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포커.
딜러가 임의로 보내는 카드로 족보를 맞추고, 칩을 건 뒤에 패를 열어 가장 높은 족보를 가진 사람이 모든 판돈을 먹어 치우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다.
족보만 외운다면 딱히 룰을 배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포커는 카지노에서 가장 인기 많은 도박 중 하나였다.
암시장 카지노에서도 그 인기대로 포커 테이블이 20개가 넘었는데, 신기하게도 구경꾼들은 가장 끝자리에 있는 테이블에만 모여 있었다.
“지, 지금 몇 연승이지? 4? 5?”
“내가 봤을 때 6연승이었는데.”
“멍청이들아. 지금 연승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상대 패를 전부 아는 것처럼 게임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저렇게 잘하냐?”
구경꾼들은 테이블 중앙에 앉은 검은 로브의 남자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연승만이 아니라, 승률도 미쳤어. 10판에서 7판 넘게 이겼을걸?”
“끗발 장난 아니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지랄. 넌 항상 빈털터리였잖아!”
“와, 칩 봐라. 아주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럽구만.”
그 말대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앞에는 칩이 언덕처럼 솟구쳐 있었다.
“후!”
“음….”
“젠장.”
그걸 지켜보는 같은 테이블의 도박꾼들은 식은땀을 흘리거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꾼 아니야? 타짜라고 하던가?”
“멍청아! 암시장 카지노 내부는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서 마나를 못 써. 그리고 타짜였으면 이미 저 딜러가 잡았겠지! 저 딜러도 경력이 20년이 넘는데!”
“아, 그러고 보니 딜러도 바뀌었지.”
저 로브의 남자가 연속으로 따다 보니, 다른 손님의 항의에 딜러가 한 번 교체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남자는 돈을 잃지 않았지만.
“그럼 진짜 운이라는 거네?”
“와, 나한테 저런 끗발 좀 섰으면….”
“뭐 운이야 당연한 거고. 판단력도 좋아 보여. 눈빛이 장난이 아니야.”
“끄으윽….”
구경꾼들의 말을 듣던 도리안이 손톱을 물어뜯다가 검은 로브의 남자. 라온에게 다가갔다.
“도, 도련님. 이제 그만하죠. 초심자의 행운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지금이 기회라구요! 다들 운이라고 하잖아요!”
“초심자의 행운이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건데.”
라온은 도리안의 불안한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만둘 때가 되긴 했지.’
산더미처럼 쌓인 칩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버터플라이의 경매가는 금화 10개에서 20개. 지금 번 돈이 금화 35개니 그만할 때도 되었다.
‘더 했다간 시비가 걸릴 수도 있고.’
시간이 없어서 연승을 했지만, 실제로는 며칠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따는 게 정석이다. 이 이상 땄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금화로 바꿔주세요.”
라온이 딜러에게 침을 밀어주며 일어섰다.
“잠깐! 그냥 간다고?”
주사위 게임에서 포커판까지 따라온 여우 가면의 여자가 따라 일어섰다.
“뭐, 벌 만큼 벌어서.”
“따기만 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
“여기 따려고 오는 곳인데?”
“한 판만 더 해. 난 한 번도 못 이겼어!”
“시간이 별로 없거든.”
“이익!”
여우 가면의 여자가 살벌한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사위부터 포커까지 내리 20판을 지다 보니, 화가 폭발한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따라오래?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와서 덤볐다가 져놓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음….”
“커험.”
“다, 다른 데로 가야겠네.”
신기하게도 여자가 일어서서 화를 내니, 구경꾼들이 눈동자를 홱 돌렸다. 꼭 두려워하는 것처럼.
예상했던 대로 저 여자는 이름난 가문 출신인 것 같았다.
“아직 돈 많네.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다가.”
“도박 좀 한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깝치지 말고 거기 서!”
“아, 그래.”
라온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어차피 떠날 거라 그녀의 지위가 높든 말든 상관없었다. 뒤에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출구로 향했다.
“가자.”
“아, 예!”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도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따라붙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본왕과의 거래는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잊었다면 죽이려고 했었는데 다행이로구나. 가자. 거래를 끝내러.
