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49화 (149/653)

149화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발목에서부터 솟구친 기운을 허리와 손목으로 연결시켰다. 칼날에 깃든 불꽃이 나선으로 비틀어지며 밀랜드의 가슴을 노렸다.

“이제야 좀 재미있겠구나.”

밀랜드가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휘돌렸다. 북방의 바람처럼 거친 파동이 대지를 갈랐다.

콰아아아앙!

막대한 힘을 담은 검격이 서로 격돌하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힘 하나는 마스터급이로구나.”

밀랜드의 기파가 강해진다. 수비하려고 검을 든 게 아니라 공격을 하다 막힌 것처럼 압박이 거세졌다.

“힘만이 아닐 겁니다.”

라온은 점점 강해지는 밀랜드의 검격을 버텨내며 미소를 지었다. 강화된 근력과 민첩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밀랜드의 압력을 버텨냈다.

캬앙!

목을 향해 쏟아지는 묵직한 검격을 흘려낸 뒤 앞으로 나아갔다.

밀랜드의 검술은 전검. 몬스터와 평생을 싸우며, 전장에서 쌓아 올린 검술이기 때문에 파천의 위력을 지녔지만, 동작이 크다. 그 틈을 노려야 했다.

“잔재주는 소용없다.”

밀랜드는 만화공의 오러 자체를 갈라버리겠다는 듯 검날 위에 더 막대한 기운을 응집시켰다. 은빛 칼날 위로 짙은 검사(劍絲)가 일어섰다.

‘저건….’

모여드는 기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마스터의 전유물인 강기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운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저 검격을 맞는다면 강철조차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지 말거라.”

밀랜드가 대지를 뭉개며 보법을 밟았다. 빠르지는 않지만, 마치 들소 떼가 몰려오는 것처럼 공간을 장악하며 다가와 피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저런 오러에는 맞서는 게 아니다. 도망친 후 빈틈을 노리는 게 옳은 일이지만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하면 이곳에 선 보람이 없지.’

무거운 전검을 사용하는 밀랜드와 제대로 맞부딪칠 흔치 않은 기회다. 이런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기운이 실린 검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라온이 네 개의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느려지는 시야 속에서 밀랜드의 힘의 흐름을 읽어냈다.

“흐읍!”

살짝 드러난 밀랜드의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광아검의 구결이 깃든 칼날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어딜.”

밀랜드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허리의 빈틈을 순식간에 지우고, 완벽한 자세로 압박을 가해왔다.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순간 사고력과 순발력, 육체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한참 전에 마스터가 된 그가 이런 공격에 허를 찔릴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온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미끼를 던졌지.’

검이 밀랜드의 막강한 기운과 마주치려는 순간 검날에 어린 오러를 비틀었다.

키이이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밀랜드가 쏟아낸 검격의 궤도가 꺾여나간다. 광아검의 초식 중 하나인 윤결. 본래는 적의 몸에 회전하는 오러를 박는 검술이지만, 지금은 완벽한 방어 초식이 되어주었다.

라온은 밀랜드의 검이 튕겨 나간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아직 회전력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칼날이 밀랜드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제법이구나!”

밀랜드가 씩 웃으며 왼손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푸른 오러가 원형으로 압축되어 칼날을 튕겨냈다.

이 찰나의 순간에 저런 임기응변이라니, 역시나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무인다웠다.

쿠구구구!

밀랜드의 손목이 반원을 그리자, 검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그대로 떨어지는 칼날에 전장의 무게가 실린다. 막대한 압력에 피부가 찢겨나갈 것 같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라온이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쏟아지는 칼날을 향해 나아갔다.

‘물러나면 오히려 당해.’

전검은 도망치거나, 물러날수록 압박을 가해오는 검술이다. 힘으로 맞서지는 않더라도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된다.

강대한 힘이 깃든 칼날이 진동하여 집중 상태에 들어갔는데도 그 흐름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측이다. 지금까지 뒤에서 봐왔던 밀랜드의 움직임을 머리에 그리며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밀랜드의 검격이 최고의 화력을 발휘하기 직전에 막아섰다. 경험이 주효했던 것인지 방향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뼈를 으깨는 듯한 위력을 비껴내며 왼쪽의 팔꿈치로 밀랜드의 명치를 후려쳤다.

