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흐음.”
쿠베러드는 검을 살피는 라온의 등을 보며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세상은 멈춰있질 않는군.’
대장장이로 살며 셀 수 없이 많은 무인을 만나보았다. 어린 나이에 천재라 불리는 무인부터 일가를 이뤄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절대자들까지.
하나하나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준 무인들이었지만, 저 앞에 있는 녀석은 달랐다.
‘강함의 문제가 아니야.’
15살의 나이에 저 무력. 대단한 건 분명하지만, 넓은 대륙을 뒤지다 보면 몇 명쯤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닌 그릇이 다르다.
대장장이가 둔탁한 쇳덩이를 두드려 검을 만들듯이 저 아이는 마음을 다듬어 검을 세우고 있었다.
가까이는 신검합일. 멀리는 마음의 검까지 이뤄낼 수 있는 상서로운 기질이었다.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인데….’
라온의 무력은 대충 익스퍼트. 수많은 벽을 뚫고 어떻게 정신만 저 경지에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지그하르트가 다시 한번 세상을 울리겠군.”
쿠베러드는 그 재밌는 세상을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재밌는 손님이 오니 싸구려 술도 달달했다.
우우웅.
갑작스레 들린 진동 소리에 술병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탁자 위에 있던 붉은색 단검이 울부짖었고, 라온이 그 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자, 잠깐.”
저걸 만져서는 안 된다. 구석에 빼둔 검이 왜 저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멈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붉은 단검은 이미 라온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었다.
“이런 젠장!”
“어억!”
쿠베러드가 벌떡 일어나서 어벙하게 서 있던 도리안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이러십니까. 두 개를 고르려던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만 고르려고….”
“저기 보이느냐?”
“어? 저 단검 뭡니까? 뭔데 저런 기운이….”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기묘한 붉은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요검(妖劍)이다.”
“요, 요검이요?”
요검이란 괴이하며 요망한 검.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검을 쥔 사람을 조종하려 드는 사이한 물건이었다.
“젠장.”
쿠베러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정신이 단단히 여물지 않은 아이가 요검을 들었으니, 검의 요기에 더 쉽게 물들게 뻔했다.
“요기가 머리에 닿기 전에 멈춰야 한다! 겁쟁이. 검을 뽑아라!”
“어….”
옆에 있는 망치를 들고 도리안을 재촉했다. 하지만 녀석은 검을 뽑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무얼 하는 게냐! 지금 멈추지 않으면 위험할….”
“아니, 멈출 필요가 없는 게. 도련님은 평소랑 같은데요?”
“뭐? 저렇게 요기를 줄줄 흘리는…엉?”
쿠베러드가 입을 떡 벌렸다. 요기가 넘치는 건 맞다. 아주 활활 피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요기가 검 주변에서만 퍼질 뿐 라온에겐 접근조차 못 했다.
끼이이잉!
요검이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이전처럼 괴이한 검명이 아니라, 목줄 잡힌 개가 지르는 비명 같았다.
“괘, 괜찮으냐?”
그 말에 단검을 보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정기가 어린 붉은 눈. 요기에 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맑은 눈빛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단검 평범한 물건이 아니군요.”
“허….”
쿠베러드가 헛바람을 흘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너,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 * *
-감히.
라스의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하등한 벌레 주제에 본왕의 빙의체를 노리다니.
그는 진심 어린 분노를 일으켰다. 이글거리며 피어나는 푸른 냉기가 단검에서 치솟은 요기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끼이이이잉!
단검이 라스의 냉기에 짓눌려 비명을 터트렸다.
-아예 박살을 내버리겠노라!
라스는 창칼처럼 얇게 저민 냉기를 단검에 밀어 넣었다. 검 자체를 죽이려는 것 같았다.
‘그만.’
-뭐?
‘거기까지 해.’
-왜냐! 본왕의 먹이를 뺏으려는 놈이니라! 본왕이 없었다면 네놈은 단검의 요기에 먹혔을 것이야!
