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후우우우.
라온은 심장을 조여오는 몬스터들의 살의를 느끼며 숨을 골랐다.
-어떻게 버틸 생각이냐.
‘감각을 최대한 열고 싸워야지.’
-감각으로 느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네 뒤에 있는 것들을 보호할 때는 더더욱.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지기 전부터 폭발에 휩싸였기 때문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알았느냐. 네놈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한 것인지. 네게 남은 건 개죽음뿐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몰라.’
-본왕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한쪽을 막지 않는 이상 지쳐 있는 네놈은 저들 모두를 보호할 수 없다. 정에 움직이다니, 한심한 놈!
라스의 말을 들은 것처럼 해양 몬스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심하다라….’
라온이 피식 웃으며 검기를 쏘아냈다. 반월을 그리며 쏘아진 붉은 칼날이 해양 몬스터 무리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맞는 말이야.’
전생에서 정에 이끌리다가 죽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봐왔다. 암살을 할 때 그걸 이용한 적도 있고.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은 암살자 라온이 아니라, 검사 라온 지그하르트였으니까.
‘견딘다.’
감각의 바다를 열고,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이미 저지른 일. 저들을 구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견디는 정도로는 안 된다. 본왕에게 몸을 넘겨라. 저 몬스터들을 모조리 얼리고, 인간들을 구해주겠노라.
‘그게 목적이었나?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내는군.’
-본왕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 하나였으니….
‘집중하게 조용히 좀 해.’
“라온 님! 피해요!”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세울 때 도리안의 경고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도리안의 손에서 길쭉한 바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떨어진 바위가 땅에 박히며 우측을 막는 벽이 만들어졌다.
“흐아압!”
도리안은 그 위로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발로 걷어차 벽을 조금 더 높게 만들었다.
‘역시 저건 평범한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었군.’
많은 물건을 넣는 것으로 모자라, 꺼낼 때 일시적으로 물건이 경량화되는 능력까지 있는 것 같다. 최소 유일급 이상의 주머니였다.
“제가 말했죠! 물건들에는 다 쓰임새가 있다고! 바위는 이럴 때 쓰는 겁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왜 바위를 가지고 다니냐고 뭐라고 했던 걸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꼭 버티세요!”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래. 고맙다.”
이 정도면 충분해.
중앙과 좌측, 우측에서 우측이 막혔으니, 이젠 두 방향만 막으면 된다.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바위를 이렇게 쓴다고? 이익!
어처구니가 없는지 라스는 넋이 나간 눈으로 도리안을 올려보았다.
“와라!”
라온이 앞으로 나가며 오러를 실은 포효를 터트렸다.
“끄륵!”
“끼이익!”
“크르르!”
그 사나운 으르렁거림에 몬스터들이 잠시 움찔거렸지만, 식욕과 광기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라라락!”
가장 먼저 돌진해 온 건 오크다. 벌겋게 녹이 슨 도끼로 머리를 노려왔다. 광아검으로 도끼를 튕겨낸 후 오크의 목을 베었다.
“끼아아!”
뒤를 이어 놀이 철퇴를 내리쳐왔다. 놈의 목표는 머리. 상체를 비튼 채로 검을 그어 놀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촤아악!
뿜어지는 놀의 핏물 사이로 시퍼런 도끼가 들이닥쳤다.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오크 투사의 기습이었다.
쩌엉!
검을 수평으로 세워 도끼를 막자마자, 오크 투사의 두 번째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알고 있어도 섬뜩하군.’
감각의 바다를 통해 오크 투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놈이 뿜어내는 살기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무력 이상의 투기와 투지였다.
치이잉!
라온이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검을 휘돌렸다. 풍차처럼 돌아간 검날이 두 개의 도끼를 튕겨냈다.
아래에서 멈춘 칼날을 그대로 위로 그었다. 오크 투사가 투기로 칼날을 잡으려 했지만, 그 정도에 막힐 검격이 아니었다.
촤아악!
가슴이 사선으로 갈라진 오크 투사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숨을 돌릴 틈도 없군.’
바닥의 진동 그리고 내려앉는 그림자. 위에서 아이스 트롤이 떨어져 내렸고, 아래에서 샤크몰이 올라오고 있었다.
