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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15화 (115/653)

115화

라온은 메시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화한 혈기라….’

그냥 혈기가 아니라, 정화한 혈기. 진혼검은 혈기에 어려 있던 사이한 기운을 본인이 먹어치우고, 남은 정심한 기운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 같았다.

‘확실히 순수한 기운이야.’

실제로 진혼검이 바친 기운은 마나석에 담긴 마나 이상으로 높은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상서로운 기운이었다.

‘받아들인다.’

막고 있던 오러의 벽을 내리자, 진혼검이 바친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기운이 마나 회로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정화한 혈기가 육체와 정신을 강화시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올랐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정심한 기운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희열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특성 <요기 적응>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이 생겨났다며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요기 적응(1성)>

본인의 육체나 무구로 요기를 사용할 때 더 적은 오러와 정신력으로 더 많은 요기를 운용할 수 있다.

라온은 요기 적응의 내용을 보고 눈을 빛냈다.

‘괜찮은데?’

요기가 깃든 검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정신력과 오러 소모가 심했다. 저 특성이 있다면 진혼검을 들고 싸울 때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라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 라스가 눈앞으로 치솟았다. 푸른 냉기에 잠긴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었다.

-왜 특성이 생긴 것이냐.

‘네가 전에 말했잖아. 시스템은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진혼검을 쓰는 날 위해서 저 특성을 만들었겠지.’

-그 특성이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 같으냐. 본왕이다! 본왕의 본체에서 힘을 빼 온 게 뻔하지 않느냐!

‘그렇겠지. 뭘 당연한 걸 물어.’

-끄으으윽!

라스가 이를 갈았다. 푸른 불꽃 위로 분노가 잔뜩 어린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다니까.’

라온이 확인한 메시지를 닫고 있을 때 진혼검이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거냐?’

우우웅!

그 말이 맞다는 듯 진혼검이 선명한 울음을 흘렸다.

‘넌 기생충 1호와 달리 확실히 도움이 되네. 기생충 2호라는 말은 취소하마. 나도 잘 부탁한다.’

우웅!

고맙다는 듯 진혼검이 몸을 떨었다.

-보, 본왕이 기생충 1호? 기생충은 네놈이다! 본왕의 능력을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는 등골 브레이커이니라!

‘그렇구나.’

-끄아아아악!

능글맞게 대답하자, 라스가 악을 내지르며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다. 화산처럼 폭발한 푸른 냉기 위로 분노의 감정이 뒤덮여 밀어닥쳤다.

고오오오!

이전에 받아들였던 라스의 분노가 잔불처럼 타올라 정신을 짓눌렀다.

“후욱….”

수천 개의 바늘로 모공을 찌르는 듯한 지독한 고통. 자신이 성장하듯 라스도 힘을 회복하고 있다. 그에 맞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했다.

영혼의 격이 오르고, 전신에 열기가 휘몰아치자 라스의 분노와 냉기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확실히 상성이야.’

불의 고리와 만화공은 냉기와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라스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본왕에게 그 몸과 영혼을 바쳐라!

‘그렇게는 못 하지.’

살이 파이는 듯한 고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후우우.

식은땀을 흘리며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와 냉기를 버틴 대가로 오르는 능력치였다.

-이런 빌어먹을! 본왕의 능력치가 넘어갔도다! 또!

라스가 펄쩍 뛰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넌 안 돼.’

라온이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하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역시 방심할 수 없어.

여유로운 말과 달리 등은 땀을 젖어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라스라지만, 그 본체는 마계의 군주다.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처음엔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무엇이 말이냐.

‘너보다 진혼검이 훨씬 착해.’

라온은 라스에게는 코웃음을 치고, 진혼검의 검날을 깔끔하게 닦아주었다.

-착하긴 무엇이 착하단 말이냐. 네놈의 육체를 조종하려 들었던 미물이니라!

‘마음을 고쳐먹었잖아. 어떻게든 날 집어삼키려는 너랑은 달라.’

