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라온이 대연무장 문을 손으로 잡았다. 닫히려던 거대한 문이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한 채 멈췄다.
“다, 당신은….”
“라온 지그하르트!”
문 앞의 검사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깃대를 치웠다.
“라온!”
“도련님!”
“라온 도련님!”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좌측 외곽에서였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빨개진 눈으로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그쪽을 마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늦게… 커헉!”
“라온!”
“야! 임마!”
본인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은 버렌을 밀쳐내고, 루난과 마르타가 달려왔다.
“라온!”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 거야! 왜 이제야 오는 거냐고!”
루난과 마르타는 드물게도 똑같이 인상을 구긴 채 자신의 소매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라온. 너무 늦었어!”
“아, 아쉽네. 안 죽고 살아 있었다니.”
루난은 소매를 잡고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고, 마르타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크림 소녀와 소고기 소녀 둘은 그대로구나. 안심했도다.
라스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저 눈깔 녀석과 귀때기는 아직 살아있군. 아쉬운 일이니라.
반면 버렌과 리메르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정말이지 언행을 예측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라온!”
“이제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늦었잖아!”
수련생들도 자리에서 벗어나 연무장 문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라온의 앞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마지막에 등장하다니, 네가 무슨 주인공이라도 되는 거냐?”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귀찮은 표정이지만, 미소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여전한 사람이다.
“왔으면 빨리 올라와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직 안 온 녀석이 있어서요.”
라온은 고개를 젓고, 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안 온 친구?”
“누가 또 있어?”
“다 온 거 아니야?”
잠시 후 없어 보이는 탁한 숨소리를 흘리며 유아를 업은 도리안이 대연무장의 문을 넘었다.
“가, 갑자기 혼자 뛰어가시면 어떻게 해요!”
도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유아를 내려놓았다.
“내가 먼저 가지 않았으면 문이 닫혔을 거야.”
라온은 그제야 문에서 손을 뗐다. 한 사람의 힘에 막혀 있던 거대한 철문이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웅장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으음….”
“저걸 그냥 힘으로 막은 건가….”
문지기 역할을 하던 검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졸업식을 시작하면 되돌릴 방법이 없잖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털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졸업식이 시작되어 참여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도리안과 유아를 놔두고 먼저 와서 문을 잡은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아, 도, 도리안!”
“도리안이 있었구나.”
“그, 그러네. 도리안이 있었네.”
리메르와 수련생들은 도리안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 모두는 라온의 화려한 등장에 빠져 도리안이라는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도리안이 있었구나? 그 말 좀 많이 섭섭한데….”
도리안이 서글픈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올라가.”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서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유아야. 저기 저 사람들 보이지?”
“예쁜 옷을 입은 언니들이요?”
“그래. 저기 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
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비아와 헬렌이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흐음….”
리메르는 달려가는 유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라온을 보았다.
“수확은 있었나?”
“네.”
“좋군. 주인공도 왔으니, 시작하자. 전부 자리로 돌아가.”
라온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들은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안색이 밝아진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원래의 자리로 향했다.
“주인공들이라고 해줘요….”
도리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맨 끝자리로 향했다.
“아, 미안. 그리고 라온은 너는 가장 앞에서….”
“멈춰라.”
리메르가 안 미안한 표정으로 라온의 위치를 말해주려고 할 때 직계들이 앉아 있던 중앙 단상에서 카룬 지그하르트가 일어섰다. 막강한 기세를 피워내며 글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주님. 다른 수련생들은 한 달 전에 졸업 자격을 증명했지만, 라온은 이제야 가문에 도착했습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했으니 함께 졸업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틀리진 않군.”
글렌이 무감정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룬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너희 둘은 교관들에게 졸업 자격을 얻지 못했다. 졸업식에 설 자격이 없으니 내려가라.”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이, 있습니다! 하분 성주의 편지가 여기에….”
“그게 아니다.”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밀랜드의 편지를 꺼내려 할 때 카룬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가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를 교관에게 보고하고 그걸 바탕으로 시험의 합격 여부를 가려야 하거늘. 이제 도착했으니, 그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설마 여기 있는 모두를 기다리게 하며 자격 증명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푹 숙였고, 라온은 덤덤한 눈으로 카룬을 바라보았다. 방해가 맞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어.”
리메르가 미소를 유지한 채 앞으로 끼어들었다.
“리메르….”
