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이게 이런 식으로 적용되네.’
라온은 올라간 능력치를 확인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틀 동안 숙면을 취했다고 모든 능력치가 오르다니, 말 그대로 잠만 자도 강해져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식탁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으로 가득하고, 능력치가 오른 희열이 전신으로 번지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잠 좀 잘 잤다고 모든 능력치를 1씩 올려준다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녀석의 머리 위로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처럼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딴 거지 같은 능력을 넘겨주다니! 슬로스. 이 멍청한 자식!
라스가 분노를 일으키려 할 때 라온이 빠르게 수저를 들어 해산물 스튜를 한입 삼켰다.
-평생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어주지! 그리고 네놈은 지금 당장… 옥!
해산물 스튜의 달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입안을 스치자 라스의 말이 뚝 끊겼다.
-오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에 분노와 냉기를 일으키던 라스가 우뚝 멈춰선 채로 탄성을 흘렸다.
-조, 좋구나. 첫 맛은 달달하고, 끝맛은 시원한 게 본왕의 마음에 쏙 들어!
녀석은 하늘로 상승하는 입꼬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음 음식을 가리켰다.
-무얼 하는 게냐! 당장 포크를 들고 크림 새우를 찍어라! 음식이 끊긴다면 네 목숨도 끊어진다고 생각하고 빨리 저 새우를 입에 넣어라!
‘입맛 없다며.’
-짐승처럼 다 처먹는 네놈은 모르겠지만, 입맛이라는 게 없다가 생기고, 생겼다가 없는 것이니라.
‘그렇다고 해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데….’
-닥치고 좀 먹어!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능력치도 올랐으니, 기분 좋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가벼운 음식부터 시작해서 무겁게 가야 한다는 라스의 조언을 들어주며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천천히 비워갔다.
-본왕의 선택이 어떠하냐. 음식의 맛만큼이나 그걸 즐기는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중요한 법이지.
‘난 잘 모르겠어. 똑같은 거 같은데.’
-그러니까 네놈이 짐승이라는 거다. 미식의 미 자도 모르는 놈.
라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마계에는 마슐랑이라는 식당의 등급이 있느니라. 해골이 많을수록 맛이 좋은 식당이지. 그리고 본왕은 그 마슐랑 해골의 개수를 결정하는 심사위원 중….
‘다 괜찮지만 스튜가 제일 낫네.’
-본왕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마신제 때마다 본왕에게 음식을 한 보따리씩 싸오는….
‘맛을 떠나 국물이 있어야 배가 차는 것 같군.’
라온은 라스의 말을 강물처럼 흘려버리며 본인이 할 말만을 중얼거렸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라온이 계속 라스의 말을 무시하며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비우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그놈인가?”
“라온 지그하르트….”
“저 녀석이 호라인 님을 이겼다고?”
“그게 말이 돼? 갓 검사가 된 놈이잖아.”
“사기를 친 게 분명해. 이번에 나가서 보았잖나. 일시적으로 힘과 오러가 강해지는 약을.”
“확실히 가능성은 있지.”
“근데 처먹기는 또 더럽게 잘 처먹네. 중무전 소속도 아니면서.”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이곳에 있으며 못 보던 얼굴. 카룬이 돌아오면서 복귀한 중무전의 검사들인 것 같았다.
‘아직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했었지.’
동굴에서 나왔을 때 우렉은 중무전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했으니, 조금 더 부숴도 괜찮을 거다.
‘만족했지?’
-본왕이 요즘 소식을 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느니라.
라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를 두드렸다.
“…….”
식탁에 그릇 10개가 싹싹 비워져 있었지만, 소식이란다. 역시 이 녀석은 <분노>보다 <탐식>에 가깝다.
라온은 옅게 한숨을 쉬며 빈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놈이야.”
“배경이 없으니, 어딜 가든 팽 당하기 좋지.”
“그전에 뒤질지도 모르고.”
그때까지도 테이블에 앉은 검사들은 줄창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
저벅.
