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라온과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는 암시장 밖에 있는 한적한 골목의 찻집에 들어갔다.
“음, 내가 좋지 않은 때 온 건가?”
그리어 드 오웬이 찻잔을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잘 와주셨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딱 맞게 왔지.’
시험 때문에 스스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리어가 와준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했지 남이 밝히는 건 아무 말도 없었으니까 시험 평가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깜빡 속아 넘어갔지.’
그리어가 방계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검술 천재라는 말만 해주어서 제이나는 자신을 직계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후드를 벗었을 때 확실히 넘어간 표정이었다.
‘뭐, 오지 않아도 방법은 있었지만.’
그리어가 오지 않았어도 그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은 많았다. 물론 지금이 깔끔한 방법인 건 두말할 필요 없었지만.
-본왕이 잘못 보지 않았구나. 네놈은 역시 사악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인간보다 악마가 더 어울려.
‘그럴지도 모르지.’
리온이 피식 웃었다. 자신은 착한 인간이 아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라스 이상의 악마가 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먼 곳까진 어쩐 일인가.”
그리어가 차를 한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장비를 구입하려고 들렸습니다.”
“시험?”
“검사가 되기 위한 시험입니다.”
“아, 졸업 시험이군. 그럼 내가 한발 빠른 건가?”
“예?”
“후후.”
그리어가 빙긋 웃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살짝 뽑은 검에 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 기사의 표식!”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도리안이 벌떡 일어섰다.
“뭐, 왕자다 보니 기사라고 하긴 뭐하지만, 일단 실력은 인정받았지.”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소.”
그리어는 사자의 문양을 소중하게 쓰다듬은 뒤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근데 참 별일을 다 겪는군. 지그하르트의 천재 검사가 도둑으로 의심받다니.”
그는 말 같지도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저 아둔한 놈! 그거 사실이다. 이 정신 나간 놈은 정말 훔쳤단 말이다!
“으윽!”
라스가 말하지 못하는 게 화가 난 듯 냉기를 뿜어냈고, 도리안이 신음을 흘렸다.
“제이나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워낙에 귀하게 자라서 버릇이 없지. 내가 잘 타이르겠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장비라면 어떤 걸 구하려고 하는 거지?”
“일단 검을 좀 보려고 합니다. 저희는 정식 검사가 아닌 이상 개인의 검을 가질 수 없어서.”
라온이 가지고 있던 검을 툭 쳤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검도 아니라, 전투 전에 새로 구하고 싶었다.
“흐음, 그럼 좋은 곳을 하나 소개해주지. 서쪽 끝에 공방 거리가 있는데, 그 구석에….”
그리어는 여러 번의 손짓을 해서 한 공방을 알려주었다.
“작고, 지저분하지만 실력은 확실하지. 직접 소개해주고 싶지만, 할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지라….”
“아닙니다. 소개만으로 충분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소개만이 아니라, 오늘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다시 붙어보고 싶었는데, 영 아쉽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사의 자격을 얻은 그리어의 기도는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자신처럼 임무와 수련을 반복하며 벽을 넘은 것 같았다.
“나중에 꼭 오웬으로 찾아오게. 다 떼놓고 제대로 한 판 붙어보고 싶으니.”
그는 지그하르트에서 마지막에 보았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사라졌다. 방향을 보니, 다시 암시장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와, 진짜 겨우 살았네요.”
도리안이 실타래처럼 긴 한숨을 뱉어냈다.
“도련님이 이렇게 막 나가실 줄은 몰랐어요. 어우….”
“다 계획이 있었어.”
라온이 빙긋 웃었다. 도리안은 불안했겠지만, 자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은 손바닥 안에 있었다.
“믿기진 않지만, 도련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일단 공방부터 갈까요?”
“아니.”
안주머니에 있는 나비의 작은 꿈틀거림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할 일이 있어.”
* * *
라온은 숙소를 잡은 뒤 안 주머니에 넣어둔 블랙 버터플라이를 꺼냈다.
은은한 흑광을 휘감은 나비가 팔랑이며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이었지만, 이건 이 나비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저런 쓸모없는 나비를 훔쳐 온 것이냐.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더라고. 각자 다 필요한 곳이 있어.”
-헛소리! 세상에 불필요한 쓰레기는 널리고 널렸노라.
“이걸 보면 그런 생각 못 할걸.”
