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라온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대자로 뻗은 용병들을 보았다.
‘역시 사람이랑 싸워야 한다니까.’
실전에서 경험을 쌓은 용병들과 검을 나누자, 광아검의 성취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식사 대신 대련을 선택한 게 정답이었다.
‘다만….’
약간 감정적으로 된달까.
광아검의 광기에 물들어 흥분하게 되는 건 완벽하게 고쳐지지 않았다. 검술 성취가 조금 더 올라야 상대의 빈틈을 냉정하게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안 오는 겁니까?”
라온이 휘돌린 검으로 울브스 용병단을 가리켰다.
“전 아직 몸도 안 풀렸습니다.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여기까지면 실망인데요.”
“이이익!”
“좋다! 덤벼!”
“너로는 안 돼. 내가 간다.”
도발을 하자 용병들이 서로 다투며 앞으로 나왔다.
“다섯이면 딱 좋군요. 한 번에 오세요.”
“미친….”
“진짜 다섯과 싸우겠다고?”
라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가자! 다굴로 조져버려!”
“거기까지.”
용병들이 달려들려고 할 때 힘이 축 빠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에 서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팔다리가 길쭉한 녹색 머리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마치 사마귀가 생각나는 외모였다.
“어?”
“부, 부단장님!”
용병들은 그 남자를 보고 부단장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 뭐 하냐?”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거북이가 기어가듯 느릿했다.
“어….”
“그, 그게….”
“대충 알겠네.”
그는 자신과 구석에 쓰러진 용병들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하아, 전 울브스의 부단장 클리프라고 합니다. 애들이 버릇이 좀 없어요.”
클리프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머리를 들어 올리는 클리프와 눈을 마주쳤다.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우리 애들 다섯과 싸우자고 하시던데, 대신 제가 싸워드려도 될까요?”
정중한 말과 달리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한 투지로 가득했다.
-다른 줄 알았거늘. 똑같은 놈이로다.
‘그러게.’
-끄응, 이제야 피자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또 시작이겠어.
‘금방 끝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라온이 가볍게 웃으며 클리프와 마주 섰다. 그의 가는 눈을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감사하죠. 아직 몸이 덜 풀려서요.”
“잘 되었군요. 저도 싸우면서 몸을 푸는 걸 좋아해서.”
클리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젠 피어나오는 투지를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익스퍼트에 오른 검사의 기세가 어깨를 짓눌러왔다.
스르르릉.
그가 등에 메고 있던 창처럼 긴 장검을 뽑았다.
“나잇값은 해야 하니, 먼저 오시지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라온이 검을 고쳐 잡고, 땅을 박찼다. 앞으로 내달리려 할 때 눈앞으로 시퍼런 칼날이 튀어나왔다.
‘빠르군.’
긴 팔과 장검의 리치를 이용한 쾌속의 검격이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칼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었어.
클리프의 팔과 장검을 보았을 때부터 이런 공격이 올 거라 예상했다.
쩌엉!
라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쇄도해 온 장검을 쳐냈다.
장검이 밀려난 틈을 노리고 땅을 박찼다. 공간을 파고들려고 할 때 클리프가 뒤로 물러서며 궤도가 어긋난 장검을 회수한 뒤 다시 내질렀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 이런 상황을 대비한 듯 조금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재밌군.’
라온이 씩 웃었다.
‘이런 싸움을 원했어.’
가볍게 이기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광아검의 효용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지금 같은 전투를 바랐었다.
“여유가 넘치는군요.”
클리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질러왔다. 매의 발톱처럼 꺾여오는 칼날을 향해 검을 후려쳤다.
쩌엉!
강한 힘을 담았지만, 장검의 흔들림은 크지 않았다. 클리프는 장검을 빠르게 끌어당겨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준비했다.
‘그랬군. 이제 알겠어.’
라온이 입술을 핥았다. 세 번의 격돌을 통해 어떻게 클리프의 빈틈을 만들어야 할지 감이 왔다.
쿠웅!
진각을 밟고 전방으로 돌진했다.
촤아악!
클리프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찔러왔다. 지금까지보다 1.5배는 더 빨라진 속도. 그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더 많이 숨기고 있었지.
라온은 어깨를 틀어 찔러오는 장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검을 내리쳤다.
쩌어엉!
소리는 컸지만, 이번에도 장검은 많이 밀려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연검이었으니까.’
