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39화 (139/653)

139화

“내기? 갑자기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라온이 냉기를 삐죽삐죽 풍겨 올리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주 간단한 내기다.

라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 뒤에 말을 이었다.

-그 뾰족귀가 낸 시험이 이곳에서 1년 동안 살아남는 거였던가?

‘그래. 이제 반년도 안 남았지.’

여러 사건이 터져서 짧게 느껴졌지만,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7개월이 지났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이제 5개월도 남지 않았다.

-그거다. 본왕은 네가 남은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간다는 쪽에 내기를 걸겠노라.

‘뭐?’

라온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거 진심이야?’

-당연하다. 마왕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 많이 봤는데.’

-시, 시끄럽다! 내기만큼은 지킨다!

‘흐음….’

얘 진짜 호구인가?

5개월도 남지 않은 시간. 웨이브도 끝났고, 에덴도 물리쳐서 말 그대로 수련만 하다가 돌아가면 되는 편한 상황에 뭐 이런 내기를 거나 싶었다.

아니야. 호구는 맞지만, 바보는 아니지.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가지고 내기를 거는 게 분명했다.

-할 것이냐?

‘일단 보여줘.’

-알겠다.

라스가 팔찌에서 완전히 나오자마자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남은 시험 기간 동안 하분 성을 벗어나지 않기.

성공 시 : 모든 능력치 +5, 칭호.

실패 시 : <분노>의 감정 15포인트 생성.

실패 시에 올라가는 분노 포인트가 높긴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좋았다.

‘이런 내기를 거는 걸 보니, 에덴의 무리라도 찾아오나 보네?’

-글쎄.

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불리한 건 말하지 않는 것이다.

“흐음….”

라온은 내기 메시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에덴이 다시 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에덴의 귀신이 하분 성을 노렸다는 정보가 풀린 후 육황 중 두 곳의 전투부대가 근처에 와 있었다.

에덴 놈들에게 상식이라는 게 있다면 한동안 하분 성을 건드릴 리가 없었다.

아니, 아니지. 놈들에게 그런 건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에덴의 귀신들은 정신이 나가기로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놈들이다. 누가 지키건 말건 찾아와 자신에게 있는 오크 로드의 마석을 노릴 미친놈들이었다.

‘뭐, 괜찮겠네.’

시련과 고난은 빠른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법. 다시 에덴이 찾아온다면 성장한 무력으로 베어버릴 뿐이다.

‘좋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어.’

-너 치고는 탁월한 선택이니라.

라온이 내기를 받아들이자, 내기 성립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가 성립되었습니다.]

녀석은 사라지는 메시지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기가 이루어졌으니, 본왕이 충고를 하나 하지.

‘충고?’

-그래. 네놈과 나름 미식의 정이 쌓였으니 하는 충고이니라.

‘미식의 정이라….”

참으로 사소한 정이었다.

‘무슨 충고지?’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네놈만이 아니라, 네놈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들을 데리고.

라스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조만간 이 성 자체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     *      *

-빌어먹을!

라스가 냉기로 만든 손으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호언장담과 달리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뭐야!’, ‘왜 다시 자!’,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말을 하며 한숨을 푹푹 쉬는 걸 보니, 녀석의 계략이 완전히 망한 것 같았다.

‘그러게 왜 내기를 걸어서.’

라온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녀석 정말 호구 끼가 있긴 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상만 받아 가게 생겼다.

-그 게으름뱅이 놈이 다시 잘 줄은 본왕도 몰랐다. 정말이지 잠탱이 그 자체인 놈이니라!

‘잠탱이?’

-화가 나니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라스는 짜증 난다며 고개를 홱 돌렸다. 녀석의 반응을 보니 무언가가 주변에 있긴 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상관없지만.’

라스의 똥 씹은 표정을 보니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라온이 가볍게 몸을 푼 뒤 검을 뽑았다.

백혼갑에 박힌 오크 로드의 마석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다시 환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금발 검사가 보여주었던 검술의 궤적은 아직 뇌리에 남아있었으니까.

“후우우.”

라온은 머릿속으로 그 검사의 검술을 그리며 눈을 떴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검을 중단에 놓았다.

화아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지는 일섬. 불꽃이 어린 칼날이 차디찬 새벽 공기를 꿰뚫었다.

‘느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로는 비슷하지만, 금발 검사의 검보다 느렸고, 정확성이 떨어졌다.

‘다시 해보자.’

검을 뒤로 젖힌 뒤 같은 궤적으로 내뻗었다. 조금 더 빨라진 것 같지만 그 남자의 검에는 많이 모자랐다.