라온은 이제 노골적으로 주절거리는 검사들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우두둑!
파괴왕의 힘까지 어린 손가락으로 테이블 중심을 눌렀다. 무언가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테이블 중앙에 일그러진 구멍이 뚫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찌질하게 뒤에서 주절대지 마시고, 앞에서 하시지요. 선배님들.”
라온은 검사들의 얼굴을 쭉 훑으며 빙긋 웃었다.
“아까 못 믿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직접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뭐?”
“직접 대련해보시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아실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좋다!”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네가 정말 속임수 없이 중무전의 검사들을 꺾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파가 상당하다. 익스퍼트 상급 수준. 강한 무력에 어울리는 자존심이었다.
“얼마든지.”
라온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식당에 피해를 줄 필요는 없으니 나가시죠.”
장발의 남자가 코를 찡그리며 먼저 문을 나섰고, 라온과 다른 검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는 식당에서 가장 가까운 소연무장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을 들어라.”
“오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장발의 남자는 고민하는 듯 눈매를 좁혔다. 호라인을 꺾었다는 소문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사용한다. 전력으로 덤벼라!”
“조장!”
“위, 위험합니다!”
다른 검사들이 말리려고 했지만 장발의 남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전력이라….”
당신은 볼 자격이 없는데.
라온이 차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대, 대련 시작!”
장발의 남자가 옆으로 시선을 주자, 다른 검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읍!”
장발의 검사가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탄력 있는 근육과 제대로 익힌 보법의 조화로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내뻗는 일검. 살기는 없지만, 어디 하나 부러뜨릴 듯한 기세였다.
‘그 정도라 이거지.’
라온이 사선으로 튼 칼날을 내리쳤다.
캬아앙!
장발 검사의 손아귀에서 검이 뽑혀 나갔다. 당황한 그의 복부에 왼쪽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막힌 속이 뚫리는 듯한 시원한 소리와 함께 장발 검사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게처럼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흐음.”
라온은 검을 어깨에 걸치며 다른 검사들을 돌아보았다.
“어어….”
“하, 한 방에 조장의 검이 튕겨 나간다고?”
“손아귀가 찢어졌어. 이게 무슨….”
“히, 힘이 트롤이라는 게 진짜였어?”
검사들은 정신을 놓은 장발 검사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라온은 당황한 검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음.”
2주 만에 귀환한 파괴왕의 재림이었다.
* * *
우렉이 책상에 앉아서 다급하게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고 레프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총관님!”
“지금 바쁘다.”
“이것도 급한 일입니다!”
급하다는 말에 우렉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빨리 말해.”
“라온. 그 미친놈이 또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레프가 질렸다는 듯 동그란 볼을 파르르 떨었다.
“사고가 터졌다고 하길래 가보니까. 어제 복귀한 검사 10명이 눈을 뒤집어 깐 채로 기절해 있었습니다.”
“후우, 이번에는 이유가 뭐야?”
“기절한 놈들이라 물어볼 수 없었고, 라온 놈의 말로는 먼저 시비를 걸어서 방어했다고….”
“그 망할 자식….”
우렉이 원목 책상을 손가락으로 거세게 긁었다. 시비를 걸었다는 건 진짜겠지만, 그곳에 있는 전부를 때려눕힐 필요는 없었을 거다.
한 명만 팼어도 기가 죽어서 덤빌 생각이 사라졌을 테니까. 놈은 일부러 모두를 깨부순 게 분명하다.
“애들 상태는.”
“목숨에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2주 정도는 요양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대련하다가 벽이랑 조, 조금 비싼 나무를 부숴서….”
“나무? 잠깐! 그놈들 어디서 싸웠어!”
“식당 옆에 있는 소연무장인데, 벽이 무너지면서 나무도 같이 꺾였습니다.”
“서, 설마….”
우렉은 멍한 눈으로 책상을 보았다.
“예. 그 사이란 나무입니다.”
