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59화 (159/653)

제159화

라온은 벽면의 구멍들이 뿜어내는 금빛 광명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건 낙서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야.’

검흔. 이 수백 개가 넘는 구멍들은 전부 검으로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검술로.’

처음 보았을 때 왜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동굴에 새겨진 검흔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검술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검술이라고?

‘그래. 경지의 차이가 심하게 나지만 확실해.’

심장에서 회전하는 여섯 개의 불의 고리가 말해준다. 이 검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화령.

이건 만화공의 검술 중 가장 애용하고, 최근에 한층 성장했던 화령의 흔적이었다.

-그 검술치고는 구멍들이 훨씬 크고, 많은데?

‘말했잖아. 경지 차이가 심하다고.’

화령은 맞지만, 같은 화령이 아니다. 자신을 굽어볼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검사가 사용한 화령이었다.

라온은 동굴의 검흔을 모조리 담아내기 위해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든 흔적을 훑어내렸다.

우우우웅!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검흔에서 번쩍이던 금빛이 별똥별처럼 아스라이 저물기 시작했다.

‘아직 다 못 봤는데….’

입술을 꽉 깨물며 동굴 벽으로 다가갔지만 사라져가는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흔적에서 번쩍이는 빛무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보여주기를 바라며 벽에 손을 짚었다.

화아아아!

그 순간 차가운 벽면에서 열기가 일어나며 눈앞이 하얀빛으로 가득 찼다.

세상이 변한다.

지금보다 훨씬 넓은 동굴이 보인다.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는 대지 위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등을 보이는 사람은 이전에도 보았던 금발의 검사였고, 그 반대편에는 눈동자의 백과 흑이 역전된 괴인이 손아귀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인이 왼손이 검은색으로 타오르자, 검사의 검에 어려 있던 불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사는 그 기이한 힘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옅은 오러만 남은 검과 신묘한 보법으로 괴인의 난폭한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며 틈을 노렸다.

괴인의 공격이 점차 강해진다. 그는 왼손에 있던 검은 기운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더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키려 했다.

그렇게 괴인의 힘이 균형이 어긋난 찰나의 시간.

금발 검사의 검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검날을 휘감은 유형화된 강기의 불꽃이 한순간 동굴 전체를 뒤덮었다.

세계수의 잎새가 이러할까. 검 전체를 덮은 새빨간 화염의 꽃잎들이 흩날리며 온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괴인이 뒤늦게 왼손에 힘을 집중했지만, 이미 늦었다. 금발 검사가 만들어낸 수백 송이의 꽃잎들이 동굴 전체를 장악했으니까.

진정한 모습의 화령은 괴인을 사정없이 녹여버리고도 힘이 남아 동굴 천장과 벽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검흔을 만들어냈다.

화아아아!

[불의 고리(6성)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만화공(4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성취가 모자랍니다.]

시야 전체가 다시 금빛으로 물들었다. 시린 빛에 눈을 감았다가 뜨자, 원래의 텅 빈 동굴이 보였다.

“허….”

라온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동굴 벽면을 살폈다.

‘이게 진짜 화령인가.’

그저 몇 송이의 꽃잎을 환검과 변검으로 휘날리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덮는 강기의 꽃잎을 흩뿌리는 게 바로 화령의 진짜 모습이었다.

‘역시 그는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전부 익히고 있었군.’

이제 확실해졌다. 지그하르트 선조인 그 금발의 검사는 자신과 똑같이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도 이해가 가.’

중무전 소속은 아닌 것 같지만, 지그하르트의 선조이니 이 장소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자는….’

눈동자의 흰자가 검고, 검은자가 흰색인 그 괴인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 괴인이 왜 지그하르트 영역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라스의 냉기와 분노가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치이잉!

라온은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일으켜 그 라스의 기운을 단번에 차단했다.

-윽!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네, 네놈의 영혼이 잠시 사라졌기에 살아 있나 확인해 본 것이니라.

“확인치고는 꽤 깊게 왔는데?”

-우, 웃기지 마라! 본왕이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네놈의 몸뚱이를 먹어 치웠을 것이다!

“그럼 다시 뺏으면 그만이지.”

라온이 평온한 표정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건방진 자식이….