묵직하고도 차가운 목소리. 다만 그 거래 대상이 아이스크림과 음식이라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알겠다. 가자.’
라온은 피식 웃으며 카지노를 떠났다.
* * *
여우 가면의 여인이 샛노란 눈동자로 카지노를 나가는 라온의 등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세타르.”
“예.”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부복했다.
“저 자식 뭐 하는 놈인지, 뭘 노리는지 알아서 와. 전부.”
“왕…아니, 제이나 아가씨.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지하 도박장 안 간 걸로 네 부탁은 들어줬을 텐데?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지?”
카지노는 이곳만 있는 게 아니다. 판돈에 제한이 없어 도박에 목숨을 건 사람들만 가는 진짜가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 근신이 아직….”
“닥치고 가. 저 새끼 분명히 사기 쳤어. 확률상 저렇게 이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내가 직접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야!”
“후, 알겠습니다.”
세타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흥.”
제이나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도박장을 나가려고 할 때 딜러가 다가왔다.
“치, 칩을 놓고 가셨습니다.”
“필요 없어. 당신이나 가져.”
그녀는 금화 10개가 넘는 칩들을 보지도 않고 딜러에게 넘겼다.
“예? 아….”
딜러는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제이나는 이미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제이나가 차게 웃었다. 돈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승패. 고귀한 피로 태어난 이상 저런 평범한 인간에게 지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뭐가 되었든 네 앞길을 막아주지.’
* * *
-흐흠.
라스는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바짝 올라간 상태로 미소를 흘렸다.
-본왕은 저것이 끌리노라.
그는 푸른 냉기로 손가락을 만들어 한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저거?’
라온이 그 아이스크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뭔지 모를 바탕에 초콜릿칩이 사이사이에 낀 요상한 형태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거 루난이 예전에 보여준 것 같은데.’
-맞다. 네놈이 먹지 않았던 그 아이스크림이다. 본왕의 꿈에서도 나왔었지.
라스는 아이스크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일단 이거 하나 주세요.”
라온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라스가 선택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오, 손님. 민트초코를 고르시다니, 아이스크림 좀 드실 줄 아시는 분이군요.”
점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활짝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민트초코?”
“억!”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도리안이 펄쩍 뛰며 다가왔다.
“도, 도련님. 지금 민트초코를 시키신 거예요?”
“그렇다는데?”
“허, 이런….”
“왜?”
“도련님 박하 아시죠? 그 톡 쏘는 거.”
“알고 있어.”
“이 아이스크림. 그 박하로 만든 겁니다. 입안이 화해진다구요! 맛대가리 없어요!”
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겁먹은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저렇게 안타까워하는 표정은 처음이다.
“저 손님은 맛을 잘 모르시는군요. 달달한 초콜릿 맛으로 시작해서 텁텁함 없이 상큼하게 끝나는 민트초코의 즐거움을 모르시다니.”
점주는 반대로 도리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여기 민트초코 나왔습니다.”
그는 직접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전해주었다. 원뿔 형태의 과자에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었다.
-빨리, 빨리 먹어 보거라. 본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노라!
라스의 냉기가 퍼지고 퍼져 아이스크림 가게 전체를 뒤덮었다.
‘알겠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녹색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점주와 도리안이 반응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참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싸운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음.”
처음에는 다른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혀를 휘감았다. 그렇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톡 쏘는 듯한 박하 향이 입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뭐랄까.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굉장히 어중간한 느낌이다.
-오옥! 맛있도다! 달달함과 깔끔함이 조화되는 이 맛은 마계에도 없어. 이건 혁명이다!
라스는 마음에 들었는지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슨 춤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뻐 보였다.
“어떤가요?”
“도련님. 괜찮으세요?”
도리안과 점원이 동시에 다가와 맛을 물었다.
“난 좀 별로네.”
“으윽!”
“역시 도련님은 맛을 좀 아시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 혀에 문제가 있다니까.”
점주이 인상을 찌푸렸고, 도리안이 활짝 웃었다.
-무얼 하는 게냐! 더, 더 먹어라! 어서!
‘에휴.’
약속은 약속이었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남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은 전부 먹어 치웠다.
