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진짜 마왕이 나타나다니.
라스의 호언장담을 듣고 생각했던 최악의 가정이 현실로 일어났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저 괴물은 라스와 동급의 마왕, 나태의 군주였다.
그 정체가 거짓이 아닌지 슬로스가 움직일 때마다 어둑한 하늘과 땅이 일그러진다. 숨 쉬듯 뿜어내는 막대한 마기에 공간이 깨져나가는 것이다.
“저, 저건 대체 무엇이냐….”
슬로스의 기운을 읽은 밀랜드가 검을 쥔 손을 떨었다. 마스터에 오른 그에게도 마왕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아니, 강하기에 더 큰 경악을 느낀 것 같았다. 철인 같았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구겨졌다.
-마계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기운을 모았군.
라스는 다가오는 슬로스를 굽어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잠만 쳐 자는 잠탱이 주제에 제법이구나.
‘마왕이 왜 여기에 있지? 너만 인간계에 올라온 거 아니었어?’
라스가 가끔 다른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 땅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라온으로서는 슬로스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놈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려줄 필요도 없지만, 그걸 알려줘도 아무 의미 없다.
‘의미가 없다? 재수 없는 소리만 골라 하는군.’
-사실이다.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라.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라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 말대로 알려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놈이 왜 이곳으로 오는 거지?’
-너희들이 잠에서 깨웠으니까.
라스가 섬뜩한 눈으로 성벽에 선 병력들을 쭉 훑어내렸다.
-슬로스는 저 산 정상에서 쳐 자고 있었다. 죽은 듯 잠에 빠져서 처음엔 본왕도 몰랐지. 하지만 골짜기에서의 전투, 웨이브, 투구 쓴 미친놈들의 습격으로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났다.
‘그럼 전에 다시 잠들었다는 잠꾸러기가….
-그래. 저 망할 놈이다. 마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자는 잠탱이답게 일어나지 않고, 다시 잠에 빠졌었지.
라스는 한 달 동안 잠만 자는 멍청이라며 누군가를 욕했는데, 그게 바로 저 마왕이었던 모양이다.
-도플갱어가 폭발하면서 터진 굉음과 흑마법의 기운을 느끼고 저 게으름뱅이가 완전히 깨어난 거다.
“허….”
잠에서 깨웠다고 저렇게 죽일 듯한 기파를 내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잠이 아니다. 저놈은 별종 중 별종. 잠 때문에 마왕이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지.
라스는 점점 강해지는 슬로스의 기파를 즐기며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슬로스는 마계에서도 잠만 쳐 자던 마족이다. 그런 놈이 어떻게 마왕이 되었을까?
‘설마…’
지금 상황과 연결해보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보니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래. 잠을 잘 때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초승달처럼 올라가는 라스의 미소에 살기가 흘러내렸다.
-마계는 싸움과 욕망의 땅. 그런 세계에서 대놓고 잠을 잔다는 건 날 죽여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놈은 오히려 공격해오는 마족들을 모조리 때려죽이면서 살아남았지.
‘허….’
-시비를 걸면 죽이고, 공격을 해오면 죽이고, 잠을 깨우면 죽이는 게 몇천 년 동안 계속되었을 때 저놈은 마계의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 때문일까. 라스의 마계 이야기가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럼 지금도….’
-맞다. 지금 녀석이 움직이는 건 몇 번이나 잠을 깨운 너희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다.
‘망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슬로스를 막을 방법이 없다. 잠을 깨운 보복을 하러 오는 마왕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저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건 오직 글렌 지그하르트뿐이었다.
-막는 법? 저 상태의 슬로스를 막을 방법은 두 가지다. 강자와 제물. 이곳에는 그 둘 모두 없지.
라스가 새하얀 대지를 뭉개며 다가오는 슬로스를 가리켰다.
‘강자라고?’
-그래. 네 할애비나 본왕 같은 존재가 이 성에 있다면 슬로스는 싸움을 피할 것이다.
‘왜?’
-이기든 지든 싸움이 오래 걸리니, 잠을 자지 못하지 않느냐.
‘허….’
들으면 들을수록 미친놈이다. 슬로스는 라스 이상으로 정신 나간 마왕이었다.
“추워…. 졸려…. 다 귀찮아…. 하지만 내 잠을 방해하는 건….”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느려터진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닭살이 올라왔다. 목소리에 실린 힘이 무시무시했다.
“어? 어어….”
테리안이 슬로스의 존재를 느끼고 옷이 땀에 젖을 정도의 식은땀을 흘렸다. 눈동자가 썩은 달걀처럼 탁 풀렸다.
“저, 저 괴물은 뭐냐….”
“끄어억….”
“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검사와 기사 중 상위의 무인들도 슬로스의 압도적인 기파에 손에 쥔 무기를 떨어뜨렸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전의가 빠져나간다. 도망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기랄.’
감각이 뛰어난 사람부터 슬로스의 기운을 느끼다 보니 강자일수록 빨리 절망을 하게 된다. 슬로스가 다가올수록 이 사태는 심각해질 것이다.
“졸려…. 너무 졸려…. 그렇지만 추워….”