“기습에도 능하군. 너야말로 전장이 어울리는구나.”

그는 알고 있었다는 듯 왼쪽 손등으로 팔꿈치 타격을 차단했다.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 그렇기에 웃음이 나왔다.

“즐겁나?”

“흥이 오르긴 합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따라 검날 위에서 춤추던 불길이 꽃송이처럼 휘날렸다.

하나하나가 검기급 위력. 밀랜드도 쉽사리 상대하지 못하고, 오러를 운용해 중간에서 폭발시켰다.

퍼어어엉!

연무장 바닥이 들썩이며 불꽃과 오러가 뒤섞인 모래폭풍이 일어났다. 라온과 밀랜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안으로 파고들어 검격을 쏟아부었다.

쿠구구구구!

솟구치는 회색 먼지 속에서 적광과 청광이 끝없이 맞부딪쳤다.

*     *      *

테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쳤군.”

라온이 경지에 비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저 정도로 맞설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무력 수위 자체는 나와 비슷할 텐데.’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그 위치에 있는 게 분명한데, 라온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선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육체 능력은 아버지보다 라온이 앞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상식을 벗어난 강함이다. 부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실력도 빨리 늘어나는데, 그 질도 다르긴 하네요.”

격이 다른 전투에 베토가 입을 떡 벌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나보다 아래였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강해질 수 있지? 어이가 없네.”

그는 기이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많은 강자와 천재들을 보고 다닌 용병단장에게도 라온은 신비 그 자체인 듯싶었다.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부터 라온의 등만을 바라보던 에드퀼이다.

“물러서지 않는다?”

“저분은 몬스터 앞에서도, 강자 앞에서도, 자연의 흐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죽을 위기에서도 앞으로 발을 뻗습니다.”

그는 밀랜드와 접전을 벌이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율이 인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강건함이 저분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확실히….”

테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라온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되어가는 어린 녀석이 저런 당당함을 가지는 건 저 무력 이상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저 아이의 뒤에 서기로 정한 건 최고의 선택일지도 모르겠군.”

잔잔하지만, 힘이 있는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간부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쩌어어어엉!

하늘이 깨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모래폭풍이 터져나갔다.

라온은 뒤로 거칠게 밀려났지만, 밀랜드는 거의 물러서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육체 능력도, 오러도 크게 밀리지 않지만, 밀랜드의 지속력과 굳건함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냐.”

밀랜드가 검을 휘돌리며 빙긋 웃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지치질 않으시는군요.”

그는 전장에서 검강과 검기를 연속으로 사용하고서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오러의 양보다도, 경지의 차이인 것 같았다.

“이것의 차이다.”

밀랜드가 본인의 복부보다 살짝 윗부분을 가리켰다.

“중단전. 마스터에 경지에 오르면 중단이 개방되고, 적은 양의 오러로 더 크고 단단한 기운을 운용할 수 있지.”

“중단전….”

“넌 익스퍼트 이상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아직 마스터에 닿지는 못했어. 소모전이라면 날 이길 수 없다.”

중단전의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 효용을 목격한 건 처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는 거지?”

“나아갈 길이 보였으니까요.”

중단전의 능력을 보자, 마스터에 닿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능력치가 있는 자신이라면 저 중단의 능력을 더 폭발적으로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재밌군.”

밀랜드가 담백한 눈빛을 발했다. 다만 그의 검에서는 그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사나운 기세가 어렸다.

“네 전력을 보여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세웠다. 불의 고리를 깨질 듯이 공명시키며 글래시아를 퍼뜨렸다.

쿠구구구!

단전에 남은 만화공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핏빛 불꽃이 검과 육체를 휘감으며 신비로운 형태를 그린다.

