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29화 (129/653)

129화

웨이브.

다른 말로 몬스터들의 파도.

하분 성이 전투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름과 겨울 2번에 걸쳐 일어나는 이 웨이브 때문이었다.

스터린 산과 북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과 5일 밤낮으로 싸우다 보면 하분 성에서 평생을 산 베테랑들도 죽고 싶어질 정도라고 한다.

웨이브의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오마의 수작이라는 말도 있고, 여름과 겨울에 개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몬스터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밀고 나온다는 말도 있었다.

라온은 그 웨이브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 사령관실에 와 있었다.

“숫자는?”

“눈에 들어온 놈들만 세어도 만 단위 이상입니다. 제 감일 뿐이지만, 작년보다 많아 보입니다.”

“매번 어디서 그렇게 튀어나오는지 알 수가 없군.”

밀랜드가 손에 쥔 종이를 구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쯤 도착하지?”

“이동속도로 볼 때 모레 새벽이면 성벽에서 관측될 겁니다.”

“특별한 건?”

“투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나 오크 투사, 북해 부근에선 만타쿤이나, 옥스톨 킬러, 크라트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1번 정찰대장 바르티는 파악해놓았던 엘리트급 몬스터를 모두 읊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 말에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엘리트급도 많군.”

“이번에도 목숨을 걸어야겠네요.”

“그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어.”

밀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정비관.”

“예!”

“모레 새벽까지 성문과 성벽의 상태를 전부 확인하도록.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병창관.”

“예!”

“무기를 확인하고, 벽 위에서 던질 수 있는 돌과 기름을 준비해라.”

“명을 받듭니다!”

그는 회의장에 있는 간부들에게 임무를 주었고,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다급하게 회의장을 떠났다.

“테리안. 너는 나 대신 지휘부에서 총괄 업무를 맡는다.”

“예!”

부사령관 테리안까지 떠나자 남은 건 라온뿐이었다.

“라온.”

“예.”

“웨이브에 대해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웨이브를 한 번 치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계속 정찰을 보내고, 출정을 나가는 이유도 그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지.”

밀랜드의 굳건한 눈동자가 비틀어진다. 노쇠한 장수의 애잔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무너진 성벽은 세우면 되고, 박살 난 성문은 새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지키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최대한 많은 병사를 지켜다오. 그게 너와 도리안의 임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하마.”

라온은 밀랜드에게 고개를 숙인 뒤 회의장을 나왔다. 그는 출정과 임무마다 모두를 살려서 데려오는 자신에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 도련님! 어떻게 됐어요?”

사령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리안이 달려왔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긴장했나 보다.

“뭘 물어. 뻔하지. 우리 임무는 성벽으로 올라오는 몬스터를 막고, 병사들을 보호하는 거다.”

“아이고!”

도리안이 주저앉아서 땅을 쳤다.

-망할 웨이브. 먹지 못한 애플 미트 파이의 원한을 갚겠노라.

겁에 질린 도리안과 반대로 라스는 차디찬 분노를 끌어 올렸다.

“진짜 죽었다. 웨이브를 어떻게 버텨!”

“1달 전에 웨이브가 온다고 말해줬잖아.”

“전 운 좋게 비켜 갈 줄 알았죠! 진짜 인생 망했어!”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라온이 혀를 쯧쯧 차고 도리안의 목덜미를 잡았다.

“어? 어디 가십니까?”

“네가 이러면 다른 병사들이 위험해. 오랜만에 정신 교육 좀 하자.”

“저, 정신 교육이라면….”

“뭘 물어. 광아검을 쓰는 나랑 놀아보는 거지.”

“잠시만요! 지금 막 괜찮아졌….”

라온은 서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괜찮아.”

*     *      *

땡땡땡땡!

귀가 따가운 종소리가 새벽을 밝힌다.

벽에 기댄 채 명상을 하고 있던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왔군.”

하분 성에 온 이후로 처음 듣는 비상종 소리다. 다급한 종소리만으로도 밖의 상황이 어떤지 예상이 갔다.

“도, 도련님.”

“잘 준비해서 나와.”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린 후 검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빨리 움직여!”

“아, 젠장 정비 덜 끝났는데!”

“병창을 열어!”