“검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그것 외에 다른 게 필요한가?”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찰나의 순간에 솟구치는 강대한 기파. 폭풍이 응집된 듯한 녹색 오러가 은빛 칼날을 진하게 휘감았다.
고오오오!
리메르는 극한의 예기를 담은 검으로 라온을 겨누었다.
“말은 필요 없겠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을 타고 나아가 검을 내리친다. 사위에서 모여든 바람의 칼날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언젠가 보았던 검. 이곳을 떠나기 전 그에게 패배할 때 보여주었던 바로 그 검술이었다. 한층 더 강화된 오러로 자신의 약점을 사정없이 노려왔다.
시험. 이건 그가 내리는 시험이다. 1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달라는 의미의 공격이었다.
‘실망시킬 수는 없지.’
리메르의 칼날이 가슴에 닿기 직전 라온의 손이 움직였다. 검집에서 벼락처럼 치솟은 붉은 칼날이 바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역으로 리메르의 허리를 노렸다.
쩌어어엉!
의지를 담은 두 칼날이 맞부딪치자 녹광과 적광이 폭발하며 연무장 중심에서 열풍이 터져 나왔다.
찌지지직!
검날의 비틀림 사이에서 일어난 샛노란 스파크를 거울삼아 라온과 리메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웅!
응집된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 라온과 리메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뻗어 그 강대한 오러의 폭풍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앙!
연무장 상공에서 폭발한 오러들은 졸업을 축하하는 폭죽처럼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전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더니, 완전히 달라져서 왔구나.”
리메르는 아직 떨리는 검을 휘돌리며 씩 웃었다. 만족스러움이 넘쳐흐르는 듯한 눈빛이다.
-달라지기는 무슨, 똥폼 잡는 것만 늘었지.
라스는 라온이 주목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허어….”
“저, 저 검격을 막았다고? 아직 수련생인 녀석이?”
“리메르가 봐준 건가?”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힘 조절이야 했겠지만, 수련생이 받아낼 검격이 아니었다고.”
“미쳤어. 17살에 저 무력이라니….”
눈앞에서 라온과 리메르의 격돌을 지켜본 검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으로서 네 성장을 인정한다. 생존 시험 합격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감사합니다.”
라온은 글렌 그리고 리메르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직접 보셨는데,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중무전주?”
“끄으윽….”
카룬 지그하르트 역시 라온이 펼쳐낸 검격의 위력을 눈앞에서 보았기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를 갈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더 강해져서 왔잖아.”
“아오! 괜히 걱정해줬네.”
“근데 교관님 검을 어떻게 막은 거야?”
“진짜 미쳤다….”
라온과 리메르의 격돌을 피부로 느낀 수련생들은 안에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역시….”
“라온!”
“저 망할 녀석….”
버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고, 루난은 오랜만에 코를 흥흥거렸으며, 마르타는 흥겨운 것처럼 입매를 말아 올렸다.
“가주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라온에 대한 질문은 이후에 하도록 하지. 시작하라.”
글렌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수련생. 라온은 앞으로.”
“예!”
라온은 당당한 걸음으로 수련생들의 앞에 서서 글렌을 올려보았다.
“5 연무장 총원 43명, 현재원 43명. 열외 무! 지금부터 5 연무장 수련생의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는 열외 무를 특히 강조하면서 졸업식의 시작을 알렸다. 수련생 모두가 허리를 쭉 펴고 자신감이 깃든 눈빛을 발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거 맞아? 난 시험도 안 봤는데. 이거 맞냐고.”
도리안은 앞의 옆의 수련생들을 힐끔거리며 손가락을 비볐다. 시험을 안 본 건 좋지만 존재감이 아예 사라진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나 너무 무시당하는 거 아니야?”
* * *
졸업식이 끝난 후 라온은 실비아와 만나기도 전에 가주전 알현실로 불려왔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연무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옥좌에 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해. 얼마나 강한지 느껴지질 않아.’
성장하면 할수록 글렌이라는 산이 얼마나 높은지 조금씩 보이게 된다. 슬로스라는 초월적 존재를 마주하고 왔음에도 그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남자라면 그 슬로스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봐야 본왕의 아래이니라.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본왕이 본체의 힘을 가져온다면 수만 합으로 이길 수 있다.
‘전에는 수천 합 아니었어?’
-그건…. 네, 네놈이 본왕의 힘을 훔쳐 갔기 때문 아니더냐!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
‘라스?’
