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로드의 목을 베기 위해 하분 성을 나선 출정대는 스터린 산 인접 지역에 도착해 있었다.
“10분간 휴식!”
밀랜드는 스터린 산이 희미하게 보이는 언덕에 멈춰 서서 휴식을 지시했다.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항상 전투를 대비하며 움직여야 했다.
“로드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가 어디지?”
“스터린 산 중턱에 있는 흔들바위였습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놈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가….”
밀랜드는 어둠과 눈에 묻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스터린 산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불길하군.’
한시가 급해서 일단 움직이고 보았지만, 여러모로 상황이 기이하다.
북해에서 산으로 올라온 해양 몬스터, 정찰대의 뒤를 노리고 움직인 아이스 트롤 샤먼과 워리어 그리고 웨이브 이후에 등장한 로드까지. 전부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밀랜드가 허리에 찬 검을 부러질 듯 쥐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3번이나 확인했으니, 아이스 트롤 로드가 등장한 건 확실하다. 이게 누군가의 함정이라고 해도 로드만큼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제 출발을…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고 다시 출발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하분 성이 있는 방향에서 작은 불똥이 치솟았다.
“어? 저건?”
“발광탄?”
발광탄을 본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두, 두 개째?”
“저 뜻은….”
두 번째 발광탄을 본 검사와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연속된 발광탄의 의미는 위기. 하분 성이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도, 돌아가야 하는 건가?”
“가더라도 로드부터 잡고 가야지!”
“미쳤어? 저건 성이 위급하다는 신호라고!”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지금 죽어라 뛰어도 너무 오래 걸려!”
검사와 기사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논쟁을 하던 사람들은 결국 결정권을 가진 밀랜드를 돌아보았다.
“하분 성에는 테리안과 라온, 에드퀼이 있다.”
밀랜드가 사그라드는 발광탄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녀석들이 별일도 아닌 걸로 발광탄을 쐈을 리 없다.”
테리안은 라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런 라온이 있음에도 위기 신호를 보낸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밀랜드의 결정은 그 하나 때문이 아니었다.
웨이브 때 본인보다 병사들을 우선해서 성벽을 뛰어내렸던 라온의 모습. 그 영웅적인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 그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모두 몸을 돌려라.”
밀랜드가 스터린 산을 뒤로하고 두 눈을 빛냈다.
“전속력으로 복귀한다.”
* * *
“하.”
라온은 손목에 걸린 푸른색 꽃팔찌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이렇게 되나?’
매일 같이 라스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기 때문에 냉기와 정신 저항은 마스터급 이상이다. 조금 더 빨리 왔다면 모르겠지만, 글래시아를 익힌 지금은 냉기고 저주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전부 네 덕분이네. 고맙다.’
라온은 팔찌에서 살짝 튀어나온 라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끄응, 본왕은 이럴 생각이 없었느니라.
라스가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래도 너 때문에 저들의 공격이 의미 없어진 건 사실이니까.
-우으윽! 건방진 놈!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라스가 냉기로 만든 팔을 바들바들 떨었다. 녀석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거라고 중얼거리고 팔찌로 들어갔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줄곧 낮은 음성을 유지하던 청주귀가 악을 질렀다.
“어린놈의 정신력이 어떻게 이런….”
빙아귀의 눈에도 당황이 비쳤다. 생선 가시처럼 길쭉한 눈동자가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정찰병들의 호위.”
라온은 덤덤한 눈빛으로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정찰병들을 가리켰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말이 되든 안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희와 난 적인데.”
검을 휘돌렸다. 만화공의 기운이 깃든 붉은 칼날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덤벼.”
“크으윽!”
“망할 놈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빙아귀와 청주귀의 기운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전력을 끌어 올린 듯 공간을 비트는 투기가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았다.
“라시크마. 비라튼! 주!”
청주귀가 허공에서 지팡이를 휘젓자, 눈보라가 거세졌다.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덩이에 시야가 모조리 막혔다. 이전보다 더 강한 저주와 냉기가 담긴 폭풍이었다.
쿠오오오!
빙아귀가 양팔을 펼쳤다. 거친 투기가 놈의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수백 개의 가시를 만들어냈다.
“크아아아아!”
빙아귀가 포효를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방어하려는 순간 놈이 사라졌다. 폭풍에 숨어 기습하려는 것 같았다.
라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뒤쪽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바닥에서 솟구치는 빙아귀의 기습이었다. 눈을 뜨고, 광아검의 흐름대로 검을 그었다.
