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하분 성 사령부.
사령관 밀랜드 앞에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차려자세로 서 있었다.
“이번에도 없었나?”
“예! 스터린 산부터 북해 인근을 두 번 왕복했지만, 산이나 숲으로 올라오는 해양 몬스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르티가 시선을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샤크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군.”
밀랜드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라온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잡고 돌아온 이후 일주일마다 정찰대를 보내 상황을 살폈지만, 특별한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수고했다. 돌아가서….”
휴식을 지시하려고 할 때 병사 연무장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기합 소리 한번 좋군요.”
바르티가 창밖을 흘낏 보면서 빙긋 웃었다.
“좋기는.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시끄럽다는 말과 달리 밀랜드의 입가에는 기꺼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자네도 가보았나?”
“예. 자주 갑니다.”
“잘 가르치는 모양이군.”
“라온이 자세를 봐줄 때마다 실력이 늘어나는 게 확실히 느껴집니다. 병사들이 괜히 가는 게 아니더군요. 오늘 복귀하자마자, 연무장에 간 녀석도 있을 정도입니다.”
“나 참.”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별난 짓을 한다니까.’
라온은 언젠가부터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병사들에게 훈련법을 알려주거나, 검술과 창술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특별한 기술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는 기본 무학을 손봐줬을 뿐인데, 그게 굉장한 효과가 있어서 지금은 많은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전투와 임무의 반복에 지쳐 텅텅 비어 있던 연무장에 활기가 도는 모습을 보자, 몸과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뭐랄까. 라온은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을 바꾸는 힘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 밝은 친구가 아닌데도, 그가 온 이후로 하분 성이 활기차진 느낌입니다.”
“그런가.”
밀랜드가 두 눈을 빛냈다.
‘왕의 자질.’
이런 냉혹한 전장에서 1달 만에 사람들을 휘어잡는 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상대로 라온은 위에 설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저도 약간 몸이 찌뿌둥하니, 수련에 참여 좀 해야겠습니다.”
“아, 잠깐.”
바르티가 어깨를 돌리며 나가려고 할 때 밀랜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 ‘웨이브’ 기간이 온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입매가 올라가 있던 바르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신병들에게도 확실하게 전하도록 해.”
밀랜드의 시선이 회색 안개에 가려진 스터린 산을 향했다.
“하분 성이 지옥의 전장으로 불리는 이유가 곧 찾아올 거라고.”
* * *
1달 전만 해도 찬 바람만 불었던 병사 연무장은 몸을 단련하는 정찰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변화는 전부 한 사람 때문이다.
라온.
홀로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죽일 정도로 강한 그가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른 정찰병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단련을 시작했다.
라온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단련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지금 연무장은 병사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와! 진짜네. 무릎을 살짝 굽히니까. 검술이 훨씬 편해졌어.”
“어떻게 저렇게 잘 아시는 거지?”
“신안(神眼)이야. 신안! 자세를 딱 보면 뭐가 모자라는지 보이시나 봐.”
“난 보지도 않고 문제점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딱 맞더라. 무서울 정도야.”
정찰병들은 오늘은 무얼 배웠고, 자신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떠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쯧, 시끄럽도다.
라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 찼다.
-조용해서 편했는데, 저것들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니라.
‘네 수다만 하겠어?’
라온은 연성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낸 뒤 피식 웃었다.
-본왕의 경험담은 금괴의 산을 주어도 들을 수 없는 마계의 보배이니라. 들을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영광은 모르겠고, 마계가 점점 친숙해지긴 해.’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본왕이 마계에서’라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이젠 마계가 고향 같아졌다.
-본왕은 네놈이 이해되지 않는다.
‘뭐가?’
-왜 저런 인간들을 신경 쓰는 거냐. 어차피 1년만 지나면 마주칠 일도 없는 것들인데.
‘딱히 신경 쓰지 않았어.’
-하나하나 자세를 봐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 사람들의 자세를 봐주는 것도 내 수련의 일환이야.’
-수련이 된다고? 저런 허술한 움직임들이?
‘그래.’
라온이 빙긋 미소 지었다.
‘아주 확실하게 도움이 되고 있지.’
정찰병들의 움직임은 눈이 아니라, 글래시아를 통해서 보고 있다.
많은 사람의 움직임을 감각의 바다로 파악하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는 빗물을 받아들이듯 넓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이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진의를 파인애플 피자에 넘긴 마계의 군주 덕분이었다.
‘다른 이유도 하나 있고.’
라온이 뒤를 돌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육체를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눈빛은 자신의 전생과 닮았다.
살아남고 싶고, 강해지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때가 생각나서 저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게 무엇이냐.
‘비밀인데.’