“끄아아악! 라온!”
사이란은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어서 굉장히 비싼 값에 팔리는 나무다. 그걸 부러뜨렸다니,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결국 그놈이 준 피해가 금화 1만 개가 넘어가는구나….”
아찔하다. 1만 개면 돈에 관해서는 크게 터치하지 않는 카룬도 눈을 부라릴 정도의 금액이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다 빼.”
“예?”
“그놈에게 절대 시비를 걸지도 말고, 걸어와도 그냥 무시하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레프가 경례하듯 손을 올리고 달려 나갔다.
우렉은 머리를 툭툭 치면서 서류 작성을 빠르게 끝내고, 중무전의 중심에 있는 카룬의 집무실로 향했다.
“후우….”
병든 닭처럼 한숨을 내쉬며 묵직한 인상을 주는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손발이 다 떨리네.’
이 방의 주인인 카룬 지그하르트는 분쟁지역에 가서 전쟁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한쪽을 아예 몰살시켜버렸다.
글렌이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말했던 대로 2주 만에 돌아왔을 것이다. 지그하르트 강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이름을 올린 괴물다웠다.
다만 그 괴물은 지금 기분이 나쁜지 닭살이 올라올 정도로 불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두꺼운 문밖에서도 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당연하겠지.’
라온이 중무전의 장비와 훈련을 깨부수고, 검사들을 팼으며, 전뢰단 부단주 호라인을 꺾었다는 소문이 가문 전체로 퍼졌으니 카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무전의 명성도 떨어졌고.’
중무전은 최강까진 아니지만 가장 용맹하다고 불리는 무력 단체다. 전력의 대부분이 나가 있었다고 해도 이제 막 검사가 된 라온 한 명에게 탈탈 털렸으니,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얻은 명성보다 라온이라는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떨어진 명성이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망할 리메르….’
처음엔 그 소문을 퍼뜨린 놈을 잡아 혀를 자르려 했지만 찾을 필요가 없었다. 미친 빨간 머리 엘프 자식이 정체를 숨기지도 않고, 동네방네에 다 떠들고 다녔으니까.
똑똑.
우렉은 언젠가 리메르를 잡아 족치겠다고 다짐하며 두터운 문에 손등을 댔다.
“들어와라.”
똑똑 소리가 두 번 이어지기도 전에 안에서 들어오라는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을 고르고 찬찬히 문을 열었다.
고오오오.
문을 열자마자 피부가 말라붙는 듯한 살벌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우렉은 마른침을 삼키고 무릎을 꿇었다.
“저, 전주님을 뵙습니다!”
글렌과 달리 대우받는 것을 좋아하는 카룬은 우렉의 정중한 인사를 끝까지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아, 예!”
분노가 가득 담긴 음성에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보고해라.”
그 한 마디에 오싹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금까지 일어난 걸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말하라는 뜻이었다.
“서, 서류로 만들어왔습니다.”
“네 입으로 말해라.”
카룬은 우렉이 만든 서류를 쓱 훑어 내린 뒤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전주님의 지시대로 라온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렉은 노인처럼 허리를 굽혀 최대한 불쌍한 모습으로 라온이 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지시받은 대로라는 말과 레프가 마음대로 움직였다는 말을 중간중간 넣어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금 놈은 1번 동굴을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번 동굴에서 버텼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카룬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다, 다행히 전주의 지시는 거의 완수했습니다. 일단 그놈의 근력과 민첩성은 트롤급이고, 오러를 사용한다면 익스퍼트 최상급도 꺾을 수 있습니다. 마스터에는 닿지 못했지만, 벽이 코앞에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우렉은 카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말을 이었다.
“마나가 비틀어진 1번 동굴에서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걸 보면 특별한 능력이 있는 무학을 익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지러움이나, 마나가 꼬이는 진법 사용은 금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카룬은 그 말에 동의하는지 아무 말 없이 옅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건데, 놈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약점?”
꽉 막혀 있는 듯했던 카룬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예!”
