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가주전을 나온 라온은 바로 별관으로 향했다. 유아는 긴장했었던 것인지 손을 살짝 떨었다.
“괜찮을 거야. 로엔 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아, 네.”
로엔은 데니어 지그하르트와 함께 자신과 실비아를 차별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준 몇 없는 사람이다. 글렌이 확실하게 보장해주었으니, 유아에게 암살 기술 같은 건 가르치지 않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봐두긴 해야지.’
나중에 유아가 처음으로 로엔의 교육을 받을 때 같이 가서 무엇을 배우는지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네 녀석치고는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뭐?’
-파인애플 소녀는 본왕의 소중한 시녀이니, 제대로 챙겨주어라.
라스는 냉기로 만든 손으로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유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네.’
라스를 보며 혀를 찼다. 유아의 음식 솜씨에 매료된 주제에 누가 누구의 시녀라는 건지 모르겠다. 먹보 마왕은 여전히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넌 왜 따라오냐?”
과자를 먹으며 졸졸 따라오는 도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저 오늘 정말 힘들다구요.”
도리안이 과자 봉지를 구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아는 척도 안 하고, 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시험도 꼽사리로 끼어 들어가기만 하고. 내 존재감은 대체 어디 간 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시험 칠래? 리메르 교관에게 말하면….”
리메르가 귀찮아 하는 게 좀 심하지만 수련생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은 진짜다. 시험을 치겠다고 하면 거절할 사람은 아니다.
“에이! 그건 또 아니죠!”
도리안은 빠르게, 아주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다 끝났는데, 뭘 또 귀찮게 합니까. 그냥 좀 아쉽다는 거예요.”
녀석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가서 쉬어.”
“와, 섭섭하네. 1년 넘게 같이 여행했는데, 너무 차가우신 거 아니에요?”
“차갑기는 무슨.”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이 녀석과 함께 별관에 가면 피곤해질 게 뻔하다. 빨리 돌려보내는 게 속 편하다.
“그리고 가고 싶어도 못 가요.”
“뭐?”
“아까 대연무장에 있을 때 도련님 어머니께서 함께 오라고 하셨거든요.”
“아….”
“그니까 함께 가자구요! 오랜만에 별관에서 맛있는 밥 먹겠네! 유아야! 가자!”
도리안은 유아의 손을 잡고 별관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다.
-밥! 별관 밥이 또 괜찮지! 더 빨리 움직이거라.
팔짱을 낀 채로 똥폼을 잡던 라스의 입에서 냉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아.”
침 흘리는 라스와 달려가는 도리안, 유아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가 셋이야….’
* * *
라온은 귀찮은 두 명과 유아를 데리고 별관 앞에 도착했다. 갑자기 돌아왔기 때문인지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오랜만에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별관 문을 열었다. 로비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
“라온!”
“도련님!”
“너무 늦으셨잖아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들은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살폈다. 호들갑을 떠는 실비아와 시녀들의 모습을 보자 집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다녀왔어요.”
라온은 걱정과 반가움이 담긴 가족들의 눈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서 오렴.”
실비아가 가슴 앞에 모은 손을 떨며 따스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도 성장하신 건가.’
예전이라면 바로 달려들어 눈물을 흘렸을 텐데, 자신이 성장하듯 실비아도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 같았다.
‘다행이… 헉!’
“라온!”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을 때 갑자기 실비아가 달려들었다.
“너무 잘 컸잖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컸지? 누구 아들이야!”
그녀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어투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어, 엄마. 제발….”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헬렌에게 도움 요청 신호를 보냈지만, 그건 역효과였다.
“도련님!”
“라온 도련님!”
“정말 잘 오셨어요!”
“이렇게 훤칠해지셔서… 흑!”
“끄으윽….”
헬렌과 다른 시녀들까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어 옴짝달싹 못 하게 낑겨버렸다. 로비에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주디엘과 도리안, 유아뿐이었다.
“후우.”
“흐흐흥….”
“와….”
주디엘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서 주방으로 들어갔고, 도리안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입을 가린 채로 히죽였으며, 유아는 적응 못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라스는….
-밥은 어디에 있느냐.
평소와 같았다.
