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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03화 (103/653)

103화

라온은 연무장 중앙에서 리메르와 마주 서서 검집을 만졌다.

“무슨 바람이 부셨습니까? 귀찮아서 관전도 안 하시던 분이.”

“가끔은 몸 좀 풀어줘야 관절에 녹이 안 슬거든. 그리고….”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검을 뽑았다.

“대련 상대가 다 도망가서 어깨가 축 처진 제자를 보는 것도 마음이 쓰려.”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을 뽑았다.

‘역시 순수한 사람이군.’

리메르가 귀차니스트인 건 분명하지만, 그 이상으로 제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그는 어떤 의도 없이 순수하게 도와주러 이곳에 온 것 같았다.

‘광아검의 성취를 단번에 올릴 기회야.’

리메르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서 있는 검사다. 그와 대련을 하게 되면 광아검의 성취만이 아니라, 실력 자체가 상승하게 될 거다.

“관전자가 한 명인 건 조금 아쉽지만, 시작할까?”

“좋습니다.”

두 사람은 중앙에 서 있는 루난을 바라보았다.

“시작.”

그 시선을 받은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올렸던 손을 내렸다.

“흐읍!”

라온이 이를 꽉 깨물고, 발을 굴렀다. 만화공의 기운을 휘돌린 육체에 광아검의 구결을 운용하여 검을 내리쳤다.

나무를 가르는 톱니처럼 대기가 깎여나갔다.

“이야, 많이 늘었어.”

리메르가 감탄하며 검을 그었다. 둥글게 펼쳐진 녹색 기운이 허공을 수놓았다.

치이이잉!

광아검의 흉폭한 검격과 리메르가 펼친 부드러운 기운이 맞부딪쳤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리메르는 광아검의 검격을 흘리지도, 막아내지도 않고, 검세에 담긴 힘을 가라앉혔다.

광아검 같은 사나운 기세의 검격의 힘을 줄이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다.

“신기하냐?”

리메르가 진녹색으로 빛나는 검을 휘돌리며 빙긋 웃었다.

“얇게 편 검기를 다발로 퍼뜨려 상대의 검격을 제어하는 검술이다. 검이 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다양해. 자신의 검만이 아니라, 상대의 검을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 하지.”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광아검의 구결이 어린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아 쏘아냈다.

뒤를 이어 바로 다음 검술을 준비했다. 광아검의 다섯 번째 형 운형참이었다.

막강한 기세를 품은 검격이 연속으로 뿜어져 나왔다.

쾅! 콰아앙!

리메르는 자세를 낮춘 채 검을 사선으로 세워 수비에 힘을 쏟았다.

‘그럼 이쪽이 좋지.’

라온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광아검은 상대가 수세로 나올수록 빛을 발하는 검술. 승세를 잡았다고 봐도 된다.

쩌어어엉!

리메르의 방어를 뚫어내기 위해 광아검의 모든 초식을 사용했다.

거대한 늑대가 먹이를 물어뜯듯 강렬한 검격이 폭발했지만, 리메르의 방어는 철벽처럼 깨지지 않았다.

“칫!”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광아검의 모든 초식을 쏟아냈지만, 틈이 보이질 않았다.

“조금씩 답답하지?”

리메르가 검을 맞댄 틈 사이로 씩 웃었다.

“네가 익힌 감각검의 위력은 대단해. 아직 성취가 낮음에도 다른 검술들을 손쉽게 부술 정도지. 하지만 너무 편향적이다!”

“큽!”

리메르가 손목을 비틀었다. 강력한 반탄력에 라온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음….”

라온이 검에 휘감긴 리메르의 기운을 풀어낸 뒤 자세를 다잡았다.

“감각검은 이름 그대로 감각에 의지하는 검술이지만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특히 네가 익힌 건 더더욱 생각하며 검을 휘둘러야 하지. 왜 그 이름인지를 생각해봐라.”

“이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정도 알려줬으면 됐지. 아예 밑천까지 달라는 건 좀 아니잖아?”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후….”

라온이 탁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지.’

스승에게만 의존하면 결국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린다. 저런 힌트를 받았다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름. 이름….’

최근 광아검을 사용하면 할수록 위력은 확실히 강해졌지만, 생각이 단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이는 틈에 검을 박아 버린다는 열망만 가득했다.

‘방금도 그랬어.’

리메르가 만들어내는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넣다가 대련이 끝났다. 이런 방식으로 성장할 수 없다.

“조금 더 해봐야겠습니다.”