라온이 배낭에서 반은 빨갛고, 반은 푸른 꽃봉오리를 꺼냈다. 예전에 설호채주에게 얻었던 투톤 플라워다.
“네게 선물을 주마.”
투톤 플라워를 꺼내서 흔들자, 왼손에 앉아 있던 블랙 버터플라이가 아직 피지 않은 꽃잎 위로 내려앉았다.
꾸웅.
블랙 버터플라이가 투톤 플라워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꽃잎들의 색이 물감을 칠한 듯 진해진다. 반대로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 날개는 색을 빼앗기듯 백색으로 물들었다.
화아아아!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빛이 사그라들고, 투톤 플라워의 꽃잎이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두 영물 사이에서 피어난 빛이 방 전체로 번졌다.
명멸하던 푸른 빛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 날개는 설원이 되었고, 투톤 플라워의 봉오리 진 꽃잎은 개화하여 청아한 향기를 피워냈다.
-이, 이건 무엇이냐! 마나만 빨아 먹는 아귀 같은 나비가 꽃을 피워내다니!
‘말했잖아. 쓸모없는 건 없다고.’
라온의 웃음과 동시에 투톤 플라워를 활짝 피워낸 블랙 버터플라이가 날아올랐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힘찬 날갯짓이다.
“더 예뻐졌네.”
손을 올리자, 블랙 버터플라이가 허공을 선회하여 손등에 내려앉았다.
“저주가 풀린 걸 축하한다.”
블랙 버터플라이와 투톤 플라워는 각자 다른 저주를 지녔다.
블랙 버터플라이는 마나를 먹기만 하고 소화를 못 하는 저주 그리고 투톤 플라워는 마나를 모으지 못하는 저주.
두 가지 저주 때문에 두 영물의 등급은 희귀에서도 하급이었다.
하지만.
‘그 둘이 모이면 달라지지.’
마나를 가득 먹은 블랙 버터플라이가 마나를 응집시키지 못하는 투톤 플라워에게 마나를 넘겨주게 되면 그 둘의 저주가 풀리게 된다.
마나를 넘겨준 채 자유롭게 떠나는 블랙 버터플라이와 찬란한 꽃을 피운 투톤 플라워는 함께여야 완성되는 공생관계였다.
‘이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라온 역시 만화공에 적혀 있던 지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거다
우우웅.
라온이 투톤 플라워의 선명한 빛을 보고 있을 때 블랙 버터플라이가 손등을 간지럽혔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에 손을 내밀어 블랙 버터플라이가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우웅.
블랙 버터플라이가 경쾌한 날갯짓을 하며 천천히 떠올랐다. 건물 주변을 휘돌던 녀석은 다시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인사를 하듯 날개를 한 번 접고서 드넓은 창공으로 떠나갔다.
“잘 살아라.”
라온은 손을 흔들어주고서, 창을 닫았다. 바닥에 앉아 활짝 핀 투톤 플라워를 보았다.
네 장의 꽃잎 중 두 장은 붉은색으로 남은 두 장은 푸른색으로 반짝인다. 이대로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이게 진짜지.’
소량의 화속성 마나와 수속성 마나가 깃들어 있던 투톤 플라워가 블랙 버터플라이에 의해 피어나 많은 마나를 끌어모은 이 상태가 투톤 플라워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제 먹어도 되겠어.’
꽃이 핀 걸 확인했으니, 이제 저 꽃잎에 담긴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차례였다.
영약이란 자연의 기운이 모인 것이지만, 응집될 때 불순물이 쌓여 자연의 마나보다 순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투톤 플라워는 다르다.
홀로 개화한 게 아니라, 다른 영물의 힘을 빌리며 한 차례 정제되었고, 두 속성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두 마나에 관해서는 날것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게 딱 맞는 영약이지.’
라온은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고,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의 오러를 가지고 있다. 투톤 플라워의 기운을 흡수하기에는 누구보다 적합했다.
‘그럼.’
투톤 플라워를 알약 먹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씹을 필요도 없었다. 투톤 플라워는 달콤한 꽃향기를 입안에 펼치기도 전에 설탕처럼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크으….’
뱃속이 뜨거웠다가 차가워졌다가를 반복했다. 불과 얼음을 번갈아 대는 듯한 감각. 배를 찢을 듯 난리 치는 걸 보니, 투톤 플라워의 기운은 진짜였다.
