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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44화 (144/653)

144화

라온은 당장 주저앉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허리를 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야 했다.

성벽을 뭉개려던 슬로스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멎었다. 발을 멈추고 이쪽을 지그시 노려본다.

“이 땅은 분노의 군주. 라스 님의 영역!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다!”

“라스….”

반쯤 감겨 있던 슬로스의 눈이 저녁달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완전히 믿는 건 아니다. 귀찮음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이런 시궁창이 왜 본왕의 땅이라는 것이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입 다물고 있어.’

-이, 이놈이 정말!

라온은 입으로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속으로는 라스를 짓눌렀다.

‘후우….’

라스가 먼 곳에서 슬로스의 존재를 알아차렸듯이 분노가 일어나면 분명 슬로스도 라스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라스의…그릇이라고…?”

“그렇다. 지금 라스 님께서는 영역을 침범한 네놈에게 분노하고 계신다. 잠탱이 주제에 주제를 모른다고 하시더군.”

“…….”

잠탱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슬로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라스에게 슬로스의 정보를 들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제 그 의심의 싹을 잘라버릴 때다.

-듣지 마라! 슬로스! 여긴 본왕의 영역도 아니고, 이놈은 본왕의 부하가 아니다! 적이니라!

‘안 들리니까. 말해도 소용없어.’

슬로스가 느끼는 건 라스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몸에 박혀 있는 분노의 기운이다.

후우우.

라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싸움에 찌든 탁기를 내보내고 찬 공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 시원한 공기와 입에서 도는 피 맛 덕분에 시야가 밝아졌다.

‘이때를 위해서 분노를 받았지.’

라스는 모르겠지만, 분노의 거래를 한 이유는 서 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분노의 감정 10. 그리고 이번에 받은 15로 슬로스를 설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분노를 일으켜야 해.’

그러면 생각할 건 하나뿐이지.

데루스 로베르트를 떠올리며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고오오오오!

라스와 거래를 하며 받았던 25의 분노가 이성의 벽을 뚫고 뇌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분노의 불길을 느끼며 살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분노의 기운… 너는… 정말 라스의….”

슬로스의 죽어 있는 듯한 눈동자에 확연한 귀찮음이 어렸다. 이제 깨달은 것이다. 자신에게 정말 분노의 군주가 어려 있다는 것을.

“라스 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다. ‘본왕의 영역에 침범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한 발자국만 더 넘어오면 평생 잘 수 없게 만들어주겠노라. 잠탱이 놈아.’”

-보, 본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냐! 이런 미친놈이 정말!

당연히 라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녀석이 준 정보와 말투를 따라 했을 뿐이다.

“으음… 자, 잠을 잘 수…없다고….”

하지만 제대로 먹혀들었다. 앞으로 잠을 잘 수 없을 거라는 말에 슬로스의 눈빛이 티가 날 정도로 흔들렸다.

“라, 라스 님. 참으십시오!”

라온은 얼음꽃 팔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멈춰라!

“그 팔찌….”

슬로스는 팔목에 걸린 꽃팔찌를 보고 눈동자가 더 크게 벌어졌다.

‘이것도 예상대로.’

라스는 처음에 꽃팔찌로 변하면서 취향이라고 말했다. 마계에서도 비슷한 액세서리를 했을 거라는 예상이 맞았다.

“지금 강림하시면 안 됩니다! 나태와 싸우기 위해서 모은 힘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대륙을 라스 님의 발밑에 놓으셔야지요!”

라온은 멍하니 있는 라스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 또 뭐라는 거냐!

“예?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잠을 못 자게 하실 거라는 겁니까? 라스 님. 그건 좀….”

꽃팔찌를 내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정신 나간 자식! 본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도다!

라스는 답답해 죽겠다고 소리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따라…다니면서… 잠을 못 자게 해…? 라스가?”

그 말이 충격이었는지 슬로스의 몸이 휘청였다.

“라스 님! 참으셔야 합니다! 먼 곳을 보셔야지요!”

-좀 닥치라고!

“나태를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정복은 더 길어질 겁니다!”

라온은 라스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실제론 라스를 개똥만도 못하게 보고 있었다.

