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27화 (127/653)

127화

“자, 이게 뭐라고?”

도리안이 바닥에 찍힌 사람 팔뚝만 한 발자국을 가리켰다.

“오, 오크.”

“오크 발자국….”

설격대 검사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오오오크? 오오오오오크?”

“끄윽, 오크입니다!”

“그렇지.”

그는 존댓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그럼 이건 뭐야.”

이번에는 나무에 새겨진 손톱자국을 가리켰다.

“이, 이건 베어울….”

“모르지? 이건 베어울프가 영역표시를 한 흔적이야. 어? 이런 걸 다 알고 있어야 훌륭한 정찰병이 될 수 있다고!”

도리안은 정답을 말하려던 설격대 검사들의 입을 막고, 강의하듯 떠들어댔다. 얼마 전에 배웠던 정보들을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끄윽….”

“으익!”

“제, 젠….”

설격대 검사들은 하늘을 올려보거나, 주먹을 말아쥐거나, 입술을 씹으면서 분노를 참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그중에는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한 설격대주 에드퀼도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라온의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살다 살다 저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테리안은 통나무를 든 채 도리안을 졸졸 따라다니는 설격대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사령관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이 테리안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자네 말대로 전우를 짐꾼 취급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저 녀석들도 알아야 해. 정찰병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3개월 정도면 저놈들도 그걸 배울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좋은 생각이었다고 칭찬을 하고 싶군.”

테리안은 진심이라는 듯 손을 보이며 빙긋 웃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자네. 그 단검으로 덫을 만든 건가?”

그의 눈빛이 허리에 찬 진혼검으로 향했다. 저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숨길 필요는 없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

테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군.’

예상했던 대로 라온의 강한 무력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이 어린 검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자네는 크게 될 인간이야.”

“저도 동감합니다.”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제가 이렇게 보여도 나름 나이가 있거든요.”

그는 젊어 보이는 얼굴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라온 님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뭐랄까? 무력이 강하고, 생각도 깊은데, 감정은 옅다고 해야 하나?”

“옅다?”

“아, 칭찬입니다. 순수한 면이 있다는 거니까.”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감춰야 하나? 아니야.’

너무 드러냈나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니다. 암살자가 아닌, 검사 라온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이 정도는 드러내도 상관없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자네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것 같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테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라온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하하, 저도 좀.”

두 사람의 손 위로 베토의 길쭉한 손이 올라왔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희 용병단에도 들려주세요.”

아직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이쪽에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손님으로든 혹은 영입대상으로든.

“벌써 영업인가?”

“이런 인재는 보자마자 점을 찍어놔야 하거든요. 솔직히 바로 끌어들이고 싶지만, 그건 무리일 거 같고. 나름 전우이니, 생판 남보다는 낫겠죠.”

“나 참.”

베토가 씩 웃었고, 테리안이 비슷한 미소를 그렸다.

“뭐? 트로오오올?”

라온은 도리안의 호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건 카리 산양의 발자국이잖아! 이것도 몰라? 너희 진짜 안 되겠다. 통나무 하나 추가!”

녀석은 콧등을 좁히며 배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정도를 모르는 놈이로다. 본왕의 1호 부하다운 놈이야.

라스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어딜 가든 평범한 놈이 없어.’

라온은 정말 통나무 하나를 더 꺼내는 도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와아아아!”

하분 성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이 폭발했다. 대로를 둘러싼 병사들과 주민들의 목소리였다.

“전원 무사 귀환이래!”

“하분 성 역사상 처음 아니야?”

“이번 출정대는 전부 실력이 출중했나 보네!”

주민들은 개선장군처럼 들어오는 병사들을 보며 다시 한번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이다!”

“후우, 오랜만에 봐도 크네. 진짜 괴물이라니까.”

“근데 저걸 한 명이 다 잡았다며?”

“나도 들었어. 그 울브스하고 대련을 했던 어린 검사가 둘 모두를 잡았다고.”