라스는 대답 없이 자는 것처럼 팔찌로 쏙 기어들어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글렌의 앞에 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옆에서 떨고 있는 유아의 손을 꼭 잡아준 채 고개를 숙였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도리안이 한 박자 늦게 인사를 했지만, 글렌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저어 일어나라 지시했다.
“너희들이 이곳을 떠난 이후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보고해라.”
“꽤 길어질 텐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다. 네가 1년간 무엇을 했는지를 듣고, 졸업 여부를 가려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들렸던 카멜룬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그곳에 가서….”
라온은 한 발 앞으로 나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물론 도둑질이나, 슬로스를 만난 건 제외하고 몇 가지 사건들을 적절하게 수정했다.
“…마지막으로 밀랜드 성주와 대련을 하고 난 뒤 다시 가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주와의 대련은 어떻게 됐지?”
“제가 패했습니다.”
“패한 건 알고 있다. 네 녀석이 그를 꺾기엔 100년은 이르니까. 성주는 강기를 썼나?”
“예. 마지막에 사용했습니다.”
“흐음!”
“허어….”
리메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로엔은 감탄한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
글렌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판단을 내리겠다더니 큰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에덴에서 노렸다는 게 그 아이인가?”
“으윽.”
글렌의 시선이 처음으로 유아에게 향했다. 그 압박감에 유아의 손에서 심한 떨림이 일었다.
“그렇습니다. 세이렌의 가면을 씌우겠다고 하면서 두 번이나 노린 걸 보면 꽤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이렌이라….”
글렌이 저절로 피어나는 기세와 위엄을 가라앉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
말하기 편해진 유아가 라온의 손을 꾹 잡은 채 천천히 입을 뗐다.
“유, 유아예요! 아, 유아입니다!”
“음.”
본인도 모르게 크게 터진 유아의 목소리에 글렌이 로엔에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있군요.”
로엔이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자체에 영기가 끼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상단전이 열린 게 아닐지….”
“아니, 처음부터 열린 상태로 태어났다. 극히 드문 재능이야. 에덴에서 노렸다는 이유를 알겠어.”
글렌은 평범한 사람처럼 기세를 아예 지워버리고,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붉은 눈은 이 찰나의 순간에 유아의 모든 것을 살핀 듯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별관에서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라온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강해지길 원하니 검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검이 아니다.”
글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걸어야 할 길은 검이 아니라, 소리다.”
그가 턱짓하자, 우측에 있던 로엔이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로엔에게 소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자, 잠시만요! 로엔 님은….”
로엔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글렌의 뒤에 섰던 암살자가 분명하다. 유아에게 암살 기술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로엔은 소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글렌은 생각을 모두 읽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소리….”
로엔은 근접 거리에서도 소리를 완벽하게 죽일 줄 아는 무인이다. 소리를 없앨 줄 아니, 반대로 소리를 낼 줄도 아는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아와 라온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 네!”
유아는 글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인상의 로엔이 편했는지 빠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지. 왜 이렇게 늦은 것이냐.”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라온은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도리안과 유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과일과 몇 가지 물품 보충을 위해 도시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유아는 실비아에게 맛 좋은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몇 가지 음식 재료를 사가길 원했고, 도리안은 주머니에 과일과 몇몇 물품을 보충하고 싶다고 해서 도시에 들렀다가 왔다.
“과, 과일?”
“물품 보충?”
리메르와 로엔은 이유를 듣자마자 어이가 없다는 듯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과일을 사느라 늦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 스승에 그 제자야.”
글렌은 리메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저렇게 가르쳤냐고 묻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다.
“가주님! 그런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자의 욕은 참을 수 있지만, 제 욕은 참지 못합니다!”
리메르가 취소하라는 듯 고개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미친놈이로다.”
-…여전히 미친놈이로다.
글렌과 라스는 통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뱉었다.
“저 둘은 그렇다 치고, 너도 과일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했느냐?”
“저는 그동안 생각을 비웠습니다.”
“생각을 비워?”
“예.”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밀랜드 성주와 대련을 끝낸 이후. 아니, 만화공이 한 단계 올라간 이후부터 뇌리에 심상이 떠올랐습니다. 검술, 보법, 연공법. 제가 강해질 수 있는 여러 미래가 그려지더군요.”
“그래서 넌 무엇을 했지?”
