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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41화 (141/653)

141화

수십 장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절삭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처럼 육체가 녹아내리고, 그 안에 잠겨 있던 점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인 모습은 갓 껍데기를 깬 달걀을 보는듯했다.

“성공한 건가.”

라온이 진혼검을 내렸다. 더 이상 도플갱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신음과 함께 물처럼 흘러내릴 뿐이다.

-제대로 들어갔다. 확실하게 핵을 부쉈어.

‘다행이군.’

-알려주긴 했지만 정말 해낼 줄은 몰랐다.

라스가 이쪽을 올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억지로 이뤄낸 신검합일은 그에게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점장도 살아 있으니, 끝났….”

도플갱어의 시체에서 점장을 꺼내려던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꺼져가던 흑마법의 기운이 갑자기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런!”

라온이 점장을 휘감고 있는 도플갱어의 점액을 억지로 벗겨내고 그를 뒤로 보냈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오러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자마자, 도플갱어의 녹아내린 육체에 응집되던 흑마법의 마나가 검은 불꽃이 되어 치솟았다.

콰아아아앙!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게 압축된 기운이 폭발했다. 몸이 뒤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지만,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는 라온의 눈에는 이미 그 흐름이 어려 있었다.

뽑아든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질주하는 붉은 선이 어둠의 기운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쿠와아아아!

갈라진 어둠의 마나가 라온과 점장을 비켜나가 설원 위에서 폭발했다. 정면에서 맞았다면 큰 부상을 입을만한 위력이었지만 찰나의 반응과 정확한 궤도의 검격이 완벽한 방어를 이뤄냈다.

“망할 놈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꺼멓게 죽어버린 땅을 노려보았다. 조사조차 할 수 없게 도플갱어를 터트리다니, 에덴은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었다.

-에덴이라는 놈들은 모조리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친놈들이지.’

고작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라스도 이제 에덴이 광인들의 집단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라온이 뒤를 돌아 점장의 상태를 살폈다. 피부 이곳저곳이 녹았고, 생기가 많이 소모되었지만,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회복부터 해줘야… 어?’

오러로 점장의 몸 상태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우우웅!

걸레짝이 된 도플갱어의 사체에서 시꺼먼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썩은 나뭇잎 같았던 시체가 구슬처럼 둥글게 모이더니 인간의 얼굴 형상을 그렸다.

챙이 있는 큰 모자, 길쭉한 코, 주름이 가득한 얼굴. 추레하게 보이는 노파의 모습이었다.

“잘 봤어. 아주 잘 봤어!”

노파의 입이 열린다.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그것이었다. 농염했고, 여유로웠으며, 진한 광기가 느껴졌다.

“너구나.”

“뭐?”

“빙아귀를 죽이고, 청주귀의 계획을 무너뜨린 게 바로 너였어.”

노파가 히죽 웃으며 턱을 모로 틀었다.

“늙고 병든 밀랜드가 청주귀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오늘도, 그때도 전부 네 짓이었어.”

검게 번들거리는 노파의 눈동자가 전신을 끈적하게 훑어내렸다.

“너….”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마녀의 가면이다. 에덴에 있을 마녀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500년 전 왕국의 대마법사라는 지위를 버리고, 몬스터의 길에 섰던 존재. 실비아가 읽어준 전래 동화에도 나오는 배신의 마녀 멀린이었다.

“멀린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건가?”

“날 알아? 날 안다고? 정말?”

노파의 목소리가 칵테일처럼 달큰하게 떠올랐다.

“아아, 좋네. 좋아. 감각도 좋고, 눈치도 빠르고 다 마음에 들어.”

“뭐?”

“거기서 가져가야 할 건 세이렌의 그릇이 아니라, 너였어. 진짜는 너였다고!”

물결처럼 굽이치는 음성에 들뜬 욕망이 넘실거렸다.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무슨….”

“냉정한 눈빛도, 차가운 목소리도, 그 얼굴도 최고야. 나와 함께 가자. 내가 최고의 남자로 만들어 줄게.”

도플갱어의 시체로 이루어진 멀린의 얼굴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내 곁에서 영원히 살게 해줄게.”

가면에 불과한 멀린의 입이 쫙 찢어진다. 귀까지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꺼져.”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내리쳤지만, 연기를 벤 것처럼 멀린의 얼굴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단호함도 멋져.”

멀린은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젠 얼굴이 아니라, 몸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년이 감히 본왕의 영육을 노리다니!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피어나는 냉기와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공간을 휘감았다.

-뭐 하는 것이냐! 아까처럼 베어라! 저년이 방심하고 있을 때 검과 하나가 되어 저 마법을 찢어버리란 말이다!

‘검과 하나….’

점장을 구할 때처럼 신검합일을 이룬 검을 내리치라는 뜻이었다.

라온이 진혼검을 검집에 넣고, 검을 들었다.

-뭣하는 것이냐! 그 미물을 써서 베라니까!

‘될 거 같아.’

