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영웅의 길?’
라온이 메시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 아!’
다시 내용을 읽어보려 할 때였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벼락같은 전율이 전신을 관통했다. 머리를 뚫고 들어온 전기가 발바닥까지 이른 듯한 느낌. 순간적으로 영혼이 한 차원 높은 곳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었다.
-쯧, 운 한번 더럽게 좋은 놈이로다.
라스가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짜증이 가득 찬 표정이다.
‘이게 다 뭐야.’
-말 그대로다. 네 영혼에 영웅의 업이 깃들었다는 뜻이지.
‘어째서?’
-말에는 힘이 어려있다. 그게 노래라면 더 강한 힘이 스며들지. 파인애플 소녀가 부른 노래에는 네 영웅적인 면모가 담겨 있으니, 그 말에 힘을 얻어 네 영혼의 격이 올라가게 된 거다.
‘고작 그걸로?’
-당연히 고작 그게 아니다.
라스가 고개를 돌려 노래를 부르는 유아를 보았다.
-전에 한 번 말했지? 파인애플 소녀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본왕이 예상한 것 이상의 재능이다. 저 아이가 네 노래를 만들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러줬기 때문에 저 무훈이 그 힘을 얻은 것이니라.
‘그럼….’
-그래. 네 영혼의 격과 능력치가 상승한 건 저 아이가 너에 대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감사히 여기도록.
‘허….’
-네가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수록, 저 아이의 노래가 많은 곳에 퍼질수록 네 영혼의 격과 능력치, 특성이 크게 상승할 것이다.
‘장난 아니네.’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감정을 자극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유아의 노래 재능은 천재라는 단어조차 벗어난 수준이다. 뛰어난 음유시인의 노래에는 혼이 깃든다던데 그걸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걸음은 겨울의 선율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아는 무훈가를 완벽하게 마치고 방긋 웃었다.
“이야아아아아!”
“유아야! 아저씨가 격하게 아낀다!”
“우리 유아 여기 있기 너무 아깝다! 대륙으로 보내자!”
“유아! 유아! 유아!”
유아의 노래를 들은 병사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를 내질렀다.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유아는 세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단상을 내려가 라온과 도리안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어땠어요?”
“이야! 진짜 대단하더라! 감동 먹었어! 나랑 비슷한 수준인데?”
도리안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지껄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노래를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어?”
“할아버지가 항상 이곳에서 싸워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유아가 헤헤 웃으며 우측에 서 있는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서리의 가지 점장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라온 검사님이 많이 고생하셨다고 하셔서 제가 듣고 본 걸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어 봤어요!”
“그래.”
라온이 무릎을 꿇어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토끼처럼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고맙다. 잘 들었어. 정말로.”
“네!”
유아가 머리를 쫑긋거리며 폴짝 뛰었다.
“그럼 나중에 저희 식당에….”
“와서 매출 올려달라는 말이지?”
“와, 이제 잘 아시네요.”
“모를 수가 없지.”
라온이 팔랑이는 유아의 머리카락을 보며 웃었다.
“그럼 나중에 꼭 와주세요!”
유아는 손을 흔들고 기다리고 있던 점장에게 달려갔다.
-라온.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라스가 팔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니라.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게 자칭 마왕의 입에서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본왕이 보기에 네놈은 파인애플 소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제 저 냉기 덩어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되었다.
-은혜를 갚는 건 빠를수록 좋지. 오늘이다. 지금 당장 서리의 가지에 가서 모든 음식을 시켜라….
‘하아.’
라온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다 본왕에게도 은혜를 입었지. 아주 큰 은혜를 말이다.
‘어떤 은혜?’
-본왕이 글래시아를 전해주지 않았더냐!
‘그것에 대해선 이미 대가를 주고받았잖아.’
-그런 막강한 능력을 고작 파인애플 피자 하나 사주고 땡 치려는 것이냐!
‘어떻게 행동이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을 수가 있지?’
마계의 군주 자리를 땅따먹기로 얻었는지 라스는 정말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숨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숨기지 않는 것이다. 마족은 욕망에 충실한 존재. 욕망을 말할 때만큼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느니라.
그 말은 사실이다. 라스는 말을 안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녀석을 왕이라고 믿는 이유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가자. 나흘 동안 서리의 가지가 꽉꽉 찼으니, 오늘은 비어 있을 것이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라스에게도, 유아에게도 도움을 받았으니, 적당히 갚아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음식으로 퉁치는 정도면 굉장히 싼 편이다.
-잘 생각했느니라!
라스가 키득거리며 팔찌 위로 솟구쳤다.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서리의 가지에서 밥 좀 먹게. 너도 가자.”
