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리메르는 불만이 가득한 듯 콧등을 찡그린 채 가주전 알현실로 들어갔다.
글렌은 여느 때처럼 리메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가주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냐.”
“라온이 그렇게 엄청난 활약을 했으면 바로 알려주셔야죠! 왜 혼자만 보물처럼 껴안고 계신 겁니까!”
“후우, 로엔.”
글렌이 낮은 한숨을 뱉으며 우측에 서 있던 로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아닙니다.”
로엔은 이번 일과 상관없다는 듯 빠르게 손을 저었다.
“그럼 저놈이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직접 비연회에 가서 훔쳐 듣지 않고서야….”
“오, 정답! 비연회 천장에 붙어서 라온의 보고를 읽고 왔죠.”
리메르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헤헤 웃었다. 비연회에 빈틈이 많다고 중얼거리는 건 덤이었다.
“내일부터 비연회에 천검대를 보내야겠군. 뻘건 굼벵이가 천장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굼벵이? 요즘 날씨에 굼벵이가 있어요?”
“네놈을 말함이다!”
“에이, 전 나비죠. 이렇게 팔팔 날아다니는데, 굼벵이라뇨!”
“후우, 됐다. 네놈하고 입씨름을 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글렌이 혀를 차고,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은 저 말고 라온을 생각해 보자구요. 그 녀석 정말 상상 이상 아닙니까?”
리메르는 활짝 핀 미소를 지으며 방방 뛰었다.
“성벽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수천 몬스터 앞을 막아서다니, 미친놈도 그런 미친놈이 없습니다!”
“음….”
글렌이 눈을 감은 채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근데 그놈이 평범한 미친놈이 아니었죠, 삼일 밤낮을 버티며 모두를 구하고, 웨이브를 승리로 이끌었잖아요. 와, 진짜 누구 제자인지, 스승 얼굴 좀 보고 싶네.”
리메르는 분명 잘 생기고, 마음이 따뜻할 거라며 떠들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가능을 이뤄가는 라온을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가주님이 생각납니다. 아니, 가주님보다 더해요.”
“더하기는 무슨.”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글렌이 눈을 떴다. 입가도 가늘게 올라간다. 손자가 본인보다 더 하다는 칭찬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분 성의 무인들은 정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대신 전투를 좋아하고, 의리가 넘치죠.”
리메르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씩 웃었다.
“지금 라온은 하분 성의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훗날 녀석의 뒤에 하분 성이 서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이렇게 될 걸 아시고, 라온의 시험을 허락해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허무해 보이는 눈동자에 옅은 열기가 일었다.
“그저 그 아이라면 어딜 가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배경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 지금 라온을 인정하신 거예요?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겠는데?”
리메르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조용히 해라.”
“전 라온이 많은 경험을 쌓고 오길 바라며 하분 성을 고른 건데, 병사들을 위해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리메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장난기가 사라진 공간을 진중한 빛이 채웠다.
“차갑고 냉소적이었던 라온이 무력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장한 것 같아서 가슴이 울컥했어요.”
“음.”
글렌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동의하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자식을 키워보지 않았지만, 내 자식이 잘 큰 것 같아서 굉장히 뿌듯하더군요.”
“사고도 치지 않고, 끝없이 발전해나가는 자식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가 입매를 비틀며 리메르를 내려보았다.
“그 아이는 나와 다른 길을 걷지만, 내 손자다. 네놈의 자식이 아니야.”
“어? 인정했다! 로엔 님 들었죠! 방금 자기 손자라고….”
“그, 그건….”
“들었습니다!”
로엔이 드물게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북망산이 내려앉는 거 아닐까요? 아니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시끄럽다!”
글렌이 호통을 쳤고, 리메르는 능글맞게 웃어넘겼다. 라온의 소식이 들어간 알현실은 오늘도 쌓인 정이 흐르고 있었다.
* * *
나름 화기애애한 지그하르트 알현실과 달리 하분 성 회의실의 분위기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번 정찰대와 4번 정찰대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급하게 끄적인 서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우거에 맞먹는 덩치, 가슴에 박힌 왕의 문양 그리고 이마 위에 외뿔까지. 전부 아이스 트롤 로드의 특징입니다. 확실합니다. 로드가 나타났습니다.”
“끄응!”
“젠장! 트롤 로드라니….”
“웨이브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회의실에 있는 간부들은 트롤 로드의 등장에 한숨을 내쉬거나,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자, 잠깐 돌연변이나, 오우거일 수도 있….”