조금 전 도플갱어의 핵을 뚫어버린 손맛이 아직 남아있다. 지금이라면 홀로 신검합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하려고? 또 뭘 보여주려고?”

멀린의 눈동자가 노란 광기로 타올랐다.

“더 보여줘. 이 눈으로 전부 봐줄테 니까.”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베어야 하는 건 눈앞에 있는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를 조종하는 마법의 흐름이었다.

조금 전 진혼검과 함께 도플갱어를 벨 때 검이 내 팔이 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로 그 느낌을 찾아야 했다.

고오오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만화공의 기운을 일으켰다. 열기로 타오르는 오러가 육체와 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검날에서 비틀어지는 오러를 물처럼 유연하게 가다듬었다.

검과 나는 하나.

신검합일이란 검에 자신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경지. 그리고 그 경지에 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져야 한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오러로 육체와 검을 휘감자 검이 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팔이 조금 더 늘어난 듯한 느낌.

라온은 그 감각을 유지한 채 하늘로 세운 검을 내리쳤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격.

하지만 그 안에는 적을 베겠다는 라온의 의지가 어려 있었다.

콰아아아!

의지가 깃든 붉은 참격이 멀린의 형제를 완벽하게 찢어발겼다.

“아아아악!”

멀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가면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검합일이 마법만이 아니라, 그녀의 본체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요검을 쓰지도 않고 신검합일에 이른 거야? 이 사이에 성장한 거야?””

비명은 잠시였다. 칭찬과 환희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아아,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넌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

멀린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미친년.”

라온이 검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검합일을 이룬 것보다 저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 기뻤다.

-본왕의 육체를 노리다니, 저년은 에덴 중에서도 특히 미친년이로구나. 본왕이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뼛속까지 얼려버렸을 것이야.

라스가 어림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누가 네 육체야. 내 몸은 내 거야.”

라온은 팔짱을 낀 라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은 하분 성 밖. 하분 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내기 조건이 단순한 성이 아니라, 이 지역을 말하기는 하지만 녀석이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걸 수 있었다.

하지만 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것을 노리지 말라고 짜증을 내며 녹아내린 멀린의 형체를 노려볼 뿐이다.

-흥, 이딴 걸로 내기에 이겼다고 할 생각 없으니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본왕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도플갱어 안에 점장이 있는 것도 알려주고, 신검합일에 대한 힌트도 주고, 너 오늘 왜 그러는 거냐? 안 하는 걸 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이제야 떨어져 나가는 건가?’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예전에 말했을 터다. 본왕은 부하와 하인을 버리지 않는다고 그 늙은이는 세 번째 시녀의 조부가 아니더냐. 구할 수 있다면 구하는 게 옳다.

‘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시리아가 루난을 괴롭히던 것을 알려준 것도 라스였다.

설마 진짜였어?

루난과 마르타, 유아에게 시녀라고 했던 게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친 건 자신이 아니라, 저 자칭 마왕 놈이었다.

-그리고….

라스가 스터린 산의 정상 부근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을 끼워 넣지 않아도 내기는. 아니, 네 몸은 본왕이 먹어 치울 것 같거든.

*     *      *

인간과 몬스터의 살점들이 장식품처럼 걸려 있는 기괴한 공간. 중앙의 백골 테이블에서 이 방과 어울리지 않는 들뜬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으으으.”

배신의 마녀 멀린의 가면을 쓴 여성이었다. 그녀의 턱 끝으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피어나는 신음. 하지만 그 신음엔 고통보다는 환희가 담겨 있었다.

“아아.”

여성이 살짝 가면을 들었다. 떨어지는 핏물을 손가락으로 받아 그대로 혓바닥 위에 찍어 내렸다. 붉은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신다.

“무조건 데려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얼굴, 그 눈빛 다른 년에게는 안 줘….”

그녀가 모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흥분으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우웅.

멀린의 가면을 쓴 여자가 긴 손톱으로 팔의 살을 쥐어뜯고 있을 때 허공이 일렁이며 안구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해골 가면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것이냐. 왜 도플갱어의 생명 반응이 끊어진 거지?

“죽었어.”

-뭐? 대체 어떻게!

“밀랜드가 이전보다 강해졌어. 도플갱어의 기척을 읽고 세이렌의 그릇을 구해냈지.”

살짝 들린 멀린의 가면 위로 붉은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그녀는 이 일과 상관없는 밀랜드의 이름을 팔았다. 아예 라온의 이름을 꺼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조는 무슨 개조를 했다는 거야. 멍청해서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세이렌의 그릇을 노린다는 것도 지 입으로 주절대던데”

-네 주술이라면 그 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난 구경만 할 거라고 말했잖아.”

-망할 년이….

“너와 내 목적은 같지 않아. 그리고 난 딱히 세이렌의 그릇을 원하지도 않았고.”

-세이렌의 그릇은 어떻게 됐지?

“살아 있어.”

-후우.

