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두 번째 웨이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군.”
밀랜드는 하분 성으로 몰려오는 누렇고 푸른 파도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웨이브급 전투태세를 발령한다! 대기 중인 검사와 병사들을 모두 소집해!”
그의 웅장한 목소리가 성벽 전체를 진동시켰다.
“병창을 열고, 전투를 준비해라!”
밀랜드의 빠르고, 정확한 지시에 멍하니 몬스터들을 보고 있던 정찰병들이 부리나케 성벽을 뛰어 내려갔다.
땡! 땡! 땡! 땡! 땡!
웨이브 때와 같은 최고 경계 경종이 하분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이게 또 무슨 일이야!”
“젠장! 올해 액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데!”
“닥치고 빨리 움직여! 곧 온다!”
“병창이 열렸으니, 무기부터 챙겨!”
경종을 들은 검사와 병사들이 숙소와 연무장에서 튀어나와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딘.”
밀랜드가 입술을 깨물고 있던 라딘에게 손짓했다.
“네가 가장 마지막에 정찰을 나갔었나?”
“예. 3일 전에 다녀왔습니다.”
“이 일의 징조는 없었나?”
“보고드렸듯이 특별한 변화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이 또 수를 썼을 가능성도 있겠군. 몬스터를 조종하는 세 놈들의 능력이니까.”
밀랜드가 동의를 구하듯 라온을 보았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이번은 아닌 듯합니다.”
라온이 성벽 아래를 굽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에덴 놈들이 멍청하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한 번 실패한 방법을 반복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몬스터들의 표정이나 기세가 평소와 다릅니다. 살육이나, 광기가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도 그걸 느꼈다. 그래서 에덴이라고 생각했지.”
밀랜드는 검집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일도 쉽게 넘어가긴 힘들겠어.”
“그럴 거 같습니다.”
-후우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가 잔불처럼 일어섰다.
-드디어 왔구나.
녀석은 앞의 몬스터가 아니라, 저 먼 곳. 희미하게 보이는 스터린 산을 노려보았다.
‘뭐가 온다는 건데?’
-본왕이 말했잖느냐. 잠꾸러기가 있다고. 그 망할 놈이 드디어 깨어났다.
라스의 푸른 눈동자에 귀화가 타오른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으며,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1달 전에 도망치라고 말했던 거?’
-그렇다. 그때 말했던 놈이 이제야 일어났다. 그 도플갱어가 터질 때 깨어났겠지.
‘무슨 드래곤이라도 되는 건가?’
라온이 라스의 시선을 따라 스터린 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드는 정도.
-드래곤?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라스는 코웃음을 치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뭔데.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도망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이미 늦었다. 비몽사몽일 때는 기회가 있었지만, 놈은 이미 너희를 포착했으니까.
‘뭐?’
그 말에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훑어내렸다.
-놈은 이 성을 지우고, 너희 모두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합당한 제물을 바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물? 무슨 제물! 대체 누가 오는 건데!’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녀석은 평소와 달리 여유 넘치는 미소를 흘렸다.
-네 눈으로 직접 보아라. 본왕에게 그걸 말해줄 의리는 없으니.
‘너….’
-말했지. 이번 내기는 결국 본왕의 승리로 끝나게 될 거라고. 이렇게 되면 승리 정도가 아니라, 네 몸을 가져갈 수도 있겠어.
라스는 저 위에서 내려오는 존재가 이 성을 밀어버릴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후우….”
라온이 깊게 가라앉은 숨을 내쉬었다. 라스의 반응을 볼 때 예측이 되는 존재가 몇 있었지만,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렬!”
“창병과 보병은 성벽 앞에 정렬하라! 자리가 없는 궁병은 성벽 아래에 서도록!”
빠르게 준비를 끝낸 병사와 기사들이 각자의 위치에 서고, 긴장한 표정으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후, 시발….”
“올해 운이 더럽다더니….”
“아주 거지 같다. 거지 같아!”
병사들은 사막의 삭풍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사령관님이랑 라온 님이 있잖아!”
“하긴 라온 님이 온 이후로 사상자가 크게 줄었지.”
“아이스 트롤 로드 슬레이어에 이어 도플갱어 슬레이어이기까지. 역사를 쓰고 계시잖아.”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야.”
검사와 병사들이 자신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듬뿍 담긴 표정. 지금으로선 온전히 받아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사령관님.”
라온은 혀끝에 이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밀랜드에게 다가갔다. 이쪽을 보는 그의 시선에도 믿음이 가득 어려 있었다.
“혹시 말입니다. 이기기 어려운 적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기막을 일으켜 자신과 밀랜드를 덮었다.
“자네답지 않은 질문이로군.”
밀랜드의 표정은 가면이라도 쓴 듯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당한 기세를 유지하며 검집을 툭 쳤다.
“그래도 싸운다. 이 성 뒤에는 수많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버텨서 희생을 줄일 것이다. 그게 하분 성의 존재 이유니까.”
“…그렇군요.”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드래곤이라도 날아오면 모를까. 오는 놈의 정체를 모르니, 설득할 수도 없었다.
