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라온이 검을 내리자, 일염극의 불길이 풀잎처럼 흩날렸다.
사그라지는 불길 위로 달을 가리고 있던 아이스 트롤 로드의 거체가 무릎을 꿇었다. 왼쪽 상반신에는 불길의 창에 꿰뚫려 시꺼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찌지지직.
시간이 돌아간 듯 녹아내린 아이스 트롤 로드의 피부와 살이 차오른다. 로드답게 어마어마한 재생력이었지만, 의미 없었다. 놈의 심장은 이미 일염극의 불꽃에 조각났으니까.
“크르륵….”
가슴을 부여잡는 아이스 트롤 로드와 눈을 마주쳤다. 만년설을 담은 듯한 하얀 눈동자에서 생기가 줄줄이 빠져나갔다.
‘모르겠군.’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삶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으며 혹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고마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마.”
“크르륵!”
라온이 다시 검을 세웠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목을 베려고 할 때 아이스 트롤 로드가 턱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크으으….”
마지막까지 싸우려는 듯 주먹을 말아쥐고 두 다리로 당당하게 섰다. 무릎을 꿇고 죽지 않겠다는 의지. 끝까지 왕다운 모습이었다.
“대단하군.”
진심으로 감탄했다. 몬스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크아아아아!”
아이스 트롤 로드가 포효와 함께 달려든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균형이 조금씩 무너졌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 의지가 빛 바라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검을 그었다. 지그하르트의 고고함이 어린 칼날이 아이스 트롤 로드의 숨통을 끊었다.
“쿠룩!”
아이스 트롤 로드의 두꺼운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확연한 웃음.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녀석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크어어억!”
“크르르륵!”
“캬아아아!”
놈의 마지막 포효를 들었던 몬스터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난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왕답게….”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아이스 트롤 로드는 왕답게 죽어갔다. 이쪽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로.
‘잘 가라.’
라온은 왕답게 죽은 녀석이 지금의 자신처럼 좋은 환경에서 환생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왕이로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라스가 아이스 트롤 로드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트롤은 인간으로 따지면 네놈보다도 어리다. 그런 나이에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 실로 왕다운 놈이었느니라.
‘그래.’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음에도 왕처럼 태어나 죽은 저 어린 트롤을 보면 알 수 있지. 왕은 만들어지지 않고, 종족을 초월해 태어나는 법이다.
라스가 뒤를 돌아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고?’
-그렇다. 하지만 네놈을 보고 그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말이지?’
-처음 네놈을 보았을 때 왕의 기질 따윈 초코 쿠키의 초코칩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네놈은 변했다. 무력만이 아니라 영혼의 격이 달라졌느니라.
라스의 눈동자가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듯 번쩍였다.
-장인이 찰흙을 빗어 도자기를 만들 듯 지금 네놈의 혼에 왕의 그릇이 만들어지고 있다.
‘왕의 그릇….’
-그에 반해 네놈은 왕이 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맞아. 생각해본 적 없어.’
지그하르트 가주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가문을 잇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여러 이득을 챙기고, 실비아와 시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왕의 그릇에 평민의 정신이라. 재밌군. 그 그릇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커질지, 네놈의 정신이 어떤 변화를 이룰지 흥미롭구나. 마계에도 너 같은 놈은 없으니까.
‘그러면 내 몸을 안 뺏는다는 건가? 패배 선언?’
-무, 무슨 헛소리냐! 흥미롭다는 거지! 네놈의 영육을 뺏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노라!
라스가 짧은 팔을 버둥거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
-본왕은 한 번 노린 물건은 어떻게 해서든 얻어야 직성이 풀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의 육체를 가져갈 것이니라!
‘아, 예.’
-말이 나온 김에 본왕의 기질을 말하자면 저 트롤 아이와 비슷하다. 자신이 위험하더라도 부하들을 살리는 진정한 왕이지. 차이점이라면 본왕의 강함은 누구에게도 밀리지…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얼음장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은 자신의 눈빛을 본 라스가 바르르 떨었다.