“어?”
도리안은 일어서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4일 동안 열어서 오늘은 휴일이에요. 그래서 유아도 나중에 오라고 했잖아요.”
“아, 그래?”
라온이 눈을 끔뻑이며 팔찌 위에서 춤을 추던 라스를 보았다.
‘오늘 안 한대.’
-…대체 무엇이냐.
라스가 냉기로 만든 손으로 고양이처럼 테이블을 긁으며 악을 내질렀다.
-본왕을 굶게 하려고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이냐! 왜 밥을 먹으려고만 하면 방해가 들어오는 것이야!
‘운명이야. 병사 식당이나 가자.’
라온은 피식 웃고서 병사 식당으로 향했다.
-양파 스튜에 퍽퍽한 빵, 너무 익힌 닭고기에 맛없는 소스까지! 오늘 정식은 최악이란 말이다!
‘메뉴는 어떻게 또 다 알고 있네….’
라스는 매일 바뀌는 병사 식당의 메뉴를 외우고 있었다.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특이하다니까.
* * *
흉폭하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가득 차 있다는 사이안 협곡.
무너진 댐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듯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밀물처럼 쇄도해오는 협곡의 반대편.
인간의 벽이 있었다. 떡 벌어진 체격으로 양날 도끼와 두꺼운 대검을 든 전사들이 일렬로 서서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협곡을 울리고, 전사들이 무기를 세웠다.
“돌격! 모조리 죽여버려라!”
가장 앞에 서 있던 거인 같은 중년인이 몬스터들의 파도에 뛰어들어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몬스터와 땅이 동시에 터져나가며 인간과 몬스터들의 대전이 열렸다.
“가즈아아아!”
“다 찢어버려!”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으아아아아!”
전사들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칼을 내리치고, 도끼를 찍었다. 건조했던 협곡이 피와 열기 그리고 전투의 희열로 가득 찼다.
인간도, 몬스터도 평범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큰 이 전장에 눈에 띄는 한 검사가 있었다.
단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흑발흑안의 여검사가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막강한 힘과 정립된 투로를 따르는 검격에 몬스터들이 한 줌 핏물이 되어 쓸려나갔다.
그녀는 이 전장에서 가장 작았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용맹을 뿜어냈다. 사나운 기세에 몬스터들이 먼저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흑발의 검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협곡에는 전사와 몬스터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노련한 전사들도 지칠 시간이었지만, 흑발의 검사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몸놀림으로 몬스터들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터트렸다. 광전사 마법이 걸린 것 같은 사나움이었지만, 눈빛은 만월의 빛처럼 맑았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이야아아아아!”
결국 협곡의 전투는 인간들의 승리로 끝이 났고, 패배한 몬스터들은 동족들의 피를 밟으며 원래의 척박한 환경으로 돌아갔다.
“후욱….”
흑발의 검사는 그제야 검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검은 오늘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맛보았고, 그 발아래에는 가장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주 신났구나. 마르타.”
숨을 고르는 그녀의 뒤로 전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가갔다.
“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였다. 너희 가주라도 따라잡을 생각이냐.”
중년인이 피에 젖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바로 사이안 협곡을 지배하는 카마인 성의 성주이자 최강의 전사라 불리는 베루안이었다.
“따라잡아야죠. 하지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어요.”
마르타가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야 할 산?”
“아주 지랄맞게 높은 산이죠.”
“네 또래 중에 널 넘어선 녀석이 있다고?”
베루안이 눈을 부릅떴다. 마르타는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제 몫을 하는 무인이었다. 왜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하나 했더니, 적수가 있었던 것 같다.
“세 번. 아니, 네 번 졌죠.”
마르타는 그 이후엔 도망 다녀서 할 말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베루안이 씩 웃으며 마르타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이곳에 온 후로 누구보다 많은 전투를 하고 육체와 정신을 단련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몰라도 지금은 네 아래일 것이다.”
“아뇨.”
마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제가 처음으로 만난 진짜예요.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가짜들과 다른 진짜 괴물. 지금보다 몇 배를 더 수련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 정도라고?”
베루안이 눈매를 좁혔다. 마르타의 재능은 자신의 아들보다도 위다. 이정도 천재에게 패배감을 준 아이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피부에 느껴져요.”
마르타가 닭살이 올라온 팔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도 강해지고 있는 그 망할 녀석의 숨소리가.”
최선을 다해서 수련을 해왔지만, 라온을 이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당하게 라온을 꺾고, 명령을 듣겠다는 약속을 지우고 싶지만, 놈에게 이긴다는 상상이 되질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진짜 적인 백혈교는 라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곳이다. 라온을 이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백혈교를 무너뜨리고 엄마를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녀석의 이름이 뭐지?”