“헉! 도련님! 그걸 또 왜 드십니까!”
도리안이 레몬이라도 한 입 씹은 표정으로 팔을 흔들었다.
“크하하하! 입은 속여도, 가슴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지! 별로인 것 같다가도 계속 끌리는 게 바로 민초의 매력입니다!”
점주가 민트초코를 하나 더 펐다. 그리고는 공짜라며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매력은 무슨! 그냥 맛이 어중간하고, 요상한 거죠!”
“민초의 훌륭함을 모르는 손님이 불쌍해.”
라온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도리안과 점원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어떤 천재가 만든 것이냐! 당장 물어보거라! 본왕의 부하로 삼겠노라!
“이 아이스크림은 누가 만든 겁니까?”
“아, 이젠 역사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점주는 역시 민초는 위대해라고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남쪽 지방의 한 영주가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민초단도 있죠?”
“민초단? 도적단인가요?”
“그럴 리가요! 민트초코를 사랑하는 모임입니다!”
“그런 걸 좋아하다니, 도적단이랑 다를 게 없네.”
도리안이 점주를 보며 혀를 찼다.
“손님 그 말 취소하시죠!”
점주가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것처럼 손을 떨었다.
“하아….”
라온이 두 사람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들은 있네.’
-라온 지그하르트! 민트초코 하나 더 주문해라! 본왕의 마음에 쏙 드는 디저트니라! 마계에 민트초코 가게를 내겠노라!
물론 제일 이상한 건 요놈이지만.
* * *
다음날.
라온은 경매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다시 암시장으로 내려갔다.
‘아직도 입이 좀 화하네.’
-본왕은 만족하느니라. 훗날 마계의 바다를 민초로 바꾸겠노라.
라스는 어제 민트초코에 단단히 빠져 아이스크림 네 개 중 네 개를 전부 민트초코로 골랐다. 본인의 절대 미각을 만족시킨다나 뭐라나.
어쨌든 별로라고 해놓고, 민트초코만 네 개를 먹는 미친 짓을 해서 도리안은 고개를 내저었고, 점원 아저씨는 흡족하다며 몇 가지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었다.
“오늘은 민트초코 안 드십니까?”
“그거 별로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고 4개를 내리 드셨잖아요. 다시 먹어봤지만, 정말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도리안은 어제처럼 레몬을 문 표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어.”
거래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민트초코의 맛을 모르다니, 한심한 놈이로다!
라스는 도리안을 보며 겁 많은 놈이 입맛도 별로라고 혀를 찼다.
“음, 아직 경매 시작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경 좀 하자. 어젠 돌아보지도 못했으니까.”
“알겠습니다.”
블랙 버터플라이를 사고도 돈은 꽤 남기 때문에 암시장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곳엔 특별한 물건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싼값에 보물을 구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상점에 들어갔다. 반지와 팔찌, 목걸이, 귀걸이 같은 귀금속이 걸려 있었다. 액세서리를 파는 곳인 것 같다.
상인은 관심이 없는지 테이블에 턱을 괴고, 꾸벅이고 있었다. 훔쳐 가도 신경 쓰지 않을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훔쳤다간 난리가 나지.’
물건에도, 가판대에도 마나석과 마나를 이용한 감시 및 보안 체계들이 설치되어 있다. 못 모르고 훔쳤다간 바로 제압당해 암시장 지하로 끌려가게 될 거다.
“뭣 좀 보이십니까?”
“별거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좋아 보이지만, 평범하다. 자신이 찾는 건 진짜 능력이 드러나지 않은 보물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상점에 들어갔다. 여기도 액세서리를 걸어놓았는데, 방금 본 곳보다는 조금 더 물건들이 낡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여기도 없군.’
물건들을 쭉 살펴보았지만, 끌리거나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고 나가려고 할 때 입구에 놓여 있는 녹슨 반지에 시선이 갔다.
‘뭐지?’
저 반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 기억이 아니다.
머릿속에 박힌 만화공의 지식. 그 안에 저 반지가 새겨져 있었다.
“허!”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녹슨 반지를 쥐었다.
‘이 반지가 여기에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