‘너란 녀석은 이런 때에도 수다와 자기 자랑을….’
“라온 님!”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도리안이 달려왔다. 팔은 부러졌고, 전신에 멍이 가득했으며, 갑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너….”
나름 잘 버틴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녀석은 정말 사력을 다해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진짜 못 따라가겠네요. 청주귀와 빙아귀를 죽이고, 로드의 목까지 베시다니. 전 로드 하나만 상대하다가도 팔이 부러졌는데.”
도리안이 부러진 팔을 만지며 훌쩍였다.
“너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왜 나섰지?”
“그게….”
녀석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배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전에 광혈귀와 싸운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싸웠다기보다는 버틴 거였지만.
“그때 도망가면서 속이 너무 답답했어요. 막 찢어질 것처럼. 몸이 아픈 것도 무섭지만, 마음이 아픈 게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다시는 동료를 놔두고 도망치지 말자고 맹세했어요.”
“이번에 그걸 지켰다?”
“예….”
도리안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확실히 도움이 됐어.”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진심이 전해져 가슴 한켠이 따스해졌다. 도움을 받은 건 처음이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리고 당신도.”
고개를 돌려 뻘쭘하게 서 있는 에드퀼을 보았다. 그의 상태는 도리안보다 심각했다. 갑옷이 피로 흥건했고 다리뼈가 조각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존댓말?”
에드퀼은 갑자기 존댓말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나중에 죽이겠다고 중얼거렸으면서.
“제가 하고 싶어서 나섰을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성으로 돌아갔다. 탁함이 없는 맑은 눈빛. 정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영웅의 이름을 외쳐라!”
성문 위에 서 있는 테리안이 피에 젖은 검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병사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라온이라는 이름이 하분 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내 이름….’
전생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감추기만 했던 이름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뜨거운 전율이 심장을 두드렸다.
“가자.”
간질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하분 성으로 걸어가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튀어 올랐다.
[뛰어난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영혼의 격이 상승했습니다.]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칭호 <벽이 되는 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불굴의 의지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무수한 보상을 보며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라스가 튀어나와 악을 질렀다.
-뭐가 이리 많은 것이냐!
* * *
로베르트 가문의 서쪽을 받치는 루샤인 산.
화려한 경관으로 이름 높은 그 산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 공동이 있었다. 밤보다 더 어두운 공동의 중앙에는 오백여 명의 아이들이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으으….”
“아….”
“끄윽….”
입술을 깨물며 버티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눈이나 코 혹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기절한 아이들이 나올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복면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이 쓰러지는 빈도가 늘어났고, 결국 남아서 버티는 아이는 108명뿐이었다.
중앙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가 큰 복면인이 공동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설원을 담은 듯한 은발을 뒤로 넘긴 데루스 로베르트가 술잔을 들고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는 이전보다 더 젊고 생기있게 보였다.
“세뇌작업이 끝났습니다.”
복면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108명인가.”
데루스의 고고해 보이는 동공에 108명의 아이들이 비쳤다.
“예. 예상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이번 개들은 꽤 쓸만하겠군요.”
“저기서 반을 줄여라.”
“예?”
“어중이떠중이는 의미 없다. 필요한 건 마스터급에게도 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냥개니까.”
그가 입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듯한 건조한 미소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 어떻게 줄이면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할 일이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을까?”
데루스의 푸른 눈동자가 사이하게 번들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복면인이 머리를 땅에 찍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의 이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레이지 웜은 먹였나?”
“예! 개량에 성공한 녀석들을 먹였으니, 라온처럼 세뇌가 풀릴 일은 없을 겁니다!”
“라온. 라온이라….”
하분 성에서 울려 퍼진 열기 띈 이름과 달리 서늘한 음성이 그 이름을 짓눌렀다.
“꽤 쓸만한 놈이었는데.”
데루스가 오른손등에 돋아난 상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은 지금까지 키웠던 사냥개 중 최고의 실력을 가졌었다.
스스로 세뇌만 풀지 않았다면 육황의 최고 간부도 죽일 능력이 되는 놈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쉬웠다.