“로드의 특징. 아니, 왕급 몬스터들의 특징인 몬스터들을 복속시키는 능력도 목격되었습니다.”
“맞습니다. 트롤만이 아니라, 오크와 놀, 해양 몬스터들까지 놈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1번 정찰대장과 4번 정찰대장이 차례로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그럼 진짜잖아!”
마지막 희망까지 깨진 간부들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로드의 밑에 모여든 몬스터들로 인해 제2의 웨이브. 아니, 웨이브보다 더 큰 해일이 몰아칠 겁니다.”
회의실에서 말이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래도 딱 하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이런 상황에 좋은 소식이 의미가 있나?”
“저희에게는 유리한 소식입니다.”
바르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서류를 들었다.
“아이스 트롤 로드의 털은 아이스 트롤 특유의 푸른색 털이 아니라, 백색 털이었습니다. 즉, 놈은 아직 성체가 아닙니다. 완성되지 않았죠.”
“아!”
“그, 그러면….”
“놈이 완성되기 전에 끝을 내야겠군.”
밀랜드가 지도에서 로드가 관측된 지점을 손가락으로 내리찍었다. 강력한 압력에 책상이 짓눌렸다.
“내일 바로 출정에 나간다.”
“내, 내일이요?”
“너무 빠릅니다! 병사들을 준비시키려면….”
간부들은 아직 부상자가 많아서 모두가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반대했다.
“병사들은 가지 않는다.”
밀랜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지 않은 신장에서 거인과 같은 위압이 흘러넘쳤다.
“기사와 검사 그리고 1번과 2번 정찰대들만 움직인다. 정예로 움직여 최대한 빨리 로드의 숨통을 끊겠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속도입니다. 더 많은 몬스터가 모이기 전에 로드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우측에 앉아 있던 테리안이 두 눈을 빛냈다.
“음….”
“그게 피해를 줄일 유일한 방법이긴 하군.”
“그래. 사령관님이라면 충분히 로드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몬스터를 막으며 시간만 끌면 돼.”
간부들도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정 준비를 시작해라. 부상자가 많은 설격대와 나머지 정찰대와 병대는 남아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간부들이 일어서서 회의실을 나가려 할 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가겠습니다.”
라온은 밀랜드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넌 아직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육체와 정신 모두 만전이 아니야.”
“그래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네 무력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이 이상 무리시킬 수는 없다.”
“사령관님.”
“네 마음은 그날의 일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충분히 느꼈어. 이번에는 쉬어라.”
밀랜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로드는 우리에게 맡겨.”
“확실히 목을 베어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라온 님 대신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오겠습니다.”
부상을 입은 라온이 싸우겠다는 투지를 비치자, 간부들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널 남기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나를 대신해서 성을 부탁하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막아다오.”
밀랜드가 옅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라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을 나갔다.
‘괜찮은 먹잇감을 놓쳤네.’
로드를 잡는다면 영혼의 격과 능력치가 오를 게 분명하기에 조금 아쉬웠다.
-멍청한 놈. 어차피 네놈에겐 기회가 없다. 저 늙은이가 상대할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네.’
라스의 말대로 로드를 상대할 사람은 사령관 밀랜드로 정해져 있다. 거기까지 가서 들러리를 서느니, 이곳에서 몸을 완벽하게 회복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돼지 새끼도 아니고, 뭘 그리 욕심이 많은지 모르겠구나.
‘네 식욕만큼은 아니지.’
-무슨 소리냐! 본왕에게 식욕 따위는 없다! 그저 미식에 대한 욕구만….
‘네. 그러시겠죠. 민트초코 소리만 들으면 침샘이 고장 나시는 마왕님.’
-끄으윽!
라온은 라스를 놀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 * *
다음날 새벽.
밀랜드가 이끄는 출정대는 설원의 끝에 있을 로드의 목을 노리고 성을 뛰쳐나갔다. 부상이 없는 정예만 움직였기 때문에 그 속도는 평범한 출정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라온은 하얀 폭풍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출정대를 지켜보다가 성벽을 내려왔다.
“아, 진짜 아쉽네. 로드의 목은 내가 베었어야 했는데.”
함께 남은 도리안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출정에서 빠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환호를 내지른 주제에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네 1호 부하. 참 대단해.’
-…본왕은 모르는 놈이다.
라스는 이럴 때만 도리안을 모르는 척했다.
