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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101화 (101/653)

101화

라온은 주디엘이 준비해 준 책자의 내용을 전부 머리에 집어넣은 뒤 태워버렸다.

책자를 남겨두었다가 별관 외의 사람에게 들키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없애버리는 게 나았다.

“흠….”

불꽃에 휩싸여 허공에서 녹아내리는 책자를 보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새로운 검술을 익혀야 하나.”

주디엘의 책자에 의하면 하분 성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검으로도 베기 힘들 정도로 가죽이 질기고, 체구도 크다고 적혀 있었다.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은 공격과 방어가 5:5인 균형 잡힌 검법. 우르르 몰려들거나, 가죽이 두꺼운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만화공의 검술이 있지만, 그건 하나하나가 필살의 검술이라 오러 소모가 너무 심했다.

평소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위주의 검술이 필요했다.

‘하긴 기본 검술은 익힐 만큼 익혔으니까.’

지금까지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만을 사용하고 수련해왔다. 토대는 충분히 닦았으니 그 위에 층을 쌓을 때가 됐다.

“흐음….”

라온이 가장 아래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고, 은빛으로 번쩍이는 패를 꺼냈다. 패의 중앙엔 검날이 불꽃에 타오르는 화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두 번째 임무에서 녹전귀를 베고, 모두를 구한 대가로 받은 은패였다.

달그락.

은패를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언젠가 실비아를 직계의 위치에 돌려놓을 때 쓰려고 남겨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방계인 실비아가 직계로 돌아가려면 은패가 아니라, 금패가 필요하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많은 수의 금패가.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해서 강해질 때다. 즉, 모을 때가 아니라 투자를 할 상황이다.

“가야겠군.”

라온은 은패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방을 나가 로비로 가는 길에 주디엘과 마주쳤다.

“일어나셨습니까.”

주디엘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아닙니다.”

인사를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주디엘이 옅게 웃던 모습은 역시 그녀의 진짜 얼굴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 가십니까?”

“이것 좀 쓰려고.”

라온이 주머니 속에서도 반짝이는 은패를 보여주었다.

“뽑아 먹을 건 확실하게 뽑아먹어야지.”

*     *      *

라온은 그 길로 바로 가주전으로 향했다. 문지기가 길을 막았지만, 은패를 보여주자 알현실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이래서 성공해야 하는군.’

방계라고 길을 막아놓고, 패가 있다는 거 하나로 이리 대접이 달라진다. 억울해서라도 공을 세우고, 성공을 해야 할 것 같다.

“흠….”

라온은 알현실로 걸어가며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가주전 내부의 검사들 그리고 사무원들 모두가 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무시하듯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저렇게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면 약간이나마 인식이 바뀌긴 한 것 같다.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문지기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알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알현실 앞의 문지기에게 사정을 말하자 안쪽에 기별을 보냈고, 곧 답이 왔다.

“들어가십시오.”

문지기가 문에 손을 대자, 천장까지 솟구친 거대한 철문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뿜어지는 글렌의 막대한 기파. 이건 몇 번을 와도 적응되지 않았다.

라온은 바닥의 황금색 카펫을 걸어 알현실 중앙에 섰다. 글렌은 평소와 같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되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 할 때 글렌이 손을 저었다. 엉거주춤 섰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본론이나 말해라.”

-저 건방지고도 반복되는 모습을 보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가 생각나는군. 수많은 귀족들이 본왕의 압도적인 기운에 질려….

“알겠습니다.”

라온은 옆에서 떠드는 놈을 무시하고 가지고 온 은패를 꺼내놓았다.

“이전에 받은 은패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은패를 사용하는 건 네 마음이다만, 그것으로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글렌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나왔다. 알현실 내부의 공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맞습니다. 어머니를 다시 직계에 위치에 올리기 위해 패를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걸 쓰겠다는 건가?”

“이번에 큰 임무를 치르고, 직계와 결투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라온이 덤덤한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깨달았다?”

“예. 나름 감탄할 만한 성과를 보였어도 직계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가주님이 힘든 일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글렌의 말대로 직계가 되는 일은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동패나 은패를 받는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큰 영향도 주지 않을 은패를 모을 바에는 은패를 사용해서 강해진 다음 금패를 모으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를 할 때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흠.”

글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도, 분위기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은패로 무엇을 받아 갈 생각이지?”

“검술입니다. 제가 졸업시험으로 갈 곳은 하분성.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벨 수 있게 공격 위주의 검술이 필요합니다.”

“공격형 검술이라….”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옥좌에서 일어섰다. 옆에 있는 책자들을 쭉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중간에 있는 검은색 책에서 뚝 멈췄다.

“이게 좋겠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책이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 라온에게 날아갔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이전처럼 그 원형의 서고를 열어줄 줄 알았는데, 글렌은 직접 책을 골라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머리가 쭈뼛 섰다.

‘광아검.’

검은색 책의 표지에는 광아검이라는 글자가 살벌한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들어보지 못한 검술이다.

“가져가겠나? 아니면 네가 직접 고를 거냐.”

“…….”

라온은 오른손을 펴서 검술서를 쓰다듬었다. 거친 표지가 이름대로 짐승의 이빨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이런 건 확실했지.’