‘난 네 먹이도 아니고, 네가 없어도 이런 검에는 먹히지 않아.’
-요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이놈이 본왕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는….
‘너도 날 못 뚫었는데, 이런 거에 뚫릴까.’
-억….
라스의 분노가 단숨에 멈췄다.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맞지? 그니까 그냥 놔둬.’
-차, 참 아프게도 말하는구나.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본왕이 수천 년에 걸쳐 씹어먹고, 뜯어먹고….
“이 단검은 뭡니까?”
-좀 들어!
라온은 떠들기 시작하는 라스를 무시하고 쿠베러드에게 다가갔다.
“그, 그건….”
쿠베러드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자신과 단검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든 실패작이다. 아까 말했던 대로 요검이지.”
“요검. 확실히 요기가 느껴지더군요.”
“뿜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네 몸을 집어삼키려 들었을 텐데.”
“견딜 만했습니다.”
“허….”
사실을 말했지만, 쿠베러드는 이해할 수 없는지 허탈해 보이는 신음을 흘렸다.
“요검은 요기가 깃든 검이다. 단순히 말해서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 검에 깃든 것이지. 그 검 안에는….”
쿠베러드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원한이 어려 있다. 그것도 지독하리만큼 끈적한 원한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앉거라.”
쿠베러드가 테이블 앞에 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저, 저도 들어도 되죠?”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폭신한 의자를 꺼내 몸을 기댔다.
“남부에 시렌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오셀룬이라는 나무를 신성시하던 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지.”
아는 마을이다. 로베르트 가문의 세력권에 살짝 벗어나 있는 작은 마을로 사람들이 선하고, 의심이 적어 도주로로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 마을에 백혈교의 교도들이 들이닥쳤다.”
“백혈교….”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필 그놈들이라니.’
백혈교는 에덴, 남북맹과 함께 오마에 속해 있는 거대 종교 단체다.
대륙을 하얀 피로 물들인다는 제 1교리를 바탕으로 세상 모든 것을 습격하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놈들의 집단이다.
“그럼 시렌 마을은….”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은 그 자리에서 죽고, 반은 납치당해 어딘가로 끌려갔다더군. 마을의 정령이라던 오셀로 나무까지 베어갔다. 남은 건 하얀 피뿐이었지.”
백혈교의 습격이 일어난 곳은 붉은 피가 아니라, 하얀 피가 대지를 적신다. 놈들의 주술 중 하나였다.
“이 검은 내가 가지고 있던 운석 조각과 그 자리에 남아있던 오셀룬의 가지를 가지고 만든 검이다.
쿠베러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라온의 손에 잡힌 단검을 보았다.
“검을 말입니까?”
“그래. 내 딴에는 위령비 대신 이 검으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려 했지. 하지만….”
그때 생각이 났는지 쿠베러드가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완성되자마자 하얀 검신과 검병이 붉게 물들었다. 내 생각과 반대로 시렌 마을 사람들의 원한이 그 검 안에 담겼지. 그것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원한이.”
“확실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검에는 어마어마한 요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요기에 홀려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원래 착한 사람들이 화나면 무섭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자라 불린 사람들도 그 요기를 견디지 못해서 내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걸 잡을 수 있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음….”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보았다. 검집과 검병만이 아니라 검날까지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의 원한을 기억하겠다는 것처럼.
우우우웅!
붉은 검신이 진동하며 요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검집에 담겨 있을 때보다 더 지독하고 사이한 기운이 손등 위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치이이잉!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심장을 휘도는 다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존재의 격을 끌어 올렸다.
끼이잉!
단검의 요기는 라스에게 밀려난 것처럼 자신의 격에 짓눌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허! 정말이지.”
쿠베러드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양파 같은 놈이로다.’
이만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검사 자격도 얻지 못하고,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라고는 생각되질 않았다.
