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어젯밤. 하분 성 사령부.
밀랜드와 테리안, 전략 장교들이 원형 테이블 앞에 모여 있었다.
“2번 정찰대가 4번 땅굴 근처에서 아이스 트롤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숫자는 열셋. 더 모여들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사령관 테리안이 지도에서 스터린 산 아래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4번 땅굴이면 5번과 그리 멀지 않군.”
“예. 트롤을 제거하는 김에 스터린 산 부근에 다른 해양 몬스터가 올라왔는지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흠, 트롤도 트롤이지만, 샤크몰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지.”
지도를 보고 있던 밀랜드의 시선이 라딘이 놓고 갔던 샤크몰의 지느러미로 향했다.
“범상치 않은 일이니, 부사령관이 직접 움직이는 게 좋겠군.”
“명을 받들겠습니다.”
테리안은 예상하던 것처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격대와 울브스 용병단을 데리고 가라. 트롤을 제거하고, 북해 주변까지 조사하고 돌아오도록. 그리고 정찰대는….”
“2번과 3번을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3번?”
“예!”
밀랜드가 살짝 의문을 표했지만, 테리안은 바꿀 생각이 없는지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좋다. 출정은 이틀 뒤 새벽이다. 그렇게 알고 모두 준비하도록.”
“예!”
전략 장교들은 상세 계획을 짜겠다며 떠났고, 지휘관 실에는 두 부자만이 남았다.
“2번대는 트롤을 목격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3번대를 왜 골랐지? 4번과 5번은 아예 나가지도 않았는데?”
“라온의 대련을 보았을 때 느낀 게 있습니다.”
“느낀 것?”
“예. 라온의 무력이 경악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육황과 오마의 어린 재능들을 뒤지다 보면 비슷한 수준이 없진 않을 겁니다.”
동의하는지 밀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아이에겐 무력 이상의 기백이 있습니다. 상대를 꺾어버리겠다는 사나운 기파에 제가 압도될 정도였습니다. 그 거친 울브스 용병단도 패배를 인정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군요.”
“결국 그 기백이 진짜인지를 보고 싶다는 거로군.”
“뭐, 그렇게 되겠죠.”
“좋다. 본인도 싸움을 원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밀랜드가 지도를 툭툭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도록 해라.”
“예!”
“다만….”
지도를 접고 일어서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조심하거라. 변화가 일어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테리안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 * *
라온은 짐을 챙기라는 라딘의 지시를 듣고 숙소로 돌아왔다.
“도, 도련님. 이거 좀 빠르지 않아요?”
도리안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발발 떨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긴 하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확실히 빨라.’
정찰에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정찰대를 바로 출정에 내보내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
샤크몰을 홀로 처리하고, 울브스 용병단을 털어버린 실력을 제대로 보여달라는 의미와 이곳의 실전을 겪어보라는 두 가지 의미 같았다.
“망했어, 진짜 위험해….”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사람 크기만 한 쿠션을 껴안고 매트 위를 뒹굴었다. 참 별걸 다 가지고 다닌다.
“이 정도면 되겠지.”
라온은 출정에 필요한 짐을 배낭에 넣은 뒤 침대 아래에 두었다.
“도련님. 아이스 트롤한테는 칼도 안 들어간다는데 진짜일까요?”
“진짜야.”
아이스 트롤은 추운 지방에서 사는 몬스터답게 가죽이 질기고, 두껍다. 날카로운 검에 오러를 가득 둘러야만 간신히 벨 수 있다.
“그렇다고 재생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까다롭지.”
트롤 특유의 재생력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근력이나 민첩성에 지능까지 뛰어나기 때문에 아이스 트롤을 상대하는 건 숙련된 검사와 기사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넌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예? 제가요?”
도리안이 껴안고 있던 전신 쿠션을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네 장점인 발을 사용해서 빈틈을 노리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배운 대로만 해.”
“도련님이 그러시니까 용기가 나…지 않네요.”
녀석은 무섭다고 중얼거리며 두더지처럼 매트 밑으로 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럼 방법이 하나 있다.”
“방법?”
“그래. 네가 아이스 트롤 앞에 서도 조금도 무섭지 않을 방법이.”
“알려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도리안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라온을 마주 보았다.
“광아검을 사용하는 나와 대련하면 아이스 트롤은 그깟 몬스터가 될 거야. 가자.”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아….”
도리안의 눈동자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탁 풀렸다. 이마 위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도리안?”
“어우, 잠깐 상상 좀 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갑자기 트롤이 좁밥으로 보이는데요?”
녀석은 신기하다며 하하하 웃더니, 그대로 침대에 푹 쓰러졌다.
-미친놈이로고.
라스는 저런 놈은 마계에도 없다며 혀를 쯧쯧 찼다.
