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크으으….”
테리안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죽은 건가?”
성으로 다가오던 괴물의 기운에 짓눌려 정신을 잃었던 게 생각났다. 아버지도 막지 못했으니, 죽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후우, 아직 저승은 아닌 듯하네요.”
울브스 용병 단장 카불이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한참 전에 해가 떴을 시간이었지만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모르겠군요. 그 괴물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저, 저건!”
“도련님!”
뒤늦게 눈을 뜬 설격대주 에드퀼과 도리안이 성벽을 올려다보며 벌떡 일어섰다.
“너희 뭘… 아!”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간 테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어둠이 깊게 스며든 하늘 아래. 홀로 선 검사가 있었다. 검을 들지 않았지만, 세상 그 어떤 무인보다도 거대하게 보였다.
고오오오!
하늘을 짙게 물들이던 어둠의 커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겁에 질려 있던 황금빛 태양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그 상서로운 빛이 라온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신비 그 자체였다.
“라, 라온….”
“라온 님!”
“아니, 어떻게….”
하나둘씩 깨어난 사람들이 라온의 등을 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모두가 기절했을 때 라온이 혼자 성벽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전율한 것이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옅은 미소를 짓는 얼굴에 피로와 고통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이쪽의 안전을 확인하듯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래를 살폈다.
“모두 무사하군.”
사막의 모래처럼 메마른 음성이 흐른다.
“약속은 지켰다.”
라온이 구김 없이 방긋 웃었다.
“야,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갑자기…”
“아!”
도리안이 손뼉을 치며 입술을 떨었다.
“아까 라온 님이 전투사를 말씀하셨잖아요! 모두 살아남으라고! 그 말을 지켰 주셨다는 뜻이에요!”
“아, 그거….”
“그럼 그게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남게 해주겠다는 뜻이었어?”
“라, 라온….”
“라온 님!”
사람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이제 그놈은 안 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 아.”
라온이 손을 저으려다가 우뚝 멈췄다. 눈을 감고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성벽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가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라온 님!”
“위험합니다!”
라온의 머리가 돌벽에 부딪치려 할 때 두꺼운 팔이 올라와 그를 붙잡았다.
“후우…”
밀랜드다. 기절해 있던 그가 일어서며 쓰러지던 라온을 끌어당겼다.
“사령관님!”
밀랜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로 라온을 부축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힘겨운 걸음으로 성벽의 끝에 섰다.
“영웅에게 박수와 환호를!”
밀랜드의 포효와 같은 목소리가 아직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의 심장을 두들겼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하분 성의 영웅!”
라온은 듣지 못하는 그의 이름과 환호가 하분 성 하늘에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슬로스라는 재해가 지나간 지 이틀이 지났다.
아직 라온은 깨어나지 못했고, 밀랜드와 테리안을 비롯한 간부들은 짧은 휴식을 취한 뒤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모두 몸은 괜찮은가?”
원형 테이블 중앙에 앉은 밀랜드가 간부들을 쭉 훑어내렸다. 다른 사람의 안부를 묻지만, 눈 밑이 시꺼멓게 그을린 그의 상태가 가장 심각해 보였다.
“조금 쉬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부사령관 테리안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습니다.”
“전 아직 머리가 띵하네요. 죽다가 살아나서 그런가.”
설격대주 에드퀼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베토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랫동안 버틴 기사단장이나, 검대의 대주들도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지지 않은 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찍 기절해서 그런지 후유증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냥 잠시 잤다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몸 상태는 별로지만.”
반면 먼저 정신을 잃은 정찰대장들은 그나마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대체 뭐였을까요?”
3번 정찰대장 라딘이 누구도 꺼내지 못했던 말을 먼저 시작했다.
“세 개의 뿔과 공간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마기를 보면 뻔하지 않느냐. 마족이다.”
밀랜드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등급이 높은 최고위 마족. 젊었을 때 마족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런 놈은 처음이었다. 아예 격이 달랐어.”
“확실히 상대조차 안 되더군요….”
“최, 최고위 마족이면 거의 마왕급 아닌가요?”
간부들은 이틀 전에 보았던 슬로스의 압도적인 기파를 되새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일 수도 있다.”
“예?”
“저, 정말입니까?”
밀랜드의 입에서 마왕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간부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마스터인 내가 버틸 수조차 없었다. 그놈을 상대하려면 육황과 오마의 우두머리급이 와야 한다.”
그는 어둠의 이끌며 다가오던 슬로스를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그런 마왕급 괴물을 돌려보낸 라온 님은 대체 뭡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에드퀼의 목소리가 침묵이 깔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음을 각오했을 겁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령관님이 쓰러졌을 때 죽음은 확정이었죠. 하지만 저희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에드퀼이 밀랜드와 간부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실 겁니다. 저희를 살린 사람이 라온 님이라는 걸.”