라온은 가는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앉고는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치솟은 정심한 기운이 전신을 휘돌자, 배를 후려치던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뜨거운 오러가 마나회로를 타고 올라 투톤 플라워의 기운을 이끌기 시작했다. 어깨가 뜨겁고, 심장은 차가워졌으며, 팔뚝은 시원했고, 허벅지는 묵직했다.
만화공의 흐름을 따르는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정말 순수하네.’
투톤 플라워에 담겨 있던 두 속성의 기운은 막 내린 눈처럼 깨끗했다. 만화공을 휘돌리기만 해도 자석처럼 척척 달라붙었다.
고오오오오!
라온의 전신이 바르르 흔들렸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전신에 퍼져 있던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단전에 차곡차곡 쌓이는 희열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입가에는 들뜬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투웅!
만화공을 반복해서 운용할 때마다 단전과 육체가 진동하여 마나회로에 녹처럼 끼어 있던 노폐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후우우욱!
라온은 육체와 오러의 결이 한 단계 진화하는 것을 느끼며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라온이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서 검회색 벼락이 번쩍였다.
[혹한의 저주 한 가닥이 사라집니다.]
[단전과 마나회로의 내구성이 상승합니다.]
[기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정신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메시지를 볼 필요도 없었다. 단전에 차오른 순도 높은 기운과 더 넓어진 마나회로 그리고 가뿐한 몸 상태만으로도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 이상인데.’
아무리 투톤 플라워라고 해도 전부 흡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큰 오해였다.
투톤 플라워의 순도는 십지초 이상이었다. 낭비 없이 대부분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꺾이지 않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네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5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1성), 불굴의 의지(1성).
근력 : 72.
민첩성 : 73.
체력 : 66.
기력 : 70.
감각 : 79.
분노 : 10.
모든 능력치가 전부 상승했지만, 가장 크게 올라간 건 기력이다. 기력 수치가 10이 넘게 오르며 70을 찍었다.
‘이 정도라면 반나절은 싸울 수 있을지도.’
단전에 차오른 만화공의 오러와 혹한의 냉기의 크기도 기력 수치만큼 커졌다. 단기결전이 아니라, 장기로 싸워도 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상태라면 소드 익스퍼트 상급도 어렵지 않게 이기겠는데.’
단순히 오러가 늘어서 강해졌다는 게 아니다.
오러가 적어서 쓸 수 없었던 만화공의 다른 검술도 추가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전보다 2배 이상 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아직 쓸 수 없는 검술이 더 많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만화공의 검술은 막대한 오러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불의 고리로 오러를 정화했다고 해도 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더 빨리 성장해야 해.’
할 일이 많으니까.
실비아를 직계에 올려야 하고, 루난과 주디엘의 동생을 구해야 하며,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한다. 오러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 모두.
“후.”
라온이 일어서서 창가를 보았다. 오후부터 밤새 연공을 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 것 같았다.
‘시험 좀 해볼까.’
연공으로 밤을 보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변한 육체와 내공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공터를 찾아갔다.
가볍게 몸을 풀고, 진각을 밟았다.
쿠웅!
내리 찍힌 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지고, 모래가 비산한다. 이전과 같은 진각이지만 내공의 질이 달라 공터 전체에 소리가 울렸다.
퍼어엉!
발을 구른 힘을 허리에 연결해 검을 내리그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우우우웅!
라온의 내뻗은 칼날에 진한 붉은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봉오리 져 있던 만화공의 검술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펑! 퍼어엉!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같은 검격이 뿜어져 나왔다. 자격을 얻은 검사라고 해도 막지 못할 아찔한 검술의 연계였다.
쿠구구구!
화염의 칼날에서 뿜어지는 폭발적인 열풍에 라온의 주변은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초토화되어 있었다.
“후우….”
연성검술과 광아검, 만화공의 검술을 차례로 펼친 라온이 들뜬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좋은데.’
라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폐물이 빠져나오면서 육체와 혈도가 한층 개선되었다. 내공도 움직임도 반응이 빨라졌다.
역시 몸을 움직여봐야 한다니까.
메시지를 보는 것과 직접 몸을 움직이는 건 천지 차이다. 이렇게 직접 몸을 써봐야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자, 그럼.”
라온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검을 툭 쳤다.
“검을 구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