마르타는 놀람이 담긴 베루안의 눈을 보며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기막을 펼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
주먹을 꽉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목숨을 빚진 은인이자, 제가 꼭 이겨야 할 남자에요.”
“그 이유만은 아니로군.”
베루안이 키득 웃었다.
“좋다. 남은 기간은 동안 내가 직접 너를 수련시켜주마.”
“네? 갑자기 왜….”
“대신 가져와라.”
그가 어깨의 도끼로 대지를 내리찍으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 라온이라는 녀석을 이겼다는 승전보를.”
* * *
대륙 북서쪽에는 레뷘이라는 이름의 사막이 있다.
하얀 모래가 깔린 특이한 곳으로 레뷘이라는 이름 대신 백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래가 하얗다고 해도 사막은 사막이지만, 의외로 자원이 많아서 사람과 몬스터들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기이한 장소였다.
그런 사막의 시작점에 작은 마을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원래부터 있는 곳이 아니라 대륙 육대상회 중 하나인 마이코 상회가 레뷘 사막 개척 사업을 위해 임시로 만든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푸른 머리칼의 인상이 매서운 청년이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버렌! 이쪽으로 와줘!”
“버렌! 여기 좀 이상한데?”
“어이! 버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 나 좀 부르지 말라고! 다 알아서 할 수 있잖아!”
버렌이라 불린 청발의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다만 화를 내면서도 우측에 가서 땅을 다지고, 왼쪽에서 기둥을 세우며 모든 일을 도와주었다.
“버렌! 샌드 스콜피온이 나타났어! 빨리 와줘!”
“젠장! 왜 나만 찾는 거야!”
마치 안 갈 것처럼 화를 내던 버렌은 올리던 기둥을 내려놓고 마을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입으로는 불평을 쏟아내지만, 부탁하는 일은 전부 도와주고 있었다.
“흐음.”
외눈 안경을 끼고 있는 지적인 외모의 남성이 마을 밖으로 달려가는 버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예상외로군. 첫 인상과는 너무 달라.”
“다 상회주님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던 노상인이 빙긋 웃었다.
“가르침? 난 저 녀석에게 해준 게 없어.”
마이코 상회의 현 회주 레니튼이 눈을 내리감았다. 버렌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의욕에 불타는 아이였다. 낮에는 몬스터와 싸우거나 개척 사업을 돕고, 밤에는 개인 단련을 하는 게 벌써 반년이 넘었다.
평범한 사람은 버틸 수 없는 방식. 버렌의 마음에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하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친구입니다. 성격이 모난 것 같지만 속은 따뜻하고 무력도 16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죠. 아!”
노인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하분 성에서 일어났다는 사건 들어보셨습니까?”
“버렌과 비슷한 나이의 검사가 홀로 무너진 성벽을 지켰다는 이야기 말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더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더 큰 사건?”
“예. 그곳에 아이스 트롤 로드를 이끌고 에덴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것도 밀랜드와 하분 성의 정예가 나갔을 때 그걸 금발의 검사가 홀로….”
노인은 레니튼에게 몇 달 전 하분 성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모두 말해주었다.
“거, 거짓말 같군.”
“저도 그렇게 여겼는데, 진짜인 듯합니다. 하분 성의 병사들이 전부 보았다고 합니다.”
“흐음, 그러면….”
레니튼이 마을로 돌아오는 버렌을 가리키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에게 그 이야기를 모두 전해 줘봐.”
“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 좀 보려고.”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노인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듯 버렌에게 다가가 레니튼에게 말해주었던 하분 성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망할 녀석!”
버렌의 녹색 눈동자가 사막의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가만히 있질 않는구나!”
그는 말아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네가 따라잡겠다고 말했던 목표인가?”
어느새 다가온 레니튼이 버렌의 앞에 섰다.
“맞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라온입니다.”
“강한 모양이더군.”
“강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넌 즐거워 보이는 거냐.”
레니튼이 웃음이 차 있는 버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네가 목표로 삼은 상대가 강해졌으면 화를 내거나 절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죠. 강했고, 강해질 녀석이기 때문에 따라잡는 보람이 있는 겁니다.”
버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메랄드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번쩍였다.
“라온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제 목표도 거기에서 멈춰버립니다. 녀석이 올라가 줄수록 저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레니튼의 입매가 둥글게 올라갔다. 기꺼운 미소로 버렌을 바라보았다.
“뭐, 사실 이것도 그 녀석 때문에 알게 된 거긴 합니다만.”