보기에는 길이만 긴 장검처럼 보였지만, 저 검은 채찍처럼 휘어지는 연검이다. 자신이 공격할 때 일부분만 강도를 풀어 충격을 흡수시킨 것이다.
‘잘하네.’
레이든 지그하르트의 검술이 더 강하고 화려하지만, 세밀한 사용법은 이쪽이 한 수 위였다.
후우웅!
클리프가 뒤로 젖힌 팔을 벼락처럼 내질렀다.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뛰어난 무인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정도.
하지만.
라온의 눈에는 그 궤적이 선명하게 어렸다.
단전에서 끌어 올린 만화공의 괴력으로 검을 쏘아냈다.
클리프가 장검의 중심에서 힘을 빼려는 순간 손목을 틀었다. 광아검의 번뜩임이 이끄는 대로 장검의 끝부분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미쳐 힘을 빼지 못한 클리프의 장검이 반으로 꺾여 실금이 생겨났던 대지에 처박혔다.
“이, 이 무슨!”
당황한 클리프가 손을 휘저었지만, 검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쿠웅!
라온은 장검이 아예 빠지지 않도록 땅을 뭉개버린 뒤 클리프를 향해 돌진했다. 검면으로 가슴팍을 후려치려고 할 때 클리프의 눈이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미안하지만, 사마귀의 낫은 두 개다!”
그가 왼손을 들어 등에 메고 있던 두 번째 검을 뽑았다. 검집의 끝에 달려 있던 소검이었다.
“알아.”
라온은 왼손으로 뽑은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클리프의 소검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진심으로 당황한 그가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까….”
“싸움에 잠깐이 어디 있어.”
코웃음을 치며 진혼검을 쥔 왼쪽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꺼어어억!”
등장은 달랐지만, 클리프도 다른 용병들과 똑같이 거품을 뿜어내며 뒤로 자빠졌다.
“후….”
라온이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하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역시 실전이 최고로군.’
광아검의 성취를 올리는 것에는 실전만 한 수련법이 없었다. 지금 얻은 깨달음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았다.
“끄어어억!”
“이, 이거 뭐냐?”
“저 사마귀 귀신이 지다니! 그것도 저런 어린 애한테!”
“아니, 이게 말이 돼? 클리프가 저렇게 깨진다고?”
“시, 신성이다. 미래의 신성이야!”
검사와 기사, 병사들까지 싸움을 구경하던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아!”
“최고다!”
“다음에는 나랑도 한 번 붙어보자!”
“어이! 어디 출신이야!”
멋진 싸움을 보여주었다면서 환호를 지르는 병사와 검사들도 많았다.
“라, 라온 님. 수고하셨어요!”
도리안이 수건과 사과 주스를 꺼내주었다. 녀석은 믿고 있었다고 말하며 따로 포도 주스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라온.”
피식 웃으며 땀을 닦을 때 부사령관 테리안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덤덤했다.
“따라와라. 사령관님이 부르신다.”
그가 뒤를 돌아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서갔지만, 흔들리는 손끝은 숨기지 못했다.
* * *
라온은 이틀 만에 다시 사령관 밀랜드의 앞에 섰다. 그는 탐색의 눈빛으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지. 정찰병들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밀랜드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저도 정찰병 소속이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싸울 때와 다르게 재미없는 말을 하는군.”
“보셨습니까?”
“보지는 못했다만 느껴졌다.”
그가 뒤편에 있는 창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뭐랄까. 무력도, 성격도 여기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더구나. 용병들의 시비에 응할 줄은 몰랐어.”
“본래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검사로서 좋은 마음가짐이다. 왜 그 나이에 그런 무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
밀랜드의 굳은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사령관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역시 검사. 당당한 말과 자세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넌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왔지?”
“예?”
“가문의 지시가 있다고 해도 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나?”
“있습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일었다.
“전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많은 싸움에 참여하고, 많은 전장에 서고 싶습니다.”
광아검을 완성하고, 만화공을 키우며 무력이 강해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감정도 알고 싶었다.
“저, 전 반대입니다! 전 뒤에서 보급병을 하….”
헛소리하는 도리안의 입을 막았다.
“많은 싸움과 많은 경험이라….”
밀랜드가 검게 탄 듯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너희들은 가장 위험한 병과가 어디라고 생각하지?”
“보병 아닐까요?”
도리안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정찰병입니다.”