슬로스는 졸립다와 춥다는 말을 반복하며 다가왔다.
‘졸린 거야 그렇다 치고. 춥다고?’
마왕이 추위를 느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춥다고 하는 거지?’
-처음에 본왕이 말하지 않느냐. 저놈의 이명은 <받아들이는 자>. 추위도, 더위도, 공격도 모두 받아들인다. 그게 놈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귀찮아 보이는 능력이지만, 그에 따른 큰 장점이 있는 것 같았다.
‘춥지 않은 곳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저놈은 나태의 군주다.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놈이지. 저 멍청이에게 상식이라는 걸 기대하지 마라.
라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쳐 있다. 아무래도 마왕은 정신이 나가야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크허억!”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미, 미쳤어. 저걸 어쩌겠다고….”
이제 평범한 기사와 검사들도 슬로스의 기운을 느꼈다. 모두 투지를 상실하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후욱….”
라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낮췄다. 자신에게 전해지는 압박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네게 주어진 선택권은 두 가지다.
‘두 가지?’
-본왕에게 네 몸을 넘기고 저놈을 막던가, 이대로 몰살을 당하던가.
라스의 눈동자가 선명한 빛으로 일렁인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두 방법을 제외하고는 네놈과 저 인간들이 살아나갈 방법은 전무하다. 장담하지.
‘…….’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라스의 말대로 상황은 최악. 헤쳐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저 산부터 이 성벽 앞까지는 결계나 다름없다.
‘결계? 그런 건 느끼지 못했는데.’
-수백 년 동안 인간과 몬스터의 피와 한이 배이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피의 결계지.
‘그게 어쨌다는 건데?’
-슬로스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안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오는 순간 중재자인 도마뱀들과 경계를 벗어난 너희 영감 같은 것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라스가 바스락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성벽을 가리켰다.
-대전쟁이 일어나면 평범한 인간들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할 테지.
‘그런 싸움이 일어나면 슬로스도 잠을 못 자잖아.’
-말했지 않느냐. 저놈은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본왕과 같은 존재가 성 앞에 서 있지 않는 이상 놈을 막을 수는 없다.
라스는 더 늦기 전에 몸을 넘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며 미소를 그렸다.
‘네게 몸을 넘긴다고 저 사람들이 산다는 보장이 있나?’
-최대한 노력해보마.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폭주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조절할 수 있느니라.
‘폭주라고?’
-육체 없이 네놈과 혼이 연결된 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육체와 간격이 한참 떨어졌으니, 처음엔 폭주할 수밖에 없다.
‘미친.’
욕이 절로 나왔다. 폭주한 라스와 잠을 자지 못해 짜증이 난 슬로스가 부딪치면 이 성 전체가 날아갈 것이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해야 해.’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아악!”
“끄아아아악!”
“저, 저기 저거! 저게 뭐야!”
“괴물이다….”
이젠 병사들조차 슬로스의 기파를 느꼈다. 그 전율적인 힘에 바로 기절을 하거나, 쓰러져서 거품을 물었다.
“라온.”
여전히 앞에서 버티고 있던 밀랜드가 자신을 불렀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정신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와라.”
“…예.”
라온은 억지로 허리를 펴고 성문 바로 위에 선 밀랜드에게 다가갔다.
“고맙다.”
“예?”
“네가 미리 경고를 해준 덕분에 민간인은 모두 내보낼 수 있었어. 넌 하분 성에 와준 최고의 복덩어리다.”
가는 웃음. 그는 지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이들을 데리고 물러나라. 이곳엔 내가 남아 버티겠다.”
밀랜드가 내려간 검을 들어 올렸다. 검날에서 뿜어지는 강기가 시퍼런 횃불이 되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혼을 불사르는 서기였다.
“사령관님….”
“난 살 만큼 살았고, 많은 것을 이루었다. 너와 다른 녀석들은 이곳에서 죽기엔 아깝다. 너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어.”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는 이 사람을. 평생을 하나만 바라보고 온 고집불통 사령관을 이대로 보내긴 싫었다.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라온은 밀랜드의 옆에 붙은 채로 검을 들어 올렸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은빛 칼날 위로 피어난 꽃송이가 만개하며 어둠을 불태우는 서광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두 자루 칼날에서 치솟은 열화와 같은 빛이 어둠을 갈라내기 시작했다.
“이건….”
“사, 사령관님! 라온!”
“두 사람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어!”
쓰러져서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사람들이 상서로운 열기를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모두 성을 빠져나가라! 사령관님의 명령이다!”
라온은 더 강한 빛을 뿜어내며 밀랜드의 지시를 외쳤다.
“그게, 무슨….”
“가, 갈 수 없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게냐! 빨리 사라져라!”
밀랜드가 앞을 보며 악을 질렀다, 그의 입가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바로 옆에 있는 자신만 볼 수 있다. 그의 얼굴에서 생기가 지워지고 있었다.
“저, 저흰….”
“물러난다! 전부 일어나서 성벽을 내려가! 남문을 열어라!”
테리안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성벽을 내려갔다. 누구보다 힘들겠지만, 누구보다 밀랜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도, 도련님!”