검으로 만들어낸 어금니부터 등으로 이어지는 뿔까지. 마치 용의 머리와도 같은 모습. 어마어마한 오러가 일으키는 파동에 연무장이 뒤틀렸다.

“그 검술의 이름은 뭐지?”

밀랜드가 빛이 어린 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염룡결입니다.”

라온이 어깨 위로 검을 세우고,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용이 입을 다물고,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재밌군. 이 검의 이름은 설룡참. 천 년 전 스터린 산 정상에 살았다는 빙룡을 베었다는 검이다.”

밀랜드의 검에 섬뜩할 정도의 예기가 어린다. 시야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기운이 검날 위로 응집되었다.

“오라. 네 용이 이길지. 내 검이 이길지 그 끝을 보자.”

그가 손짓하자마자, 라온이 다리를 뒤로 뺐다. 극한으로 압축시킨 오러를 폭발시키며 땅을 박찼다.

고오오오!

공간을 불태우는 오러의 칼날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견디지 못하면 그대로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일었다. 검극에 끌어모은 오러를 한순간에 터트렸다. 적룡이 화염의 숨결을 뿜어내는 듯 불꽃과 함께 검이 나아갔다.

쩌저저저적!

푸른빛과 붉은빛이 명멸하고, 오러의 폭풍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쇳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폭풍이 가라앉고 연무장의 전경이 드러났다.

마법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바닥 위로 라온과 밀랜드가 서 있었다.

밀랜드의 검에는 눈부실 정도로 완벽하게 유형화된 오러가 어려 있었지만, 라온의 검은 반으로 부러져 칼날이 땅에 박혀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라온은 부러진 검날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사령관님이 이겼다!”

“당연한 일이잖아. 뭘 그렇게 좋아해!”

“사령관님!”

“라온 님! 잘하셨어요!”

“거의 맞먹었잖아요!”

“라온! 라온! 라온!”

병사들은 승자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패자를 위로했다.

다만 승자인 밀랜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패자인 라온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흡사 승패가 뒤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나 참.”

밀랜드는 검에 어린 섬광 같은 오러를 흩뜨려 버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강기까지 사용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초인의 육체와 판단력, 오러를 가지게 된다.

강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강기를 쓰지 않았다면 마지막 그 검술에 먹혔을 것이다.

“대체 무얼 노리기에 그렇게 빨리 강해지는 것이냐.”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요.”

라온은 부러진 검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덕분에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뤄냈다. 그 성장의 밑바탕이 된 건 전부 그놈 덕분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난 아직 잊지 않았다.’

네놈의 목을 벨 때까지 난 멈추지 않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분노의 열기가 피어났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과는 다른 결의 화려함을 지닌 로베르트 가주전.

데루스 로베르트는 웅장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높은 천장의 집무실에 앉아 수석 집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 외에 몇 가지 특이사항이 있지만, 전체 보고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특이사항?”

데루스가 부드러운 눈매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북방 이곳저곳에서 어린 검사들이 활약하는 중인데,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수련을 위해 나왔다고 판단됩니다.”

“실전에 노출 시켜 검사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려나 보군.”

“효과는 확실합니다. 하분 성을 구해냈다는 어린 검귀 라온부터….”

“라온?”

라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데루스의 눈빛이 급변했다. 봄바람처럼 선선했던 분위기가 빙굴에 들어온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그 라온이 아닙니다. 금발적안.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게 확실시되는 어린 녀석입니다.”

“아, 그렇겠지.”

데루스가 피식 웃으며 손등을 보았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검흔에서 핏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좀 짜증이 나서.”

그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분 성이라면 에덴의 습격을 막았다는 어린 검사가 그 라온이라는 녀석이겠군.”

기분이 나빠진 듯 데루스의 음성에 짙은 짜증이 묻어났다.

“스쳐 지나가듯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셨군요.”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맞습니다. 다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소문은 과장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축소되기도 하지.”

“예?”

“계획대로 된다면 결국 지그하르트와도 부딪치게 될 거다. 그 아이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 전체의 정보를 갱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데루스가 깔끔한 턱을 쓸어내렸다. 라온의 목을 벨 때처럼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림자들을 북쪽으로 보내라. 지그하르트의 모든 정보를 가져오도록.”