“저기 있다! 특별한 기세도 없는데, 어떻게 그리 강하지?”

“소문이 과장된 거 아니야?”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루 먼저 들어간 정찰대 때문에 병사들과 주민들의 시선은 전부 라온에게 쏠렸다.

감탄, 탐색, 경외 혹은 의심의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라온은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제 정말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겠네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와서 히죽 웃었다. 설격대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는지 씻지도 않은 녀석의 얼굴에 광채가 흘렀다.

“즐겁나 보네.”

“즐겁죠! 후배가 바로 들어왔는데! 원래 단체 생활에서는 밑에 후배가 몇 명이나 있느냐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거든요. 전 지금 천국입니다. 천국!”

싸움도 끝났고, 잡일 시킬 녀석들도 많다 보니 도리안의 걸음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퍼레이드 하듯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의 머리를 앞세우고 지휘부에 도착했을 때 밀랜드의 부관 찰스가 나와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이 바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자신과 테리안, 에드퀼 그리고 라딘까지 모두를 불렀다.

“전 버려진 건가요?”

“아, 그….”

“농담입니다. 농담!”

베토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주점을 향해 걸어갔다. 용병들은 오히려 좋아하며 그 뒤를 쫓았다.

“따라오시죠.”

라온은 찰스의 뒤를 따라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오래된 나무의 향이 흐르는 흑색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사령관 밀랜드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사망자 없이 엘리트 몬스터를 잡고 왔는데도, 밀랜드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뻔했다. 예상대로 그는 살벌한 시선으로 설격대주 에드퀼을 노려보았다.

“에드퀼.”

“예….”

“내가 널 너무 편하게 대해주었나 보군.”

밀랜드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공기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의 압박이 피어났다.

“끄흡!”

그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는 에드퀼은 숨을 쉬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매번 회의 때마다 정찰병들을 잘 챙겨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모든 회의에 참여한 네가 이런 식으로 날 엿 먹여?”

사령관답지 않은 상스러운 말이었지만, 그에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에드퀼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용서?”

“예! 한 번만 봐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용서 좋지. 다만 대가는 치르고.”

조금 누그러진 듯한 밀랜드의 목소리에 에드퀼이 고개를 들었다. 다만 기대를 담은 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부사령관의 공증하에 치러진 내기이니, 나도 함부로 그 약속을 깰 수는 없다. 그리고 난 그 방법이 꽤 괜찮아 보여. 정찰병이 어떻게 생활하고, 일하는지를 알면 너희들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

“사, 사령관님….”

“오늘부터 너희는 정찰병 소속이다. 약속은 3개월이었지만, 난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다. 3개월 후 너희들의 태도를 보고, 이 징계를 풀어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그만 가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에드퀼은 혼이 반쯤 빠져나간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죽은 자의 숲에 나오는 좀비 같았다.

“라딘.”

“예.”

“나를 그렇게 못 믿는 게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잡일을 떠맡는 걸 말하지 않았지?”

밀랜드의 분위기는 여전히 사나웠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라딘도 징계를 받을 것 같았다.

“임무나, 토벌에 나갈 때 검사들과 부딪치는 건 병사들입니다. 전 괜찮지만, 제 아래 있는 녀석들에게 보복이 들어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오러 사용자의 공격에 맞으면 저희는 한참 앓아누워야 하니까요.”

라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부하들을 생각한 마음이 진짜인 듯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멍청한 녀석.”

밀랜드가 혀를 쯧쯧 찼다.

“내가 이곳을 운영하며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었을 것 같으냐. 몰래 와서 말해주었다면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저 녀석과 같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패서 안 되는 일은 없어. 만약에 주먹으로 일이 해결 안 된다면 그건 덜 팬 거다.”

“예에?”

“아, 아버지?”

테리안과 라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쨌든 네 녀석도 징계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근신이야.”

“내일부터요? 오늘은….”