“영혼을 위로하고자 만든 검은 복수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위령비로도 쓰지 못하지. 봉인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까 반 정도는 납치되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백혈교는 원래 반은 그 자리에서 죽이고, 반은 납치를 해간다. 그 자리에도 시체는 원래 마을 사람에서 절반밖에 없었어.”
라온이 억울하다는 듯 울어 재끼는 단검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전생의 어린 시절. 자신도 로베르트의 인간들에게 납치를 당했었다.
이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모두 죽기까지 했으니, 자신보다 더한 원한을 가졌을 것이다.
우우웅.
흐느끼는 듯한 단검의 울음소리를 듣자 까칠한 사포로 가슴을 긁는 듯했다.
“나는.”
라온이 다시 눈을 뜨고, 단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일을 이루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네 복수를 도와주기는 힘들다. 다만 혹시라도 백혈교와 부딪치게 된다면 네가 바라는 일을 해주마.”
단검의 울음소리가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가겠나?”
단검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생각을 하는 듯 검날을 떨었다.
우우우웅!
단검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요기가 흘러나왔지만, 이전처럼 해가 되는 기운이 아니다.
찌이잉!
회전하는 불의 고리와 공명하는 소리. 청아한 검명이었다.
“거, 검명?”
쿠베러드는 시원한 검명을 터트린 단검과 라온을 보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갔다.
“전 이걸로 고르겠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단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그걸 가져가겠다는 거냐?”
“안 됩니까?”
“하, 전설급 무기를 당당하게 가져가겠다는 놈은 처음이로군.”
어처구니없다는 말과 달리 쿠베러드의 표정은 시원하고 만족스럽게 보였다.
-뭣이 어째? 그 요망한 놈을 고르겠다고?
‘그래.’
-그놈은 기생충이다! 본왕의 것을 노리는 기생충을 몸에 두다니! 정신이 나간 것이냐!
‘기생충이라….’
라온이 뚱한 눈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냐! 본왕을 왜 그런 무엄한 눈으로 보는 것이야!
‘기생충이 하나나, 둘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아서.’
-기, 기생충 둘? 기생…. 설마! 지금 본왕을 말한 것이냐?
‘맞잖아. 너도 이 검처럼 내 몸을 노렸으면서.’
-이런 정신 나간! 본왕은 분노의 군주로서 마계의 북방을 통째로….
‘아니. 군주고, 지랄이고. 내 몸을 노리다가 실패해서 달라붙어 있는 건 사실이잖아.’
-다, 달라붙어? 본왕이? 으으으윽! 라온 지그하르트! 다 뱉으라고 입에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다! 본왕이 태어난 이후 이런 모욕은 처음이니라!
‘달렸으니 말을 하지.’
라온은 폭주하는 라스를 놔두고, 쿠베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위령비로 세우려 만든 검이니, 이름은 짓지 않았다.”
“그럼 제가 지어도 되겠습니까?”
“생각난 게 있나?”
“장인께서 그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진혼. 진혼검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요기를 흘리는 진혼검이라. 오묘하군.”
그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가져가라. 다만 네가 아까 했던 말을 지키거라.”
“물론입니다. 제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오마와는 계속 부딪칠 테니까요.”
“와, 요검. 요검을 얻다니….”
도리안은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듯 요상한 안경을 낀 채로 과자를 씹어먹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진혼검을 허리 뒤편에 착용한 뒤 쿠베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뭘 하느냐?”
“예?”
“검을 골라야지.”
“아니….”
“난 네게 검을 준다고 했지. 단검을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
그는 자신에게 검도 한 자루 주려는 것 같았다.
“정말 검도 주시려는 겁니까?”
“지지만 않으면 된다. 장인이 검사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쿠베러드는 아까 자신이 유심히 보고 있던 검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발칸 녀석을 보러 지그하르트에 놀러 갈 테니, 박대하지 말고.”
“물론입니다. 저희 집이 요리 하나는 잘합니다. 꼭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지.”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무슨.”
두 사람은 골목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라온이 고개를 숙인 뒤 대장간을 나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안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나 안 골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