피익!
그가 라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손등의 상처가 벌어지며 끈적한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 주인님!”
복면인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려고 할 때 데루스가 스스로 손등의 상처를 벌리며 미소 지었다.
“보아라. 라온은 죽어가면서 내게 이를 박아넣고 갔다. 저 아이들도 그런 존재로 키워라.”
데루스의 푸른 눈동자에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나를 위해서라면 적의 목에 어금니를 박아넣고 웃으며 죽을 수 있는 사냥개로.”
* * *
밀랜드와 출정대가 숨 쉴 틈 없이 달려갔지만, 이미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났다. 희미하게 하분 성이 보이는 설원에 도착했을 때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우르르 돌진해왔다.
“크윽, 전투 준비!”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전투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몬스터들은 싸울 생각이 없는 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몬스터들의 상태가 보인다. 피로 물든 몸뚱이, 텅 빈 손, 그늘 가득한 눈빛. 패잔병의 모습 그 자체였다.
‘뭐지?’
밀랜드가 허겁지겁 도망치는 몬스터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다시 출발한다. 전력으로 달려라!”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감추고 다시 출발을 지시했다.
“예!”
불안한 건 출정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하분 성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정예만 모였기 때문에 밀랜드와 출정대는 정오가 되기 전에 하분 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상태는 출정대의 상상과 확연히 달랐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성벽 아래에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만 병사들의 시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출정대는 떨리는 걸음으로 하분 성으로 다가갔다.
“사, 사령관님! 여길 보십시오!”
밀랜드가 주변을 살피며 움직일 때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소리를 질렀다. 가보니 일반적인 아이스 트롤 보다 2배는 큰 괴물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이놈입니다! 이놈이 아이스 트롤 로드에요!”
“역시 함정이었군. 그런데 이걸 누가….”
“사령관님! 여기에 에, 에덴의 귀신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있습니다! 비, 빙아귀입니다!”
정찰병들은 빙아귀와 청주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아이스 트롤 로드에 빙아귀, 청주귀?”
밀랜드는 세 괴물을 차례로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에덴의 두 괴수에 아이스 트롤 로드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들. 하지만 인간의 시체나 살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덴이 함정을 팠다는 건 알겠지만 그걸 어떻게 버틴 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일단 가자.”
밀랜드가 숨을 고르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 내부에서 환호와 괴성이 들린다. 자세히 들어보니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라온?”
라온이다. 녀석의 이름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하룻밤 동안 발생한 일을 들은 밀랜드와 간부들은 회의실에 앉아 넋이 나간 것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내 평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러니까요. 에덴과 아이스 트롤 로드가 쳐들어왔는데,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니, 꿈만 같습니다. 무신의 은총을 받은 게 분명해요!”
“무신의 은총이 아니라, 라온의 은총이지. 이번에도 그 녀석이 혼자 다 했잖아.”
“빙아귀와 청주귀, 아이스 트롤 로드를 잡고 팔 하나만 부러졌다니, 진짜 괴물이야.”
간부들은 라온의 무력과 전략에 감탄하여 혀를 내둘렀다.
“어찌 됐든 이겼잖아요. 축제! 삼일밤낮으로 축제를 엽시다!”
“삼일밤낮 가지고 되겠어? 일주일은 해도 돼!”
“그래. 이런 날은 우리 평생에 다시 없을 거라고!”
한동안 몬스터들이 오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간부들은 당장 축제를 열자며 손을 들었다.
“축제도 좋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밀랜드가 시장터처럼 시끄러워진 회의실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할 일이라고 하신다면….”
“너희들이 칭송하는 라온. 그냥 환호만 해주고 말 건 아니겠지.”
“아, 당연하죠!”
“최고의 상과 금화 주머니를 내려야 합니다!”
간부들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라온 덕분이니까요.”
이들에게 라온의 활약상을 이야기해주었던 테리안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밀랜드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두 눈을 번쩍였다.
“녀석에게 하분 성의 유물을 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