화아아아!
검을 뒤로 젖힌 뒤 창처럼 내질렀다. 샤크몰이 솟구치고, 아이스 트롤이 떨어진 순간 칼날에서 뿜어진 불꽃이 두 괴물을 집어 삼켜버렸다.
“크르륵….”
“키이이익….”
밤을 지우는 화염의 꽃잎에 몬스터들은 겁먹은 듯 멈춰 섰다.
“끼아아악!”
뒤에서 사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어와 비슷하게 생긴 해양 몬스터 오르쿠스의 괴성이다. 머리가 좋은 놈답게 촉수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몬스터들이 동시에 달려든다. 자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병사들을 노리고.
“젠장.”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성벽 위에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역부족이다. 밀랜드가 중앙을 비우는 순간 성이 무너질 수 있기에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혼자 해야겠군.’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감각의 바다를 최대로 열었다. 만화공을 끌어 올리며 발을 굴렀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을 휘감아 검을 내질렀다.
광아검의 이빨이 오크를 찢어발기고, 연성검의 검세가 트롤의 사지를 가른다.
밀려오는 녹색의 파도를 향해 만화공의 불꽃을 뿜어냈다. 숨결처럼 뿜어진 불길이 반원을 그리고 퍼지며 전방의 몬스터들을 녹여버렸다.
“후우욱.”
라온이 거친 숨을 뱉었다. 육체는 지쳐가지만, 정신과 감각은 점점 또렷해진다. 오랜만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기분을 맛봤다.
쿠구구구!
도리안이 세워준 벽에서 진동이 일었다. 바위가 갈기갈기 깨지며 거대한 집게를 가진 해양 몬스터 크라트가 튀어나왔다.
투석기처럼 쏟아진 바위에 부상자들이 짓눌릴 것 같았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광아검을 후려쳤다. 사납게 휘어지는 검격으로 돌무더기를 쳐내고,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았다.
요기를 담은 일섬. 크라트들은 그 단단한 갑각이 무색하게도 일격에 머리가 터지며 쓰러졌다.
“끼이이익!”
뒤에서 다시 오르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군.’
감각의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를 향해 열기에 휘감긴 검을 내리쳤다. 새빨간 검기가 밤공기를 가르고 푸른 문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날 쓰러뜨리기 전엔 이 뒤로 못 간다.”
라온이 두 검을 교차하며 진각을 밟았다. 갈라지는 대지 위로 피어나는 붉은 기류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 * *
밀랜드는 홀로 수천의 몬스터를 압도하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만용이라 여겼다.
이곳에 작은 승리를 이룬 애송이가 실력을 과신하여 나섰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저 지옥 같은 곳에서 30명의 부상자를 보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하지만 라온은 버텼다. 도리안이 바위로 우측을 막아주었다고 해도 끊임없이 몰아치는 몬스터들의 공세를 견디고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오크를 베고, 트롤을 태우고, 크라트를 부수며 홀로 무쌍의 위용을 자랑했다.
라온이 앞에서 완벽한 방어를 해준 덕분에 그의 뒤에 무방비로 쓰러져 있는 병사들은 떨어진 이후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정상적인 감각이 아니야.’
무력 이상의 감각.
라온의 기감은 그의 무력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예리한 감각을 토대로 펼치는 진중한 검술은 두꺼운 벽이 되어 병사들을 보호했다.
‘심지어 강해지고 있군.’
그는 이 최악의 상황을 기회로 삼아 성장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하분 성을 지키면서도 처음 보는 괴이한 경우였다.
“켈런!”
밀랜드는 라온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밤여우 기사단의 단장 켈런을 불렀다.
“예!”
“부상자들을 구해라.”
“예? 하지만….”
“괜찮다.”
그는 검기를 내뿜어 오르쿠스마저 잡아낸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버텨줄 것이다. 내려가서 부상자를 구해라!”
밀랜드가 검을 꽉 말아쥐었다. 불가능한 일을 이룬 라온을 보자 지쳐가던 늙은 육체에 다시 한번 활력이 돌았다.
콰아아아앙!
그의 검에서 뿜어진 막대한 검격이 전방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버텨라!”