“라온이라는 녀석을 보고 싶군.”
“분명 감탄하실 겁니다.”
“다만 난 네가 더 끌리는구나.”
“예?”
“진심으로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상대를 높이는 녀석은 흔하지 않거든. 투자한다면 난 네게 했을 거다.”
“아…”
예상 밖의 말에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라온과는 굉장히 친한 모양이군. 맞수이면서 친한 관계라니 재미있어.”
“치, 친하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적일 뿐입니다!”
“아닌 거 같은데. 친할 수밖에 없는 미소였는데.”
레니튼이 빙글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
“아니라구요!”
버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놈이랑 친해질 생각 없습니다!”
* * *
풀벌레와 파충류 그리고 몬스터들의 부조화스러운 울음이 숲 전체로 퍼져나가는 누런빛의 정글.
질끈 동여맨 은발을 뒤로 넘긴 보라빛 눈동자의 여검사가 똬리 튼 뱀처럼 꼬여 있는 정글을 달리고 있었다.
고귀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정글 안에 녹아든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카아악!
은발의 검사가 늪을 지나려고 할 때 늪지 아래에서 악어의 외형을 가진 암속성 몬스터 크로커다크가 튀어나와 입을 쩍 벌렸다.
치이잉!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날에서 뻗어나간 은빛 서리가 바닥을 스치며 몬스터와 늪지를 얼려버렸다.
“캬악!”
“키야….”
뒤이어 올라오던 몬스터들도 중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은발의 검사는 하나둘씩 늪지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진각을 밟았다. 쿵 하고 대지가 울리며 그녀가 밟은 부분부터 은빛 서리가 퍼져나가 주변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흡!”
은발의 검사는 허공에서 몸을 돌려 얼어붙은 늪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작은 새나 곤충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지만, 냉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숨결에 다가오기 전에 모조리 밀려 나갔다.
그렇게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직선으로 달리던 그녀의 앞에 갈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나무 가면을 쓰고, 창과 방패를 든 무인이 나타났다.
“크아아압!”
무인이 붉은 오러를 가득 담은 창을 내질렀다. 막강한 창격이 전신을 노리고 쏘아질 때 은발의 검사가 든 칼날 위로 서리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캬갸갸갸걍!
은빛 서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무인을 포함한 주변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끄으윽….”
가면을 쓴 무인은 다리와 팔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은발의 검사는 무인에게 고개를 까딱이고 그가 지키고 있던 마을로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
“정글 돌파에 6시간도 안 걸렸어!”
“네가 1등이다. 루난!”
“어른들한테도 이 정도 기록은 흔하지 않은데!”
“어른들이 아니라, 전사장급 아니면 절대 못 하지!”
“루난! 진짜 대단해!”
마을 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공격하긴커녕 은발의 검사를 둘러싸고 환호를 질렀다.
“고마워요.”
루난은 덤덤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지금 이 수준이면 앞으로가 더 기대되네.”
“그러니까. 16살에 이런 무력을 가진 애가 있었나? 우리 족장뿐이지 아마?”
사람들은 루난이 앞으로 여중제일인이 될 거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있어요.”
“응?”
“저보다 훨씬 강한 아이가 있어요.”
루난은 드물게도 사람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훠, 훨씬 강하다고?”
“너보다?”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그 아이를 이기려고 이곳에 온 것이냐?”
루난의 곁으로 키가 큰 적발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새어 나오는 기세는 바다처럼 웅장했다.
“아뇨.”
“아니다? 그럼?”
“옆에서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어요.”
루난은 가문에 있을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그대로 흘러냈다.
“그런가.”
가면의 여성은 큭큭 웃고서 루난의 등을 거칠게 쳤다.
“어떤 일이라도 목표가 있는 건 좋은 일이지. 다만 네 재능은 보다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다. 너무 앞만 보지는 말도록 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루난의 다음에 올 정글 돌파 시험자를 기다렸다.
“음.”
루난은 이 부족의 족장이자, 마스터에 이른 전사 레이의 등을 보며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먹을까.’
카탐 정글의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글 돌파를 이뤘으니, 오랜만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치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근데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허공에 발장구를 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을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이곳을 안내해주었다. 라밈이다.
“와, 넌 어디서 들어왔냐?”
끼륵.
라밈의 뒤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마귀 소리였다.
“어? 이 녀석 왜 이렇게 붙어? 내가 좋냐?”
까악!
마을로 들어온 정글 까마귀와 친해진 건지 라밈과 까마귀가 노는 소리가 흥겹게 들려왔다.
“좋아! 내가 큰맘 먹고 키워주지. 먼저 이름부터 짓자고!”