-말을 하다가 마는 건 마계의 죄악 중 하나이니라. 네놈의 육체를 얻자마자 그 영혼을 빙하 속에 가둬버릴 것이니라!
‘할 수 있다면 해.’
라온은 라스의 저주를 무시하고 뒤에 있는 정찰병을 보았다. 접힌 어깨 때문에 검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를 조금만 펴면 좋을 겁니다.”
“어깨요? 알겠습니다!”
그는 신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바로 어깨를 폈다. 움직임이 달라지는 만큼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어이!”
그 옆의 병사를 봐주려고 할 때 연무장 외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지! 더 빨리 뛰어!”
도리안은 아직도 말단 정찰병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설격대 검사들을 데리고 연무장을 돌고 있었다. 저들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는 없으니, 저렇게 체력 단련만 시키는 것이다.
‘힘이랑 다리 하나는 좋은 녀석이니까.’
수련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매일 달려왔기 때문에 도리안의 체력은 웬만한 검사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누가 오러 쓰는 소리를 내었는가?”
뒤를 돈 도리안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녀석은 리메르에게 배웠던 대로 오러 사용을 금지하고, 육체와 체력으로만 달리도록 설격대를 갈구었다.
‘잘 뛰네.’
라온은 도리안의 바로 뒤에서 달리는 설격대주 에드퀼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사령관이 무섭긴 무서운지 눈빛에 불평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지시는 제대로 듣고 있었다.
“자, 그만!”
도리안이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전력으로 뛰었기 때문에 검사들의 얼굴에는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은 수색 연습이다. 엎드려!”
“끄윽!”
“제, 젠장….”
“이게 제일 싫어….”
설격대 검사들은 코가 땅에 닿을 것처럼 네 발로 엎드렸다.
“이제 그 상태로 연무장을 돈다. 바닥의 흔적을 살피는 연습이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끄응….”
“후욱….”
설격대 검사들은 거북이처럼 기어서 연무장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놀리는 것 같지만, 저건 정찰병들이 하는 수색 훈련 중 하나였다.
-근데 왜 저 녀석이 정찰병 교육을 하는 것이냐. 정찰도 제대로 모르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그러네….’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보니 도리안이 저들의 교육 담당이 되어 있었다. 재밌는 건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니, 당연한 건가.’
저들이 지금 정찰병 신분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검사들이다. 평범한 정찰병들이 교육하기엔 부담스러우니, 도리안이 딱 제격이긴 했다.
“후후.”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좋아 보인다?”
“좋긴요. 귀찮아 죽겠습니다.”
말과 달리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처음에 하분 성에 왔을 때는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지만, 지금은 포동하니 살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예상한 것보다 편하긴 하네요. 전 정말 숨도 못 쉬고 싸울 줄만 알았거든요.”
도리안이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중얼거렸다.
“음? 너 몰라?”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예? 뭘요?”
“여기가 지옥의 전장 혹은 전장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는 일 년에 두 번 발생하는 웨이브 때문이야.”
“웨…이브?”
“스터린 산과 숲에 있던 육지 몬스터와 북해에서 올라온 해양 몬스터가 끝없이 몰려오는 현상이지.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아, 알면 알수록 무서우니까. 알아보지도 않았죠! 모르는 게 약이잖아요!”
도리안이 물에 젖은 개처럼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웨이브라니, 그게 뭐야! 무서워!”
“곧 그 징조가 있을 거다. 시작되면 3일에서 5일 정도는 잠도 못 잔다고 보면 돼.”
“싸우느라 잠도 못 잔다구요?”
“응.”
“으어어억!”
손톱을 물어뜯는 녀석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괜찮아. 배웠던 대로만 움직이면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겠죠? 그럴 수 있…지 않아요!”
도리안은 악 소리를 지르고 정찰병들에게 달려가 웨이브에 대해 물었다. 자신과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녀석의 표정이 점차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끝났어! 내 인생은 끝이야!”
이젠 머리를 부여잡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네 1호 부하 참 재밌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멍하니 떠 있는 라스를 툭 쳤다.
-…본왕이 모르는 놈이니라.
* * *
“미친놈! 그래서 그냥 보내줬다는 것이냐?”
푸른 로브를 입은 사내가 이를 드러냈다.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에서 서늘한 한기가 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한 번 더 습격하는 건 악수였으니까.”
검은 로브의 사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계획, 그놈의 수! 네놈은 머리를 너무 많이 굴린다!”
“무지성으로 들이박는 네놈보다야 낫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몬스터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야성적인 투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다음은 뭘 어쩔 건데. 밀랜드를 끌어낸다는 계획은 깨진 거나 다름없잖아!”
“괜찮다. 새로운 계획을 짰으니까.”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계획?”