“하긴 네가 그런 치사한 짓을 하진 않겠지.”

-뭐?

“고고하신 마계의 군주가 빈 몸을 노리는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내 몸을 뺏는 것도 네 힘과 능력으로 당당하게 이루겠지. 아니야?”

-자, 잘 아는군! 물론이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 빈집을 터는 치사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약간의 띄움과 기대를 담은 말에 라스는 팔짱을 푼 채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이러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건드리지 않겠지.

라온은 라스에게 심리적 압박을 걸어두고서, 진짜 화령에 대해 생각했다.

‘마스터에 올라도 그걸 따라 하는 건 무리야.’

기억에서 본 남자의 화령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모두 강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건 마스터에 오르고 난 뒤에도 한참 성장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다만 비슷하게는 할 수 있을 거야.’

라온의 검 위로 만화공의 불길이 솟구쳤다. 불의 고리가 6성에 오르며 이제 이 비틀린 공간에서도 전력의 오러를 운용할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

4성에 이른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화령을 펼쳐냈다. 칼날에 서려 있던 불꽃이 분수처럼 퍼져나가며 수십 개의 꽃잎이 흩날렸다.

그 위력도, 숫자도 금발 검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지만, 호라인과 싸울 때보다 조금 더 발전했다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해볼까.’

라온이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화령을 그으려 할 때였다.

[완벽에 이른 <화령>을 관찰했습니다.]

[<화령> 습득이 빨라집니다.]

예전 글렌의 태화보를 보고 나타났던 메시지와 같은 내용. 마왕도 익힐 만한 무학을 보면 나온다는 성장 강화 메시지였다.

‘딱 좋은 순간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습득 능력이 있다면 금발 검사의 화령을 조금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뭐야! 이게 갑자기 왜 떠!

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메시지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네놈 조금 전에 어딜 가서 무얼 보고 온 것이냐!

‘글쎄….’

라온은 메시지를 끄며 속으로 대답했다. 조상님의 개인 수업을 듣고 왔다고.

*     *      *

슬리온 가의 연무장.

“개진!”

“개진!”

슬리온 가문의 가주 로칸 슬리온의 웅혼한 목소리를 따라 검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화려하면서도 안정된 검진을 펼쳐냈다.

우우우웅!

검사들의 기세가 검진의 중심을 타고 올라 강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벽설!”

로칸 슬리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검사들이 검진의 형태를 마름모꼴로 전환한 뒤 더 날카로운 기파를 내뿜었다.

적의 진형을 부수기 위한 돌진형 검진의 모습이었다.

“이결!”

로칸 슬리온은 검진의 형태를 차례로 변화시켰고, 검사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서로 다른 검진을 형성하며 완벽한 합을 이루어냈다.

“음!”

로칸은 매끄럽게 형성된 검진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날에 검사들이 완벽한 검진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어 가슴이 뿌듯했다.

‘잘 보았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완벽한 검진을 어떻게 보았을지 기대하면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로칸이 입을 떡 벌렸다. 사랑스러운 딸은 자신이나, 검진이 아니라 하늘을 멍하니 올려 보고 있었다.

‘어억….’

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검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손을 떨며 루난에게 다가갔다.

“루, 루난?”

로칸이 멍하니 있는 루난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생각하는 거니? 아빠 일하는 거 봐야지?”

“라온.”

“억?”

루난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이가 바득 갈렸다. 최근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라, 라온이 왜?”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어제 교관님이 라온 이야기를 해줬어.”

“교관이면 그 리메르?”

“응.”

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갑자기 집중력이 떨어졌다 했더니 리메르가 몰래 다녀간 모양이다.

“그 새끼. 아니, 교관이 뭐라고 했는데?”

“라온이 중무전의 호라인이라는 사람을 이겼대.”

“호, 호라인? 호라인이라고?”

호라인이라는 말에 로칸이 눈을 부릅떴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호라인은 익스퍼트 최상급이야! 아무리 그놈이 천재라고 해도 17살에 이길 수준이 아니라고!”

“라온은 이겨.”

“루난. 경지의 차이라는 건 그리 쉽게….”

“라온은 이겨.”

“아니, 익스퍼트끼리도 성장의 격이….”

