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라온은 동굴을 나가기 전에 무엇을 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파괴왕>.
상태 : 혹한의 저주(두 가닥).
특성 : <분노>, <나태>, 불의 고리(6성), 수속성 저항력(5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4성), 글래시아(4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2성), 불굴의 의지(2성), 요기적응(1성), 집중(1성).
근력 : 138.
민첩성 : 134.
체력 : 132.
기력 : 136.
감각 : 152.
분노 : 25.
중무전에 온 3주 동안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냈다. 지금이라면 호라인을 훨씬 쉽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가닥이라….’
아홉 가닥이었던 혹한의 저주가 이젠 두 가닥밖에 남지 않았다. 예상이지만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완전히 사라질 것 같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전부 사라진다면….’
이전과는 격이 다른 속도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경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그러면….’
라온은 이번에 얻은 파괴왕의 칭호를 열어 보았다.
<파괴왕>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파괴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무언가를 파괴할 때 근력에 6%의 가산이 붙는다.
설명을 읽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6%의 가산이면 지금 138의 근력이 무언가를 파괴할 때 8.28의 근력이 추가되어 146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8이지만, 기본 힘이 올라가면 저 수치도 올라갈 테니, 성장할수록 효과가 좋아지는 칭호였다.
-아….
기뻐하는 자신과 달리, 라스는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괴롭도다. 삶이란 이리도 괴로운 것이었나?
녀석은 이상한 말을 읊으며 눈을 멍하게 떴다. 2주간 해를 못 봐서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갇힌 채 빼앗기기만 하는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금방 나갈 거야. 나가서 맛난 거 먹어야지.”
-그건 그렇군!
순식간에 기운을 차린 라스가 기지개를 켰다.
-무얼 하는 것이냐! 당장 나가거라!
“…….”
내가 하긴 했지만, 쉽다. 너무 쉬워서 무서울 정도. 이 녀석이 정말 분노의 군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 가자. 가.”
라온은 나가다 말고 멈춰서 뒤를 돌았다. 스스로 지워버린 선조의 흔적들을 쭉 훑었다.
‘다시 볼 수 있겠지.’
자신을 이끄는 듯한 그 금발의 검사를 또 만나길 바라며 동굴의 출구로 향했다.
잠도 자지 않고, 무리를 했기 때문에 몸이 무거웠지만, 기분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 * *
우렉은 곧 라온과 버렌이 나올 동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전주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카룬 지그하르트는 분쟁 지역에 가자마자 상황을 종료시켰지만, 글렌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그곳에서 일주일을 더 머물러야 했기에 아직 중무전에 도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중무전에 남아 있는 간부인 레프와 호라인 그리고 다른 무력이 뛰어난 검사들을 데리고 동굴 앞에 섰다.
정오쯤 되었을 때 5번 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얼굴이 조금 하얘진 버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생각보다 더 눈이 부시네요.”
손을 들어 햇빛을 막는 버렌은 2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세를 풍겼다. 마나의 흐름이 꼬여 있는 동굴에서 전력을 다해 수련한 것 같았다.
우렉은 버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군.’
그분의 아들다워.
대부분의 검사들이 시간 낭비만 하다가 돌아가는 저 동굴에서도 수련을 이어가다니, 대단한 녀석이었다.
“총관님.”
우렉을 알아본 버렌이 다가와 고개를 꾸벅였다. 눈이 부시는지 여전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라온은 아직입니까.”
“그래. 기다릴 테냐?”
“아뇨. 볼 필요 없습니다. 그 녀석은 분명 강해져서 나올 테니까요.”
“그걸 알면서 그냥 가겠다고?”
“라온은 라온. 저는 저니까요.”
버렌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과 호라인의 대련을 보았음에도 자신감과 여유를 가진 태도. 괜히 중무전주의 피를 이은 게 아니라는 듯한 안정된 눈빛이었다.
‘성장했군.’
예전 아집으로 가득 찼던 아이는 어느새 크고 단단한 무인이 되었다. 다른 간부들도 버렌의 자신감을 보며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쉬어라. 이틀간 휴식이다.”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1번 굴을 보다가 중무전 숙소로 향했다.
라온은 버렌이 떠나고 3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저 지독한 동굴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을 할 때였다.
쿠와아아아앙!
1번 동굴 안에서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이 울렸다. 톱으로 돌덩이를 써는 듯한 절삭음은 덤이었다.
“초, 총관님!”
“저 미, 미친놈이 설마….”
우렉과 레프가 눈을 마주치며 손을 떨었다. 지금 이 순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파괴왕 새끼, 동굴도 때려 부수고 있어!’
예상이 아니라, 확실했다. 파괴본능을 가진 그 미친놈은 저 동굴도 깨부수는 게 분명했다.
“크윽….”
우렉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중무전에 금화 9713개의 손해를 입히고, 이젠 동굴까지 부수다니, 뭐 저런 또라이가 있나 싶었다.
“초, 총관님. 지금이라도 들어갈까요?”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프와 간부들이 눈동자를 떨며 아직도 무너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동굴을 가리켰다.