“잘 아는구나.”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다. 가장 위험한 병과는 정찰병이지. 그들은 성안보다 성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전투가 벌어졌다고 쉬거나 빠지지도 않는다. 정찰할 때는 밖에서, 안에 있을 때는 성벽 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임무 중 사망 비율이 가장 높기 때문에 정찰병은 항상 부족하다.”
그러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병사로 들어온 주제에 도리안과 2인 숙소를 쓰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전투 단체에 보내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어. 너희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주마.”
“제, 제 목표는 보급병이라고 말씀드렸….”
“너희 둘을 정찰대의 특별 가드로 임명한다. 네가 원하는 실전을 원 없이 치르고, 최대한 많은 정찰병의 목숨을 구해주길 바란다.”
밀랜드는 부탁한다고 말하며 기광이 어린 눈빛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정찰병들과 함께 움직이면 싸움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전 실전에 서고 싶다는 말을 안 했다니까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라온과 밀랜드는 바로 옆에 있는 도리안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조만간 제대로 인사발령을 내리지. 정찰 임무 수고했다. 쉬도록.”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전 최후방에서 보급병으로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도리안을 잡아끌고, 사령관실을 나왔다.
“으윽, 끝났다. 끝났어. 내 인생은 망했다고!”
도리안은 좀비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 망했으니까. 헛소리 말고 가서 쉬어.”
“예? 라온 님은요?”
녀석은 언제 꺼냈는지 둥그런 과자를 입에 물고 있었다.
“수련 좀 하고 갈게.”
“으, 알겠습니다.”
도리안은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잠깐.
라온이 병사들의 수련장을 찾아가려 할 때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이 다르다.
꽃팔찌에서 솟구친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
-그렇다. 대련이 끝나면 피자를 먹겠다고 말했잖느냐.
‘아, 그거.’
라온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수련하고 저녁에 먹자.’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그렇게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니라!
‘이번엔 진짜야. 피자도 네가 원하는 걸로 먹을게.’
-저,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깨달은 걸 먼저 정리하고 싶어서 그래.’
라온이 다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웅!
진혼검도 믿어보라고 말하는 듯 검명을 울렸다.
-조, 좋다. 그럼 마음 넓은 본왕이 이해해주겠노라. 대신 본왕이 원하는 피자를 고르는 건 무조건이니라.
‘그래. 그래.’
라온은 애를 달래듯이 웃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서산에서 떠오른 달이 손가락 세 마디 정도 움직인 후에야 수련장을 나왔다. 검집을 툭 두드리는 그의 표정은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광아검의 성취가 많이 올랐어.’
대련을 통해 깨달은 점을 정신과 육체에 확실하게 새겼다.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껍질을 한 겹은 깬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서 잘까.’
-라온 지그하르트!
숙소로 가려 할 때 앵무새처럼 팔목에 매달려 있던 라스가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냈다.
-본왕과의 약속을 또 잊었다는 말이냐!
‘아, 농담이야. 농담.’
라온이 피식 웃었다. 그런 어이없는 약속을 잊었을 리가 있겠는가. 장난 한 번 쳐 봤을 뿐이다.
수련하는 동안 라스가 조용하게 기다려줘서 원하는 대로 피자를 시켜줄 생각이었다.
우우웅!
진혼검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고 검명을 터트렸다.
-무엇이? 본왕이 속이 좁아? 좁은 건 네놈 주인의 머리통이니라!
우우웅!
-미물 주제에 본왕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 본왕은 그저 미식가로서의 호기심에….
라온은 시끄럽게 떠드는 마왕과 요검을 무시하고, 정찰병들과 갔던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그런데….
“어라?”
주점의 불이 꺼져 있었고,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찍 문을 닫은 것 같았다.
-문 닫은 것이냐?
‘그런 거 같은데.’
-…….
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푸른 불꽃을 바르르 떨었다. 가늘게 피어나던 냉기가 해일처럼 파도치기 시작했다.
-본왕이 아까 가자고 하지 않았더냐!
‘나도 이렇게 일찍 닫을 줄은 몰랐지.’
-닥치거라. 이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느니라!
‘진짜 이럴 생각은….
-본왕의 피자를 내놓아라!
녀석에게서 뿜어진 냉기가 발목과 손목을 휘감아왔다.
‘이, 이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육체를 뺏고, 본왕의 손과 입으로 직접 피자를 먹겠노라!
라스의 냉기가 푸른 벼락처럼 명멸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거대한 분노와 냉기가 자신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날.
라온의 능력치가 2포인트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