쩌어어엉!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충격음이 울리고 라온의 검이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감각 하나는 더럽게 좋은 놈이군. 하지만 아까와는 다를 거다! 이 눈 폭풍은 나의 공간이니까!”
그 말대로다. 검격의 위력과 속도가 격이 달라졌다. 숨겨둔 힘을 개방한 것만이 아니라, 이 눈보라가 놈을 강화하는 것 같았다.
“뒈져라!”
빙아귀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내지른다. 팔뚝과 정강이에 달린 가시와 칼날이 회전하며 투기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콰아아아!
라온이 만화공을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시뻘건 불꽃에 휘감긴 칼날을 내리쳤다. 투기와 오러가 격돌하며 만들어진 막대한 파동이 바닥에 가득 깔린 눈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어야 할 빙아귀는 보이지 않았다. 눈 폭풍 속에 숨어서 다시 기습을 준비하는 거다. 상어가 먹잇감을 노리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헛짓을 하는군.’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글래시아를 통해 빙아귀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치이잉!
빙아귀가 좌측에서 다가와 심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검면을 돌려 벼락처럼 떨어지는 투기를 흘려냈다.
콰아아아!
물러서는 빙아귀를 쫓으려 할 때 눈 폭풍이 다시 거세지며, 가시처럼 날카롭게 갈린 얼음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청주귀와 빙아귀는 각자 장기를 살린 합공으로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라온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얼음 조각을 서리의 코트로 막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네놈은 이제 내 얼굴도 보지 못한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 속에 파묻혀 죽게 될 거다!”
눈 폭풍 속에서 빙아귀의 목소리가 들린다.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는 건지.”
라온의 왼발이 의념을 담고 움직였다. 공간을 격하는 태화보. 순식간에 눈 폭풍을 가로질러 우측의 끝에서 나타났다.
-뭘 하려는 것이냐.
‘저놈들이 하려는 거 그리고…’
꽃팔찌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네게 배운 거.’
-뭐?
되묻는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감각의 바다도, 글렌의 코트도 아니다. 서리의 은신. 암살자가 어둠을 두르듯 끝없이 쏟아지는 눈과 냉기를 몸에 둘렀다. 존재감과 기척을 죽이며 나 자신이 눈이 되는 듯한 이미지를 그렸다.
암살자로 살며 평생을 해온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빙아귀가 이쪽의 위치를 눈치채기 전에 이미 자신의 존재감은 눈과 같을 정도로 가라앉았다.
“뭐야! 어디 갔어! 청주귀! 놈이 보이지 않는다!”
뒤를 쫓아온 빙아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근처에 있다! 네놈을 노리고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움직여!”
눈 폭풍 밖에서 들리는 청주귀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놈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젠장! 저 자식 주절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어!”
빙아귀가 이를 악물고 다시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라온은 빙아귀의 뒤에 이르러 있었다. 열기를 머금은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살의를 두른 검이 빙아귀의 목에 닿는 찰나 놈이 몸을 틀었다. 극한에 이른 반응속도. 괜히 에덴의 투구를 받은 괴인이 아니었다.
푸카아아악!
하지만 검은 더 빨랐다. 목 대신 빙아귀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갈라지고, 살벌한 양의 핏물이 치솟았다.
“끄아아아악!”
빙아귀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비명을 터트렸다. 마무리를 지으려고 할 때 놈의 아가리가 빛살처럼 튀어나와 왼팔을 물어뜯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쪽을 노리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끄르르륵! 팔을 통째로 뜯어주마!”
“팔? 무슨 팔?”
“당연히 네놈의…억!”
빙아귀가 물어뜯던 라온의 팔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네놈이 물고 있던 건 내 팔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얼음이다.”
빙아귀가 팔을 물어뜯으려는 찰나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팔에 두꺼운 얼음의 방패를 만들었다. 놈이 물은 건 그 방패였다.
“잘 물고 있으라고.”
“흐읍!”
빙아귀가 팔을 놓고 물러서려고 할 때 라온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르고, 예리한 검격. 다리를 움직이려던 빙아귀의 몸이 우뚝 멈췄다.
“끄윽, 네, 네놈은 정말….”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빙아귀의 목이 갈라졌다.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진 상어 투구가 누런 눈에 파묻혔다.
“쯧, 힘은 더럽게 세네.”
라온이 흐느적거리는 왼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턱은 글래시아로 만든 냉기의 방패를 뚫고 뼈를 깨부쉈다. 무시무시한 치악력이었다.
“팔이 부러졌어도 끝은 내야지.”