살아날 구멍이라 생각한 우렉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호라인과의 대련에서 조금의 냉기에 노출되었을 뿐인데, 동상에 걸렸습니다. 동굴에서도 손이 빨간 걸 보면 확실합니다. 그놈은 냉기에 굉장히 약합니다.”
“냉기라….”
“지금은 모두 잊고 있지만, 라온은 본래 냉기에 마나회로가 막혀 있는 체질이었습니다. 이건 확실히 먹히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우렉은 관심을 보이는 카룬에게 한발 다가가 주먹을 움켜주었다.
“냉기를 이용한다면 적은 비용으로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
카룬에게서 풍겨 나오던 거북한 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살았다는 현실감이 들자, 등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그놈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건드리지 말고 놔두어라.”
카룬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호라인을 꺾은 놈이니, 제압하려면 최소 마스터급이 필요해. 그렇다고 정말 마스터를 보내봤자, 17살짜리를 힘으로 제압한다고 욕이나 먹겠지. 며칠 안 남았으니, 멋대로 하게 놔둬. 어차피 얼마 살지도 못할 놈이니까.”
“훌륭하신 판단이십니다.”
우레은 카룬과 같은 생각을 했음에도 그를 띄워주었다. 다만 감탄한 건 사실이다. 카룬은 분노한 와중에도 냉정한 판단을 내렸으니까.
“다만 준비는 해두어라.”
“준비라고 하신다면….”
“그놈을 폐인으로 만든 다음 그 일을 뒤집어씌울 허수아비가 필요하지 않느냐.”
“아!”
“에덴. 아니, 발데르 녀석도 괜찮겠군.”
카룬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본인의 동생조차 장기 말로 사용하려는 듯한 기세였다.
“계, 계획을 짜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렉은 팔다리에 닭살이 오르는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막내 도련님은 5번 동굴에서….”
“그놈 이야기는 필요 없다.”
카룬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실력이 조금 괜찮아졌나 했더니, 눈빛이 망가져서 돌아왔더군.”
“어….”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우렉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독기도, 악의도 없이 순해 빠졌다. 재능이 조금 있어서 키워보려 했더니, 그 정신에 그 수준이면 신경 쓸 필요 없지.”
“그, 그럼 선택식에서….”
“그래. 뽑을 생각 없다. 셋째와 넷째처럼 처리해.”
“…….”
셋째와 넷째처럼이라는 소리는 이 중무전에 그의 자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신은 카룬.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라온의 도발에 어설프게 당한 머저리들도 정리하고.”
“알겠습니다.”
우렉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
그렇기에 따를 만한 인간이었다.
* * *
라온이 두 번째 파괴왕 짓을 시작하려 했지만, 첫날 빼고는 수확이 없었다. 더 이상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이쪽에서 도발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실수인 척 기물을 부수면 우렉이나, 레프가 나와서 말렸지만, 대주나, 부대주, 단주급 강자들은 어디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련하는 척하면서 몇 가지 장비나 기물을 때려 부수며 시간을 죽이다 보니, 어느새 5일이지나 결국 연수가 종료되었다.
“지난 한 달간 수고 많았고, 앞으로….”
라온은 단상 윙에서 어설픈 말을 내뱉는 레프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똑똑하네.’
카룬은 시비를 받거나, 걸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중무전 검사들에게 자신을 아예 무시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 같다.
‘괜찮은 방법이야.’
자신을 제어하려면 대주나 부대주, 단주 같은 마스터급이 와야 하고, 혹여나 이긴다고 해도 본전이고, 지면 개망신이다. 모두를 물려서 부딪칠 일을 없게 만드는 건 좋은 방법이었다.
‘뭐, 그래도 할 건 다 했지만.’
대충 계산해도 중무전에 금화 15,000개에 가까운 손해를 입혔고, 때려눕힌 검사들은 20명이 한참 넘었다. 줄 피해는 다 줬고, 얻을 명성은 전부 얻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카룬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그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으로 속 좁은 인간이었다.