“부, 부하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라스 님….”

감동받은 표정으로 꽃팔찌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크으…. 진짜였나….”

슬로스의 입매가 쭉 내려간다. 라스가 부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하다.

-지랄! 지이이이랄이다! 이 괴물 같은 놈! 대체 네놈의 뱃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이냐!

“라스 님. 일단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자식이이이익!

라온은 악을 지르는 라스의 꽃팔찌에 고개를 숙인 뒤 슬로스 앞에 섰다.

‘죽겠군. 심장이 남아 남지 않을 정도야.’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일으키는 라스와 앞에서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슬로스에게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마왕 둘 사이에 끼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끝을 내야 한다.

-이놈!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는 당연하게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무시무시한 냉기와 분노의 파도가 전신으로 흘러왔다.

‘이걸 그대로 보여줘야 해.’

평소처럼 라스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쏟아지는 녀석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콰아아아아!

라온의 전신으로 라스의 냉기와 분노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스의… 기운….”

슬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내렸다.

“다시 소개하지. 난 조만간 강림하실 라스 님의 육체가 될 분노의 그릇이다.”

“으음….”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다. 전쟁 소리와 흑마법이 네 잠을 깨웠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슬로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넌 상대를 잘못 정했어. 계속 널 시끄럽게 만든 놈들은 몬스터의 투구를 쓴 에덴이라는 집단이다. 우리는 놈들의 공격을 방어했을 뿐이다.”

라온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꾹 참은 채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에…덴…. 그놈들은…어디에…있지…?”

“모른다.”

“그러면 너희는…상관없다는 건가….”

“그렇다.”

“그럼 라스와… 싸울 필요는…없겠어….”

슬로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슬로스. 어디 가는 거냐?”

“너희들과… 상관이… 없으니…돌아간다….”

“돌아간다고? 그게 지금…. 헉! 라스 님!”

라온이 펄쩍 뛰며 팔찌를 부여잡았다.

“차, 참으셔야 합니다! 아직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 뭐?

“아, 예! 제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라온은 넋이 나간 듯 어벙하게 떠 있는 라스를 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슬로스. 본왕의 하인들을 건드려놓고 어딜 가려는 것이냐.”

“라스…. 네가… 이곳에 있는지…몰랐다….”

“그게 더 문제다. 본왕이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네놈이 본왕의 것들을 죽였을 것 아니냐.”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듣는척하며 일부러 시간을 끌며 말했다. 저쪽에서 의심할 조금의 틈도 만들지 않았다.

-본왕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속이 터진다. 아주 팍팍 터져! 인간들이 화병에 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노라!

라스의 눈동자가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아갔다.

“너도 마족이니 알고 있겠지. 목숨에는 목숨이다.”

라온은 몬스터와의 전투에 죽었던 병사들을 가리켰다.

“나는…아직…한 명도…죽이지….”

“본왕에게 따지지 마라. 네놈이 이곳에 오면서 이끌린 몬스터들이 본왕의 하인들을 죽였으니까.”

“그런….”

“너도 잠을 깨웠다며 아무 상관 없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더냐.”

“으음….”

할 말이 없는지 슬로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눈을 보니 이유고 뭐고 다 귀찮아 보인다. 빨리 돌아가서 잠이나 잤으면 하는 표정이다.

‘때로군.’

밑밥은 다 깔았으니, 본론을 꺼낼 시기였다.

“그렇다고 네 목숨을 가져간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본왕도 잘 알고 있느니라.”

“라스….”

“고고한 마계의 군주인 이 몸이 기회를 주마. 선택해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잠을 포기할지 아니면 이 녀석에게 네 능력을 넘겨줄지. 이 녀석은 앞으로 본왕의…어?”

라온이 입을 떡 벌리고 꽃팔찌를 바라보았다. 물론 라스는 그곳에 없었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라, 라스 님!”

-이, 이게 네 목적이었군. 이 마귀 같은 놈!

라스는 본인이 마왕인 주제에 자신에게 마귀니, 악귀니 소리치면서 분노의 기운을 일으켰다.

“제게 그런 기회를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라스 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라온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혓바닥을 씹은 통증으로 라스의 방해를 이겨냈다.