“아니, 대기한다.”
우렉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들어갔다가 무너지는 동굴에 묻힌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차피 저놈도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 얼마 부수지 못하고 곧 나올 거다.”
쿠구구궁! 콰아아앙!
다만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는 1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저 미친놈! 대체 얼마나 때려 부수는 거야!”
어이가 없다. 동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건지 아예 산을 박살 낼 기세였다. 정신이 나가다 못해 대가리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총관님!”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적습입니까?”
중무전에 있던 검사들도 그 소리를 듣고, 무기를 쥐고 튀어나왔다.
“별일 아니니 돌아가서 할 일들이나 해라.”
그냥 동굴이 무너지고 있다고 하며 검사들에게 돌아가라 지시했다. 어차피 저들은 이곳에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된다.
쿠구구….
다시 동굴 앞에 간부들만 남았을 때 1번 동굴에서 계속되던 굉음과 흔들림이 멎었다.
‘뒤진 거야? 오는 거야?’
제발 첫 번째이기를 바라며 기다리자, 동굴 안쪽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먼지에 씌인 신발에서부터 시선을 올리던 우렉은 라온과 눈을 마주친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눈….’
한밤의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깊게 가라앉은 듯한 붉은 눈동자는 이미 완성된 고수의 풍모를 띄었다. 저 미친 괴물은 이 짧은 시간에 또 한 번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위기나 고행을 겪을수록 강해지는 건 옛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그 사례가 서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고행을 끝내고 나왔습니다.”
라온이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친 짓은 골라 하더니, 이럴 때는 또 예의가 바르다.
“도, 동굴 안에서 들린 소리는 뭐지?”
우렉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쓸어내리며 라온이 나온 1번 동굴을 가리켰다.
“아, 갑자기 동굴이 무너지더라구요. 저도 간신히 피했습니다.”
“윽….”
놈은 죽을뻔했다고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연기를 하는 모습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네가 부순 거 아니냐?”
“동굴에 파묻히고 싶은 것도 아닌데, 제가 왜 부수겠습니까. 거기다 저 안에서 마나를 제대로 운용할 수도 없다는 건 총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크음….”
우렉이 콧등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지만, 이놈은 마나 없이도 동굴을 충분히 부술 수 있는 놈이었다.
“고행이 끝났다고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시다니, 감사합니다.”
붉은 눈을 빛내는 라온의 기세는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으음….”
2주 전 그와 비슷한 무력을 보였던 호라인이 한 발 물러나며 관자놀이에서 땀을 흘렸다.
‘라온 지그하르트라….’
우렉이 입맛을 다셨다. 라온은 평상시에는 무학을 익힌 줄도 모를 정도로 고요하지만, 그 진의를 드러내면 대해의 해일처럼 거대하고 사나웠다.
‘아무리 봐도 물건이야….’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이나, 술수마저 나이를 초월한 수준이다.
조금 전에 감탄했던 버렌과는 아예 격이 달랐다.
‘아깝군.’
보면 볼수록 아쉽다. 이 녀석을 품에 넣는다면 카룬이 가주직을 노릴 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안 한 번 해볼까.’
라온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개인에 불과하고, 중무전은 지그하르트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단체다. 먼저 손을 내민다면 이 미친놈도 잡을 수밖에 없으리라.
‘가주님께는 나중에 설명하면 되겠지.’
라온이 진심을 다해서 용서를 빈다면 카룬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도 이 녀석의 재능이 역대급이라는 건 알고 있으시니까.
만약 안 된다면 그때 가서 쳐내면 그만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가 왜 중무전을 연수 장소로 골랐는지는 알고 있다.”
우렌은 뒷짐을 진 채로 라온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 선택은 최악의 수다. 네가 준 피해라고 해봐야 중무전 전체로 보면 티끌밖에 되지 않아.”
말과 달리 재산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억지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중무전은 지그하르트에서 제일 가는 무력 단체고, 카룬 님은 네 녀석을 품고도 남는 그릇이시다.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중무전에 투신해라. 이게 네게 주어진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다.”
멍청한 녀석이 아니니, 이 정도로 말하면 충분히 알아듣고 움직일 것이다.
“용서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용서해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뭐?”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서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라온이 잘못한 건 없었고, 카룬이 그를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견제할 뿐이었으니까.
“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렇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모로 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의 생각을 모조리 훑어내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받을 수는 없겠네요.”
“멍청한! 이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카룬 님 밑에서 있는다면 네놈은 비단길을 걷는 것과….”
“기회고 뭐고. 드래곤 새끼가 어떻게 용이 되다가 만 드레이크 밑으로 들어갑니까. 쪽팔리게.”
“뭐?”
“미, 미친!”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 말을 들은 간부들이 턱을 덜덜 떨었다.
“억….”
우렉의 눈도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라온은 본인을 드래곤으로, 카룬을 드레이크로 비교하며 격의 차이가 나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또라이 새끼….’
당돌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라온은 이 중무전에 스스로 찾아와 싸움을 걸었고, 카룬은 한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어린 조카의 싹을 자르려고 들었으니까.
“으음….”
