 미안해. 아이스크림이 아니었어. 대신 나중에 나눠줄게.”
루난은 소매를 꾹 잡은 채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여기에 와야 마음이 편해진다니까.’
별관만큼은 아니지만, 이 5 연무장도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몇 없는 공간이었다. 이제 이들과 이곳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너희들은 지치지도 않냐.”
담벼락 위에서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메르가 풀어헤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지각입니다. 교관님.”
버렌이 리메르의 앞을 막아섰다.
“훈련 다 끝났는데, 지각은 무슨 지각.”
“약속시간을 스스로 정하셔놓고, 늦었으니 지각이죠.”
“살다 보면 한두 번은 늦잖아.”
“교관님은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늦으시지 않습니까.”
“아, 깐깐하기는! 너 그러다가 머리 빠진다!”
리메르는 보법을 사용하여 버렌을 뛰어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음….”
버렌은 양손으로 푸른 머리를 쓱 쓸어내린 뒤에 손가락을 확인했다. 별로 뽑히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험, 모두 연수 수고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각 단체가 어떻게 훈련하고 무엇을 하는지 대충은 알았으리라 본다.”
리메르는 버렌이 더 따지기 전에 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모르는데….’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중무전에 가서 한 일이라곤 부수고, 때리고 또 부순 것뿐이다. 강해지긴 했지만 중무전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일주일 뒤.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택식이 시작된다.”
선택식은 5년간의 훈련을 끝내고 각자의 소속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이미 왔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부터 대나 단에서 너희들에게 영입 제안을 할 것이다.”
리메르의 시선이 잠시 라온을 향했다.
“너희들이 쌓아 올린 5년이 결정되는 일이니까. 그저 눈앞의 명성이나, 이익에 매몰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라.”
그는 평상시와 달리 진지하게 조언해주었다.
“힌트를 조금 주자면 작은 단체를 선택해라. 큰 단체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있어서 임무에 나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반면 작은 단체는 다양한 임무에 대부분의 단원이 동원되기 때문에 실적을 쌓기가 좋다. 그리고….”
리메르가 본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단장이 잘생길수록 좋다. 다정다감하고, 도박을 잘하면 더더욱 좋지, 아이들을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도 중요하고, 강한 검술과 우아한 보법. 특히 바람 같은….”
갑자기 그의 이야기가 옆길 그것도 머나먼 옆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저 귀때기 자식 또 시작이네. 말이 더럽게 많느니라.
‘그러게 누구랑 비슷해.’
-저렇게 말이 많은 놈이 또 있단 말이냐?
‘그래. 더 많지.’
-미친놈이로고.
‘그게 너야’라는 말을 참으며 리메르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때 버렌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거 가져가라.”
버렌이 내민 상자를 받았다. 슬쩍 열어보니 보석이 달린 금색 수실이 들어 있었다. 빛깔과 매듭의 형태 그리고 중앙의 보석을 보니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걸 왜….”
“예복에 붙이는 보석 수실이다. 나는 남아돌지만, 네놈 것은 텅 비었으니 가져다가 달아라. 수석인 네놈이 초라하면 우리도 없어 보이니까. 제대로 차고 오도록.”
‘이번 연수 때를 본 건가.’
연수 시작과 끝에 입은 자신의 예복 장식은 수수했다. 실비아와 헬렌이 정성을 다해서 구했다고 하지만 다른 직계나 방계에 비해 화려하지 못하다. 그걸 생각해서 이 수실을 준 것 같았다.
“고맙다.”
“주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버렌은 손을 휘휘 젓고서 옆으로 떨어졌다.
‘은인이라….’
어제 말했던 대로 빚을 갚는 거겠지.
빚은 갚아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라온이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이지만 리메르의 헛소리가 덜 지겹게 들려왔다.
* * *
후우.
라온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겠구만.’
리메르의 헛소리와 라스의 주절거림에 끼어 한 시간을 시달리다 보니, 실전을 치른 것보다도 더 피곤했다.
빨리 가서 수련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원을 넘었을 때 별관으로 향하는 중앙 길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별관의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로 문이 막혀 있었다.
‘음?’
포장을 보니, 문 앞의 상자는 전부 선물이었고, 줄을 선 사람들도 하나같이 강대한 기세를 뿜어내는 무인이었다.
‘대체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별관 앞으로 갈 때 자신을 알아본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라온!”
“라온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우리 격호단에 와라!”
“아니, 우리 적결대가 네 뒤를 받쳐주겠다!”
“무슨 소리! 라온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곳은 우리 대명전이다!”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은 적을 본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들어 자신을 에워쌌다. 들어본 단체, 들어보지 못한 단체들이 각자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들에게 오라고 외쳐댔다.
“음….”
이제 이해가 간다. 이들 모두가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서 본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라온!”
라온이 사람들을 차례로 살필 때 옆으로 실비아와 시녀들이 다가왔다.
“이분들 모두 너를 영입하고 싶어서 찾아오셨대!”
“저 물건들은 전부 라온 님 선물이구요!”
“저게 다가 아니에요! 안에도 더 있어요!”
실비아와 시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별관에 있는 수많은 선물을 가리켰다.
“네가 정말 대견해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별관과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에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실비아의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벌써 그러면 곤란해.”
라온은 소매로 실비아의 눈가를 훔쳐주며 옅게 웃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지금은 출발선일 뿐. 눈물은 직계에 올라가서 흘려도 늦지 않는다.
‘언젠가는 꼭.’
그녀에게 그 광경을 다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 * *
리메르는 오랜만에 가주전 알현실 내부에서 글렌과 마주하고 서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이곳저곳의 스카웃을 받고 있지만, 역시나 으뜸은 라온입니다.”
그는 흥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방계가 운영하는 무력 단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별관으로 선물과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이언드와 세레나는 어제 직접 찾아갔죠. 모두가 라온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몸이 달아오른 상태입니다.”
“흐음….”
글렌은 그 보고가 마음에 드는지 살짝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신입 검사의 무력이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건 몇백 년. 아니, 지그하르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뭐, 그렇지.”
“정말 물건입니다. 물건! 누군지 몰라도 정말 잘 키웠다. 캬!”
리메르는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가주님도 라온만큼 대단하셨겠죠?”
“나도 많은 대주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지금의 라온만큼은 아니다. 그 녀석은 당년의 나를 뛰어넘었어.”
돌처럼 굳어버린 듯한 글렌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조금 올라간 입매와 더불어 확실한 미소가 지어졌다.
“보셨죠. 본인보다도 손주를 띄우잖아요. 저게 바로 손주 바보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역시 가주님은 어쩔 수 없는 라온바라기인….”
리메르가 옆에 있는 로엔에게 귓속말을 중얼거렸고, 로엔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시끄럽다!”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억지로 입매를 끌어 내렸다.
“이런 말을 하자고 이곳에 온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고 싶은 말이라뇨?”
“네놈을 하루 이틀 보느냐. 정신 나간 듯한 그 눈빛. 오늘은 오랜만에 들어줄 만한 말을 하겠군.”
“역시 절 잘 아시네요. 그럼 뜸 들이지 않겠습니다.”
리메르의 가벼운 분위기가 씻은 듯 가라앉았다. 거센 폭풍이 어린 듯한 정심한 눈빛을 발하며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