“그래. 와라.”

리메르가 웃으면서 모은 네 손가락은 까딱였다.

“흡!”

숨을 깊게 들이켜고 땅을 박찼다. 여전히 방어 자세를 하는 리메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진한 쇳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촤아악!

라온이 살짝 밀려 나간 검을 뒤집어 그대로 내리그었다. 리메르의 검이 우측으로 돌아간다. 완벽한 방어. 이전처럼 뚫을 수밖에 없는 수비였다.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검술은 여전히 사납지만,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 순간 공격만 생각하던 시야에 리메르의 좌측 허리가 들어왔다. 빈틈은 아니다. 단단하게 방어를 갖춘 곳이다.

‘다만.’

빈틈을 만들 수 있다는 예감이 뇌리를 관통했다.

후우웅!

라온이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폭포처럼 격하게 떨어지는 검격에 리메르가 어깨를 부드럽게 세웠다.

쩌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친 반탄력에 손목이 밀려 나간 순간 리메르의 왼쪽 허리에 빈틈이 생겨났다.

라온은 곧바로 발목을 틀어 검의 궤도를 바꿨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회전력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헉!”

리메르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의 빛이 돋아났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재빠르게 휘돌렸다.

쩌저정!

그는 라온의 검에 담긴 격렬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바, 방금 뭐냐? 왜 갑자기 검로를….”

“보였습니다.”

“보여?”

“네.”

광아검의 공격에 매몰되어 있던 머리를 여유롭게 풀어주니, 상대의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틈이 아니라, 틈을 만들 방법이 보였다. 즉, 수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그걸 전부 알려드릴 수는 없죠.”

리메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웃었다.

“말까지 가르칠 생각은 없었는데?”

“원래 애들은 보는 대로 배우는 법입니다.”

라온은 발로 땅을 툭툭 두드린 후 아직 자세를 다 잡지 못한 리메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     *      *

휘익.

리메르는 달려오는 라온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그대로 검을 올려 쳐왔다.

“아직 멀었어.”

검을 눕혀 완벽한 방어 자세를 잡았을 때 라온의 움직임이 변했다. 허리를 올려 치던 검을 틀어 좌측 손목을 노려왔다.

‘이런!’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검 끝에 오러를 만들어 방어하고, 역공을 노렸다.

치이잉!

하지만 라온의 검은 다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본능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상대의 빈틈을 찾는 조련된 야수의 움직임 같았다.

‘이 녀석은 진짜….’

자그마한 힌트를 주었을 뿐인데, 벌써 광아검의 진짜 모습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놀랍다 못해 머리가 쭈뼛 설 지경이다.

후우웅!

리메르가 검을 세차게 그었다. 검날에 맺힌 녹색 기운이 펼쳐지며 전방의 모든 방위를 막았다. 딱 하나 눈에 보이지 않을 틈을 제외하고.

라온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번쩍였다. 광폭하게 휘두르던 검을 돌려 유일한 틈을 노려왔다.

‘확실해!’

헛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이 짧은 대련을 통해 진짜 광아검을 깨달았다.

‘그럼 그 길을 더 빨리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겠지.’

처음 맡은 교관이지만 라온 그리고 다른 수련생들 덕분에 매 순간이 즐거웠다.

“좋다. 계속 덤벼봐!”

리메르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고수가 아닌 이상 찾을 수 없는 딱 하나의 틈을 만들었다.

라온은 그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그 작은 틈에 살벌한 칼날을 찔러왔다.

‘미쳤군.’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검로는 세밀한데 검격은 사납다. 저 검이 완성된다면 보통의 무인으론 견디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리메르가 빈틈을 지웠다. 지금의 라온으로는 뚫어내지 못한 검술을 펼치며 그를 압박해나갔다.

검의 위력도, 검로의 명확함도 전부 자신이 위였지만, 라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섬뜩한 눈빛으로 검을 휘두르며 빈틈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상대는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광아검을 그 틈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검술이었다.

콰앙! 콰아앙!

리메르는 라온과 근접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끝없이 검을 휘둘렀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검세가 강해지고, 흐름에 빈틈이 없다. 녀석의 성취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흐아압!”

라온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내리쳤다. 방어 태세를 갖추자마자, 그 방어를 비틀어버릴 공격을 해온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변화다.

‘뭐 이런 놈이….’

방어를 계속 뚫고 오니, 봐주고 있음에도 등줄기가 섬뜩했다.

하지만 아직 녀석에게 승리를 줄 수는 없었다.