“보병과 창병은 성벽으로!”

병사들만이 아니라, 정비사나 대장장이들까지 이 추운 날 땀을 줄줄 흘리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후우….”

라온은 숨을 고르며 성벽으로 향했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오늘은 피가 강이 되어 흐르겠어.

라스는 찬 공기를 크게 들이키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미트 파이의 원한을 갚으라는 자칭 마왕을 무시하고 성벽을 올랐다.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밤새 쌓인 설원 위로 녹색과 푸른색의 파도가 굽이친다. 오크, 트롤, 놀, 샤크몰, 크라트, 샤미르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감각이 뛰어난 자신으로서도 세기 힘들 정도의 숫자에 손끝이 떨렸다.

몬스터들에게서 뿜어지는 광기와 식탐의 악취에 후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놈들은 이 성안에 있는 인간들을 상자 안에 든 먹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후욱!”

“아….”

“미, 미쳤어!”

“시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성벽에 선 병사들은 무기를 쥔 손을 덜덜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눈빛에 어린 건 확연한 두려움이었다.

쿠구구구!

다른 몬스터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엘리트 몬스터들이 피워내는 강렬한 투기에 병사들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챠아아앙!

성벽 중앙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칼날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몬스터들이 피워내던 광기가 내려앉고, 정심한 기운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겁먹을 필요 없다! 하분 성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다! 정렬하라!”

“정렬하라!”

밀랜드였다. 어느새 성벽 위에 오른 그가 대지가 흔들릴 정도의 웅대한 목소리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방패병과 창병은 전방으로. 궁병은 그 뒤에 대기하라!”

직접 움직인 사령관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굳은 다리를 풀고 마음을 다지기 시작했다.

“대기하라!”

밀랜드는 설원을 가득 채우는 몬스터의 해일을 보고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몬스터들에게서 풍겨오는 혈향과 노린내가 바로 가까이에서 코를 자극할 때쯤, 그의 검이 불을 뿜었다.

“쏴라!”

은색 칼날에 담긴 막대한 기운이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콰아아아앙!

거리를 격하는 검기가 몬스터들의 선두를 몰아쳤고, 그 뒤로 정찰병과 궁수들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아아앙!

어둑한 남색 하늘 위로 은색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퍼버버버벅!

화살에 맞은 몬스터들이 뒤로 넘어갔지만, 파도는 그치지 않았다. 동족을 밟고, 뜯으며 성벽을 향해 밀려왔다.

“쏴!”

재빠르게 장전한 쇠뇌와 활이 다시 바람을 뿜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 무더기가 쏟아져도 몬스터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결국 성까지 도착한 오우거 한 마리가 그 거대한 주먹으로 성문을 후려치려 할 때 밀랜드의 칼이 뒤집혔다.

콰아아앙!

강기에 휘감긴 검격이 연속으로 쏟아지며 오우거와 오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성벽을 사수하라! 절대 넘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성벽에 달라붙어 올라오는 해양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다.

모두가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무기를 휘두르고 활을 날렸지만 몬스터들의 광기는 멎지 않았다. 놈들은 얼어붙은 성벽을 평지처럼 타고 올라와 식탐 어린 손톱을 내리쳤다.

“허어억!”

메뚜기처럼 성벽을 뛰어 올라온 트롤이 병사의 머리를 뜯으려 할 때 라온이 움직였다.

촤아악!

광아검으로 트롤의 발목을 잘라 아래로 떨어뜨렸다. 넘어진 보병을 세워주려 했지만, 바로 옆에서 놀이 갈고리를 타고 올라왔다.

“끼아아아!”

창을 내지르려는 놀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우측으로 움직여 도끼를 든 오크의 가슴을 갈랐다.

퍼어엉!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성벽 위로 갈색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해양 몬스터 스웰피쉬의 독 안개였다.

“아악!”

“끄아아악!”

독 안개에 노출된 병사들이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다.

터엉!

라온이 독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검을 내리쳤다. 붉은 검풍이 독 안개를 오크 쪽으로 밀어냈다.

“크아아아!”

“크라락!”