‘결국 만나 볼 수밖에 없겠어.’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벨 각오를 하며 라온이 숨을 골랐다.
-흐음.
라스는 여유 넘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본왕이 파인애플 소녀는 확실하게 구할 테니까.
‘시끄러워.’
라온은 즐거워하는 라스를 밀어버리고, 정해진 위치에 섰다.
라스의 말은 진짜다.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올 것이다.
하지만.
“라온 님. 믿고 있겠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손가락이 뽑히도록 활 쏠 테니까. 뒤는 맡기세요!”
병사들 그리고 검사들이 자신의 등을 보며 힘을 얻는 게 느껴진다. 저 기대 어린 시선을 배신하고 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기대를 얻는다는 것도 그저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군.’
다른 사람의 신뢰와 기대를 받는 건 기쁨 그 이상의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았다. 암살자 때였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 망할 놈 때문에 별걸 다 배우네,’
라온이 라스를 노려보며 검병을 꽉 쥐었다.
“으아, 망했다. 망했어.”
도리안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배 주머니에서 통나무와 바위를 무더기로 꺼내놓았다. 몬스터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려 할 때 뿌리려는 것 같았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밀랜드가 검을 뽑으며 마지막 준비를 지시했다. 병사들이 복명복창하며 창대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라온.”
그가 고개를 돌리며 라온을 불렀다. 성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번 전투사는 자네에게 맡기지.”
전투사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한 마디의 말이다. 지금까지는 항상 밀랜드가 해왔지만, 그걸 처음으로 라온에게 넘긴다는 뜻이었다.
“왜 제게….”
“내가 말하는 것보다 자네가 말하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으니까.”
밀랜드가 턱짓으로 병사들을 가리켰다. 믿음이 어려 있는 시선들에 가슴이 들끓어 올랐다.
‘전투사….’
살아온 방식 때문인지 말주변은 없지만, 바라는 건 하나 있었다.
라온이 몸을 돌렸다. 하분 성 전체의 시선을 마주하며 옅게 웃었다.
“모두 살아남아라!”
멋없는 한마디에 진심을 담았다.
“그, 그게 다예요?”
“생각보다 말을 너무 못하네.”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고, 베토는 피식 웃었다.
“음….”
“남자다워서 좋은데 뭘.”
에드퀼은 그저 바라보았고, 테리안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단순해서 좋아.”
“하긴 사령관님 전투사는 너무 길잖아.”
“난 처음에 검술 학교 교장 선생님인 줄 알았다.”
기사와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쟁 직전에 어려 있던 두려움과 긴장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그라지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군기가 일어섰다.
“일개 검사가 병력들의 사기를 최고치로 끌어 올리는군.”
밀랜드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이게 지금 자네의 위치네. 지휘관을 넘어서는 신뢰가 있다는 뜻이지.”
“저는 그저….”
“오늘도 부탁하네. 많은 병사를 구해주게나.”
웃음을 지운 밀랜드가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 손이 주먹을 쥔 순간 세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쏴라!”
생존의 의지를 담은 은빛 화살 뭉치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몬스터들의 피부를 찢어발겼다.
“캬어어억!”
“크아아아아!”
“키아아아아!”
하지만 몬스터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용의 역린을 자극한 것처럼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며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쏴!”
밀랜드의 지시에 수백 발의 화살이 연이어 떨어졌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더 많은 숫자가 생을 다하며 몸을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몬스터들이 동시에 몸통을 박아넣자, 성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올라온다! 백병전을 준비해라!”
“돌과 나무부터 던져!”
“이야아아아!”
도리안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돌과 나무를 던져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오크와 트롤, 크라트를 짓눌렀다. 창병들은 아래를 향해 창을 찔렀고, 궁병들은 끊임없이 시위를 튕겼다.
저무는 노을빛을 받은 칼날에 강대한 군기가 담겼지만, 몬스터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성을 넘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벽을 타고 올랐다.
라온이 몬스터들의 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눈동자에 가득 담긴 공포. 잘못 본 게 아니다. 몬스터들은 식욕이나 공격 의사보다 일단 이 성벽을 넘어 도망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크아아아아!”
가장 먼저 성벽을 오른 건 오우거다. 어마어마한 도약력으로 단 두 번 만에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이이익!”
“허억!”
오우거의 괴성과 살기에 겁먹은 병사들이 물러설 때 라온이 움직였다. 병사들의 머리를 깨부수려는 오우거의 오른팔을 단숨에 베어냈다.
“크어어어억!”
오우거는 반격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성벽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당연히 놓아주지 않았다. 빛살이 되어 뻗어 나가는 참격이 오우거의 머리를 날렸다.
“크어어어어!”
“캬아아악!”
뒤를 이어 트롤과 샤크몰이 개미 떼처럼 성을 올라왔다. 라온은 글래시아로 성벽을 덮으며 위기에 처한 병사들을 돕고, 몬스터들을 베었다.
“키아아아!”