* * *
라온은 식탁에 앉은 채로 옆을 둘러보았다. 식탁에는 실비아와 도리안, 유아만이 아니라, 시녀들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시녀들이 계속 거절했지만,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자는 실비아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달달하고 짭짤한 향기가 본왕을 짓누르는구나. 무기를 들어라.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는 식탁 위를 가득 채운 맛깔나는 음식들을 보며 입에서 군침처럼 냉기를 마구 흘려댔다.
“밥 먹기 전에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좋겠지.”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린 유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까 봐서 알겠지만, 내가 라온의 엄마야. 실비아라고 한단다.”
그녀는 유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먼저 본인을 소개했다.
“아, 저, 저는 유아예요. 하분 성에서 왔어요.”
유아는 벌떡 일어나서 실비아와 다른 시녀들에게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유아구나.”
실비아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유아를 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라온. 네 딸은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후후, 농담이야.”
“으윽….”
라온이 빨개진 얼굴로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지만, 실비아에겐 항상 당황하게 된다.
“음식이 식으니까. 일단 먹으면서 시작할까.”
“뭘 시작하려고?”
“당연히 너랑 도리안이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듣는 거지. 설마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나중에 따로 말할….”
“그건 오늘 놀고먹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리안이 앞에 있던 파이를 그대로 꿀떡 삼키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리안….”
“일단 저희는 바로 북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분 성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해서 먼저 보급을 위해 카멜룬에….”
그만두라고 눈짓을 주었지만,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도리안은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간의 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자신이 활약했다고 할 때마다 손을 꼭 부여잡은 채 탄성을 흘렸고, 두 번이나 성벽에서 뛰어내려 병사들을 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실비아는 기꺼운 눈으로 자신을 보다가 에덴의 손아귀에서 유아와 점장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입술을 꾹 깨물며 유아를 끌어 안아주었다.
“힘들었겠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보았기에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유아의 사정에 공감한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지금까지 참고 있던 유아도 그 마음을 느꼈는지 눈매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흐윽….”
“마님….”
“유아야.”
시녀들도 실비아의 사연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둘씩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식탁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잘 지내겠네.’
라온이 유아와 실비아, 시녀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예상대로 자신의 가족들은 유아를 잘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 정말 잘했어. 그리고 고마워.”
유아를 안고 있던 실비아가 자신를 보며 웃어주었다. 이전에 약속한 대로 지그하르트답게 살아주어 고맙다는 것 같았다.
“흐으읍!”
도리안은 그 사정도 모르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정이 많은 건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
라스는 이번에도 같았다.
-안 먹냐?
녀석은 가득 깔린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작은 손을 휘저었다.
-음식 다 식느니라!
분위가 파악 못 하는 거 하나는 마왕다웠다.
* * *
라온은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유아는 실비아가 함께 자겠다며 데리고 갔고, 오늘 되는 일이 없었던 도리안에겐 손님방을 내주었다.
-빌어먹을!
눈앞에서 맛 좋은 음식을 놓친 라스가 냉기를 가득 뿜어냈다.
-오랜만에 별관 음식인데! 다 식은 채로 먹다니! 죄악이다! 죄악!
‘식어도 맛있었잖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안 식었으면 더 맛있었을 게 아니더냐! 너와는 참으로 맞지 않아.
‘그건 동감이야.’
뭐든 최고의 맛으로 먹어야 하는 라스와 달리 암살자 생활을 한 자신은 음식의 맛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배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참 귀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때 방문 앞에 누군가가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세 번의 노크. 주디엘이었다.
“들어와.”
주디엘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하분 성으로 떠나기 전에 따르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중무전에서 연락은 없었나?”
“대연무장에 있을 때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주디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주인님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는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역시.”
라온이 피식 웃었다. 오늘도 카룬 지그하르트가 나섰다가 망신을 당했으니, 그렇게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오늘 도리안이 말했던 사건들을 그대로 전해줘.”
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각색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줘도 별문제 없었다.
“그 외에 별관에 문제는 없었나?”
“예. 레이든 지그하르트 사건 때문인지 다른 세력에서 견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중무전 역시 한동안은 아예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라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레이든을 일방적으로 후려팬 덕분에 별관에는 시선이 떨어지고, 자신의 주목도만 높아진 것 같다.
