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우렉이 꽃병을 옆으로 치우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찾아와 파괴왕 따위의 소리를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망할 새끼가 연무장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부수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손 대는 것마다 부서져요!”
레프가 주먹에 힘을 주고 책상을 내리쳤다.
“건드리기만 하면 망가지니, 파괴왕이라는 말밖에 그놈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좀 진정해!”
우렉은 옆에 둔 꽃병을 다시 품에 안고서 레프를 뒤로 밀었다.
“수련장 물품을 좀 부수는 정도야 큰 문제 없잖아. 수련검이나, 수련복 몇 개 망가진 게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야?”
“수련검 몇 자루 부러졌다고 제가 여길 왜 오겠습니까!”
레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쳤다.
“그 미친놈이 청주석 수갑 3개를 깨 먹고, 팔검인형을 모조리 망가뜨렸다구요!”
“뭐?”
우렉이 품에 안은 꽃병을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섰다. 깨진 꽃병을 돌아보지도 않고 눈을 부라렸다.
“바, 방금 뭐라 그랬어. 청주석 수갑 3개에 팔검인형 전부?”
“예! 전부 부서졌습니다!”
“그게 왜 부서져. 설마 수갑 안 씌운 거야?”
“아, 아뇨. 씌웠는데 힘인지 기술인지 그냥 다 부숩니다. 파괴왕이라니까요!”
“이런 미친….”
청주석 수갑은 한 쌍에 금화 100개고, 팔검인형은 금화 200개가 넘는다. 돈을 잡아먹는 귀신 같은 장비들이지만 그만큼 단단하다. 그런 물건들이 부서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금화 1900개. 금화 1900개가 날아갔다고?”
우렉의 눈동자가 썩은 달걀처럼 탁하게 풀렸다.
“저기 그게 다가 아니라….”
“가, 가자.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그는 턱을 떨면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레프가 그 뒤를 따랐다.
“아….”
우렉은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연무장 우측에 설치해둔 팔검인형이 말 그대로 개박살 나 있었고 단상 위에는 파란빛을 뿜어내는 청주석 수갑들이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져 있었다.
문제는 레프가 말한 게 다가 아니었다.
“검적도 쪼개졌잖아!”
검술의 어긋난 균형을 물방울로 알려주는 검술 훈련 도구 검적이 나뭇가지처럼 분질러져 있었다. 저것도 하나에 금화 500개가 넘는 돈 먹는 하마 같은 장비였다.
“저 녀석들은 왜 다 누워 있는 건데!”
연무장 바닥에 중무전 소속 검사들 패잔병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상태를 보니 부상을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저, 전부 라온이 한 겁니다.”
“아까는 이런 말 없었잖아!”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뛰쳐나가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훈련할 때….”
레프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모조리 설명해주었다.
“크으윽!”
우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총관이란 한 단체의 안주인과도 같은 존재. 돈과 사람 모두를 관리하기에 여기서 깨진 돈과 부상자는 전부 자신의 책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당장 찾아서… 헉!”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라온을 찾으려 할 때 쇳덩이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소리가 난 곳을 보자 훤칠한 금발 사내가 녹색 구체를 풍선처럼 터트리고 있었다.
“크허헉! 금화 400개짜리 밸런스 볼이!”
저 구체는 육체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굉장히 귀한 단련용 장비다. 고위 마법사의 마나가 깃들어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그게 아예 뭉개졌다.
하지만 저 미친놈은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뿌드드득!
라온이 밸런스 볼 옆에 있는 대형 방패에 손을 대자, 방패가 부드러운 소고기 육포처럼 뜯겨나갔다.
“아악! 금화 500개짜리 방패가!”
저 방패는 오러를 넣으면 검기나 검사까지 막아낼 수 있는 특별 제품이다. 검기 훈련용으로 산 물건이 저 괴물의 손아귀에서 과자처럼 아작이 나 버렸다.
라온은 아직도 성에 안 차는지 다음 제물을 찾아 뚜벅뚜벅 움직이고 있었다.
“저 새끼 잡아! 당장 잡으라고!”
* * *
라온이 훈련장 구경이라는 명목하에 대놓고 물건들을 부수고 있을 때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훈련 교관 레프와 덩치가 큰 중년 남성이었다.
‘총관 우렉이로군.’