“라온은 이겨.”

루난은 영롱한 보라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도 잡았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크윽….’

라온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사랑스러운 딸이 저렇게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 그럼 아빠랑 내기 하나 할까?”

로칸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검지를 들었다.

“내기?”

“그래. 네게 경지의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줄게. 이쪽으로 오렴.”

로칸이 루난을 데리고 연무장 좌측으로 향했다.

“아빠는 딱 너보다 반 단계 위의 힘만 사용할 거야.”

“응.”

“네가 아빠에게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하면 선물을 주마.”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루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대신 한 번도 성공 못 하면 지금부터 라온은 잊고, 아빠의 수업에 집중하는 거야. 알겠지?”

“응.”

루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하자는 듯 바로 검을 뽑았다.

“그럼 시작!”

로칸이 시작을 외쳤지만, 루난은 바로 덤비지 않았다. 보랏빛 눈에 선명한 의지를 담고, 자세를 낮췄다.

‘호, 제법.’

성장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침착함까지 가졌을 줄은 몰랐다. 역시나 자신의 딸이었다.

“갈게.”

루난은 미리 경고를 해주며 오른 다리를 길게 뒤로 뻗었다. 그녀의 다리가 절벽을 타는 산양처럼 거칠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허억!”

얼음을 타고 오는 벼락처럼 전율적인 속도에 로칸의 손이 움찔거렸다.

‘이건….’

카탐 정글의 수호자인 여족장의 돌진기였다. 빛살처럼 빠르면서도, 방향이 자유롭다. 루난은 그녀의 기술을 완벽하게 재연하고 있었다.

‘지금 수준으로 차단하긴 힘들어.’

지금의 경지. 즉, 루난에게 약속했던 무학의 경지로는 저 돌진을 완벽하게 막을 자신이 없었다.

“크읍!”

아주 조금만 힘을 조금 더 끌어 올리면 가볍게 막을 수 있지만, 로칸은 차마 딸을 속이지 못하고 약속한 힘만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파아앙!

루난이 스쳐 지나가고, 로칸의 소매가 짧게 뜯겨나갔다.

“루난….”

로칸은 소매를 보며 헛바람을 뱉었다. 단순한 무력의 성장이 아니라, 이런 기술까지 익혀온 게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카탐 정글을 수호하는 여족장의 보법을 그 정도로 사용하다니! 대단하구나!”

라온이라는 존재를 잊고, 뿌듯함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로칸은 루난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장 난 인형처럼 우뚝 멈춰 섰다.

“라온을 도와주려고.”

“라, 라온을 도와줘?”

“응.”

루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

로칸이 어깨와 팔을 부르르 떨며 라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제 못 참는다!”

그는 당장 라온에게 달려갈 것처럼 땅을 박찼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버리겠어!”

“야! 가주님 또 시작이다!”

“말려! 전부 붙어!”

“넌 마님을 불러와! 그분밖에 말릴 수가 없어!”

불안에 떨던 슬리온 가문의 검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로칸을 붙잡았다.

“라오오오오온!”

루난은 로칸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발장구를 치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 보았다.

“아이스크림 같이 먹어야지.”

*     *      *

라온은 학습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한 지금의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화령을 펼쳐냈다.

당연히 잠도 자지 않고, 라스가 싫어하는 나딘빵은 씹지도 않고 삼켰다. 물 먹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계속 검만 휘둘렀다.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면서 오러를 전부 소모하면 만화공으로 채우고, 전부 소모하면 또 만화공으로 채우면서 화령만을 반복했다.

[<만화공 화령>의 성취 속도가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성취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가도 라온의 검은 끝없이 허공을 노닐었다. 결국 그는 오러와 체력,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나서야 검을 내렸다.

‘역시 그걸 따라 하는 건 무리였군.’

잠도, 식사도 포기하며 수련했지만, 그 기억 속 화령을 재연하지는 못했다.

‘지금 경지로는 불가능해.’

확실히 깨달았다.

최소 마스터 상급은 되어야 그 남자처럼 세상을 뒤덮은 화령을 뿌려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 낭비는 아니지.’