“네가 여러 가지로 신경 썼겠네.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다 주인님 덕분입니다.”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야.’
그는 1년 전 떠나기 전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알려주고 갔고, 그게 그대로 현실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그저 그 지시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저 어린 나이에 완성되어가는 무력과 이미 경지에 오른 냉철함을 바탕으로 이뤄내는 전략. 라온 이라는 사람은 지그하르트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괴물이었다.
“주인님. 혹시 연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연수?”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이제 검사가 되셨으니, 가문의 무력단체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 전에 한 단체를 골라서 1달 동안 연수를 받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연무장에서 졸업식이 끝났을 때 몇몇 수련생이 연수에 대해 말했던 게 생각났다.
“연수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가?”
“예. 선택식과 달리 연수는 신입 검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주디엘이 미리 준비했는지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읽어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건넨 서류를 펼쳐 읽었다. 직계들의 단체부터 방계, 외부 인사, 봉신 가문의 검대까지 지그하르트 소속의 단체들의 정보가 모두 적혀 있었다.
주로 맡는 임무, 인원, 무력 수위, 가문 내의 위치까지 많은 정보가 적혀 있어서 이것만 보고도 가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리하느라 고생했겠네. 수고했다.”
라온은 서류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쭉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주디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흐음.”
라온은 서류를 쭉 살핀 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그래.”
라온은 서류의 위쪽에 시선을 주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곳이 있더라고.”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텅 빈 연무장의 찬 공기를 들이키자 기분이 고조된다. 하분 성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이곳에 서야 마음이 편했다.
심호흡하며 이 연무장에서 가장 많이 휘둘렀던 연성 검술을 펼쳤다. 도도한 흐름이 생겨난 검술의 파동이 연무장을 크게 울렸다.
“그게 기본 검술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못 믿을 거다.”
연성검법을 한 차례 끝냈을 때 뒤에서 감탄이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있군. 네 녀석은 1년이 지나도 그대로구나.”
버렌은 조금은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씩 웃었다.
“검술 실력은 차원이 달라졌지만.”
그의 녹색 눈빛에는 검술에 대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눈깔이가 달라진 것 같군.
‘그러게.’
분위기만이 아니다. 느껴지는 무력이 한층 단단해졌다. 익스퍼트에 오른 폭발적인 기세. 그 역시 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강해진 것 같았다.
“너에게는 여러 빚이… 으억!”
“라온!”
버렌이 다가오려 할 때 연무장 문이 거칠게 열리고 루난이 달려왔다. 그녀의 돌진에 버렌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라온. 오랜만이야.”
루난은 1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맹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눈빛과 달리 외모는 더 성숙해졌다. 처음 본다면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냉정함이 깃든 얼굴이다.
무력 역시 이전보다 한 층 진일보했다. 예리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기세가 그녀의 어깨 위로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이거!”
루난이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웃음이 나온다. 저 상자를 보자 다시 한번 가문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오! 역시 본왕의 첫 번째 시녀 아이스크림 소녀답도다.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먹어라!
라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혀를 날름거렸다.
“나도 가져온 게 있어.”
라온이 휴게실에 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와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것보다 더 세련된 느낌의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이건?”
“도시에서 가져온 신제품이야.”
“내…거?”
“응.”
많이 얻어먹었으니, 한번은 갚아줄 때도 되어서 도시에 갔을 때 사두었다.
“아….”
루난이 상자를 받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줄 생각만 했지, 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것 같다.
“고, 고마워.”
루난의 입매가 가늘게 올라갔다. 거의 처음 보는 미소였다.
“너희들은 여전히… 으억!”
“소꿉놀이라도 하냐?”
밀려 나간 버렌이 민망한 표정으로 다가올 때 담벼락을 넘어온 마르타에게 깔려서 바닥에 엎어졌다.
“나이가 몇 갠데 그러고 놀고 있냐. 앙?”
마르타는 흑단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왕족처럼 고귀함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지만 상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이 녀석도 강해졌군.’
마르타의 무력은 버렌이나 루난이상으로 성장해 있었다. 부드러움은 전혀 없이 오로지 강대한 기세인 것을 보니 성격도 그대로인 모양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희는 너무 머리가 꽃밭….”
라온은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절거릴 때 구슬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이걸 왜….”
“먹으라고.”