주디엘이 주었던 중무전 인명부에 있던 남자다. 중무전의 살림을 담당하는 우렉이 레프와 함께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너, 너 뭐 하는 놈이야! 이걸 왜 다 부숴!”
우렉이 바닥에 있는 방패를 보며 악을 질렀다.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기나 해! 어? 오늘 네가 부순 것만 치면 금화 3000개가 넘어!”
“연무장 구경을 하라고 하시길래 조금 만졌을 뿐입니다.”
“누가!”
“뒤에 계신 분이요.”
라온이 우렉의 뒤에 있는 레프를 가리켰다.
“이익!”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까 분명 멈추라고 해, 했습니다.”
“닥쳐!”
우렉이 죽일 듯이 인상을 구기고, 레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구경하라고 했다 해도 넌 중무전 재산에 큰 손해를 입혔다. 그걸 배상해야….”
“잠시만요.”
우렉의 입에서 예상대로의 말이 나왔다. 라온이 담담한 눈빛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전에 몇 가지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중무전은 지그하르트를 대표하는 무력 단체 맞죠?”
“당연하다! 전마대와 전뢰단을 보유하고 있는 중무전은 최강이다!”
“그런 최강의 중무전이 싸구려 물품을 쓰시진 않겠죠?”
“물론! 이 연무장에 있는 물건 중 싸구려는 하나도 없다! 전부 최고급이지.”
“마지막으로 제가 힘이 좋아 보이시나요?”
“힘? 근육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놈이 무슨 힘이 있다는 것이냐!”
우렉은 라온에게 분노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죠. 그러면 사기당하셨네요.”
“사, 사기?”
“그게 무슨 소리냐!”
우렉과 레프가 사기라는 단어에 눈을 부릅떴다.
“이 물건들 비싸 보이기만 하지. 내구성이 바닥이잖아요.”
라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투명한 방패를 바닥에 던졌다.
“설마 지그하르트 최강의 단체 중 하나인 중무전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이제 막 검사가 된 제가 부술 정도로 싸구려는 아닐 거 아니에요. 말씀하신 대로 전 다른 검사들에 비해 팔이 얇아서 힘도 없고, 오러도 막혔는데.”
팔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는 청주석 수갑을 보여주었다.
“버렌. 내가 이거 벗지 않은 건 너도 봤지?”
“어? 아, 그, 그렇지.”
버렌은 갑자기 불렸지만, 솔직하게 사실을 말했다. 표정을 보니 저 미친놈 또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세요. 오러도 쓰지 않은 제가 어떻게 이런 단단한 물건들을 부수겠습니까. 다 사기당하신 겁니다. 사기당한 사실을 알려드렸으니, 오히려 제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
“어…?”
우렉과 레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두 사람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아예 눈이 풀려버렸다.
“아,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의심당해서 기분이 좀 상했지만, 괜찮아요. 첫날이니까 참겠습니다.”
라온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물러났다. 우렉과 레프는 목각인형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궤변이다! 저거 다 네가 힘으로 부순 거잖아!
‘맞아. 금방 미친 소리라는 걸 알게 되겠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들도 자존심이 있으니, 물어내라는 소리를 다시 하지는 않을 거야.’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주디엘이 저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려줬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 주디엘에게 간부들의 성격과 취향이 적힌 서류를 받아보았다.
총관 우렉은 돈 이상으로 자존심을 챙기는 타입이다. 다른 검사들 앞에서 한 번 물러섰으니, 다시 배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것이다.
“크으, 뭣들 하는 거냐! 부서진 물건들을 다 치워!”
“아, 예!”
우렉의 지시에 멍하니 서 있던 검사들이 깨진 장비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흠.”
라온은 스탠드에 걸터앉으며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절반 이상은 망가뜨린 거 같은데.’
아직 기구는 많았지만, 비싸 보이는 건 대부분 부쉈으니,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나중에 카룬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게 목표였나.”
버렌이 옆자리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중무전의 기구들을 부수기 위해서 온 거냐?”
녀석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오진 않았지.”
“다른 목표가 또 있다는 뜻이로군. 하긴 네가 고작 물건을 부수기 위해서 왔을 리가 없겠지.”
버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망가뜨리지는 말고 적당히 해라.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걱정해주는 거야?”