-저놈도 똑같다. 본왕만큼 강했다면 포기하지 않고 네놈을 노렸을 것이다.

우우웅!

아니라는 듯 진혼검이 검날을 진동시켰다.

‘똑같이 보지 말라는데?’

-조만간 네놈만이 아니라, 저 요검도 박살을 내주겠노라.

라스는 흉악한 냉기를 뿜어내며 진혼검을 굽어보았다.

‘능력치를 올려주면 나야 고맙지.’

-끄응, 네놈은 본왕이 아니라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어딜 가든 적을 만드는 유형의 인간이니라.

‘내 적은 너뿐이야.’

무조건 죽여야 하는 진짜 적이 있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검사 라온.”

진혼검을 다 닦은 뒤 검집에 넣으려 할 때 그리어가 검은 보자기를 들고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그는 여전히 왕자답지 않았다.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도 나름 놈들과 관계가 있어서요.”

“확실히 그렇구려.”

진혼검을 보여주자,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조그마한 요기를 뿜어낸다고 생각했는데, 상식을 초월했더군. 그런 검은 처음 보았소.”

“저도 그렇습니다. 제 생각보다 원한이 강한 것 같더군요.”

“괜찮겠소? 요검은 제 주인도 문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절 완전히 주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긴 그만한 힘이 있으니, 받아들였을 테지. 감탄이 나오는 무력이야.”

그는 앞으로 더 노력해서 따라잡겠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역시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젠 동지가 되었으니 보여줘도 되겠군.”

그리어가 가지고 온 검은 보자기에서 아이 머리통만 한 하얀 구슬을 꺼냈다.

“이건….”

“우리가 가지고 가던 백혈교 지부의 물건이오. 아시다시피 백혈교는 습격한 마을 사람의 반은 그 자리에서 흡혈하고, 반은 납치해가지. 우리는 놈들이 이 구슬로 납치한 사람들을 백혈교 본단으로 이동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기대감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그리어의 말을 들은 진혼검이 진동을 일으켰다. 복수를 원하는 마음과 혹여나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길 바라는 마음 같았다.

‘음.’

라온이 감탄한 눈으로 진혼검을 보았다.

‘대단하네.’

요검이 되었어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하다니, 시렌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따스한 심성을 가졌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도련님.”

검명을 흘리는 진혼검을 멍하니 보고 있던 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단검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쓰시는 걸 처음 봤는데, 장난이 아니던데요?”

“음, 확실히.”

“체계화된 단검술이었지.”

그 말에 그리어와 기사들도 시선을 돌렸다. 어떤 검술인지,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리메르 교관에게 배웠어.”

“아!

“어쩐지.”

“그 사람이면 그럴 만하지.”

도리안도, 왕자도, 기사들도 리메르라면 단검술도 익혔을 것 같다고 말하며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이쪽도 쓸만한데.’

리메르라는 핑계는 어디에도 통하고 있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진혼검을 허리 뒤편에 착용했다.

*     *      *

다음날 정오.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입매는 단단히 여물어 있었다. 흡사 소나무가 사람으로 화한 듯했다.

한 자루 검처럼 고고한 기세를 피워내는 이 남자가 바로 오웬 왕국 은기사단의 3번 조장이자,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보리니 키튼이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갈림길에 도착한 라온과 그리어가 잡혔다.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흐음.”

보리니의 시선은 보호해야 할 삼왕자가 아니라 라온의 등을 쫓았다.

‘확실히 날 파악했었지.’

어제 백혈교도가 삼왕자 일행을 습격했을 때 잠시 기운이 흐트러졌었는데, 라온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아차렸다.

‘대단한 녀석이야.’

그는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뒤 백혈교를 처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많은 실전을 겪은 베테랑 기사를 보는 듯한 판단력과 집중력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단검술이었고.’

왕자에게 라온 지그하르트가 검의 천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단검술까지 익혔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어설프게 익힌 단검술이 아니라, 수천, 수만 번을 그어본 것처럼 능숙한 검로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이 걸작이었지.’