“곧 시작될 웨이브. 그 안에 너와 내 힘을 조금 섞는다.”
“섞는다고?”
“그래. 넌 웨이브에 더 많은 해양 몬스터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써라.”
“네놈은 뭘 하려고?”
“나는 벽을 무너뜨릴 것을 준비하겠다.”
그가 로브를 들쳤다. 길쭉한 검은 털이 나 있는 해골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살아 있는 듯 빈 안구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붐 스컬?”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그 정도 성벽은 확실하게 부술 수 있다.”
“성벽에 다가가기 전에 밀랜드에게 찢길 것이다.”
“괜찮아.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게 개조했으니까. 마스터라고 해도 발견할 수 없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자신 있는 손짓으로 붐 스컬을 쓰다듬었다.
“그 이후에는? 벽을 부숴도 하분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밀랜드와 간부들을 끌어낼 계획은 그 이후부터 시작되니까. 벽이 무너지게 되면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다.”
“후, 이번이 마지막이다.”
푸른 로브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너와 내가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해도 그 과정마저 같을 필요는 없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나는 내 나름대로 움직이겠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손에 든 녹색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하분 성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카드를 꺼낼 테니까.”
* * *
어둠이 지워지지 않은 새벽 연무장.
라온이 검을 내리쳤다. 열기가 깃든 검풍에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리고, 찬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발을 구르고 검날을 추켜올린다. 강대한 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움직임. 그는 이미지로 만든 적과 생사를 다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후우우욱.
라온의 입에서 냉기가 뿜어진다. 눈빛이 얼어붙고, 칼날의 열기가 차게 식었다.
푸르게 번들거리는 칼날이 짐승의 어금니처럼 사납게 쏘아진다. 불길에 녹아내렸던 땅이 바위처럼 굳고, 허공에 서리의 꽃이 피어났다.
은빛 칼날 위에서 춤을 추던 얼음꽃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치이잉!
서리의 꽃잎은 하나하나가 냉기와 예기를 담은 칼날이 되어 라온이 이미지로 그린 적을 찢어발긴 후에야 이슬처럼 녹아내렸다.
“후우.”
라온이 냉기를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으음….
라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왜?’
-이상하리만큼 성장이 빠르구나.
‘…….’
리온이 벙찐 얼굴로 라스를 보았다. 지가 이미지를 연습하라고 알려줘 놓고 저런 반응이라니, 파인애플 피자의 맛만 빼고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야!”
라스의 반응에 어처구니없어할 때 연무장 외곽에 서 있던 도리안이 다가왔다.
“이젠 얼음꽃도 여섯 송이가 피어나네요. 볼 때마다 달라지니, 정신을 못 차리겠네.”
도리안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강해지냐며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내 예상보다 성장세가 빠르긴 해.’
라스의 조언과 임무에서 얻었던 경험을 조화시키니, 글래시아와 광아검의 성장이 눈부셨다. 예측을 벗어난 성장 속도에 자신도 당황할 정도였다.
“너도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하면 빨리 강해질 수 있어.”
“새벽부터 밤…. 도련님은 16살이 되셔도 변하질 않으시네요.”
“달라질 이유가 없지.”
집을 떠났다고 해도, 16살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해 수련하는 것뿐이다.
“너도 훈련하고 온 거야?”
“훈련까지는 아니고, 성을 좀 돌고 왔습니다.”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설격대 애들 데리고 간 거냐?”
“예. 일과죠. 일과.”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아쉽겠네?”
“그러게요. 하….”
설격대가 정찰병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도리안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다른 후배들이 있어서 괜찮아요.”
도리안은 본인을 정찰대의 호위가 아니라, 정찰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엔 죽겠다고 하더니, 제대로 적응했다.
“이제 적응 좀 됐나 보네.”
“도련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뭐, 그렇지.”
그의 말대로 정찰이나, 임무에서 동고동락하고, 훈련장에서 매일같이 보니, 정찰병들에게 나름 정이 든 상태였다.
“그놈의 웨이브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헉! 내 입으로 그 불길한 단어를 꺼내다니! 젠장!”
도리안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예에.”
힘이 축 빠진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의 가지로 가자. 병사 식당 음식은 정말이지 최악이니라.
라스가 제발 서리의 가지에 가자며 냉기로 만든 손을 흔들었다.
‘병사 식당도 괜찮지 않아? 난 맛있는데?’
-그 딱딱한 빵 쪼가리와 스프가 맛있다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네놈의 혀는 정상이 아니다. 혀에 가야 할 능력치가 전부 정신력으로 간 게 분명 하느니라.