라온은 피식 웃고서 침대 위에 앉았다. 시끄러운 녀석이 조용해졌으니, 수련할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외부와 조화를 시켰던 혹한의 냉기를 끌어 올렸다.
‘이미지라고 했지.’
라스는 이미지만 있다면 글래시아를 어떤 방법으로도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부 비슷하네.’
리메르가 만화공의 습득을 도와줄 때도, 글렌이 태화보를 보여줄 때도 매번 이미지를 중요시했다. 아무래도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심상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 같다.
후우우우.
폐가 조여들 정도로 천천히 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상하는 건 옷. 내부와 외부의 냉기를 모조리 막아낼 수 있는 서리의 옷을 그려보았다.
무겁지만 완벽한 방어를 할 수 있는 철제 갑옷, 가볍지만 든든한 가죽 갑옷, 바람와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로브까지. 많은 옷을 생각해 보았지만, 모든 냉기를 막는다는 이미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완벽한, 그리고 절대적인….’
그 생각을 하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글렌 지그하르트.
글렌이 입고 다니는 검붉은색의 코트는 그의 위엄을 두른 듯 그 어떤 칼날과 냉기에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무적자의 갑옷이 바로 그와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냉기의 실로 한 땀 한 땀 옷을 꿰매는 상상을 하며 깊은 심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성문 앞에 나와 있었다. 함께 출발하는 설격대와 울브스 용병단은 진중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손보고 있었다.
“괜찮아?”
“예. 뭐가 되었든 도련님하고 대련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더라구요. 하하!”
대련을 말한 이후 도리안은 미친 검귀에 비하면 아이스 트롤은 밥이지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안녕하세요.”
요상한 방법으로 자신감을 채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을 때 은색 방한복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흑발흑안에 피부는 하얗다. 평범한 키에 인상이 부드러워 큰 특징은 없어 보였다.
“울브스 용병단의 단장 베토라고 합니다. 어제 저희 아이들이 실례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부단장 클리프와 달리 싸움을 걸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울브스 용병단의 기질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즐겼으니까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소속은 정찰병이십니까?”
“예.”
“최강의 정찰병이시겠네요.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인사를 끝낸 베토는 준비 상태를 확인한다며 울브스 용병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눈을 뽑아라.
‘또 왜.’
-눈빛에 뱀이 어려 있다. 저런 놈은 믿는 게 아니야.
‘관상도 볼 줄 알아?’
-경험이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저런 눈빛과 얼굴을 한 놈 수없이 마주쳤지. 십중팔구는 배신자가 될 놈이다.
‘여전히 부정적이네.’
다만 라온도 저 베토라는 남자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꽤 여러 가지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특히 눈.’
라스의 말처럼 뱀의 기운은 느끼지 못했지만, 어둠을 담은 듯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기이한 힘이 어려 있었다.
“아저씨들!”
안쪽에서 들린 초롱초롱한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았다. 서리의 가지에 있어야 할 유아가 여러 개의 주머니를 들고 달려왔다.
-오, 파인애플 소녀가 아닌가!
“조금 늦었죠. 다 준비됐어요.”
유아는 가지고 온 주머니를 검사와 용병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미리 주문했던 간식들을 주는 것 같았다.
“와, 유아는 어떻게 점점 귀여워지냐.”
“요리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고.”
“하분 성의 자랑이지. 자랑!”
정찰병들은 유아를 본인들의 아이처럼 웃으며 귀여워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 하분 성의 마스코트 같은 아이인 모양이다.
“하나 남네.”
유아는 주머니를 모두 나누어준 뒤 남은 하나를 가지고 라온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랑 제가 만든 수제 육포에요. 햇볕 좋을 때 말려서 맛있으니, 가져가세요.”
“이걸 왜 나한테….”
“첫 출정이잖아요. 꼭 돌아오셔서 다음엔 사드세요.”
유아가 히히 웃으며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고맙다.”
“고마우면 돌아오셔서 매상 올려주세요!”
유아는 모두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하고서 주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도리안은 텅 빈 손을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눠 먹으라는 거잖아. 네가 가지고 있어.”
“아, 옙!”
녀석은 씩 웃으며 육포 주머니를 배 주머니에 넣었다.
“모두 정렬! 지금부터 마지막 점검을 한다.”
출발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을 때 부사령관 테리안이 정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물자와 인원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때기 놈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러게.’
출발 직전에 찾아오거나, 대충 확인하는 리메르와는 성격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테리안이 정문 앞 단상 위에 서서 병사들을 굽어보았다. 거센 존재감에 시선이 저절로 고정되었다.
“출정의 목표는 두 가지다. 모여들고 있는 아이스 트롤의 제거와 스터린 산 초입부터 북해까지 정찰.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끝까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예!”