라온이 가진 거대한 그릇을 느낀 우렉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온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우렉과 간부들을 스쳐 지나갔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바닥에서 건방진 놈은 오래 못 가니까.”
“명심하죠. 아, 이곳에서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어요.”
라온은 손을 흔들고서, 숙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끄윽!”
우렉은 죽일 것처럼 라온의 등을 노려보다가 간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가 말한 거 전부 잊어버려. 이게 그분 귀에 들어가면 저놈만이 아니라 우리도 죽는다.”
“아, 예!”
“아, 알겠습니다.”
간부들은 고개를 숙이며 목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우렉은 라온이 나왔던 1번 동굴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어. 더 강해지거나, 사고를 치기 전에….’
* * *
라온은 우렉을 조롱해준 뒤 숙소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가 팔찌 위로 쑥 올라왔다.
“왜….”
10일 넘게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더니 힘이 풀려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당장 식당으로 가자! 본왕이 원하는 모든 음식을 시켜야 할 것이야!
녀석은 팔로 탭댄스를 추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가야지. 가야 하는데….”
라온은 대답을 하다 말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끝없이 화령을 사용하고, 우렉과의 기 싸움까지 끝내고 왔더니 더 이상 깨어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수마에 빠져드는 라온이었다.
-…….
라스의 기대로 가득 찼던 숙소엔 이제 라온의 낮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야! 야 이 자식아! 이게 무슨 경우냐!
라스가 탭댄스를 추던 팔로 라온의 머리를 후려쳤다.
“으음….”
잠시 눈을 뜬 라온은 제대로 누운 뒤 이불을 당겨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했다.
-이,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악마도 약속한 건 지키거늘 인간이란 정말이지 사악한 그 자체였다. 특히 저놈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끄으윽, 일어나기만 하면….
라스가 바득 이를 갈 때 라온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극한까지 수면을 참아내셨습니다.]
[<집중>의 효과로 수면의 질을 최대한 상승시킵니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더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음.
라스는 메시지 위로 얼굴을 빼꼼 내민 채 입맛을 다셨다.
-왠지 불안하느니라….
* * *
눈을 뜨자 열화 같은 활력이 전신을 질주한다.
자고 난 뒤의 나른함은 전혀 없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생기가 온몸에 가득 차 있었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태어난 이후 가장 개운한 아침을 중무전 숙소에서 맞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자식아아아아!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솟구치며 냉기를 마구잡이로 뿌려댔다.
-본왕과의 약속을 또 안 지키고 이틀이나 쳐 자다니!
“약속?”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바로라고 하지 않고, 조금 이따가 먹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이지 않느냐!
“이게 인간계에서는 달라.”
-뭐?
“만약에 ‘조만간 밥 한번 먹어요.’라고 하면 언제쯤 밥 먹을 거 같아?”
-음, 일주일 정도 아니더냐?
라스는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안 만나. 혹은 몇 달은 걸리겠지.”
-뭐라?
“조금 이따가 혹은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하자라는 말은 실제로는 만나지 않거나, 한참 뒤에 보자는 말이거든.
-어…?
갑작스러운 설명에 라스의 눈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어쨌든 약속을 어긴 건 아니라는 거야. 지금 가면 되잖아. 그렇지?”
-뭐, 이, 인간계의 의미가 그렇다면야….
라스는 화를 내다 말고 맹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라온은 피식 웃으며 빠르게 씻고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중무전은 인원이 많은 만큼 식당도 컸고, 원하는 메뉴를 마음대로 주문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때라 그런지 식당에 있는 중무전 소속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은 훈제 오리볶음이랑, 해산물 스튜 그리고 야채 오븐 구이에 크림 새우. 거기다….
“…….”
라스는 이름을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말했다. 자신도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저걸 다 먹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몇 번 문제가 있었어도 조용히 기다려 주었으니, 이 정도는 먹어주기로 하고 녀석이 말한 음식을 모두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평소에 보던 메시지가 나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오늘은 <나태>의 효과로 능력치가 오르는 메시지가 없었네.’
-네놈이 잘 때 나태의 효과로 수면의 질을 높인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것에 힘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라스는 별일 없어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히죽였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가뿐했나.’
라온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가 보았다는 메시지대로 잠의 질을 높인 덕분인지 아직도 전신에 활력이 가득했다.
-잘 잤으면 그만이지, 능력치까지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니라. 인간은 마왕의 힘을 모두 이용할 수 없다.
라스가 마왕의 힘은 그리 쉬운 게 아니라며 쯧쯧 혀를 찼다.
“음식 나왔습니다!”
녀석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때 주방에서 차례로 음식이 나왔다.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음식들의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자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네놈은 마왕의 힘을 사용하기엔 애송이에 불과하다. 손쉽게 능력치를 올릴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일단 본왕은 스튜부터….
라스가 이죽거리며 스튜를 가리킬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효율 계산이 끝났습니다.]
[극한까지 높아진 수면의 질이 <나태>의 능력을 강화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라온은 그 메시지를 보며 눈을 빛냈고, 라스는 주절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어?”
-입맛 떨어졌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