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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09화 (109/653)
  • 109화

    발카르 왕국.

    신비로운 마법과 독보적인 아티펙트 제작 능력을 가진 왕국으로 지그하르트와 함께 육황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막강한 세력이다.

    제이나 루인 발카르는 그 발카르의 왕녀였다.

    발카르의 왕녀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어린 나이에 뛰어난 마법 재능과 특별한 능력까지 갖춰 어딜 가든 주목을 받았고, 누구에게나 존중을 받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누구나 알아보는, 대륙에 몇 없는 진짜 왕족이었다.

    그녀는 발카르의 왕녀답게 지는 걸 견디지 못했다.

    싸움에서 졌으면 수백 골드가 넘는 스크롤을 찢어서라도 이겨야 했고, 도박에 졌으면 수십 배의 돈을 걸어서라도 승리해야 했다.

    제이나는 어제 도박판에서 자신을 이겼던 용병이 상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고, 그가 가진 반지를 보게 되었다.

    ‘황금빛?’

    장비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녀의 능력 스티르가 자동으로 발동하며 남자가 들고 있는 녹슨 반지의 실제 등급이 유일 급임을 알려주었다.

    ‘저런 물건이 왜 여기에 있지?’

    이런 시궁창이 아니라, 지하 2층에서나 거래되어야 할 물건이 남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반지는 녹슬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일 등급이라면 금괴를 가져가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으니까.

    제이나는 남자에게 반지를 10배의 가격으로 사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10배가 아니라, 그냥 바치리라 생각했다. 이제 저 무지렁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50배의 가격을 불러도 그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제이나는 거절당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날 모르는 놈이네.’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알고 벌벌 기는 모습이 기대되어 일단 그를 보내주었다.

    남자는 조롱을 듣고도 별 반응 없이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계속 경매만 구경하던 그는 블랙 버터플라이라는 나비에 관심이 있는지 처음으로 입찰했다.

    ‘저걸 노린 건가.’

    제이나가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가격을 올릴 때마다 추가로 입찰해서 돈을 올렸다.

    어느새 금화 30개가 넘었고, 남자의 손이 아주 느릿하게 올라갔다. 금화 40개.

    ‘고작 40개인가.’

    반지를 가져간 남자의 보유 금액은 금화 35개에서 40개에 정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푼돈. 비웃음을 흘리며 50개를 불렀다.

    “끙….”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손을 내렸고, 그 손이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제이나는 그 후에도 남자가 입찰하는 물건을 모조리 2배에 가까운 금액을 주고 낙찰받았다.

    자신에게 반항한 남자의 표정은 물을 주지 않은 꽃잎처럼 바싹 말라 갔다. 누구를 건드린 건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저 표정이지.’

    돈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벌 수 있는 푼돈이니까. 진짜 보고 싶은 건 인간이 절망하고 당황하는 저 표정이었다.

    “후우!”

    남자는 짐을 놔둔 채 경매장 밖으로 나갔다.

    제이나가 들뜬 미소를 지었다.

    ‘다 보이네.’

    저 남자가 이제 자신의 정체를 듣고, 경악할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돌아오겠지. 그다음엔 더 뻔하고.

    남자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반지를 바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서 발카르에 밉보이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제이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긴 다리를 꼬고, 얼마 남지 않은 경매를 즐겼다.

    잠시 후 경매가 끝나 갈 때쯤 남자가 돌아왔다.

    ‘역시.’

    물기 가득한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경악한 게 분명했다.

    “후후.”

    제이나는 거만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남자의 뒤에 섰다.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빙긋 웃으며 조롱의 말을 건넸다. 이제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예상과 180도 달랐다.

    남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귀가 먹혔냐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흡사 파리를 쫓는 것처럼.

    ‘이 미친놈이?’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 저런 건방진 짓을 할 리 없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보네.”

    가면을 벗으려고 할 때 룸에 보내놓았던 가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 아가씨. 객실에 있던 경매품들이 사, 사라졌습니다.”

