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검술서를 덮은 라온의 눈에 희열의 불길이 타올랐다.
‘감각검이었어.’
감각검은 검술의 한 종류로 검술의 초식을 반복해서 단련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전을 치르며 검술의 경지를 높이는 방식이다.
예전 6연무장의 수련생들이 버렌을 꺾을 뻔했던 검술이 바로 감각검이다.
검술을 익히자마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고, 성취 속도가 빨라서 뛰어난 수준의 감각검은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이건 감각검 중에서도 상급이야.’
전생에서 감각검을 익혀봤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광아검은 감각검 중에서도 상급이라 불릴 법한 높은 수준의 검술이었다.
‘다만 사나워.’
천금을 주고도 못 구할 물건이지만 상당히 흉폭했다.
광아. 미친 이빨이라는 이름 그대로 상대의 모가지에 검을 박아넣으려는 기세가 강했다.
‘조심해야겠어.’
감각검을 잘못 익히면 상대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에 검이 박힐 수도 있다. 주의하면서 익혀야 할 것 같다.
라온은 다시 검술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이상한데.’
검술서를 읽을 때마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이 광아검이라는 검술은 감각검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그림과 글씨 모든 걸 세세하게 보았지만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좋은 걸 얻었어.”
하분 성에 가게 되면 숨을 쉬듯이 검을 휘둘러야 한다. 그곳에서 싸우게 된다면 이 광아검을 완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자세부터.’
라온은 검술서를 바닥에 놓고 일어섰다. 검을 쥐고, 책에서 본 광아검의 기본자세를 하나씩 연습해보았다.
어떤 검술이든 가장 중요한 건 기본이다. 기본자세가 완성되어야 응용을 할 수 있다. 형태가 단순한 감각검일수록 기본이 중요했다.
라온은 검술서를 보며 완벽한 자세를 잡을 때까지 연습하고 검을 집어넣었다.
자세를 잡았다면 이제 실전을 치를 차례다. 감각검을 홀로 익혀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실전이라….’
라온이 허리춤에 찬 검을 툭툭 치며 웃었다.
“오랜만에 녀석들과 대련을 하는 것도 괜찮겠는데.”
* * *
다음날.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낸 뒤 5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어제 익혔던 광아검의 자세와 구결을 풀어내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버렌이 들어왔다.
“내가 제일 빨리 온 줄 알았는데….”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훈련이 자율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라온이 광아검의 기본자세를 확실하게 다듬고 버렌을 보았다. 못 보던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걸 보니, 그도 새로운 검술을 배운 모양이다.
버렌의 수련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광아검의 연습을 시작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훈련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메르가 뒷짐을 진 채로 걸어왔다.
“너희는 여전하구나.”
하품하며 팔자걸음을 걷는 걸 보면 영락없는 백수의 모습이다. 다만 왼쪽 눈 쪽이 살짝 어두웠다. 멍이 든 것 같았다.
도박장에서 얻어맞았나?
“나는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그가 수석 교관실로 걸어갈 때 라온이 그 앞을 막아섰다.
“대련 좀 봐주시겠습니까?”
“대련? 누구랑?”
리메르가 고개를 돌리며 그 상대를 찾았다. 하지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버렌이랑 하겠습니다.”
“엉? 나?”
당황한 버렌이 보름달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싫어?”
“아, 아니! 아니다!”
버렌이 재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할게! 아니, 하겠다!”
놓칠 수 없어.
예전 임시 수련생 시험에서 얻어터진 이후 라온과는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꼭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흠, 귀찮은데.”
리메르는 볼을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교관님.”
“에휴, 알겠어. 준비해라.”
“예!”
버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연무장 중앙으로 달려갔다.
“넌 안 가냐?”
“교관님. 혹시라도 제가 버렌을 다치게 할 것 같으면 막아주세요.”
“막아달라고?”
“예.”
리메르가 올 때까지 버렌에게 대련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감각검은 제어하기 어려운 검술. 자칫 잘못하면 버렌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아, 진짜 귀찮은데….”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고 임시로 만든 대련장으로 향했다. 저렇게 말해도 리메르는 확실하게 막아줄 사람이다.
라온은 날을 세우지 않은 수련검을 들고, 버렌과 마주 섰다. 훈련하던 수련생들이 모두 물러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에휴, 대련을, 후우, 시작한다.”