-스트레스는 확실히 풀렸겠군. 그렇게 원 없이 때려 부쉈으니까.
라스는 질린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레프의 지루한 말이 끝나고, 몇 없는 검사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물론 자신이 아니라, 옆에 있는 버렌을 향하는 박수였다.
“바로 돌아가는 거냐?”
버렌이 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야지. 이제 여기에서 할 건 없어서.”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하지.”
그는 따라오라는 듯 사람이 없는 소연무장을 가리켰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의 뒤를 따라갔다.
“네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
버렌은 연무장의 끝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뒤를 돌았다.
“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해.”
거친 눈매와 달리 눈빛은 굉장히 맑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싸우지 말라는 건가?”
라온이 담담하게 입을 떼며 버렌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네가 시작하지 않았으나, 끝을 내는 건 네가 하는 게 맞는 일이다. 다만….”
의외의 말이라고 생각할 때 버렌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다. 내가 5살 때 아버지께서 직접 손에 수련검을 쥐어 주시고, 검술을 알려주신 건 지금도 잊지 못해.”
“…….”
“그때부터 내 목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보게 만들 거다.”
“그런가.”
라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문 전체가 비난하는 실비아를 옹호하듯 버렌은 밴댕이처럼 속이 좁고 찌질한 카룬을 훌륭한 아버지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전부 다르다. 전생이라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겪은 지금은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그렇기에 네가 아버지에게 싸움을 걸면 내가 막을 것이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고 해도.”
“반대? 네 아버지가 내게 검을 날려도 막겠다고?”
“그래.”
버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넌 내 라이벌이자, 은인이니까.”
“목숨을 구해준 건 이제 잊어도 되는데.”
“목숨을 구해준 것도 맞지만, 넌 내 아집을 깨준 은인이다. 그 이상은 묻지 마라. 민망하니까.”
버렌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귓볼이 빨개진 걸 보니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은인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의 싸움은 내가 막을 것이다. 내 말 똑똑히 기억하고, 선택식이나 확실히 준비해! 너한테는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가 갈 테니까!”
그는 그 말을 하고 보법까지 사용하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눈깔이에게 독기가 빠지니까 영 별로구나.
라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전에는 건방지다고 싫어하더니, 지금은 또 마음엔 안 든단다. 마왕의 취향은 참으로 까다로웠다.
라온은 멀어지는 버렌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리 말해준 버렌에게는 미안하지만, 카룬을 놔둘 생각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놔두어도 저쪽에서 먼저 칼날이 들어올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끝은 날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 * *
-애플미트파이, 파인애플 쿠키, 파인애플….
라온이 먹고 싶은 음식 노래를 부르는 라스와 별관으로 돌아갈 때였다.
“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중앙 도로 위에 키가 큰 중년인이 서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턱은 각져 남성적인 외모를 가졌고, 풍겨내는 기운은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장대했다.
마스터. 그것도 한참 전에 그 경지를 밟은 강대한 무인이 푸른 눈을 번쩍이며 다가왔다.
“나는 백련대의 대주 아이언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라온 지그하르트. 백련대에 들어와서 내 검이 되어라.”
“싫습니다.”
라온은 아이언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어?”
절대로 변하지 않을 듯한 아이언드의 냉막한 표정이 단숨에 깨졌다.
“보자마자 검이 되라니, 너무 갑작스럽군요.”
“다,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는 이상하다는 듯 턱을 살짝 틀었다.
“제가 남에게 단도직입적인 건 좋아하지만, 남이 제게 단도직입적인 건 싫어합니다.”
라온은 당연한 거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허….”
이런 단호한 거절은 생각도 못 했는지 아이언드의 눈동자가 잠시 풀렸다.
-모르면 당황스럽지.
팔찌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라스가 피식 웃었다.
-이놈이 돌았는데, 한 번 더 돈 놈이라는 걸.
‘그러면 정상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