“오늘은 뭘 하실 거예요?”
“연공 해야지. 빨리 회복해야 하니까.”
“도와드릴까요?”
“괜찮으니, 네 할 일이나 해.”
“옙!”
그 말을 기다렸는지 도리안이 경례 자세를 취한 뒤 숙소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서리의 가지에 가서 유아랑 놀 생각인 것 같았다.
‘꽤 친해졌나 보네.’
-파인애플 소녀와 정신 연령이 딱 맞지 않느냐. 아니, 솔직히 저 녀석이 더 어리니라.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긴 하지.’
너도 비슷하고.
발작을 일으킬 게 뻔해서 마지막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정신연령이라고 하니 생각나는군. 본왕은 마계에서 고고한 정신을 가진 존재로 이름이 높았느니라. 다른 마왕들이 추한 짓을 할 때도 본왕만큼은 언제나 우아하게….
‘빨리 가서 연공이나 해야겠네.’
-들어라!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니까!
‘네 자랑은 이미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었어.’
-끄윽, 매번 말하지만,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라온은 자칭 우아한 마왕의 저주를 무시하고,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후우우….”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순도 높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고리가 공명하며 몸 상태를 끌어 올렸을 때 만화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치솟은 용암 같은 열기가 마나회로를 질주하며 전투의 잔재를 녹이기 시작했다.
집중 특성 덕분인지, 능력치가 올랐기 때문인지 마나 회로를 내달리는 오러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세밀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가능하겠어.’
라온이 평소보다 많은 마나를 끌어들였다. 어깨가 살짝 떨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더 높아진 무학과 감각을 이용하여 그 흐름을 통제했다.
마나의 변화 덕분에 집중력이 고조된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듯 불의 고리를 돌리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창밖에서 쏟아지던 태양 빛이 가라앉고, 달이 하늘의 중심에 올라섰을 때 라온이 눈을 떴다.
번쩍!
이미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른 듯 붉은 눈이 타오른다. 새벽과 달리 힘으로 가득 찬 눈동자였다.
‘내일쯤이면 오러는 전부 회복할 수 있겠어.’
라온이 단전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능력치와 무학 성취가 많이 올랐기 때문에 회복 속도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완벽한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본왕의 위대한 능력 덕분이니라. 잊지 말고 보답해라.
‘그래. 그래.’
라온은 턱을 쭉 내밀고, 위엄 있는 척하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글래시아도 한 번 운용해볼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글래시아의 수련도 이어가기로 했다. 다시 눈을 내리감고, 호수보다 넓어진 감각의 바다를 펼쳐냈다.
치이잉!
라온은 감각의 바다에 더 깊게 잠수했다. 설화의 감각까지 운용하여 기감의 범위를 확장했다. 집중 특성 덕분인지 감각을 펼치는 게 훨씬 쉽고 빨라졌다.
고오오오!
둥글게 퍼져나가는 감각의 물길을 문어의 촉수처럼 조형하여 성 주변을 살폈다. 이미지를 통해 글래시아를 운용하는 수련이었다.
‘음?’
감각의 물길로 사위를 살피던 라온이 우뚝 멈췄다. 감각의 바다에 다수의 파도가 일어났다. 사납게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기척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몬스터들 사이에 세 개의 커다란 해일이 솟구쳤다. 평범한 놈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한 존재들이었다.
덜컥.
라온이 다시 한번 기척을 확인할 때 슬쩍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와, 아직까지 하고 계셨네.”
도리안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그가 까치발로 침대로 다가갈 때 라온의 눈이 번뜩였다.
“헉!”
“방해꾼이 왔군.”
“바, 방해꾼이라니요! 말이 심하잖아요! 일부러 늦게 왔는데!”
“너 말고.”
“예?”
“아니지. 방해꾼이 아니라 먹잇감이겠어.”
그가 몸을 일으키며 검을 챙겼다.
“도, 도련님? 이 시간에 왜 검을….”
“가서 전해.”
라온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튀겼다.
“적이 오고 있다고.”
* * *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올랐을 때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일어섰다.
“빙아귀. 시간이다.”
그 말에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빙아귀가 눈을 떴다. 짐승처럼 가늘게 선 동공이 부르르 떨렸다.
“드디어 피를 보겠군.”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음성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밀랜드는 확실히 간 건가?”
“정찰용으로 사용한 트롤의 눈으로 확인했다. 예상보다 이동속도가 빨라. 6시간 후면 스터린 산 부근까지 도착할 것이다.”