‘다시.’

라온은 조금의 발전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찌르기를 반복 또 반복했다.

“후우.”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직 만화공의 찌르기만 계속하던 라온이 숨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조금은 나아졌군.’

반복 수련을 한 덕분에 약간이지만 그 남자의 검에 다가갔다. 검의 속도가 올랐고, 그 안에 조금 더 정밀한 오러를 담아낼 수 있었다.

-느리구나. 아주 느려. 본왕이라면 진즉에 그 검을 깨우쳤을 것이다.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괜한데 화풀이 하지 마.’

-크으….

‘어차피 끝난 거면 지금 내기를 포기하든가.’

-닥치거라. 본왕은 포기를 모르는 마왕이니라. 절대 기권을 외치지 않는다.

‘참으로 우유부단한 마왕이시군.’

-우, 우유부단? 지금 본왕에게 우유부단이라고 한 것이냐!

라스가 팔찌 위로 나오며 냉기의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는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의 이명 중 하나가 바로 단호한 마왕이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돌아보지 않는 절대적인 판단력으로 마족들에게 경외를 받았던….

‘다시 수련해야겠네.’

-좀 들어!

라온이 검을 고쳐잡았을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고오오오!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내며 전신을 휘감았다.

아무래도 공짜로 보상을 주게 생겨서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듯싶다.

‘안 덤비는 게 좋을 텐데, 자칭 단호한 마왕님.’

-닥쳐라! 내기고 뭐고 이 기회에 네놈의 육체를 가져가겠노라!

본인이 먼저 걸었던 내기가 제대로 안 풀린 것에 화가 났는지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며 냉기와 분노를 뿜어냈다.

우우웅.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라스의 냉기와 분노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마나 회로에 서리의 벽을 세웠다.

-본왕이 언제까지 같은 짓을 반복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마나 회로로 스며드는 라스의 냉기가 비틀어진다. 칼날처럼 얇고 가늘게 벼려져 글래시아로 만든 벽을 찌르기 시작했다.

찌지직!

얇으면서도 막강한 기운이 깃든 냉기의 창에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보았느냐! 냉기의 형태 변화를 완벽하게 이뤄낼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이제 네놈도….

‘아, 이렇게 하는 거로군.’

라온이 빙긋 웃으며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라스가 만든 창을 똑같이 만들었다.

캬아앙!

냉기로 만들어진 창과 창이 부딪치며 두 개의 창이 동시에 소멸되었다.

라온은 그렇게 사라진 냉기를 단전으로 끌어당겨 혹한의 냉기를 증가시켰다.

-이, 이놈!

‘고마워. 또 새로운 걸 배웠네.’

-끄으으윽! 아직이다! 본왕은 포기하지 않았어!

라스가 더 얇고 가는 창을 만들어 마나 회로를 공격했지만, 매번 라온이 생성한 창에 막혀 사라지기만 했다.

‘이것도 수련이 되네.’

라스의 창을 막기 위해서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한 창의 제작이 필요했다. 정신을 집중하며 방어를 지속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기력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감각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창으로 창을 막는 연습 덕분일까.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능력치가 상승했다.

-이런 제기랄!

라스는 허공을 올려보며 악을 질렀다.

무게 잡던 라스가 다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돌아와 참 다행이었다.

저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니까.

*     *      *

“라온 님.”

눈썹처럼 가는 달이 하늘에 올라왔을 때 들뜬 얼굴의 도리안이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임무 끝났습니다! 밥 먹으러 가시죠!”

“벌써?”

“벌써라뇨! 하루종일 근무 섰는데!”

도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주머니에서 의자라도 꺼내 던질 기세였다.

“미안.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몰랐어.”

라온이 하늘을 올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신없이 수련하다 보니, 밤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은 서리의 가지에 가서 먹죠. 오랜만에 좋은 사과가 들어와서 애플 미트 파이가 끝내준대요.”

-애, 애플 미트 파이?

라온이 대답하기 전에 라스가 땅 위로 솟구친 지렁이처럼 불쑥 올라왔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가자! 애플 미트 파이를 먹을 기회이니라!

4개월 동안 애플 미트 파이를 먹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던 라스의 입에서 냉기의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미 영업 끝났을 시간 아닌가? 오늘 평일이잖아.”

“제가 유아한테 미리 예약을 해두었죠!”

“이런 건 재빠르다니까.”

“사과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예약을 걸었습니다!”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꺼낸 의자를 넣으며 헤헤 웃었다.

“흐음….”

라스는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능력치도 얻었고, 곧 내기의 보상도 들어올 테니, 인심 써서 먹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가자.”