-슬로스! 이놈을 죽여라!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인간이다! 손만 휘둘러!

“잠과… 능력의 전수…? 그건 간단하군….”

슬로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아, 안 돼! 안 된다! 이 멍청한 놈아! 넌 악마보다 더한 인간에게 속고 있단 말이다! 멈춰!

라스가 손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슬로스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우우우웅!

그의 손가락에서 피어나온 시꺼먼 기운이 심장을 관통했다. 아니, 심장이 아니다. 영혼의 한 축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태>의 능력 일부가 혼과 육체에 스며듭니다.]

[적응 기간이 끝난 뒤 능력이 발동됩니다.]

인두로 등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다. 하지만 이 통증 덕분에 더 정신이 들었다.

-보, 본왕이 여기서 죽는구나. 이렇게 화병으로 죽어. 아아아….

라스가 바닥에 드러누워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돌아…가겠다…. 너무 졸려…. 잠이나….”

“잠깐.”

라온이 손을 들어 돌아가려는 슬로스를 멈춰 세웠다.

“아직 안 끝났어.”

“…뭐?”

슬로스의 눈동자에 살의가 깃들었다. 더 이상 잠자는 것을 방해하면 라스고 뭐고 싸울 기세였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라온은 품에 가지고 다니던 검은 보자기를 풀고, 고블린 왕의 마석을 꺼냈다. 마석에서 뿜어지는 열기에 냉기와 긴장으로 굳어버린 손가락이 풀렸다.

“그건….”

슬로스도 마석의 열기를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마석을 가져가라.”

거리낌 없이 마석을 슬로스에게 던졌다.

“따스하군…. 이게… 있다면…계속… 잘 수… 있겠어.”

슬로스에게 깃들어 있던 살의와 짜증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마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걸 내게… 주는 거지….”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내려오지 마라. 그리고 대량의 몬스터가 움직이면 네가 적당히 통제해서 멈추도록 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하고 홀로만 이득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었다. 슬로스를 이용하여 앞으로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귀찮군…. 하지만 그리…어렵진…않아….”

슬로스가 황홀한 눈으로 고블린 왕의 마석을 바라보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것도… 라스의…부탁인가…?”

“아니. 라스 님과 상관없는 나와의 거래다.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말도록.”

“거래…? 이 물건에…비하면 사소하군. 그러니….”

녀석은 마석을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에서 피어난 검은 줄기가 꽃팔찌 바로 옆의 손목을 휘감았다.

“무슨!”

“걱정하지…마라…. 거래 이후…잔금이니까.”

그 말대로 검은빛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치이이잉!

쇳덩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손목에 얼음꽃과 조금 다른 형태의 검은색 꽃팔찌가 추가로 생겨났다.

“이건 뭐지?”

“훗날 네게… 도움이 될…것이다….”

“근데 왜 꽃팔찌….”

“네 주인의… 취향에 맞췄다…. 또 귀찮게… 하기 전에….”

슬로스는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 다시 산으로 향했다.

그가 물러감에 따라 어둠이 그치기 시작했다. 끝없는 밤이 사라지고, 잠들었던 태양이 깨어났다.

“후우….”

라온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숨을 뱉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군.’

당장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슬로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다행인 점은 고블린 마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걸음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하필 또 꽃이라니, 라스. 이 팔찌는….’

-끄르르륵! 라, 라온 개새….

라스는 정말 화병에 걸렸는지 기절해 있었다. 입에서 푸른 거품이 보글보글 뿜어진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지으며 식은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났군.’

전부 한 끗 차이였다. 슬로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라스가 거래에 응해주지 않았다면, 성에 있는 모두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방법은 쓸 수 없었을 테니까.

슬로스의 뒷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을….]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

[만화공의 등급이….]

[혹한의 냉기가 글래시아와….]

[특성 <나태>가 생성….]

[수면을 취할 때….]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시야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라온은 메시지를 닫고, 휘청이는 다리에 마지막 힘을 주었다. 나태의 군주가 산으로 사라지고, 금빛 태양이 어둠을 지워낼 때까지 홀로 성벽을 지켰다.

그렇게 하룻밤의 악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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