리메르는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손을 들었다.
“심한 살수는 쓰지 말고, 발전을 위해 검을 휘두르도록.”
“예!”
“예.”
“서로에게 할 말은?”
그는 빨리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새로운 검술을 사용할 거다.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라.”
“난 익혔던 걸 사용하지. 오늘은 그때와 다를 거야.”
라온은 새로운 검술을 말했고, 버렌은 익히고 있던 검술을 사용하겠노라 말했다.
“됐지? 그럼 시작!”
그 말과 함께 리메르가 손을 내렸고, 버렌과 라온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 *
으득!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기회야.’
라온에게 패한 이후 매일 같이 그와의 대련을 꿈꿨다.
녀석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자신도 끝없이 노력해왔다. 이전처럼 허무하게 지진 않을 것이다.
“흐아아아!”
버렌은 새로 배운 검술이 아니라, 직계 수련에서 배웠던 키린 검술을 사용했다.
후우웅!
승리의 의지가 담긴 검에 속도가 붙는다. 검날이 순식간에 라온의 미간에 이르렀다.
‘어?’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검이 라온에게 닿기 전에 놈의 검이 벼락처럼 치솟았다.
쩌어엉!
격렬한 충격이 일어나며 두 검의 궤도가 동시에 틀어졌다.
“윽….”
버렌이 재빠르게 물러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녀석이 먼저 나온다고?’
라온은 항상 상대의 파악한 뒤 움직이는 방식의 전투를 해왔다. 먼저 공격하다니, 생각 못 한 일이다.
“좋다! 받아주마!”
버렌이 밀려 나간 검을 다잡았을 때 라온이 발을 구르고 돌진해왔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라온의 검을 향해 키린 검술의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쩌어엉!
라온의 검에 담긴 거력에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버렌을 당황시키는 건 검의 위력이 아니다.
라온의 흉폭한 기세. 지금까지의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사나움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쩡! 쩌저정!
버렌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라온의 검격을 막아내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 지려고 지금까지 수련한 게 아니야!’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하체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을 손에 쥔 검까지 이어 그대로 내질렀다.
키린 검술. 절착살.
회전력이 담긴 검격이 라온을 향해 쏘아졌다.
“후욱….”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더 사나운 기세를 두른 채 절착살을 향해 돌진했다.
쩡! 쩌정!
그는 검을 연속으로 내리쳐 절착살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흡사 맹수가 어금니로 물어뜯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온의 검은 절착살이라는 먹이를 먹고도 배를 채우지 못했다. 더 큰 먹이를 씹기 위해 버렌을 향해 질주했다.
“이익!”
버렌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하체 중심을 내리고, 바람의 예리함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쿠구구구!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검격을 쏘아냈지만, 라온의 검은 그보다 더한 흉폭함을 두르고 그어졌다.
쩌저저적!
라온의 검에 담긴 지독한 기세에 버렌의 마지막 검격이 너무도 손쉽게 찢어졌다.
‘저, 저 검은 뭐야!’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라온의 검은 자신의 검술의 빈틈만 찾는 독사 같았다. 빠르고, 집요하며, 강해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이익!”
버렌이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라온의 검이 빨랐다.
눈앞에서 검광이 번쩍인다. 녀석의 검이 코앞까지 쇄도해왔다.
‘아직이다!’
예전이라면 눈을 감았겠지만, 지금의 버렌은 다르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물러섰다. 하지만 라온의 검은 예상했다는 듯 바로 쫓아왔다. 꼭 살아 있는 짐승처럼.
쩌엉!
라온의 검은 기습적으로 내지른 초식을 뚫어버리고, 목을 향해 질주해왔다.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기세가 줄질 않았다.
‘미, 미친! 이건 대련이라고!’
버렌이 속으로 비명을 지를 때 푸른 바람이 일었다.
캬아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라온이 멀리 튕겨 나갔다.
“에이….”
버렌의 앞엔 귀찮은 표정의 리메르가 서 있었다.
“후, 감사합니다.”
라온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이 자식! 날 죽일 셈이었냐!”
버렌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라온을 가리켰다.
“말했잖아. 아직 검에 익숙하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그건 보통 인사말이잖아!”
“난 진짜였어.”