눈 폭풍 너머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는 청주귀를 노리고 땅을 박찼다.
“허억!”
글래시아로 눈보라를 뚫어내자마자 청주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계속 쏟아내던 얼음 조각이 더 거세게 몰아쳤다.
“꺼져라!”
주술을 사용하는 건지 도망치는 속도가 무인 이상으로 쾌속했다. 하지만 태화보를 사용하는 라온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나를 지켜라!”
잡힌다는 것을 깨달은 청주귀가 악을 지르며 지팡이를 부러뜨렸다.
“크아아아아!”
회색 연기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나며 만신창이가 된 도리안과 에드퀼이 튕겨 나왔다. 아이스 트롤 로드가 연기를 뚫고 나와 라온을 향해 돌진해왔다.
“크아아아아!”
“크라라라!”
“캬아아악!”
성벽을 공격하던 몬스터들도 동시에 뒤를 돌아 라온에게 달려온다. 세뇌시킨 몬스터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는 주술 같았다.
“아직이다! 난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이어서 허공에 거대한 눈의 검과 창을 만들어 쏘아낸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크라아아!”
어느새 쫓아온 아이스 트롤 로드가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내리쳐왔다.
터엉!
라온이 가람보법을 밟아 청주귀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은빛 곡선 위로 피어나는 열 개의 불꽃이 하나의 톱니처럼 회전한다.
촤아아악!
설원의 지평선을 따라 그어지는 붉은 궤적이 얼음의 무구를 가르고 나아가 청주귀의 가면을 쪼갰다.
“흐어억,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청주귀의 주름진 얼굴 위로 빨간 선이 그어졌다. 놈이 얼굴 중앙에서 흐르는 핏물을 잡으려 들었지만 헛수고였다.
“네, 네놈을 그때 죽였어야 했는….”
그 말을 남기고 청주귀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귀기 어린 눈빛이 촛불처럼 훅 꺼졌다.
후우욱!
끝없이 쏟아지던 눈보라가 멈추고 광기를 흘리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멈춰 섰다.
“크륵….”
도끼를 내리치려던 아이스 트롤 로드도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라온이 적의 수장을 물리쳤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
성벽 위에서 열기 띈 테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군기가 끓어오른 병사들이 내지른 검과 창이 당황한 몬스터들을 찢어발겼다.
다만 라온은 바로 앞에 있는 아이스 트롤 로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떨리는 놈의 눈. 그 어지러움이 전생의 자신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아이스 트롤 로드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사라진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똑똑한 놈이다. 그 눈빛 역시 불의 고리를 익혀 세뇌를 벗어났던 전생의 자신과 같았다.
“크어어어어어!”
아이스 트롤 로드가 포효를 터트리며 뒤로 물러섰다. 싸움이 아니라, 죽어가는 몬스터들을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의미의 신호였다.
‘제대로 된 왕이로군.’
라온은 몬스터들을 부르는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살기 위해서 몬스터들을 미끼로 쓰던 청주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지도자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지만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보내줄 수는 없다.”
물러나려던 아이스 트롤 로드의 길을 막아섰다.
“크라라라!”
아이스 트롤 로드가 비키라는 듯 길쭉한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널 보내줬다간 훗날 이 성이 무너질 거야.”
방금의 행동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이녀석은 왕의 자격을 갖췄다. 인간을 사 냥개로만 여기는 데루스 로베르트보다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있는 놈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끝을 내야 했다.
“왕답게 살지 못했으니, 왕답게 보내주마.”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크으으!”
아이스 트롤 로드가 표정을 굳힌다. 어울리지 않던 도끼를 내려놓고 푸른 투기를 끌어낸다. 세뇌를 당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투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우우우웅!
아이스 트롤 로드의 주먹 위로 푸른 투기가 압축되며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크기가 줄어들수록 그 안에 어린 투기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증폭되어갔다.
후우우욱!
라온이 남아 있는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방울져 떨어지는 불꽃의 오러가 칼날 위로 모여든다. 겨우내 만들어진 고드름처럼 오러의 창날이 벼려졌다.
“오라. 이름 없는 트롤의 왕이여.”
“크아아아아!”
아이스 트롤 로드가 땅을 터트리며 도약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압축된 기운이 폭발하며 시야 전체가 푸른 투기로 가득 찼다.
치이잉!
라온이 뒤로 젖힌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칼날에 모여든 불꽃의 오러가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질주한다.
만화공 십화.
일염극.
휘몰아치는 화염의 창이 투기의 해일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