살아 있다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해골의 가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년. 네년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안구에 열화와 같은 빛을 뿜어내며 멀린의 가면을 노려보다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흐으으.”

여성이 살짝 들린 멀린의 가면을 얼굴에 바짝 붙이며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     *      *

라온은 만화공의 정심한 기운으로 점장의 몸에 어린 흑마법의 기운을 지우고 활력을 넣어주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빨리 잡아서 다행이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돌이킬 수 없을 뻔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후우….”

“라온 님!”

“검사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점장을 업었을 때 뒤에서 도리안과 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경악한 얼굴의 밀랜드와 병사들 그리고 도리안이 유아를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도리안의 등에서 뛰어 내린 유아가 점장의 팔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 일어나! 앞으로 일 안 한다고 뭐라 안 할게! 제발!”

“유아야.”

유아가 턱을 바르르 떨며 라온을 올려보았다.

“괜찮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아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앙!”

점장이 무사하다는 소리에 유아가 도플갱어 앞에서도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유, 유아야.”

그 울음이 각성제가 된 건지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점장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유아가 고개를 들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점장과 눈을 마주치고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나 무서웠다고! 할아버지!”

“그래. 미안하다. 유아야.”

라온이 점장을 내려주자, 유아가 점장에게 폭 안긴 채 더 큰 울음을 터트렸다. 점장은 힘없는 손으로도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싸안으며 서로를 확인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울렁인다. 아이스 트롤 로드를 잡고 영웅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한 만족감이 심장을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밀랜드는 유아와 점장 그리고 도플갱어가 터지고 시꺼멓게 그을린 곳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라온은 서리의 가지에서부터 지금 이곳까지 이루어진 도플갱어와의 전부를 말해주었다.

“으음, 부끄러워서 뭐라 할 말이 없군.”

밀랜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것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우연히 알았으니까요.”

“그건 핑계가 되지 못해. 자네에게도 저 둘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네.”

도플갱어. 그것도 흑마법으로 개조하여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밀랜드는 본인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유아와 점장에게 찾아가 직접 사과를 하고, 바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진짜 리더의 책임감을 보는 것 같아서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     *      *

도플갱어의 습격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라온은 홀로 연무장에 서서 검을 쥐고 있었다.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긋는 참격에 극쾌의 의지가 담긴다. 마치 처음부터 검을 내리고 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쾌검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아니야.”

멀린의 가면을 베었을 때 깨달았던 신검합일의 경지는 다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순간에만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 해보았으니, 조만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 없느니라.

라스는 어울리지 않게 조언을 해주었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거냐.’

-본왕은 원래 관대하다. 곧 네 몸이 본왕의 손에 들어올 테니, 더더욱.

도플갱어를 잡은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모르겠군.”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 문이 열리고 유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검사님.”

유아가 코를 훌쩍였다.

“하, 할아버지가 일어나셨어요.”

“그래?”

점장은 유아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잠들었다. 한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제야 깨어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검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는데,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자신 역시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유아를 따라 의무대로 향했다. 낡았지만, 잘 관리한 병실로 들어가자, 점장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그 앞에 밀랜드가 서 있었다.

“사령관님?”

이곳에 밀랜드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뭘 그리 놀라는 건가. 병문안을 왔을 뿐인데.”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직접 찾아오다니, 미안하다고 했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검사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잘못했으면 저 어린 것들 혼자 두고 떠날 뻔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점장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숙였다.

“성의 주민을 구해줘서 고맙네. 이런 사태를 막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어.”

밀랜드가 입술을 깨물며 똑같이 고개를 내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밀랜드와 점장의 인사를 막으려 했지만 둘 다 요지부동이다.

“이건 사령관으로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전하는 감사일세.”

“감사 인사도 받아주시지 않으면 전 해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인사를 받아주고 나서야 두 사람이 머리를 들었다.

“라온 검사님. 이런 상황에 죄송하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에, 에덴의 귀신들이 제 손녀를 노렸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점장은 본인이 죽다 살아난 와중에도 손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도 있으니, 지금 말하면 되겠어.’

에덴이 유아를 노리고 있으니, 지그하르트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거친 뜀박질 소리와 함께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3번 정찰대장 라딘이었다.

“사,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그가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말을 이었다.

“모, 몬스터들이 성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몬스터들이?”

“그 규모가 웨이브에 맞먹을 정도입니다!”

웨이브에 맞먹는다는 말에 밀랜드와 라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으음, 밖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잘 회복하게.”

밀랜드는 점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서, 라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유아에 관한 일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유아야. 할아버지 잘 모시고 있어.”

“네!”

억지로 힘차게 대답하는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밀랜드를 따라 성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하얀 폭풍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파도를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움직이는 걸 보면 또 에덴인가? 정말이지 끈질긴….’

몬스터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던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뭐지?’

성으로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의 기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전이 식욕과 광기로 물들었다면 지금은….

공포 그리고 두려움.

몬스터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질겁한 표정으로 석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치는데 성벽이 방해라도 되는 것처럼.

‘뭐야.’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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