화령 자체의 성취도 크게 올랐지만, 변검과 환검의 숙련도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지금이라면 대련할 당시의 호라인과 붙어도 그리 밀리지 않는 변검과 환검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라온은 탁한 숨을 내뱉고서 검을 내렸다.

“라스.”

-이 자식….

라스가 부들부들 떨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계속 흔들어 싸서 잠도 못 자게 만들더니, 이제 눈 좀 붙이려니까 왜 부르는 것이냐!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이곳에 온 뒤 56끼를 제대로 못 먹었으니 14일이 지났다!

시계이자, 달력 대용 라스는 계산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좀 이상했다.

“56끼면 14일이 아니라, 19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계는 1일 4식이니라. 즉, 오늘이 2주가 되는 날이지.

마계가 1일 4식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날짜로 끼니로 세는 마왕은 참으로 신박했다.

“그럼 오늘이 나가는 날이네.”

-2주 동안 저 고무 빵을 처먹으며 버티다니, 이 천벌 받을 놈!

맛없는 빵을 먹는다고 천벌을 받는다니, 마왕의 사고방식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화내지 마. 오늘 나가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고 있던 라스가 움찔 멈추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저, 정말이냐?

“그래. 네가 원하는 걸로 먹을게. 다만 그 전에….”

라온이 다시 검을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화령을 써보고.”

체력도, 정신력도, 오러도 한계지만, 집중력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갈린 상태다.

지금이라면 그 남자의 검을 약간이나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오오오!

은은하게 내려오는 발광석의 빛이 각진 어깨에서 흘러내려 검날에 스며든다. 다리를 뻗으며 부드럽게 손목을 비틀었다.

손목을 따라 휘어지는 붉은 칼날의 궤적이 나뭇가지처럼 허공을 수놓고, 그 가지에서 만개한 꽃송이들이 휘날린다.

화아아아아!

불꽃과 불꽃이 이어지며 피어난 염화의 꽃잎들이 동굴을 뒤덮었다.

잘 벼린 칼날의 예리함과 화려함을 담아낸 검사의 꽃잎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 번져가며 하늘을 노닐고, 땅을 적신다.

하늘과 땅을 잇는 지평선처럼 퍼져나가던 불꽃의 선이 두껍게 번지며 더 커다란 화령의 줄기를 일으켰다.

라온이 일으킨 꽃무리가 동굴 전체를 수놓으며 염화의 폭풍을 일으킨다.

꽃잎의 숫자도, 위력도 비교할 수 없이 작았지만, 화령에 담긴 흐름과 궤적은 천년의 세월을 지나 라온의 손에서 그대로 피어났다.

쿠와아아아앙!

구멍에 닿은 검기의 조각들이 응집된 기운을 발산하며 동굴 전체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동굴이 무너질 듯 뒤흔들리며 돌무더기를 쏟아냈지만 이미 집중에 빠진 라온은 화령의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짙어진 화마의 꽃잎들이 돌덩이를 가루로 만들며 그 숫자와 예리함을 더해갔다.

끝없이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한 자루의 검으로 막아내는 모습은 그가 바라던 대로 선조의 검과 닮아 있었다.

동굴의 흔들림이 가라앉고, 한계를 모르고 쏟아지던 돌덩이도 그 끝을 고했다.

후우우욱.

라온은 바닥에 가득 깔린 돌가루의 사이에 서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부족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검술을 펼친 그가 희열에 잠겨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화공 <화령>이 <화령 개(開)>로 성장합니다.]

[장비, 검, 사람에 이어 동굴을 깨부쉈습니다.]

[칭호 <파괴왕>이 생성됩니다.]

파괴왕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졌다는 메시지였다.

-아니….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푸른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다 부수는 망아지 놈에게 왜 칭호까지 주는 것이냐! 그것도 본왕의 힘으로!

짜증이 폭발했는지 빽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본왕의 육체가, 본왕의 힘이….

“조금 이따가 맛있는 거 먹어줄 테니까. 좀 참으라고.”

슬라임처럼 흐느적거리는 라스를 잡으며 피식 웃었다.

-조금 이따가? 나가자마자 먹어라!

“미안하지만 할 일이 있어.”

동굴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보는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광망이 어렸다.

“중무전 놈들에게 인사를 해줘야 하거든.”

덕분에 강해졌다고.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