“거, 걱정은 무슨! 내가 쓸 장비까지 부술까 봐 말한 것뿐이다!”
그는 오랜만에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채 손을 휘저었다.
“아예 막지는 않는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말리기 힘들지. 네놈이 말린다고 들을 놈도 아니고.”
버렌은 눈썹을 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너 원래 그렇게 힘이 좋았나?”
“물건들이 싸구려라니까.”
“그러냐.”
버렌은 옅게 미소 짓고서 일어섰다.
“네놈을 따라잡으려면 정말 피똥을 싸야겠군.”
버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른 검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거 정말 본왕이 알던 눈깔이 맞냐?
라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변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인데.
‘그러게. 나도 신기해.’
버렌은 이전의 날카로운 성격이 거짓말인 것처럼 여유로워졌다. 물론 루난이나, 마르타에겐 여전히 짜증을 내지만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을 따라잡겠다는 다짐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런데 네놈 지금 힘이 몇이냐.
‘힘?’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오랜만에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왕을 농락하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네 가닥).
특성 : 분노, 나태, 불의 고리(5성), 수속성 저항력(5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4성), 글래시아(4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러딩 커스(1성), 암습(2성), 불굴의 의지(2성), 요기적응(1성), 집중(1성).
근력 : 129
민첩성 : 125.
체력 : 124
기력 : 128.
감각 : 144.
<분노 : 25.>
‘엄청나네.’
보자마자 헉 소리가 절로 터진다. 1년간 시스템으로 얻은 능력치와 수련하며 상승한 능력치, 그리고 나태의 효과로 얻은 능력치가 합쳐져 지금 자신의 육체 능력은 인간이라는 종족을 벗어나 있었다.
‘이러니 죄다 부수지.’
그동안 능력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힘을 전력으로 사용하니 접합부라면 철조차 부술 수 있었다.
‘힘이 129네.’
-뭐, 뭣이라고?
‘129라고.’
-이런 정신 나간 놈! 언제 그렇게 된 것이냐!
‘대부분 네가 줬잖아. 뭘 물어.’
저 능력치의 절반 이상은 라스가 어설픈 내기를 걸거나,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린 덕분이다. 훈련과 나태의 능력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라스의 호구 짓이 최고였다.
-이 망할 놈이! 파인애플에 붙은 파리처럼 본왕의 단물을 야금야금 빨아먹는구나!
라스가 이를 갈며 냉기와 분노를 일으켰다.
쿠구구구!
마나 회로 사이로 차디찬 냉기와 이글거리는 분노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침투해왔다. 제대로 해보자는 건지 라스는 혼에 어려 있는 분노의 기운까지 일으켰다.
-지금 네놈은 그 오러를 사용할 수 없지! 이번에는 본왕의 승리다!
‘아닐걸.’
불의 고리는 오러가 아니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심장을 휘도는 다섯 개의 고리가 울리며 영혼을 휘감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청주석 수갑이 억제할 수 있는 오러는 하나. 단전에 있는 두 번째 오러 글래시아의 냉기는 잡지 못했다.
치이이익!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서리의 벽이 라스의 냉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 기생충 같은 놈!
라스는 10분 이상 냉기와 분노를 쏟아내며 악을 질렀다.
‘그래봐야 다 네 손해라니까.’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방금 뜬 메시지를 가리켰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이걸 보라고. 이렇게 알아서 주니까. 능력치가 안 오르고 배겨?’
-이런 제에에엔장!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울부짖음은 중무전에서도 계속되었다.
* * *
“저 망할 자식.”
우렉이 스탠드에 앉아 있는 라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얍삽한 놈에게 제대로 당했지만 다른 검사들 앞에서 인정한 상태라 자존심이 상해 다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대로 밟아주마. 아주 자근자근….’
“우렉.”
“헉!”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때 뒤에서 묵직한 중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카, 카룬 님!”
중무전주 카룬 지그하르트가 열 명의 호위와 함께 연무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가주께서 임무에 나가 있는 전마대와 전뢰단을 지원하라고 하시더군.”
“아, 그, 그렇군요.”
우렉은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을 보러 온 것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흠.”
카룬은 멍하니 앉아 있는 라온을 보며 찬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말한 건 기억하고 있겠지? 저 건방진 놈을 언제, 어디서라도 죽일 수 있도록 정보를 모아 두어라.”