“…윽.”
마르타는 싸울 때보다 더 좋지 않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초코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지고 뒤로 물러섰다. 꼭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줬을 때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어때?”
“마, 맛있… 아니 괜찮네.”
그녀는 표정이 보이지 않게 뒤를 돈 채로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귓볼이 조금 빨개진 걸 감추지는 못했다. 굉장히 마음에 든 느낌이다.
“응. 응.”
루난 역시 행복함이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슬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넣고 있었다.
-남 좀 그만 챙기고 좀 먹어라! 어제도 다 식은 음식만 먹었지 않느냐!
라스가 팔을 마구 휘저으며 냉기를 일으켰다. 가만히 있는다면 이곳에 냉기의 해일을 일으킬 기세였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남은 네 개 중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때 라스가 펄쩍 뛰며 파란색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민.트.초.코! 절대 민크초코해!
‘…….’
이 먹보가 정말 마왕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다시 한번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민트초코를 입에 넣었다. 역시나 그리 좋지 않다. 시원하긴 한데, 이걸 왜 먹는지 잘 모르겠다.
-크으, 이 맛에 산다….
반면 라스는 마약이라도 한 듯 눈동자가 떨며 히죽거렸다.
“음, 너희들 어디로 연수를 갈지는 결정했나.”
버렌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밀리고, 깔렸는데도 별 표정 변화가 없다. 과거에 비해 확연히 유해진 성격. 강해진 건 무력만이 아니었다.
“뭘 물어. 당연히 아버지께 가지.”
“나도.”
아이스크림을 먹던 마르타와 루난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나도 중무전으로 가니까. 그럼 넌 어디로 갈 거냐.”
버렌의 질문에 루난과 마르타도 아이스크림을 씹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라온!”
“진짜 있네!”
“아하하하! 하나도 안 변했어.”
라온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다른 검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그간의 회포를 풀겠다는 듯 라온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북적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그리고 그들의 성장과 반가움이 그대로 전해져와서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5 연무장의 검사들이 모두 모였고, 라온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후우우웅!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연무장 담벼락 위로 치솟은 녹색 바람과 함께 리메르가 나타났다.
“너희들은 지치지도 않냐. 오늘은 쉬라고 했잖아.”
“어쩌다 보니 와졌어요.”
“라온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근데 진짜 있더라구요.”
수련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리메르를 보며 헤헤 웃었다.
“어? 43명 다 있네. 그럼 오늘 끝내자. 내일 또 오기 귀찮아.”
리메르는 수련생들의 숫자를 세고 난 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뭘 끝내요?”
“너희들 연수받을 단체 정하는 거. 그게 내 마지막 일이거든.”
그는 휴게실로 가다 말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건 내일 서류로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대충대충인데….”
“내가 대충하는 거 하루 이틀이냐? 진짜 선택식도 아니니까. 그냥 해. 어차피 연수생에게 어려운 일 안 시켜.”
리메르는 시끄럽다고 손을 저으며 불만을 일축했다.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엘프다웠다.
“지금부터 내가 단체를 부를 테니까. 원하는 곳이 있으면 거수하도록. 먼저 휘검단.”
그는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지그하르트의 단체를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어휴!”
“진짜 자기 마음대로라니까.”
“뭐, 결정하긴 했지만.”
수련생들은 불만을 가지면서도 원하는 단체에 손을 들어 올렸다.
루난과 마르타는 말했던 대로 그녀들의 아버지가 장으로 있는 검대로 들어갔고, 도리안은 보급을 담당하는 풍위대를 골랐다.
계속해서 단체가 호명되며 남은 사람은 라온과 버렌뿐이었다.
“다음은 중무전.”
“예!”
카룬 지그하르트가 수장으로 있는 중무전이 불리자마자 버렌이 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라온 너도?”
“헉! 네가 왜?”
리메르와 버렌은 당당하게 거수하고 있는 라온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중무전이라면 네놈을 싫어하는 놈이 있는 곳이잖느냐. 왜 거길 가려는 거냐.
라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니까.’
라온의 두 눈에 진한 광채가 어렸다.
연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정했다.
날 가장 싫어하는 카룬이 운영하는 중무전에 가서 그들의 훈련 방법을 쪽쪽 빨아먹고 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