성벽의 한 축을 부수며 샤크스팅이 올라섰다. 전신에 돋아난 가시들이 시위를 당기기 전의 화살처럼 바르르 떨렸다.
“허억!”
“샤, 샤크스팅이다!”
“가시가 날아온다!”
“히이익!”
샤크스팅의 가시가 살짝 들어가서 튀어나오려는 순간 놈의 목이 날아갔고, 그 뒤에서 라온이 나타났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 님!”
라온은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의 인사를 받고 성벽 너머를 보았다.
‘동물까지 오는 건가?’
밀려오는 몬스터들의 뒤편에 스터린 산 부근에 살던 야생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웨이브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야생동물들이 도망치는 모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으음….”
자신과 같은 걸 보았는지 밀랜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산 그에게도 지금 상황은 경악스러운 것 같았다.
“테리안!”
“예!”
그의 부름에 부사령관 테리안이 부복했다.
“정찰병들을 보내서 성 뒤편의 마을들을 피신시켜라. 성 내부의 민간인들까지. 전부!”
“예?”
생각지도 못한 지시에 테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빨리!”
“아, 알겠습니다!”
테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 정찰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제 이 상황이 웨이브보다 심각하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물러설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였지만.
라온이 입맛을 다실 때 성벽 위로 거대한 마름모꼴 그림자가 졌다.
“만타쿤이다!”
“두 마리! 양쪽에서 옵니다!”
병사들의 말대로 엄청난 크기의 가오리 형 몬스터 만타쿤이 날아가고 있었다.
라온과 밀랜드가 동시에 움직였다. 각기 좌측과 우측으로 떠오르는 만타쿤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두 자루의 검이 각각 다른 색의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앙!
반으로 갈라진 만타쿤 두 마리가 추락하며 성벽을 오르던 몬스터들을 덮쳤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며 일순간 소강상태가 되었다.
밀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주름진 노안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이어 오러 메시지를 보내왔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자네는 빠지게.]
[예? 그게 무슨….]
[아까 자네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겠어. 자네는 나보다 먼 곳을 보았군.]
그가 오크 무리를 베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위로 갈 수 있는 무인일세.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훗날을 생각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이쪽을 보는 일은 없었다.
‘도망치라고?’
뒤를 돌아보았다. 신념과 믿음이 어린 시선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혼자 도망치려면 진즉 갔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쳤다. 칼끝에 걸린 노을빛 불꽃이 섬전처럼 나아가 성벽을 가득 메운 트롤의 목을 갈랐다.
“혼자 도망칠 수는 없지.”
라온이 서슬 퍼런 눈으로 여유롭게 웃는 라스를 노려보았다.
‘네게 질 수도 없고.’
-의미 없는 발악인가?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지나봐야 알겠지.’
-네가 무릎을 꿇고 경악하는 모습이 벌써 그려지는군.
‘내가 무릎을 꿇더라도 이들은 살릴 거야.’
누렇게 떠오르는 달 아래. 붉고 푸른 시선이 맞부딪쳤다.
* * *
수성은 다음 날 일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건 혈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싸움이었기 때문에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은 숨을 헐떡였고,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이 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사명감으로 끝까지 창과 검을 내질렀다.
“거의 끝나간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
“버텨! 네 뒤에 동료를 믿어라!”
간부,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끝까지 무기를 휘둘렀다. 그 열화와 같은 군기에 몬스터들의 파도가 잦아들고,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뜨면 우리의 승리다!”
“우와아아아아!”
어제보다 확연히 줄어든 몬스터들의 숫자에 병사들의 눈에 다시 힘이 깃들었다.
“키아아아아!”
“크라라락!”
다만 몬스터들의 반응도 평소와 달랐다. 많은 숫자가 줄었는데도 도망치기는커녕 더 간절하게 성벽을 올랐다. 물론 생각 없이 올라섰다가 검사와 기사들의 검에 목을 헌납했지만.
“이놈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도망칠 때가 됐는데?”
“해는 왜 안 뜨는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일출 시간이 한참 지났잖아!”
몬스터들과 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해가 뜨지 않는다?’
밤이 계속되는 듯이 하늘은 여전히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밤의 커튼을 들추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솟구친 세 개의 뿔을 본 순간 무저갱을 마주한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아….”
저 먼 곳. 들리지 않아야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추워…. 졸려…. 귀찮아…. 하지만 깼어….”
그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빛이 사그라드는 검은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영혼이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이런 놈이 존재했다니.
스멀스멀 피어나는 죽음의 기운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마왕의 위용. 마의 화신이 이곳을 노리고 있었다.
“추워… 간신히 잠들었는데…. 또 깼어…. 다 귀찮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백야를 짓밟는다. 세상의 빛이 모두 그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저놈이냐? 네가 말했던 잠탱이라는 게?’
라온이 이를 악물고 꽃팔찌를 내려보았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구나.
라스의 푸른 눈동자에서 섬뜩한 냉기가 요동쳤다.
-저 굼벵이의 이름은 받아들이는 자. 슬로스.
슬로스라 칭한 괴물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본왕과 같은 위에 오른 <나태>의 군주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