“아쉽게도 정말 네 말대로 되었군. 밀랜드와 한번 부딪쳐보고 싶었는데.”
빙아귀는 아쉽다며 긴 혀를 날름거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준비나 해라. 바로 쳐야 하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로드가 아까워. 제대로 키운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쩝.”
“로드?”
“그래. 미끼로 쓰기에는 너무 큰 녀석이잖냐.”
“뭘 착각하는군.”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로드는 여기에 있다.”
그가 로브에서 꺼낸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괴이한 문양이 번쩍이며 이전보다 더 커진 아이스 트롤 로드가 튀어나왔다.
“끄르륵….”
로드는 멍한 눈으로 식욕으로 가득 찬 신음을 흘렸다.
“왕급 몬스터들은 피를 볼수록 강해진다. 안전하게 로드를 키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 그럼 스터린 산에는 뭐가 있는 거지?”
“내가 주술로 만든 가짜가 있다.”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밀랜드는 바로 알아차릴 텐데?”
“그렇겠지. 다만 그때는 이미 우리의 일이 끝난 뒤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차게 웃었다. 그걸 위해서 정찰대에게 3번이나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여주었다. 도착하면 알아차리겠지만, 지금은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럼 시작하지.”
그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산이 뒤틀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뒤에 있던 눈 덮인 언덕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부르르 떨렸다.
콰아아아아!
새하얀 눈들이 쓸려나가고, 푸른 털들이 솟구쳤다. 트롤과 오크. 하얀 언덕은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몬스터들로 만들어진 가짜였다.
“그 언덕… 하분 성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쌓아 올린 거지? 청주귀. 네놈의 계획은 지루하지만, 효과는 확실하군.”
“계속 말했잖느냐. 계획대로 움직이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청주귀가 입매를 틀어 올리며 트롤 샤먼의 가면을 얼굴에 썼다.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면이 그의 머리를 휘감았다.
“크르르륵.”
청주귀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안구에서 몬스터보다 더 흉악한 빛이 번들거렸으며, 손에 든 지팡이에선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크흐! 시체로 가득할 하분 성을 볼 밀랜드의 표정이 기대되는군.”
빙아귀가 히죽거리며 상어의 투구를 머리에 썼다.
치리리링!
투구에서 흘러내린 푸른 물결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등과 어깨에서는 칼날 같은 지느러미가 돋아났고, 팔과 다리에서는 푸른 가시가 솟구쳤다. 닿기만 해도 피부가 찢겨나갈 것처럼 가시가 가득 박힌 갑옷. 해양 몬스터 중 가장 흉폭하다는 샤크스팅의 갑옷이었다.
“가자!”
“크아아아아!”
“크라라락!”
청주귀가 암녹색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죽은 듯 멈춰 있던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하분 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웨이브 때보다 몇 배나 더 흉악한 기세였다.
“경계도,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을 테니, 무너진 성벽을 바로 돌파한다.”
“저항이 약한 상대로 학살이라, 난 이런 게 좋단 말이지.”
청주귀는 끝까지 계획을 짰고, 빙아귀의 눈빛은 사악함으로 타올랐다.
“성이 보인다! 어? 근데….”
“뭐, 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분 성으로 달리던 두 괴인은 이미 대비가 끝난 듯 병사로 가득 찬 성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의 존재를 확신한 듯 하늘 위로 발광탄까지 솟구쳤다.
“함정인가?”
“함정은 아니다. 밀랜드의 위치는 확실하게 확인했어! 대체 무슨….”
빙아귀만이 아니라, 청주귀도 당황하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 이걸 어떻게….”
“당황하지 마라. 청주귀. 어차피 성에 남은 것들은 어중이떠중이뿐이다. 힘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이야!”
“후우, 이번만큼은 네 말이 맞군.”
청주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괴이한 단어를 연달아 내뱉었다.
“끼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지팡이에서 흐르는 빛을 받은 몬스터들은 뻘건 눈빛을 발하며 더 빠르고 사납게 성벽으로 돌진했다.
“성벽으로 가라! 단숨에 깨부숴!”
“크흐흐, 이번엔 내가 먼저… 어?”
몬스터들이 몸통으로 성벽을 부수려 할 때 성 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휘날리는 금발. 며칠 전 수천의 몬스터를 홀로 막아선 영웅이 그곳에 있었다.
“가지 않길 잘했네.”
라온이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누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먹잇감이 알아서 찾아와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