글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하지만 거대 가문의 가주답게 보상만큼은 확실하게 챙겨준다. 그가 잘못되거나 허접한 검술서를 주진 않았을 것 같았다.

“받겠습니다.”

검술서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겠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잘 맞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라온이 허리를 굽힌 후 돌아가려 할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지만 묻지.”

“예.”

“졸업시험 장소가 하분 성이라는 걸 듣고 겁이 나진 않았던 거냐.”

글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온다. 기세를 품어내지 않았어도 거인이 내려보는 듯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검술서를 얻기 위해 온 걸 보면 하분 성이 어떤 곳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거절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건가?”

“하지 않았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겁을 먹거나, 거절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련이 없다면 강해질 수 없지.’

전생에서 가장 빨리 강해졌을 때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나서였다.

현생에서도 녹전귀와 싸우고, 광혈귀에게 살아남은 이후 가장 큰 성장을 이루지 않았던가.

평범한 속도로 강해진다면 훈련장에서 남들과 맞춰서 수련하면 된다. 남들보다 빨리 더 높이 가야 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이용해야 한다.

“에덴과 부딪치고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알게 된 것?”

“예. 그 짧은 순간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연무장에서 1년 동안 수련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경험을 얻게 된다면 고마울 뿐이죠.”

라온은 솔직한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리고 리메르 교관은 제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힘들고, 고생하겠지만 나중에는 가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글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지만, 알현실 공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알겠다. 가보거라.”

“예.”

라온은 아까 못한 인사를 정식으로 한 뒤 일어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문을 열고 돌아가려고 할 때 글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검술을 사용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생각의 범위를 늘려라.”

“…알겠습니다.”

조언 같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이제 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꾸벅인 뒤 알현실을 나섰다.

*     *      *

“흠흠흠.”

글렌이 앉아 있는 옥좌 바로 옆 기둥 뒤에서 히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좋으냐.”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알아주는데 당연히 좋죠.”

리메르가 입가에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로 기둥 뒤에서 나타났다.

“제 의도를 전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역시 착하고 똑똑한 아이라니까. 잔소리쟁이 버렌이나 욕쟁이 마르타랑은 달라요. 챙겨주지 않을 수가 없어.”

“뒤에서 제자 욕을 하고 다니는 너랑도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군.”

글렌은 활짝 웃는 리메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욕은 무슨 욕입니까. 다 귀여운 녀석들이니 장난치는 거죠. 전 수련생 모두를 똑같이 아낍니다.”

리메르가 낄낄 웃었다.

“어쨌든 라온도 알았네요. 목숨을 건 사투가 성장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그걸 아는 사람은 많다. 알고도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드물 뿐이지.”

글렌은 조금 전까지 라온이 서 있던 알현실 중앙을 내려보았다.

‘두려움이 없었지.’

라온에 눈동자에 공포는 보이지 않았다. 말과 달리 공명심도 없었다. 그저 냉정함. 상황을 파악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침착함만이 어려 있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저 어린 나이에 저런 마음가짐이라니, 긴 세월을 살면서도 보지 못한 재능이다. 특히 그 아이가 자신의 손자라는 게 기꺼웠다.

“가주님도 라온이 마음에 차셨나 보네요. 입꼬리가 씰룩이시는데요?”

기분 좋게 라온을 생각하고 있을 때 리메르의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좀 닥치거라.”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엘프 녀석은 분위기를 모른다.

“그건 그렇고 광아검을 주셨네요.”

리메르가 안쪽에 있는 서고를 보고 빙긋 웃었다.

“있지도 않던 서고까지 만들어서 금패 수준의 검술서를 챙겨주다니, 손주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넌 입이 참 가볍군.”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좀 줄었는데요.”

“후….”

글렌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광아검은 뛰어난 검술서지만, 굉장히 흉폭하죠. 라온이 잘 제어할 수 있을까요?”

“검술서를 주었으면 그만이다. 제어하든, 익히지 못해 버려지든 그건 저 녀석의 손에 달려 있지.”

“오….”

리메르가 감탄을 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 치고는 확실한 조언을 해주셨던데 역시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

“안 되겠군.”

글렌이 혀를 차고서 손을 들었다.

“어억!”

히죽이던 리메르가 실이 달린 것처럼 글렌에게 끌려오기 시작했다.

“환자라 봐주었더니 끝이 없구나.”

“자, 잠깐만요! 가주님!”

“몸이 좀 나았으니, 타작을 해도 되겠지.”

리메르가 버둥거렸지만 끌려가는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로엔 님! 그 영감님 어디 갔어! 나 좀 살려…끄헉!”

알현실에서 근 30년 만에 리메르가 얻어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라온은 검술서를 챙긴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리지도 않은 채 바로 뒤편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

검술서를 펼치자, 저자로 보이는 자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검을 잡아먹는 검사가 되어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글렌이 해주었던 조언과 비슷한 느낌이다.

뭔지 모를 내용을 계속 읽어봐야 시간 낭비다. 바로 다음 장을 넘겼다. 글과 그림으로 검술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읽어볼까.’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검술서를 읽었다. 그렇게 다섯 시간이 지난 후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이런 검술을 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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