이미 작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와 병사 그리고 용병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20분 뒤에 출발한다. 모두 마지막 점검을 하고 마음을 다잡도록!”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사령관님의 지시대로 혹시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
“예!”
“어이.”
라딘의 말대로 마지막 확인을 하려고 할 때 함께 출발하는 설격대 검사들이 다가왔다.
“이것 좀 들어.”
“조금만 더러워져도 너희들이 어떻게 될지 알지?”
“조심해서 다뤄.”
“하나라도 없어졌다간 혼난다.”
“네 애인처럼 생각하라고. 없겠지만.”
그들은 천막이나, 텐트, 식량 같은 무거운 물건들을 정찰대 앞에 던져놓고 낄낄 웃으며 돌아갔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제 놈들 짐을 들어달라는 거지.”
“이걸 왜 정찰대가 드는 거죠?”
라온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싸울지 모르니, 힘을 아껴야 한다더군. 저놈들이 여기에 배정받고 난 이후에는 매번 이래.”
라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찰병들은 익숙한 것처럼 검사들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있냐. 지위도, 힘도 약한데, 까라면 까야지.”
“음….”
라온이 설격대 검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격대주라고 했던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 또한 이 꼴을 모두 보았음에도 당연하다는 듯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랄맞군.’
저들이 싸움을 준비한다면 이들은 정찰을 준비해야 한다. 더 힘든 일을 하는 동료에게 짐을 떠넘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인간들은 갑질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느니라.
라스는 인간들은 뻔하다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 더럽네! 다 놔두세요!”
도리안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왔다. 녀석은 멍하니 선 정찰병들 사이에 껴서 검사들이 두고 간 짐을 모조리 배 주머니에 넣었다.
“선배님들! 제가 다 들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십쇼!”
“오오!”
“진짜야?”
“안 무겁냐?”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도리안은 팔근육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하고 콧김을 흥하고 불었다.
“시, 신입! 너 특이한 놈이라고 한 거 사과한다!”
“이야! 너 이거 먹어!”
“옙!”
정찰병들은 모든 짐을 챙긴 도리안에게 박수를 보내고, 간식을 챙겨주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녀석은 성격이 워낙에 좋아서 윗사람이나, 동료들에게 사랑을 받을 타입이었다.
20분이 지나고, 방한복을 입은 테리안이 돌아왔다. 모든 병력이 그 앞에 정렬했다.
“출발한다. 2번, 3번 정찰대 앞으로!”
“앞으로!”
라온과 도리안은 3번 정찰대장 라딘을 따라 일행의 선두로 갔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정찰을 나갈 때 사용했던 쪽문이 아니라, 성 중앙의 정문이 열리며 천지를 뒤덮은 새하얀 설경이 드러났다.
“전진!”
* * *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한다. 모두 텐트를 치고, 야영을 준비하도록.”
“예!”
테리안의 지시에 병사들이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직접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설격대 검사들은 달랐다.
“아까 준 재료들 있지? 그걸로 가벼운 스튜라도 만들어. 대주님이랑 부대주님도 드셔야 하니까. 맛대가리 없게 만들면 각오하고.”
“너희 넷은 이쪽으로 와. 텐트 치는 것 좀 도와라.”
설격대 검사들이 정찰대가 있는 곳에 와서 음식을 만들라고 명령하고, 몇 명은 잡일을 시키려고 데려갔다.
“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도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맞는 거예요?”
“맞지 않으면 어쩌냐. 힘이 없는걸.”
라딘이 냄비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사령관님이나 사령관님은 아무 말 안 하시나요?”
“모르시지. 지금도 부사령관님 없을 때 찾아온 거잖냐.”
그는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테리안이 없을 때만 찾아온다고 말했다.
“사령관님이나, 부사령관님이 성 밖에 나오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직접 부딪치는 건 우리라서 대들면 결국 우리 손해야.”
라딘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불을 피웠다.
“아, 빡쳐!”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식사 재료들을 꺼내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음….”
라온은 불 위에 냄비를 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전 이렇게 전투가 많은 곳은 단합이 잘 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군요.”
“대부분 그렇긴 한데, 설격대는 아니야. 대주부터가 얌생이라, 약자는 기가 막히게 고르고 이용하거든.”
“그렇군요.”
라온은 일은 안 하고 잡담을 주절거리는 설격대를 보며 붉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럼 저것들만 휘어잡으면 되겠네.
* * *
진군은 빨랐다.
눈 위를 걷는 일에 자신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그런지 다수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4번 땅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예상과 달리 2번 정찰대가 관측했다는 트롤 무리는 보이지 않았고, 놈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합니다.”
테리안이 2번 정찰대장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축 처진 어깨뿐이었다.
“제대로 본 건 맞나?”
“화, 확실합니다. 숲 외곽에 트롤 열세 마리가 모여 있었습니다!”