라밈이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손뼉을 쳤다.
“라온! 너 그림자처럼 시꺼머니까 라온이 좋겠어!”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루난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밈의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가자, 덩굴처럼 꼬인 깃털을 가진 정글까마귀와 라밈이 마주 보고 있었다.
“루난? 너 시험 중 아니었어?”
“끝났어.”
루난은 가볍게 대꾸해준 뒤 까마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까악!
까마귀는 왜 보냐는 듯 고개를 모로 틀고 깍깍 울었다.
“흥.”
루난은 까마귀와 눈싸움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라밈을 바라보았다.
“헉!”
평소와 달리 힘이 들어간 루난의 눈빛이 라밈이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일이야.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얘 이름이 뭐라고?”
루난이 뒤에서 잔걸음을 걷는 까마귀를 가리켰다.
“라, 라온인데….”
“이름 바꿔.”
“아니, 이미 라온이라고….”
“이름 바꿔.”
“딱 그림자처럼 꺼멓잖아. 원래 검은 애들한테 라온이라는 이름이 자주….”
“이름 바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서우리만큼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이름 바꿔.”
점점 강해지는 루난의 압박에 청년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얘 왜 이래!
* * *
에덴과의 전쟁이 끝난 후 4개월이 지났다.
웨이브에 이어 로드와의 전쟁에서 많은 몬스터가 죽었기 때문인지 더 이상 성 주변에 얼씬거리는 몬스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꾸준히 정찰을 나갔지만 몬스터들이 모이거나, 특이사항도 발견되지 않아 하분 성은 유례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그 평화를 만들어낸 라온은 다른 사람과 달리 바쁘게 지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수련이다.
그는 부상 당했던 팔을 트롤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복하자마자 연무장에 박혀서 하루종일 검만 휘둘렀다.
“후욱….”
오늘도 달이 떠오를 때까지 만화공과 검술을 수련했던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탁한 숨을 뱉었다.
‘잘되지 않는군.’
백혼갑의 보석을 만졌을 때 보았던 금발 검사와 오크 로드의 전투. 그 격돌에서 검사가 사용했던 만화공의 검술을 재연해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그의 검술 경지와 오러의 수준이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긴 그 오크 로드도 무시무시하게 강했으니까.’
금발 검사와 맞서 싸웠던 오크 로드는 몬스터가 아니라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과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해야지.’
전생과 현생 모두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꾸준히 검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한다면 언젠가 그 경지도 문을 열어줄 것이다.
“라온 님!”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야간 경계 가실 시간이에요.”
“아.”
라온이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아쉬움 섞인 숨을 뱉어냈다. 임무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그래. 가자.”
검을 집어넣고 도리안을 따라 성벽으로 향했다.
“도련님은 같은 검술을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하는 거지.”
“학!”
평범하게 대답을 해줬을 뿐인데,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다.
“그냥 한다고 하니까. 진짜 다른 세상 사람 같네요. 어우. 난 못 해.”
녀석은 못 참겠다고 중얼거리며 배 주머니에서 약초즙을 꺼내 마셨다.
“하나 드실래요?”
“됐어.”
라온은 손을 젓고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에 달은 맑다. 저 멀리 스터린 산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안개가 보일 정도였다.
‘좋은 날이네.’
오늘 경계는 경치를 보는 맛이 있겠다고 생각하며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경계 임무도 그냥 보낼 필요는 없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펴야 하니, 감각의 바다를 늘리기엔 제격인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라온은 감각의 바다를 통해 주변을 관찰하며 손목에 걸린 라스를 보았다.
‘요즘 조용하네.’
서리의 가지에 가서 식사를 하자는 땡깡만 제외하면 녀석은 최근 이상하리만큼 잔잔했다.
‘좀 덤벼줬으면 좋겠는데.’
라스와 내기를 하거나, 싸운다면 능력치가 쉽게 올라가기 때문에 녀석의 시비가 그리웠다.
쯥.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꽃팔찌에서 라스가 연기처럼 피어 나왔다. 녀석은 멀리 보이는 스터린 산의 정상 부근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할 말이 있다.
‘지금은 밥 못 먹어. 임무 중이야.’
-그런 게 아니다! 본왕을 식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었어?’
-끄으윽! 진짜 너란 놈은… 휴우.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뭔데?’
-오랜만에 본왕과 내기 하나 하자.
‘내기?’
내기라고?
사기 도박꾼들이 사기 칠 때 가장 어려운 일이 호구를 판에 앉히는 거라고 한다. 이 상황은 호구가 절로 걸어와 판에 앉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열기가 일었다.
호구 라스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