“옙!”

-오오! 탁월한 선택이니라!

라온은 경쾌한 걸음을 걷는 인간과 마왕을 데리고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테이블을 정리하던 유아가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이미 영업이 끝났는지 가게 내부에는 손님이 없었다.

“영업 끝난 거 아니야?”

“예약해서 괜찮아요! 미리 준비해뒀거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유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점장이 없는 건지 주방에선 유아의 기척만 느껴졌다.

-크으, 이 향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가!

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주점 바닥 전체로 깔렸다.

“어우, 오늘따라 춥네. 유아야 사과가 들어간 치킨 스튜도 좀 줘!”

도리안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 듯 어깨와 팔을 떨며 추가 주문을 했다.

-애, 애플 치킨 스튜! 애플 미트 파이에 애플 치킨 스튜!

라스의 입에서 냉기의 브레스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미안하다. 음식에 미친 마왕 때문이야.’

라온은 억지로 라스의 입을 다물게 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즉에 좀 먹어줄 걸 그랬다.

-끄으으….

“식사 나왔습니다!”

라스의 냉기가 입을 뚫고 나오려 할 때 유아가 큼지막한 쟁반에 파이와 스튜를 가져왔다. 달큰한 사과 향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점장님은 안 계시는 거야?”

“오늘 사과를 가져온 상인 아저씨랑 이야기하신다고 나가셨는데, 아직 안 오셨어요. 항상 이렇다니까.”

유아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맨날 나만 일한다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사실 제가 할아버지보다 요리 잘하거든요.”

유아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양갈래 머리를 흔들며 속삭였다.

-흐으윽, 애플 미트 파이에, 애플 스튜? 여긴 마계인가? 본왕이 마계로 돌아온 것이냐!

라스는 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허공에서 방방 뛰었다.

-빨리 먹어라! 감질나서 죽겠노라!

‘알겠어.’

파이와 스튜를 앞접시에 덜어낸 뒤 먼저 스튜를 떠먹었다.

“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맛이다.

사과의 달달함과 닭고기에 배인 짭짤함이 어우러진 맛이 혀를 거칠게 자극했다. 국물은 걸쭉하면서도 풍미가 있어 한 입을 먹은 것으로 입안 전체에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마, 맛있다! 단맛과 짠맛이 바람과 불꽃처럼 어우러져 본왕의 혀를 맴도는구나! 마계의 맛이니라!

“우와! 맛있어! 진짜 맛있어!”

라스는 미식가인 주제에 맛 표현이 참으로 단조로웠다. 맛있다는 말만 연발하는 도리안 수준이었다.

“그럼….”

라온이 애플 미트 파이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딱딱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입에 넣자마자 파이가 카펫처럼 부드럽게 펼쳐진다. 깍뚝 썬 사과의 과즙과 잘 다진 고기의 육즙과 조화롭게 혀를 휘감았다.

따스하면서도 상쾌한 봄이 생각나는 맛. 아삭한 사과와 흐물거리는 고기의 각기 다른 식감에 먹는 재미까지 있었다.

“이건 대단하네.”

라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곳에서 많은 음식을 먹었지만, 이 파이가 최고였다. 돈을 퍼부어도 아깝지 않은 맛. 왜 그렇게 빨리 매진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끝내주네! 오늘 사과가 진짜 미쳤어!”

애플 미트 파이를 먹어보았던 도리안도 혀를 내둘렀다. 이전보다 오늘 것이 훨씬 맛있다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아, 이것이다! 본왕이 네놈에게 붙어 있던 이유가 바로 이때를 위함이었어! 진정한 지옥의 맛이니라!

라스의 애플 미트 파이에 감동했는지 전신을 떨며 끊임없이 냉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곧 승천할 것 같았다.

“그 정도예요?”

“그래. 정말 맛있어.”

“헤헤,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아가 활짝 웃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더 먹으라면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가지고 나왔는데, 전부 맛있었다.

-끄으윽, 본왕은 이제 가도 여한이 없노라. 세계를 맛본 느낌이다.

라스는 이제 눈을 까뒤집고 혀를 쭉 내밀고 있었다. 진정 만족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의 재능은 노래만이 아니라, 요리에도 있었던 것 같다. 나오는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점장의 음식보다 맛이 좋았다.

“잘 먹었어.”

라온은 10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모두 먹어 치우고 테이블에 음식값을 올려놓았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보다 4배는 많은 금액이었다.

“에? 이거 음식 가격보다 더 많은데요?”