간부들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의문이 생겨납니다. 사령관님조차 버티지 못하는 괴물을 상대로 라온 님이 어떻게 우리를 살렸는가, 무슨 수를 써서 그 괴물을 돌려보냈는가 하는 의문이.”
“확실히….”
“나도 내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하긴 해.”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간부들 역시 그게 의문이라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너 라온을 의심하는 거냐?”
“아닙니다.”
테리안이 에드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에드퀼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저었다.
“라온 님이 본인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셨을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희생?”
“라온 님이 무력으로 그 마족을 이겼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남는 건 계약 혹은 거래죠. 제 생각입니다만 라온 님은 본인의 영혼과 육체를 걸고 성의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취했을 겁니다.”
에드퀼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싹 마른 입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지금까지 봐온 라온이라는 사람은 그런 남자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어 하시죠.”
“후우….”
“그 아이가 그런 면이 있지.”
“라온 님….”
테리안과 간부들은 에드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해 있을 때 라온의 입에서 거래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들었다.”
밀랜드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내리감았다.
“거래….”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다른 단어는 모르겠지만, 거래라는 단어는 확실히 들었다.”
“역시….”
“이런!”
에드퀼이 인상을 찌푸렸고, 테리안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마족과 인간의 계약 내용은 보통 힘이다. 마족이 인간에게 힘을 넘겨주고, 영혼을 받아 가지. 하지만 이번에 라온이 건 거래는 뻔하다.”
밀랜드가 분하다는 듯 테이블에 올린 손을 떨었다.
“녀석은 본인의 영혼을 희생하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그렇겠죠.”
“제기랄….”
모두가 깨달았기에 이를 바득 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사령관님.”
에드퀼이 가는 숨을 뱉으며 밀랜드를 불렀다.
“라온 님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제 말씀해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긴 이제 속이는 건 무리겠어.”
밀랜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게 녀석의 이름이다.”
“지그하르트였군요.”
“역시….”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간부들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보여준 활약이 엄청났으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다.
“알고 있었나?”
“아직 16살인 아이가 그 정도 무력과 정신력을 가질 만한 곳은 육황과 오마뿐이죠. 라온 님의 기질은 마가 아니라 정에 가까우니 육황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그하르트라는 걸 알았으니, 복수는 포기할 것이냐.”
“복수 따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그분을 따르고 싶습니다.”
에드퀼이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따른다고?”
“라온 님을?”
“넌 라온한테 얻어터졌잖아!”
간부들이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눈매를 좁혔다.
“신나게 얻어터졌죠.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초심을 잃은 채 평생 약자만 괴롭히며 찌질하게 살았을 겁니다.”
에드퀼이 깨끗한 눈빛을 발하며 일어섰다. 정찰대장들 앞에 서서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집만 가득 차 전우라는 걸 잊고 모자란 짓을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
“왜, 왜 이래! 다 사과 했잖아!”
“그래.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해놓고 왜 또….”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손을 내젓는 정찰병들에게 끝까지 고개를 숙인 뒤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이 아니더라도 전 라온 님을 따르기로 정했습니다. 그분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 뒤를 쫓을 것입니다. 사령관님. 죄 많은 절 성에서 추방 시켜 주십시오.”
에드퀼이 밀랜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급하구나.”
밀랜드가 코웃음을 치며 턱을 세웠다.
“예?”
“녀석에게 목숨을 빚진 건 너만이 아니야.”
그 말에 이곳에 있는 간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이 성 모두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냈다. 그 아이가 잃은 것들을 우리가 채워주는 게 옳다.”
밀랜드가 빙긋 웃으며 무릎을 꿇은 에드퀼을 일으켰다.
“나도 녀석의 뒤를 받치겠다.”
* * *
으음….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뭐지?’
슬로스와의 기 싸움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팔다리가 가벼웠다.
“이상한데….”
예상과 다른 몸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섰다. 육체와 정신만이 아니라, 감각도 더 민감해진 것 같았다.
-이상해? 이상하냐?
올라간 능력치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가 불기둥처럼 치솟았다.
-네놈의 대가리가 가장 이상하노라! 더러운 사기꾼 놈아!
라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제대로 화가 난 모양새다.
‘아,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았어’
-무엇이 고맙다는 말이냐!
‘네가 맨날 마계 이야기를 주절거렸잖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도 기억에 남아서 정보를 이용하기 쉬웠어.
-이, 이놈이….
‘거기다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슬로스에 대한 정보를 마구 넘겨줬잖아. 네가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 넌 역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라스.’
라온이 경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끼으으윽!
라스는 냉기를 풀풀 풍겨내며 눈을 흘겼다.
-죽일 테다.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영혼에 냉기의 창을 박아넣을 것이야!
‘그건 나중에 하시고.’
라온이 당장에 달려들려던 라스에게 손을 저었다.
‘일단 메시지부터 좀 볼게. 꽤 좋은 걸 얻은 것 같거든.’