“밥 더 먹고 와라!”

리메르가 검에 폭풍 같은 바람을 휘감았다. 검날에 응집된 오러를 그대로 쏘아냈다. 절기 풍혼참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방금 펼친 검은 아직은 라온이 이겨내기 버거운 위력이다.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후웅!

라온이 검을 뒤로 젖힌 채 달려온다. 풍혼참의 바람에 옷이 갈려져도 상관없이 검을 내리쳤다.

쿠웅!

풍혼참은 강렬한 검격을 맞고도 베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라온도 멈추지 않는다. 보법을 밟아 물러서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조금씩 갈라지던 풍혼참이 결국 파탄을 드러내고. 틈이 만들어졌다.

콰아아!

라온이 긴 숨을 뱉어내며 검을 그었다. 작열하는 태양 같은 붉은빛이 번쩍이고 풍혼참이 허공에서 녹아내렸다.

“허!”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저놈 방금 뭘 한 거야?’

풍혼참을 보고, 광아검을 발전시키라고 한 건데 아예 깨버렸다. 뭐 저런 미친놈이 있나 싶었다.

후우욱!

라온은 거센 먼지가 피어오르는 연무장의 중심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야. 너….”

“안 돼.”

라온에게 다가가려 할 때 루난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응?”

“지금은 안 돼.”

그 말에 앞을 보았다. 라온의 동공이 풀려 있었다.

‘무아지경?’

녀석은 풍혼참과 싸우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뭐 이런….’

남들은 평생에 한두 번 오는 깨달음이 저 녀석에겐 왜 이렇게 많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루난은 리메르의 손을 놓고,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다가올 사람들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라온이 무아지경에 빠진 건 자신도 몰랐다. 더 멀리 있던 루난이 어떻게 본 건지 의문이었다.

“복 많은 녀석이라니까.”

리메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이 라온을 지켜줘야 할 것 같다.

“빨리 끝내고, 술 마시러 가려고 했는데.”

그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     *      *

후우우우.

라온은 깊게 가라앉은 숨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두웠다. 하늘에 떠 있던 해가 달로 바뀌었지만 놀라진 않았다.

‘무아지경에 들었으니까.’

마지막 너무도 강했던 리메르의 검을 상대하며 순간적인 깨달음이 일어났다.

더 앞으로 나아갈지 이미 얻은 깨달음을 지켜야 할지. 두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 택했고,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좋아 보인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리 여유롭게 있어도 리메르의 기운은 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계속 자신을 지켜준 게 분명했다.

“저쪽에도 말해.”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연무장 문에서 은빛 머리칼이 팔랑였다.

“끝났어?”

문을 열고 루난이 들어왔다.

“저 녀석이 네 무아지경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난의 앞에 섰다.

“고마워.”

“강해졌어?”

“그래.”

“이제 대련 안 해도 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루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강해졌다고 자신하는 걸 보니, 확실하게 깨달음은 얻었나 보네.”

리메르가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와 흙을 툭툭 털었다.

“네. 광아검은 미친 맹수의 이빨도 되지만, 순간적인 번뜩임도 됩니다. 차가운 이성을 지닌 맹수가 바로 광아검이더군요.”

광아검은 단순히 사납고 흉폭한 감각검이 아니다. 감만이 아니라, 경험과 정신을 이용해서 상대의 틈을 비틀어 낼 수 있는 특별한 검술이었다.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진짜 광아검에 첫발을 내디딘 것 같다.

“시간을 쓴 보람이 있네. 오늘은 술맛 좀 있겠어.”

리메르는 씩 웃고서 연무장 출구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를 하자, 손을 흔들고 그대로 연무장을 나갔다.

“라온 수련하자.”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 검을 뽑았다. 대련이 아닌 검술을 수련하자는 의미였다.

“알겠어.”

루난에게 또 빚을 졌다. 수련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라온은 루난의 검술을 쭉 살펴보았다. 광아검을 익힌 덕분인지 뭐가 모자른지 한눈에 보였다.

“두 번째 초식을 펼칠 때 발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내밀고, 무릎을 조금 더 펴.”

“응.”

루난의 검술이 더 세밀하고, 예리해졌다. 조언 하나로 바뀌는 걸 보면 역시 그녀의 재능은 대륙에 닿을 정도였다.

라온은 루난에게 몇 가지 조언을 더 해준 뒤 고개를 들었다. 큼지막한 달이 연무장을 비추는 걸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준비는 거의 끝났군.’

딱 하나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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