라온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미친놈….”
버렌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평소 가장 싫어하는 상스러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자, 됐지?”
리메르는 검을 집어넣고 하품을 했다.
“난 그럼 자러….”
“아직입니다.”
라온이 리메르의 앞을 막아서고 고개를 저었다.
“엥? 이제 대련 상대도 없잖아. 버렌은 안 해줄 거 같은데?”
“저기 있잖아요.”
그가 뒤를 돌아 구경을 하던 수련생들을 가리켰다.
“우, 우리?”
“우리가 왜?”
갑자기 지목을 당한 수련생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명색이 수석 수련생인데, 너희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실력을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아니, 나는….”
“어? 어어?”
“자, 잠시만! 나 숙소에 일이….”
“거절을 거절한다. 크레인 너부터 시작하지.”
라온은 거절을 거절하고, 가장 만만한 크레인을 끌고 왔다.
“자, 잠깐만 진짜야?”
크레인이 입술을 떨었다. 방금 그 흉폭한 검술을 보여주고 싸워보자니, 미친 것 같았다.
“누, 누가 좀! 버렌 님!”
“으음….”
크레인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버렌은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교관님?”
“뭐, 내가 좀 귀찮기는 한데, 이런 검술과 마주하면 분명 실력은 늘 거야.”
리메르도 할 거면 빨리하라며 크레인의 등을 떠밀었다.
“걱정하지 마. 위험할 때는 교관님이 멈춰주시니까.”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간다.”
“으아아악!”
그날 5 연무장에선 수련생들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쯧.”
라온이 연무장에 걸터앉아 혀를 찼다. 넓은 연무장은 텅 비어 오직 그 혼자만 쓸쓸하게 있었다.
“이제 대련하기도 힘드네.”
2주일 동안 연무장에 출근하며 수련생들과 계속해서 대련을 해왔다.
수련생들의 실력도 올리고, 광아검의 성취도 높이는 1석2조의 계책이라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생각이었나보다.
2주가 지난 지금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다.
버렌은 일곱의 대련 이후에 연무장에 나오지 않았고, 마르타는 10번을 패배한 이후 ‘씨이이이발!’이라고 외치고 사라졌다.
그리고 루난은 연무장의 문틈에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대련 안 해?”
저 아이가 저렇게 묻는 걸 보니,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안 해.”
고개를 끄덕이자, 루난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자신의 옆에 앉았다.
“후….”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수련생들과 하는 것도 무리군.’
저들이 무서워하는 것도 있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벌어져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알게 된 건 있으니.’
수련생들과 대련을 하며 광아검의 성질을 알았다.
‘흉폭한 늑대.’
광아검은 상대의 검술 중 흐름이 어긋나거나, 부족한 부분을 파고들이 집요하게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술이었다.
수련생들은 광아검의 흉폭함 이상으로 약점을 찾는 그 본능을 무서워했다.
물론 버렌이나, 마르타는 잊을 만하면 와서 다시 덤비고 도망갔지만.
‘그런데….’
라온이 옆에 앉은 루난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버렌이나 마르타와 달리 한 번의 대련 이후 다시 싸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과 싸우는 것 자체를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루난.”
“응?”
“대려….”
대련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난이 스르륵 멀어졌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보법을 사용하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안 해. 안 할게.”
안 한다고 하자 루난이 다시 옆에 붙었다.
‘시리아 때문이겠지.’
시리아 슬리온. 그 미친놈 때문에 루난은 친한 사람과는 대련이라도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다.
-본왕이라면 밤새도록 상대해 줄 수 있다. 물론 네놈은 본왕의 새끼손가락에 짓눌려 죽게 되겠지만.
‘상대해 줄 수 있다고?’
-그래. 몸을 넘겨라. 본왕이 정신세계를 만들어서 너를.
‘기각.’
-이, 이놈! 본왕은 진심으로….
손부채를 흔들어 라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바람에 흘러간 녀석이 욕을 뱉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곧 돌아오니까.
“후….”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제 수련해야 하나.’
광아검의 성취를 어떻게 높여야 하나 고민할 때 연무장의 문이 쾅 열렸다.
“야, 한숨 소리가 내 방까지 들린다!”
리메르였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와 라온의 앞에 섰다.
“대련 상대 없지?”
“예.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나랑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