    “뭐?”

    “나비랑 몇몇 경매품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가드는 누구도 침입하지 않았는데, 경매품들이 없어졌다고 벌벌 떨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

    “곤란한 일이 있나 보네?”

    따지려 할 때 남자가 조금 전 자신이 할 말을 그대로 읊으며 웃었다. 비웃음. 항상 자신이 남에게 보이던 그 미소였다.

    ‘이놈이다!’

    거의 틀리지 않는 감이 속삭였다. 이 거렁뱅이가 물건을 훔친 범인이라고.

    “너지.”

    제이나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뭐가?”

    “네가 훔쳤잖아!”

    “뭘 훔쳤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옆에 있는 어벙하게 생긴 놈만 덜덜 떨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제이나가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여우 가면을 벗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뚱했다.

    “뭐하냐?”

    “나 몰라?”

    “모르는데?”

    “하!”

    진짜 모르는 표정이라는 게 더 열받았다.

    “나 제이나야. 발카르 왕국의 국왕 로스타스 디루아 발카르의 막내딸이라고!”

    “발카르의 공주?”

    자존심을 구기고 스스로를 밝혔다. 남자의 머리를 덮은 후드가 크게 흔들렸다. 놈은 이제야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 넌 발카르를 건드렸….”

    “그래서 어쩌라고?”

    헉 소리를 내며 경악하던 남자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진짜! 저거 잡아!”

    “아가씨?”

    “저놈이 경매품을 훔친 게 분명해! 꿇려서 뒤져!”

    제이나가 악을 질렀다. 진짜 훔쳤거나 아니거나 상관없다. 저놈의 구겨진 표정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실례 좀 하겠소.”

    예의 바른 말과 달리 가드의 손은 험악했다. 단숨에 뻗어가 남자의 어깨를 부수려고 할 때, 남자의 손이 반원을 그렸다.

    터엉!

    가드는 팔이 꺾인 채 바닥에 짓눌렸고, 남자는 가드의 머리에 다리를 올려놓고 코웃음을 쳤다.

    “생각 없이 공격부터 하네. 너희들 자신 있어?”

    남자가 밑에 깔린 가드를 짓밟으며 탁한 음성을 흘렸다. 그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카르에 밉보이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직접 네놈이 도둑이라는 걸….”

    “라온? 라온이 아닌가!”

    마법을 쓰려고 할 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화려한 예복을 입은 금발의 사내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어?”

    제이나가 눈을 부릅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았던 오웬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반가운 표정으로 거렁뱅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맞군! 목소리가 똑같아서 자네일 줄 알았네!”

    “오랜만입니다.”

    남자는 그리어와 안면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어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

    그리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남자를 가리켰다.

    “내가 예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었지. 지그하르트에 진짜배기 검술의 천재가 있다고. 바로 이 친구야. 라온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제이나가 남자의 이름을 듣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지, 지그하르트라고?”

    “북방의 패자!”

    “그, 그럼 지금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게 시비를 건 거야?”

    “와, 이거….”

    옆에서 모른 척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육황인 발카르와 지그하르트의 부딪침에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쯧.”

    라온이라 불린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선명한 금발과 붉은 눈동자. 현 지그하르트의 가주인 글렌과 같은 머리색과 눈빛이었다.

    ‘직계!’

    직계가 아니고서야 저런 눈빛과 머리색이 나올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잘못 건드렸다.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주제를 모른다고도 했고, 도둑놈이라고도 했지. 그런데 이번엔 먼저 공격까지 하네.”

    라온의 눈동자가 빨갛게 번쩍였다. 그의 발밑에서 타오른 이글거리는 기세가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사나운 기파였다.

    “난 참을 만큼 참은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그, 그건….”

    제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지렁이 용병을 대하는 것과 지그하르트의 직계를 대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이거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 시비를 건다고 봐도 되는 건가?”

    “나, 난 네가 누구인지 몰랐어.”