*     *      *

라온이 침대 아래에 세워둔 배낭을 어깨에 걸쳤다.

숙소를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서 방을 쭉 둘러보았다. 고작 1년하고도 1개월을 산 작은 방이지만 몇 년 동안 살았던 것처럼 떠나기 아쉬웠다.

-촌스럽게 추억에 젖지 말고 빨리 나가라.

‘마왕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군.’

작지만, 안락했던 숙소를 눈에 담고, 밖으로 나갔다.

“그거 제가 가져갈게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리안이 손을 흔들었다. 녀석은 자기가 들겠다며 배낭을 배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저도 준비됐어요.”

도리안 뒤에서 흰색 털옷을 입은 유아가 나왔다. 모자를 뒤집어쓴 모습이 꼭 흰 토끼 같았다.

“짐은 다 챙겼어?”

“네. 도리안 님이 가져가셨어요.”

유아는 도리안을 가리키며 헤헤 웃었다.

‘밝아졌군.’

결국 유아는 떠나고, 점장은 남기로 결정됐다. 미리 마음을 다졌기 때문인지 슬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자.”

라온은 유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숙소를 나섰다. 검사와 기사 그리고 병사들이 양옆에 도열하여 성문까지 길이 생겨 있었다.

“조심히 가세요!”

“우리 잊지 마시구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걸음을 뗄 때마다 등을 대고 싸운 전우들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라온은 그 말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성문으로 향했다.

처음 보았을 때 굳건하게 닫혀 있던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밀랜드와 테리안을 비롯한 간부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테리안과 카불은 웃었고, 라딘을 비롯한 정찰대장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며, 테리안과 에드퀼은 차분한 눈빛을 발했다.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거라.”

라온과 밀랜드의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몇 달 전 나누었던 검과 검의 대화가 아직 마음에 남았으니까.

간부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에드퀼의 차례가 되었다.

“제 뒤에 서는 정도가 아니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그대로입니까?”

“물론입니다.”

에드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해지십시오.”

라온이 흔들리지 않는 에드퀼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저와 함께 걷고 싶으시다면 이곳에서 누구보다 강해지십시오. 검과 정신 모두.”

“알겠습니다.”

에드퀼이 이전과는 격이 다른 기파를 뿜어냈다. 질문도, 의문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항상 기억하거라. 우리가. 하분 성이 네 뒤에 있다는 걸.”

“예.”

담백하지만 힘이 어려 있는 밀랜드의 말을 들으며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라온이 하분 성 그 자체인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점장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유아의 어깨를 잡고 무운을 빌듯이 활짝 열린 성문을 나섰다.

“잘 가세요!”

“라온 님!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온 잘 가라! 고마운 건 우리였어!”

“유아야 조심해라!”

성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잘 있어요!”

“나중에 또 봐요!”

인사하는 유아나 도리안과 달리 라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볼 그날을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하분 성에 올 때 고생했던 끝없는 언덕이 나타났다.

“유아야. 여기에선 업혀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유아를 업고 움직이려고 할 때 도리안이 콧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왔다. 배 주머니에 손을 깊게 넣은 뒤 나무로 된 썰매를 꺼냈다. 세 사람이 타도 남을 정도로 큰 썰매였다.

-저, 저게 뭐야. 저런 게 왜 주머니에 있어!

귀찮다며 조용히 있던 라스가 헛바람을 뱉었다.

“썰매?”

“이게 왜 있어?”

라온과 유아가 썰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네? 이런 곳에 다니려면 썰매 정도는 필수죠.”

도리안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급 썰매라 속도도 조절할 수 있어요. 타세요.”

겁많은 녀석이 왜 썰매를 가지고 다니나 했는데, 속도 조절도 되나 보다.

“와아아!”

유아는 재밌겠다며 손을 올린 채 방방 뛰었다.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 건가?’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유아를 데리고, 썰매에 앉았다.

“그럼 출발합니다.”

도리안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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