“물론입니다!”
“2주 안에 돌아오지.”
그는 손을 휙 젓고서 연무장을 지나 중무전을 나갔다.
“후우….”
우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카룬이 돌아오기 전에 라온에게 망신을 주고, 놈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럼 방법은 하나지.’
대련.
대련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레프!”
우렉이 멍하니 서 있던 레프에게 손짓했다.
“아, 예!”
“가네트를 불러!”
가네트는 오러는 약하지만,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검사다. 라온의 검술 재능도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세월의 차이를 이기진 못할 것이다.
꾸욱.
우렉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오늘 네 한계를 봐주마. 라온 지그하르트.”
* * *
라온은 자유시간 동안 평소처럼 전력으로 훈련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뭐 하는 거냐.
‘스트레칭.’
-수련은 안 하는 거냐?
‘곧 대련이 시작될 테니까.’
-대련?
‘그래. 뻔하거든.’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주디엘에게 정보를 모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진 걸 보면 중무전은 자신의 정보를 원한다.
알아서 찾아와준 기회를 놓칠 리 없을 테니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분명 대련을 신청할 것이다.
“정렬!”
라온이 천천히 연무장을 돌고 있을 때 레프가 단상 위로 올라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다 해결되었으니, 다음 훈련을 진행하겠다.
그는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할 때 자신을 흘깃 보았다.
“이번 훈련은 대련이다. 청주석 수갑을 찬 채 오직 검술과 보법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맞지?’
레프의 말은 자신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흥! 그, 그 정도는 본왕도 예측하고 있었노라!
라스는 목소리를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베빈, 아룬 앞으로 나와라!”
레프의 부름에 검사 두 명이 앞으로 나와 검격을 나누기 시작했다. 둘 다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뛰어난 검사였기에 오러가 없는데도 대련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두 검사는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한 전투를 보이다가 베빈이라는 검사가 어깨를 얻어맞고 나서 대련이 종료되었다.
“보았겠지? 중무전은 대련도 실전처럼 진행한다.”
레프는 특히 라온을 보며 실전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라온과 가네트. 앞으로 나오도록.”
라온은 일어서며 가네트라 불린 남자를 보았다. 30대 내외로 보이는 외모에 단단한 체격을 가졌다. 오러 자체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쪽을 보는 눈빛이 낮게 가라앉은 걸 보면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라온은 흥겨운 미소를 흘리며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재밌겠네.’
* * *
가네트는 라온을 내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 건방진 녀석만 조지면 된다는 거지.’
총관 우렉은 라온이 숨긴 검술과 능력을 모두 사용하도록 대련에서 괴롭히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제대로 조져서 망신을 주면 다음 인사이동 때 전마대로 옮겨주겠다고 하니 무조건 해야만 했다. 잘생긴 얼굴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오러가 없다면 얼마든지 팰 수 있지.’
라온이 뛰어난 육체와 오러를 가진 건 인정하지만 검술만큼은 자신이 위라고 자신할 수 있다. 오러만 쓰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
“선배 된 도리로 선공을 양보하지.”
가네트가 손을 까딱였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마음 바뀌기 전에 덤벼.”
라온이 오러를 사용한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지금은 둘 다 청주석 수갑을 찬 상태이니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돌진해왔다. 순식간에 눈앞에 이르러 검을 내리쳤다.
‘예상대로군.’
가네트가 피식 웃었다. 검의 궤도와 속도 모두 상정 내였다.
‘바로 흘려주지.’
들어 올린 검을 살짝 틀어 떨어져 내리는 라온의 검격을 멋있게 흘려버리려고 할 때였다.
쿠웅!
라온과 검이 부딪친 순간 관절이 빠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어났다.
“어? 뭐, 뭐야!”
라온의 검에 실린 힘이 너무도 강해서 가네트는 흘리기는커녕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손목이 꺾였다.
“이, 이러면 안 되는… 꽥!”
뻐어어억!
뒤로 밀려 나간 가네트의 검이 그의 이마를 세차게 후려쳤다. 본인의 수련검에게 얻어맞은 그의 머리에서 공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끄르르륵….”
흐려지는 가네트의 눈동자에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라온의 모습이 잡혔다.
“다음 나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