“사상자 없이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잡고 돌아왔는데, 바로 징계를 줄 수는 없지. 오늘은 먹고, 놀아라.”

“아, 감사합니다.”

라딘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사령관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밀랜드의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언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듯 밀랜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솔직히 어울리지는 않았다. 단단한 차돌이 웃는 느낌이지만, 그가 부하를 아끼는 따스함은 그대로 전해졌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가 돌아온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정말 고생했어.”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1년을 버티는 게 네 졸업시험이라고 했었나?”

“예.”

“이번 일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지그하르트에 전해주마. 보수도 확실하게 챙겨놓을 테니, 나중에 찾아가도록.”

“감사합니다.”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밀랜드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럴 때는 어린애 같군.”

그는 끌끌 웃고서 손을 저었다.

“돌아가라. 너도 오늘을 즐겨야지. 늦게 갔다간 자리 없을 거다.”

“예.”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고, 밀랜드는 멍하니 서 있는 테리안을 손으로 불렀다.

“어땠느냐?”

“예?”

“저 아이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떤 녀석이지?”

“볼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볼 수 없다?”

“제가 감히 판단할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두드려야 할 쇳덩이일 줄 알았는데, 이미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칼날이었습니다.”

“후후, 내가 말했잖느냐. 저 녀석은 다르다고.”

밀랜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도 선합니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힘을 드러내지도 않더군요. 지그하르트에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신기하게 잘 어울립니다.”

“라온에게 선을 댈 수 있다면 대어놓아라.”

“예?”

“언젠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 수도 있는 아이니까.”

“그, 그 정도입니까?”

“저 녀석….”

밀랜드가 창으로 라온을 내려다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같은 나이의 북패왕보다도 강하다. 나도 처음 보는 괴물이야.”

*     *      *

모두 주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라온도 바로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라온 님! 여기요!”

얼굴이 빨개진 도리안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어? 주인공이다!”

“우리 정찰대의 자랑!”

“라온! 라온! 라온!”

정찰대 사람들은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치며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우와아아아!”

“검귀! 검귀!”

“우리도 있다고!”

용병들도 같은 행동을 취하며 환호를 터트렸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도리안의 옆에 앉았다. 북해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저들과 나름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게 그리 싫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쏜다! 유아야! 있는 술이랑 음식 다 가져와!”

“뭔 소리야! 내가 낼 거야!”

“아니, 우리 3번 정찰대가 지른다!”

이젠 정찰대와 용병들이 서로 돈을 내겠다고 싸우기 시작했다. 한 명도 죽지 않고 돌아온 것에 모두 흥이 돋은 것이다.

“에헴!”

주문한 음식과 술을 서빙 한 유아가 가운데에 주점 가운데에 서서 귀엽게 헛기침했다.

“출정대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제가 오랜만에 한 곡 불러볼게요!”

유아는 작은 손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오오오오!”

“정말?”

“이거 얼마 만에 듣는 유아 노래야!”

“검귀 때문에 이런 기회를 다 얻네!”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몸을 돌려서 유아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아부 같지 않았다.

“자, 그럼.”

유아는 양갈래 머리를 파닥이며 눈을 감았다.

“푸른 파도가 쓸어내리는 얼음 숲의….”

양손을 꼭 모은 채 노래를 시작하자, 순간 주점이 고요해졌다.

“밤을 노니는 요정은 낮을 그리워하고….”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울린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재능 자체의 격이 달랐다.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서 이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기교가 좋다든가, 음색이 맑다든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목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잘하는군. 특별한 재능이 있느니라.

‘파인애플 줬다고 좋게 보는 거야?’

-본왕은 재능을 보는 데에 있어서 냉정하다. 저건 이미 마법과 비슷한 단계다. 가슴이 울렁이지 않았더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에게 노래를 시킨다면 분명 크게 될 것이니라. 이곳에서 음식을 나르기엔 아까운 아이야. 본왕의 직속 가수이자 셰프로 임명….