하늘을 향해 찌른 검에서 강렬한 서기가 치솟았다. 달과 이어지는 듯한 검광을 본 병사들의 눈빛에 그와 같은 색이 입혀졌다.
“밤은 끝난다. 버티고, 버텨서 무찔러라!”
* * *
“네놈 이제는 붐 스컬도 제대로 조작 못 하는 거냐? 솜씨가 많이 녹슬었군.”
푸른 로브의 사내는 중간부터 무너지는 성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밀랜드마저 속일 정도로 조작은 완벽했다. 검기를 쏘아낸 놈의 감각이 비상했을 뿐이다.”
“그런 핑계를…음?”
그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금발의 검사를 보고 키득거렸다.
“저 미친놈은 뭐야?”
“저 녀석이다.”
“뭐?”
“내 위험 감지 능력을 발동시키고, 방금 붐 스컬을 베었던 놈이 바로 저 어린놈이다.”
“흐음….”
그 말에 검은 로브의 사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별거 없어 보이는데.”
“보면 알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은 로브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푸른 로브 사내는 콧등을 찡그리며 라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해 보이는데.’
어린 나이에 막강한 무력을 가졌고 용기가 뛰어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저런 놈에게… 음?”
푸른 로브의 사내가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뭐야?’
오크 투사가 놀의 시체를 이용한 완벽한 공격을 했는데, 놈은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쳐냈다.
이상한 건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오크나 트롤에 이어 크라트까지 전부 어딜 노릴 것인지를 파악하고 단숨에 끝을 냈다. 육감이 기괴할 정도로 발달한 놈이었다.
“저놈의 감각이… 가진 경지를 한참 넘어서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나도 트롤 샤먼의 위험 감지 능력이 없었다면 저놈에게 위치를 잡혔을 거다.”
“으음, 검술에도 지독한 살의가 어려있어. 일검일살. 사람을 지키면서 저런 살검이라니 특이한 놈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조금 더 자세히 보라고 말하며 라온을 가리켰다.
“헉!”
턱을 긁적이며 라온을 살피던 푸른 로브의 사내가 둔탁한 신음을 흘렸다.
“지, 지금 설마….”
“그래. 저놈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다.”
검은 로브 사내의 목소리가 진흙의 밑바닥처럼 가라앉았다.
* * *
오크가 도끼를 내리친다. 흐름을 읽고 오크와 도끼를 동시에 베었다.
베어울프가 손톱을 휘둘렀다. 공격을 흘려내고, 목을 갈랐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포효를 터트리며 쇄도해온다. 거대한 주먹에 어린 투기가 번들거렸다.
여섯 번의 부딪침 끝에 트롤 워리어의 투기에 작은 틈이 벌어졌다. 만화공을 일으켜 빈틈을 내질렀다. 심장이 터진 트롤 워리어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감각의 바다. 심상으로 만들어낸 냉기의 물결로 적의 움직임을 읽었다.
오싹하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 심을 세우듯 집중력이 최고조에 올랐다.
적의 호흡이, 근육의 움직임이 눈에 선명하게 어렸다.
베고, 베고, 또 벤다.
도미노처럼 몬스터가 쓰러질 때마다, 뒤에 있는 병사들이 사라질 때마다 족쇄가 풀리듯 정신이 고조된다.
샤크몰이 땅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가슴을 터트렸다.
크라트가 갑각을 단단하게 만들기 전에 목을 베었다.
성문과 맞먹는 크기의 만타쿤을 일검에 갈라버렸다.
고양된 정신이 심장을 울린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능해진다.
시리도록 푸른 칼날이 베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뻗어나가는 발이 닿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붉은 핏물이 시야를 가릴 때마다 하늘이 변한다.
어둑했던 밤하늘에 광명이 깃들고, 다시 꽉 찬 달이 떠오른다.
그 만월마저 기울었을 때 눈앞에 남은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피에 젖은 대지를 밝히는 여명. 그 상서로운 빛 아래 시체들의 산이 쌓여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극한의 집중력을….]
[글래시아를 습득….]
라온은 메시지가 아니라, 떠오르는 금색의 태양을 보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