‘그럴지도.’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전생의 어린 시절엔 임무를 마쳐야만 빵 한 조각을 받았다. 끼니마다 밥을 챙겨주는 이곳은 천국이나 다를 바 없다.
다만 민트초코와 파인애플 피자에 정신이 나간 놈에게 듣고 싶진 않은 말이었다.
‘오랜만에 한 번 가볼까.’
-저, 정말이냐?
‘그래. 가끔은 네 말도 들어줘야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라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검술과 오러, 냉기가 모두 성장한 기분으로 간만에 라스의 혀를 만족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도리안. 오늘 아침은 서리의 가지로 가자. 내가 살게.”
“예? 웬일이세요?”
“가끔은 특식을 먹어줘야지.”
“오! 알겠습니다!”
기분이 풀린 도리안과 함께 서리의 가지로 들어갔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테이블은 한자리 빼고 전부 차 있었다.
“오! 교관님!”
“교관님! 인사 박습니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유아야! 교관님 식사는 내 앞으로 달아놔!”
아침 식사를 하던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교관 아니라니까요.”
“저희 자세를 매일 봐주시는데, 교관님이죠!”
“예!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됐으니, 식사하세요.”
라온이 손을 젓고서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요즘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관이라고 부르고, 인사를 해와서 귀찮을 지경이다.
“오늘 정말 잘 오셨어요!”
유아가 양갈래 머리를 살랑이며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신메뉴가 나왔거든요! 한 번 맛봐주시겠어요?”
유아는 방긋 웃으며 메뉴판에 새로 추가된 부분을 가리켰다.
“애플 미트 파이?”
“네! 간 사과를 넣어서 만든 촉촉하고, 달달한 고기파이에요!”
“음….”
안 끌리는데.
고기면 고기. 과일이면 과일이 좋다. 섞는 건 딱히 선호하지 않았다.
-먹어라! 골라라! 선택해라!
라스의 냉기가 불기둥처럼 치솟았다.
-본왕은 애플 미트 파이가 끌리느니라!
녀석의 목소리에 군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 그 파이 하나 주고, 도리안 너는?”
“전 모험을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평범하게 정찰병 정식에 파인애플 쿠키 추가!”
“네!”
녀석은 배 주머니에서 파인애플 하나를 꺼냈다. 유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인애플을 챙겼다.
-파인애플 쿠키를 추가해라! 본왕도 그 쫀득함을 느끼고 싶다!
“하아, 나도 파인애플 쿠키.”
“네에!”
유아는 상큼하게 웃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너 대체 파인애플이 몇 개나 있는 거냐?”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녀석은 아쉽다는 듯 배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 좀 무서웠다.
-철저한 준비성. 역시 본왕의 1호 부하답구나. 음식 재료를 철저하게 챙기라 지시해라.
‘얼마 전에는 모르는 놈이라며.’
-…….
라스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과 잡담을 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아가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오, 냄새 좋네.”
“냄새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아요. 드셔보세요!”
유아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라온이 옅게 웃고서 나이프를 들었다. 파이를 자르자, 사과의 새콤함과 고기의 짙은 육향이 조화롭게 퍼져 나왔다. 혀에 침이 절로 고였다.
-빠, 빨리! 빨리 먹어라.
‘보채지 좀 마.’
파이를 덜어서 먹으려고 할 때 식당 밖이 분주해졌다.
쾅!
곧 문이 열리고, 얼굴이 빨개진 라딘이 들어왔다. 급한 일이 있는지 눈빛이 다급했다.
“라온! 여기 있었구나!”
그가 찾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사령관님의 호출이다!”
“이 시간에요?”
“급한 일이니까.”
그의 말을 듣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웨이브의 징조가 일어났다.”
“웨이브….”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웨이브? 웨이브. 웨이브!”
도리안은 웨이브를 세 번 외치고 목각인형처럼 굳었다.
“웨, 웨이브라고?”
“시발….”
“후, 올 때가 되긴 했지.”
병사들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불안한 듯 포크를 내려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유아야. 신메뉴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걱정하지 말고 있어.”
“아, 네.”
라온은 불안해하는 유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라딘을 따라 식당을 나갔다.
-자, 잠깐! 어딜 가는 것이냐!
라스는 고무줄처럼 몸을 늘려서 파이 그릇에 꼭 달라붙었다.
-웨이브가 뭐든 본왕이 전부 해결해주겠노라! 한 입. 딱 한 입만 먹고 가라! 라온!
냉기로 만든 손으로 파이 그릇을 잡으려고 했지만, 당연히 잡히지 않았다. 그는 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라온에게 끌려갔다.
-본왕은 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냐! 왜!
“웨이브으으으!”
서리의 가지는 파이를 먹지 못한 마왕과 겁쟁이의 절규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