‘또 시작이네.’

라온은 라스의 주절거림을 무시하고 유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녀석의 말대로 그녀의 노래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마주해본다!”

“우와아아아아!”

“유아! 유아!”

유아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호로 주점이 들썩였다. 용병과 정찰병들은 너 때문에 유아의 노래를 들었다고 감동하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주점 안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고, 병사들과 용병들은 뒤섞여서 웃고 떠들며 출정에서 있었던 기억을 풀어냈다.

‘그래. 이거였어.’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를 바탕으로 동료애가 생기는 이 모습이 하분 성에 오며 기대했던 장면이다. 조금 거칠지만, 따스한 감정이 심장을 두드렸다.

‘아직도 세상엔 배울 게 많아.’

라온 즐거워하는 모두를 보며 옅게 웃었다.

*     *      *

지그하르트 별관이 내려다보이는 북망산 중턱의 나무 위.

작은 새나 앉을 법한 얇은 나뭇가지 위에 글렌 지그하르트가 서 있었다.

그의 붉은 시선에 별관 앞에 놓아둔 고급 소고기를 살피는 실비아가 잡혔다.

“쩝, 직접 주면 더 좋아할 텐데.”

바로 아래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리메르가 입맛을 다셨다.

“난 저 아이가 소고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글렌은 문을 닫고 들어가는 실비아를 끝까지 눈에 담으며 입을 뗐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아비가 아니라, 그저 방관자였으니까.”

“…….”

“그런 방관자에겐 저 아이 옆에 다가갈 자격이 없다.”

“가주님이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했다. 강해지길 원했고, 그에 따른 결과였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실비아의 모습은 태어났을 때와 이곳으로 도망 왔을 때밖에 없다.”

글렌의 목소리는 늦게 피어 홀로 찬바람을 맞는 꽃처럼 쓸쓸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 시간을 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리메르.”

“예?”

“이곳에서 자루에 든 깃털들을 뿌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날아가겠죠.”

“그래. 사방팔방으로 퍼져서 잡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한 말과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벌인 건 주워 담을 수 없다.”

“음, 아닌데?”

리메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보세요.”

그가 주머니에 있던 마권을 갈기갈기 찢은 뒤 허공에 뿌렸다. 찬바람을 타고 종이가 흩어졌다.

“자, 지금!”

리메르는 손을 갈퀴처럼 휘둘렀다. 녹색 바람이 일어나며 흩날리던 마권 조각이 모두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되는데요?”

그는 씩 웃으며 손에 있는 마권을 내밀었다.

“…네놈이랑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글렌이 이를 바득 갈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어? 가주님. 삐지신 거예요?”

“닥쳐라.”

“그냥 장난이죠!”

“오지 마.”

“하하하! 요즘 귀가 자주 가렵던데 혹시 제 욕을 하고 다니시는 건 아니죠?”

“네 이름은 입에도 담고 싶지 않다.”

글렌과 리메르가 투닥거리며 가주전으로 걸어갈 때 차디찬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스쳤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보니, 곧 시작되겠네요.”

“그래. 웨이브가 시작되면 그 아이도 왜 하분 성을 지옥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겠지.”

“어? 대답하셨네요?”

“쯧.”

글렌이 혀를 차고 다시 등을 돌렸다.

“라온이 하분 성에서 활약 좀 했다던데, 저도 좀 알려주시죠.”

“난 모른다.”

“에이, 모르긴요. 2주마다 정기보고 들어오잖아요! 손자 걱정에 밤잠도 못 이루시는 분이…어?”

“후우우우.”

글렌의 손아귀에서 노란 스파크가 튀겼다.

“가, 가주님?”

“한동안 그 주둥이를 열 수 없게 해 주마.”

“잠깐! 그거 떨어지면 저 죽어요!”

“그래. 죽어라.”

그날 북망산 중앙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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