“이래서 정찰대만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소 검사 하나씩은 정찰대에 넣어야 합니다.”
설격대주는 테리안의 옆에 붙어서 정찰대가 여러모로 부족한 집단이라고 말했다. 꼴을 보니, 다른 이들을 깔아뭉개서라도 본인의 영향력을 더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지금은 녀석들의 흔적을 찾아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
테리안이 다시 고개를 숙여 눈 덮인 땅을 훑어보았다.
“아이스 트롤이 눈 위에서 짐승처럼 움직인다고 해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트롤이 남긴 잔재를 찾아라! 여기서 놈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피해로 돌아올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정찰대, 검사,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각자 구역을 나눴다.
“하여튼 트롤 놈들은 그냥 잡히는 법이 없다니까.”
라딘은 쌓인 눈을 걷어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스 트롤의 흔적이 사라졌단다. 일단 수색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으니, 준비해!”
“예!”
정찰병들은 다리가 짧은 개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어서 트롤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용병이나, 설격대의 검사들도 트롤의 이동 방향이나, 기척을 느끼려고 기감을 풀어냈다.
‘알아서 찾겠지.’
라온은 흔적을 뒤지지 않고, 경계 자세를 취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산 정찰병의 수색 능력이라면 금방 찾을 게 분명했고, 자신의 역할은 수색이 아니라, 보호였기 때문에 경계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 시간이 다 지나도록 트롤은 나타나지 않았고, 흔적도 딱 하나만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아이스 트롤이 흔적을 많이 남기는 몬스터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못 찾을 리가 없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니, 직접 움직여봐야 할 것 같았다.
“젠장!”
테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이, 일단 스터린 산 쪽으로 간 건 호, 확실한데요….”
2번 정찰대장이 유일하게 하나 남은 트롤의 발자국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 산에는 아이스 트롤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있다. 그 흔적 하나만 보고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어.”
“끄응….”
“북쪽의 낮은 짧아. 더 늦으면 밤이 된다. 일단은….”
“저도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앞으로 나와 테리안의 발밑에 있는 마지막 흔적을 보았다.
“자네가?”
“예. 조금만 보겠습니다.”
“너는 이제 막 정찰대에 들어가지 않았나? 그리고 새로 얻은 직책은 정찰대의 호위일 텐데?”
테리안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설격대주 에드퀼이 콧등을 찡그렸다.
“괜히 나서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들어가라. 해가 지고 있어서 시간이 없다.”
“그만.”
테리안이 주절거리는 설격대주의 입을 막았다.
“일단 방향은 스터린 산이군요.”
라온은 바닥에 나 있는 유일한 흔적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다 아는 이야기고. 그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설격대주는 정찰대 소속인 자신이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짜증을 부렸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죠.”
“하! 어디에서 온 도련님인가? 들었던 실력에 비해 철이 너무 없는데? 지금 네가 우리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 버러지 콧수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려서 용암에 튀겨버리고 싶도다. 입을 주절거리는 게 밉상 그 자체이니라.
‘조금 잔인하지만 동감이야.’
라온은 계속 입을 놀리는 설격대주의 말을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이것 또한 성장을 위한 계기이니, 정신을 집중했다.
고오오오!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이미지로 만든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이제 꽤 넓어져서 샘물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바다를 얇게 퍼뜨렸지만, 트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대로 일어섰겠지만, 여러모로 아니꼬운 설격대주와 설격대 검사들 때문에 확실하게 그 위치를 잡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이 또한 이미지다.
갇혀 있는 바다를 열면 조금 더 먼 곳에도 글래시아의 감각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호수처럼 막혀 있는 바다의 뚝을 열었다.
콰아아아아!
들리지 않아야 할 물소리가 뇌리를 울리며 감각의 바다에 차 있던 흑색의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트롤의 발자국이 향했던 방향으로 올려보냈다. 이 땅의 냉기와 어우러진 감각의 바다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스터린 산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감각의 물길을 조종해 예상되는 방향을 뒤졌지만, 다수의 몬스터만 느껴질 뿐 모여 있는 트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혹시.’
방향을 바꿨다. 아이스 트롤이 좋아하는 눈 쌓인 숲이 아니라, 산기슭이나 계곡으로 감각의 물길을 쏟아냈다.
설화의 감각까지 열고 집중하자, 산골짜기 부근에서 시야가 확 밝아지듯이 야생의 기척이 잡혔다.
듣던 것보다 숫자는 더 많았지만, 털에 냉기를 휘감고 있는 아이스 트롤이 분명했다.
“후우….”
탁한 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정찰대는 기대감이 어린 시선으로, 설격대주와 설격대 검사들은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 보니 뻔하군. 괜히 시간만 낭비했어. 부사령관님 일단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찾았는데?
“뭐?”
“찾았다고.”
라온은 코웃음을 치던 설격대주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