-이 마귀 같은 놈! 마왕 둘에게 사기를 친 놈은 천지가 개벽한 이후 네놈이 처음이다!
‘마계에는 사기꾼이 없나?’
-네놈 같은 놈이 또 있었으면 이미 세상은 멸망했다!
‘그래?’
피식 웃으며 지나간 메시지들을 불러왔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을 겨루었습니다.]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마주 서서 버틴 것만으로 영혼의 격이 상승하고, 모든 능력치가 오르다니, 슬로스의 막강함이 다시 한번 피부에 와닿았다.
-고작 몇 분 버텼다고 영혼의 격을 올려 주는 게 말이 되느냐!
‘흐음….’
라온은 악을 지르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이 슬로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거지.’
매일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음식만 쫓는 호구가 슬로스 이상의 강자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만화공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만화공이 4성에 올랐습니다.]
3성에서 머물러 있던 만화공이 4성이 되었다. 슬로스에게서 버티기 위해 죽을 정도로 만화공을 일으킨 보람이 있었다.
단전에 차오른 열기의 구체가 예전보다 크고 정심해진 게 느껴졌다.
‘그럼 혹시….’
다음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혹한의 냉기가 글래시아와 통합됩니다.]
[글래시아의 등급이 4성으로 상승합니다.]
예상대로다.
만화공과 같이 운용했던 글래시아가 혹한의 냉기와 합쳐지며 4성의 경지에 올랐다. 만화공의 오러 옆에 자리한 냉기의 구체도 더 순수한 기운을 뿜어냈다.
불의 고리는 늘어나진 않았지만, 성취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했다. 조만간 고리가 하나 더 추가될 것 같았다.
‘역시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강자와 싸워야 해.’
강자와 전력을 다해 부딪친 것만으로 막혀 있던 무학의 경지가 단숨에 벽을 뚫었다. 실전이 최고의 수련이라는 말은 역시나 옳았다.
-흐으읍!
라스에게서 숨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특성 <나태>가 생성되었습니다.]
[수면을 취할 때 미량의 능력치가 상승하고, 체력과 오러 회복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세 번째 메시지를 보았을 때 라온과 라스가 함께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미친!
“잠을 자는데, 능력치가 상승해?”
잘못 본 줄 알고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대로다. 잠을 자기만 해도 능력치가 오른다고 적혀 있었다.
“와아….”
정신이 멍해졌다. 미량이라고 적혀 있으니, 소수점 단위로 오르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앞으로는 24시간이 수련이나 마찬가지였다.
-슬로스! 이 모지리 자식! 예전에 죽였어야 했는데에에에!
라스는 슬로스를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고 말하며 꽥 비명을 질렀다.
“이래서 몸이 가벼웠군.”
<나태>의 체력과 오러 회복 능력 덕분에 몸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분노>의 지독할 정도의 방해를 이겨내셨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감각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이게 왜 없나 했지.”
이 메시지가 없었으면 섭섭할 뻔했다.
-끄으으으, 또 본왕의 능력치가 빨렸노라….
라스는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침대 모퉁이에 축 늘어졌다. 패배자의 말로 그 자체를 보는 듯 했다.
“그러니까 누가 방해하래?”
-닥쳐라. 네놈이 본왕의 이름을 팔면서 사기 치는 걸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
녀석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마왕 둘을 등쳐먹다니! 천계의 위선자들도 네놈만큼은 아니야!
‘그거 칭찬인가?’
-매번 그 귀때기 이름을 팔더니, 이제 본왕까지! 네놈의 사악함은 이미 도를 넘었다!
라스는 마왕 주제에 용사 같은 말을 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놈의 악행을 막을 것이다!
‘막든 말든 상관없는데, 그 전에.’
라온이 빙긋 웃으며 모은 네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기 보상도 지금 넘겨.’
-내, 내기 보상?
‘내가 이 성 밖으로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내기.’
-아….
이제 생각이 났는지 라스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네가 믿던 게 슬로스였지? 그 녀석은 고블린 왕의 마석 껴안고 자고 있을 테니,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어. 내기도 지금 끝내자.”
-끕, 자, 잠깐!
라스가 손을 저으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라온?
녀석의 목소리가 실크를 감은 듯 부드러워졌다.
-점장을 구할 때 기억하느냐? 네가 밖에 나갔지만 본왕이 관대한 마음으로 넘어가 주었지 않느냐.
“기억은 하는데, 설마 그걸 가지고 봐달라고 하진 않겠지? 마계의 왕이 그렇게 쪼잔하진 않을 거야.”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암, 그렇고 말고. 부하를 사랑하고, 관대하며, 고고하신 분노의 군주께서 그런 말을 하겠어?”
-그으으….
말을 하려던 라스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고픈 말이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간 것 같았다.
“왜? 하려던 말 해봐.”
라온은 빙긋 웃으며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으! 이 아귀 같은 놈! 다 처먹고 배나 터져라!
라스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렁거렸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따라 메시지 창이 참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