그 말에 글렌의 눈빛이 처음으로 번쩍였다. 흥분한 듯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는 심상들을 냇물처럼 그저 지켜만 보았습니다.”
“왜지? 그 영감들을 잡으면 더 강해질 거라는 욕심이 일었을 텐데.”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넘보기에 너무 큰 것들이었습니다. 어설프게 파고들었다면 거기에 매몰되어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켜만 보았다?”
“예. 언젠가는 그것이 제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저 둘과 마지막 수련생 생활을 즐겼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답이었어.’
대련 이후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미래의 자신만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 심상을 붙잡기만 하면 마스터에 오르는 것도, 데루스에게 복수하는 것도 금방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이미지였지만, 그건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놓았다.
떠도는 구름처럼, 혹은 흘러가는 바람처럼 강해진 미래의 심상을 놓아버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무학의 성취가 상승했다.
“그렇군.”
글렌이 다시 몸을 의자에 파묻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강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육체 단련, 오러 연공, 권법, 검술, 보법, 대련 그리고 심상까지.”
그는 자신과 같은 붉은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더 먼 곳을 향할수록 꼭 잡아야 하는 걸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네 선택은 옳았다.”
“예?”
“먼 곳을 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까운 곳을 살피다가 방향이 어긋나게 되지. 중간의 위치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도록 해라.”
“아, 예.”
글렌에게서 옳았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순간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오?”
“음!”
리메르와 로엔도 의외였던지 입을 떡 벌렸다.
“다만 그 아이나, 너는 이미 에덴에 노출된 상태다. 제대로 변장했다고 해도 조심했어야 한다.”
“저희가 변장을 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장한 건 맞지만 그걸 글렌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네 녀석이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변장했으리라 생각했다.”
글렌은 잠시간의 침묵 후 평소보다 조금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렇습니까.”
라온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짓을 하느라 늦었는지 알았는데, 길을 잡았다면 감안해줄 만하지. 네 졸업을 인정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감사합니다.”
“저, 저기!”
글렌이 빨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젓고,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려 할 때 도리안이 손을 들었다.
“저는… 윽!”
시험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고 말하려 했지만, 글렌의 시선을 받자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부스럭.
도리안은 버릇처럼 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번에 사 온 과자를 꺼냈다.
“과, 과자 좀 드실래요?”
* * *
“가주님도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인 모양이네요.”
리메르는 도리안이 주고 간 과자를 씹으며 히죽 웃었다.
“손주의 활약상을 직접 듣고 싶어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1시간 넘게 들으시다니, 저는 그런 내리사랑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시끄럽다.”
“거기다 이번에는 실수도 하셨잖아요. 말을 잘못해서 천검대와 비연회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는 걸 라온에게 들킬 뻔…윽! 죄, 죄송!”
글렌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나는 걸 본 리메르가 폭소를 멈추고 물러섰다. 바로 어제 죽을 정도로 얻어맞아서 아직 반항할 용기가 없었다.
“라온 님의 기척은 더 줄어드셨더군요. 이젠 고수라고 해도 라온 님이 무학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로엔이 신기하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처음부터 기척을 숨기는데 능한 녀석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저도 라온의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익스퍼트 상급을 넘어선 건 확실한데….”
리메르도 과자를 씹으며 그 말에 동의했다.
“아까 들었지 않느냐. 머릿속으로 영감이 떠오르고 있다고. 그 아이는 이미 벽 앞에 서 있다.
“벼, 벽이라면….”
“설마 마스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엔이 눈을 부릅뜨고, 리메르가 과자 봉지를 떨어뜨렸다.
“그 아이는 이미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르러 있다. 거기다 마스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에 올라탔지.”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에 오르면 머릿속으로 자신의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금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높은 심상의 경지에 매몰되면 평생 마스터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아예 무시하면 마스터에 이르는 길이 멀어진다.
그저 지나가는 물처럼 흘려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라온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그걸 이뤄냈다. 역시나 보통 녀석이 아니다.
라온의 진짜 강점은 빠르게 성장하는 무력이 아니라, 정신의 굳건함과 냉정함인 것 같았다.
“대륙십이성이라는 아이들이 마스터에 오른 나이가 20대 중반. 하지만 라온은 그 나이대의 나보다도 한 줄 위의 성취를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글렌의 붉은 눈동자에 기대의 불꽃이 번쩍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가 탄생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