요기와 오러를 응집시켜서 그어내는 검격. 그 위력과 범위는 익스퍼트 최상급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웠어.

저곳에 있던 왕자와 기사들은 몰랐겠지만, 먼 곳에서 지켜본 보리니는 확실하게 느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펼쳐낸 검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검무劍舞. 검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 춤에 담긴 원한에 잠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라….”

삼왕자가 진정한 천재라고 말했을 때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왕국 제일. 아니,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은기사단에 들어가 여러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보았지만, 저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훗.”

보리니 키튼은 멀어지는 라온의 등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안에 지그하르트에 또 하나의 신성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     *      *

라온과 도리안은 차원문을 탄 이후에 2주 동안 이동해서 하분 성 근처에 있는 주디안 숲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 정도만 더 이동하면 북방의 지옥 중 하나라는 하분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으으….”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간이침대에 누운 채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모닥불의 열기와 두꺼운 이불이 있음에도 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주, 죽을 거야. 진짜 죽을 거라구요!”

“안 죽어.”

라온은 진혼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배운 대로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야.”

리메르는 못 할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보냈다는 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시험이라는 뜻이다. 물론 광혈귀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렇지?”

우웅!

진혼검은 맞다는 듯 선명한 검명을 울렸다. 2주라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은 물론 도리안과도 약간의 친분이 쌓인 상태였다.

“그건 알지만, 무섭다고! 무서운 걸 어떻게 해!”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야광등을 머리맡에 놓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노숙에서 침대와 야광등이라니 엄청난 사치였다. 물론 그 덕분에 자신도 편하게 잘 수는 있었지만.

“다 됐다.”

라온은 진혼검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다시 검집에 넣었다.

-으흠!

라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팔찌에서 튀어나왔다.

-요즘 그 미물에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냐?

‘잘해준다고?’

-그렇다. 매일 한 번씩 닦아주고, 주기적으로 말도 걸어주지 않느냐.

‘뭐, 도움이 되니까.’

필요 없다고 말해도 진혼검은 요기를 이용해서 사슴 같은 사냥감을 찾아주기도 하고, 산적들을 먼저 찾아내 경고도 해주었다.

-그, 그 정도는 네놈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도 날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게 고맙잖아.’

자신의 기감이 더 뛰어난 건 맞지만, 저런 일을 알아서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마웠다.

‘요기의 사용법도 알려주고 있고.’

진혼검은 요기를 더 잘 사용하는 방법과 요기에 적응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예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자주 닦아주고, 말도 걸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요기 같은 하찮은 힘을 사용해봤자 급만 떨어진다.

‘급이 떨어지더라도 난 강해져야 하거든.’

라온은 가늘게 웃으며 입을 삐죽이는 라스를 밀어냈다.

딱히 소외시키는 것도 아닌데, 진혼검과 많은 대화를 하고 친해질수록 라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우우웅!

냉기를 뿜어내는 라스를 놀리듯이 진혼검이 검명을 터트렸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하지 마.’

라스가 냉기를 뿜어내서 진혼검을 짓누르려고 할 때 라온이 만화공을 이용하여 라스의 기운을 막아주었다.

-왜 막는 것이냐!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본왕은 마계의 군주이니라! 요검 따위가 반항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나 잘 거니까. 조용히 해.’

-끄윽!

라온은 라스를 억지로 팔찌에 밀어 넣고 간이침대 위에 누웠다. 푹신함을 느끼며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듯이 천천히 숨을 고를 때 팔찌에서 라스가 다시 튀어나왔다. 조금 전과 달리 살짝 기가 죽은 기세였다.

-자는 거냐?

‘아직.’

-그럼….

라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보, 본왕이 냉기의 사용법을 조금 가르쳐줄까?

라온은 등을 돌린 채로 옅게 웃었다.

마계의 군주가 2주 만에 낚싯바늘을 덥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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