독 안개를 들이킨 오크들이 피부를 긁으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은 인사를 해오는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고도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전투는 태양이 서산에 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체 어디에 이 숫자가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몬스터들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성벽에 서서 용맹을 뿜어내던 병사들은 추위와 피로에 지쳐 팔다리를 허우적댔고, 기계처럼 화살을 뿌리던 궁병들의 손가락에도 핏물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오러를 운용하며 성벽을 사수하던 검사와 기사들도 오러 고갈 현상이 나타나 얼굴이 노랗게 죽어갔다.

그들 모두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웨이브 중 이번이 가장 지독하다고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 가장 건재한 사람은 하분 성에 온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라온이었다.

그는 불의 고리와 만화공이라는 희대의 연공법으로 육체의 피로를 풀고, 오러를 회복시키며 전장을 제집처럼 노닐었다.

그가 구한 병사만 100명이 넘고, 죽이거나 떨어뜨린 몬스터는 300마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퍼어엉!

라온이 성벽을 올라오던 트롤의 목을 베어버리고, 아래로 밀어버렸다.

“후우….”

굳어버린 듯한 허리를 폈다. 해가 지고 있음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며칠 동안 지속된다고 하니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으라라야!”

도리안은 어느샌가 검을 내려놓고, 설격대에게 고통을 주던 통나무를 아래에 던지고 있었다.

매번 무거운 걸 잘 든다 했더니, 힘이 장사였다. 통나무에 얻어맞은 오크와 놀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콰아아앙!

성문 앞에서 대지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밀랜드다. 그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성문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사령관인 그가 굳건하게 버텨준 덕분에 성문과 주변 성벽은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았다.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바닥으로 기우는 태양. 해가 떨어지고 나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모두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피 묻은 검을 털었다.

“하아.”

천천히 숨을 고르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 감각의 바다에 처음 느끼는 기척이 잡혔다.

기사들이 무기와 갑옷의 정비를 위해 잠시 빠져서 정찰병들과 소수의 검사만 남은 우측 외곽. 그곳으로 시꺼먼 무언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저게 뭐지?’

트롤의 머리통만 한 크기에 검은색 털로 뒤덮여 있는 기이한 외형의 몬스터다. 놈은 성벽에 닿는 게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지 죽을힘을 다해 질주했다.

다른 사람은 저 몬스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뭔가 불안해.’

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점. 현재 가장 약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방향을 노리고 다가가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터엉!

라온이 땅을 박차고 우측 성벽으로 뛰었다. 시커먼 몬스터를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콰아아앙!

놈이 성벽에 닿기 전에 베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갈라진 몸에서 뿜어진 불길한 기운이 그대로 폭발했다.

쿠구구구!

거미줄처럼 갈라졌던 금이 터지며 성벽이 중간부터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끄으으윽!”

벽 위에 있던 30명 정도의 병사와 검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몬스터들의 살점으로 가득한 땅에 떨어졌다.

“아아아아악!”

“내, 내 다리! 내 다리가!”

“흐으윽!”

“사, 살려줘! 팔이 꼈어! 몸이 안 움직여!”

무너진 성벽에 깔리거나 착지를 제대로 못 한 병사들이 피에 젖은 비명을 터트렸다.

“큭!”

“내려가지 마라!”

라온이 움직이려 할 때 밀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성벽을 사수해라! 작은 것을 보다간 큰 게 무너진다!”

그는 아래로 떨어진 병사들을 보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일개 검사나 병사가 아닌, 사령관으로서의 선택이었다.

맞는 말이다. 저들을 보호하다간 반만 무너진 성벽이 완전히 깨져나갈 테니까.

‘하지만 나는….’

라온은 이를 드러내는 몬스터들을 보고, 검을 고쳐잡았다.

저들 모두는 함께 임무에 나간 적 있는 전우들이었고, 직접 자세를 봐주었던 동료들이었다.

지나가듯이 들었던 그들의 사연이, 우렁차게 외쳤던 그들의 목표가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는 지휘관이 아니야.’

밀랜드가 원한 건 병사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살리라는 지시. 라온은 먼저 내려온 임무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라온!”

“라온 님!”

등을 후려치는 듯한 밀랜드와 도리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쇳소리를 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다 방법이 있어.’

라온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수천 개의 광기를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내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되네.’

-…진짜 미친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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