도리안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도련님이라고 외쳤다.
“도리안. 먼저 가라. 나도 곧 갈 테니까. 먼저 가!”
“정말 오실 거죠?”
“내가 여기서 죽을 놈으로 보여?”
“아, 알겠습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안 오면 죽여버릴 겁니다!”
녀석은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리고, 정찰병들부터 성벽을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맨날 죽는 소리를 해도 이럴 때는 믿음직스러웠다.
가라고 말해도 병사들은 쉬이 떠나지 못했다. 계속 뒤를 돌아 자신과 밀랜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도 가라. 이 이상은 무리다!”
밀랜드가 새파란 입술을 떨며 어깨를 밀었다.
“조금만 더 버티겠습니다!”
라온은 경련이 오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감각이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라스의 퉁명스러운 음성과 동시에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이 강해졌다.
“춥고 졸립다…. 너희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성벽에 근접한 슬로스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기파에 정신의 끈이 잠시 끊어질 뻔했다. 간신히 만들어 놓은 오러의 횃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휘청였다.
쿠구구구!
점차 강해지는 압박에 결국 만화공의 불길이 먼저 꺼졌다.
“크으윽….”
라온은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장기조차 찢겨나갈 압력이었다.
“크아아아!”
밀랜드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허억!”
“어어억!”
“또, 또야!”
두 사람의 기세가 흐트러지자 퇴각하던 병사들이 다시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말했지 않느냐. 네게 선택권은 두 개뿐이라고. 이제 결정해라. 죽을 테냐. 아니면 본왕에게 몸을 넘길 테냐.
‘두 개….’
라온이 끝까지 버티는 밀랜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들은 정보는 많아.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지만, 전생처럼 생로가 꽉 막힌 느낌은 아니다.
라스에게 얻은 정보를 잘 조합하면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자신을 믿어준 전우들을 꼭 살리고 싶었다.
춥다. 졸립다. 비슷한 강자. 시간. 귀찮음, 단순함.
라온은 라스에게 들은 정보를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이 순간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통 안의 구슬처럼 돌아가던 단어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하나의 답안을 도출해냈다.
‘이거라면….’
도박이지만 모두를 구하고 이득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이 도박에는 도움이 필요했다.
‘라스.’
-결정했느냐? 결국 몸을 바치기로….
‘거래를 하자.’
-뭐라? 거래?
‘네 분노를 받을 테니, 저 무식한 마왕 놈 앞에서 서 있을 수 있게 해줘.’
라온은 확신을 담은 눈으로 라스를 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뭐 하려고 하는 것이냐.
‘네가 말했지? 내가 살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고. 이건 그것과는 다른 방법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네놈이 슬로스 앞에 설 수 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달라져. 그니까 할 거야 말 거야!’
-이득이 없다. 어차피 네놈의 몸은 결국 본왕의 손에 들어오니까.
‘아니 안 들어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더라도 네게 몸을 넘기지 않을 거다.’
-개소리를!
‘지금까지 봐왔으면 알겠지? 네가 거짓말하지 않듯이 나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가 뼈를 으깨듯 이를 갈았다.
‘네게 몸을 넘겨도 이 사람들은 죽어. 그렇다면 나도 이곳에서 함께 죽겠다.’
라온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검병을 내려놓았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놈!
라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린다. 당황한다는 증거였다.
‘만약 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네게 몸을 넘기지. 약속한다.’
-크으으윽!
놈은 성벽에 거의 다다른 슬로스와 자신을 번갈아 보며 이를 갈았다.
“끄으윽!”
라스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밀랜드가 무너졌다. 이 짧은 순간에 벌써 20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만 내쉬었다. 기절하면서도 검을 쥐고 있다니,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콰아아아아아!
그가 쓰러지자 하늘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어깨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라스!’
-빌어먹을! 이 대가는 클 것이다
힘이 쭉 빠진 전신으로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라스가 넘겨주는 기운이었다. 그와 함께 혼의 깊은 곳에 대가로 받은 분노가 스며들었다.
“후우욱….”
하지만 라스는 많은 기운을 주지 않았다. 전력을 다 써야만 간신히 버틸 정도의 힘이다.
‘좀생이 같으니.’
라온이 바득 이를 갈며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만화공은 운용하면서, 글래시아를 풀어놓았다. 전생의 격까지 불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심장과 폐가 찌그러진다.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
영혼을 짓누르는 공포와 육체를 부수는 압력을 이겨내며 두 다리로 성벽 위에 섰다.
콰아아아아아!
결국 성벽에 도착한 슬로스와 눈을 마주쳤다. 귀찮음만이 가득하던 마신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돋아났다.
됐어.
방금의 눈빛으로 확신했다.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다.
“나태의 왕이여. 너라면 느꼈겠지?”
라온이 피가 흐르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나는 라스 님을 모시는 분노의 그릇이다.”
-부, 분노의 그릇? 네놈이 왜 분노의 그릇이라는 것이냐! 무엇을 하려는 거야!
‘뭘 물어.’
까부는 널 짓밟고, 두 번째 호구를 잡는 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