“만족한 만큼 준 거야. 거기다 오늘 우리가 늦었잖아. 나머지는 팁.”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맞는 말이다. 만족스러운 음식에는 그 값을 쳐줘야 하는 법이지.

“여기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라스와 도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또 올게.”

머리를 꾸벅이는 유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서리의 가지를 나섰다.

-파인애플 소녀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손에도 재주가 있구나. 본왕의 세 번째 시녀답도다.

‘세 번째?’

-첫 번째는 아이스크림 소녀, 두 번째는 소고기 소녀 그리고 저 파인애플 소녀가 있지 않느냐.

아이스크림은 루난, 소고기는 마르타, 파인애플이 유아였다. 참 지 멋대로 사는 마왕이었다.

‘한심해….’

라스에게 혀를 쯧쯧 차고 숙소로 가려 할 때 인상이 강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왔다. 서리의 가지 점장이자, 유아의 할아버지였다.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유아 화 단단히 났어요!”

도리안이 큰일 났다고 중얼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점장은 매서운 눈빛과 달리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손녀에게 혼나러 가봐야겠어요.”

그는 고개를 꾸벅이고 서리의 가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유아가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소리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혼나네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만지며 낄낄 웃었다.

“정말 인상이랑 다른 분 아니에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저렇게 순하고 착한 분일 줄 몰랐어요.”

“방금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이상한 거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은 대답 없이 점장이 들어간 서리의 가지를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상한데.’

*     *      *

흐흐흥.

유아는 라온과 도리안이 식사했던 테이블을 치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경첩 소리가 평소와 달리 섬뜩하게 울렸다.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유아가 행주를 꽉 움켜쥔 채 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 녀석과 이야기를 좀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점의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쳤다.

“매번 이러신다니까!”

“바빴지?”

“좋은 사과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서 몸이 두 개여도 부족했다구요!”

“허허, 미안하구나. 그럼 내일은 나가서 놀거라. 할애비 혼자서 일하마.”

점장은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다가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괜찮아요. 거기다 오늘 매출 엄청나게….”

자랑하듯 금화와 은화를 꺼내던 유아가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살폈다.

따스하고 큰 손, 눈가에 가득한 주름, 살짝 굽어진 허리까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헉!’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그의 다정한 눈빛 속에 시꺼먼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다, 당신 누구야!”

유아가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감각이 말한다. 저 남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를 따라 하려는 무언가라고.

“유아야. 왜 그러는 게냐.”

“당신 누구냐고!”

“늦게 왔다고 너무 하는구나.”

장난친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다.

“우리 할아버지 어디 갔어!”

“유아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할아버지의 얼굴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뱉는다. 말투도, 행동도 모두 같았지만, 저 존재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당신 할아버지 아니잖아! 우리 할아버지 어디 갔냐고!”

유아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뒷걸음칠 쳤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는 감각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더 이상 갈 곳은 없는데 할아버지의 거죽을 쓴 괴물은 이미 앞에 와 있었다.

“유아야. 대체 왜 그러느냐. 장난이 지나치구나.”

“하, 할아버지 어쨌어. 제발!”

“…….”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자, 그가 석상처럼 멈춰 섰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진 건조한 눈빛이 굽어져 흘러내렸다.

“어떻게 알았지?”

세월을 담은 할아버지의 인자한 음성이 폐부를 긁는 것 같은 쇳소리로 변했다.

“아….”

유아가 주저앉아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자그마한 감정도 담기지 않는 사이한 눈빛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내놔!”

유아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순간에도 본인보다 사라진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괴물은 그 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그의 목이 인간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메마른 어조가 반복되는 공포에 숨이 가빠져 왔다.

“아아….”

할어버지와 똑같았던 괴물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었다. 색이 다른 찰흙 여러 개를 뭉친 듯한 괴기스러움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괴물이 손을 펼쳤다. 거대한 손아귀가 쩍 벌어지며 짐승의 아가리 같은 검은 구멍이 돋아났다. 구멍에선 회색 진흙 같은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유아야.”

그 검은 구멍 안에서 할아버지의 형상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는 만큼 검은 구멍 역시 다가왔다. 유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알았지?”

히죽이는 괴물의 손아귀의 구멍이 유아를 집어삼키려는 찰나 그녀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이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벽을 부수고 솟구친 무시무시한 열풍에 괴물의 손아귀가 녹아내렸다.

유아는 자신을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는 부드러운 손길에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휘날리는 잿빛 먼지 속 서슬 퍼런 기운을 피워내는 금발의 검사가 있었다.

치이잉!

검을 뽑는 그의 눈동자에 붉은 벼락이 일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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