    “모르는 사람을 모욕하고, 건드리는 게 더 미친 짓 아닌가? 성격이 특이하군.”

    라온은 자신을 비꼬듯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 새끼가 진짜….’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먼저 건드렸다고 해도 역으로 조롱을 당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하, 그래서 어쩌자고, 네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놈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을 거다.

    “할 수 있는데.”

    “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러설 거라 생각했던 그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여기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으로 네게 싸움을 걸 수 있는데, 넌 할 수 있나?”

    “개, 개소리!”

    제이나가 턱을 떨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분명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라온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고,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피워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리어가 저 라온이라는 놈의 재능과 검술이 뛰어나 언젠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거기다 저렇게 돌아다닌다는 건 검사가 되었다는 건데.’

    어려 보이는 외모. 저 나이에 검사가 되었다면 상당한 인망이 있다는 뜻이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를 힘으로 제압하려 하고 도둑으로 몰았다는 건 네 생각보다 파급이 큰 일이다.”

    “으윽….”

    제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사과해라. 이 자리에서 용서를 빈다면 넘어가 주지. 거절한다면 발카르에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

    라온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폐가 우그러드는 감각. 정말 그리어보다 어린 놈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의 기세였다.

    “자, 잠깐만 생각 좀….”

    “5초 주지. 5, 4.”

    놈은 시간도 끌 수 없게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기세, 눈빛, 상황 장악 모두 범상치 않았다. 이런 놈이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젠장….’

    주변을 돌아보았다. 경매 직원들도, 손님들도 다 이곳을 보고 있었다. 괜히 가면을 벗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휩쓸었다.

    “3, 2, 1.”

    “미, 미안해.”

    라온이 1이라고 말한 순간 허겁지겁 사과의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누가 용서를 빌 때 반말을 하지?”

    “…미, 미안해요.”

    제이나가 이를 악물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누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인사를 하지?”

    “당신 진짜….”

    “해라.”

    라온의 명령 같은 말에 제이나가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뭘?”

    “흐으….”

    당장 일어나서 라온에게 마법을 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겨, 경매장이랑 카지노에서 시비를 걸고, 도둑으로 의심해서 정말 죄. 죄송…합니다.”

    답이 없었다. 제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북해를 마주한 듯한 차가운 눈빛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나도 일을 크게 벌일 필요 없으니. 여기까지 하지.”

    “아….”

    “왕국을 망신시키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언행에 조심하도록.”

    그가 한심하다는 듯한 손짓을 하며 카지노를 나갔다. 그리어는 자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라온을 따라나섰다.

    “…….”

    제이나의 침묵에 경매장에 있는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지배인.”

    “에, 예에!”

    계단 아래에 있던 경매장 지배인이 꼬리에 불붙은 개 마냥 뛰어왔다.

    “오늘 VIP층 경계 센서 작동한 적 없어?”

    “어, 없습니다.”

    “통제실은 어디 있어.”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배인은 허리를 반으로 굽힌 채 제이나를 통제실로 안내했다.

    “마나석 센서 출입 목록이랑, 경계 내역 전부 가져와!”

    제이나가 통제실 안의 테이블을 부수며 악을 내질렀다.

    ‘분명히 있어.’

    어쩔 수 없이 당했지만, 놈이 도둑질했다는 확증만 찾으면 역전할 수 있다.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서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확인해! 하나도 놓치지 마!”

    하지만 그녀의 가드들과 경매장 직원들이 눈 빠지듯 뒤져도 라온의 모습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만 등록되었을 뿐이다.

    “말도 안 돼….”

    제이나가 턱을 떨며 주저앉았다. 자신의 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라온을 도둑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증거도 나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불온한 느낌, 놈의 부하의 반응, 경매가 딱 끝났을 때 나타난 상황을 보면 라온이 경매품을 훔친 건 확실하다.

    하지만 확증이 없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또 의심했다간 정말 역풍이 불어닥칠 거다.

    으득.

    제이나가 이를 갈며 발을 굴렀다.

    “그 새끼 도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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