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99화 (99/653)

99화

“시험을 바꾼다?”

글렌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예.”

리메르가 부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혈귀와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정광이 어렸다.

“지금 졸업 시험은 교관의 인정 혹은 수련생들끼리의 대련이었나?”

“맞습니다.”

수련생들의 졸업 시험은 교관이 만들어낸 시험 코스를 통과하거나, 수련생들끼리 일대일의 대련을 통해 인정을 받은 자만이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럼 시험 내용을 무엇으로 바꾸겠다는 거지?”

“생존입니다.”

리메르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수련생들을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뗀 채 외부에 내보내고 싶습니다.”

“외부에 내보낸다?”

흥미가 동했는지 글렌의 상체가 조금 앞으로 나왔다.

“예. 5 연무장의 아이들은 기세의 시험을 통과했고,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과 명예를 건 결투에서 이겼습니다. 둘 모두 졸업시험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죠.”

“네 녀석이 여러모로 수를 썼지.”

“맞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을 벗어난 일들도 있었죠. 수련생들은 두 번째 임무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고, 살인이라는 큰 산까지 넘었습니다.”

리메르가 미소를 지었다. 우연이 겹쳐 늦게 움직였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은 육체적, 정신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전 시험을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닌, 아이들을 성장시킬 기회로 만들고 싶습니다. 검사가 되는 시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더 높이 올라갈 토대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언제 검사가 되느냐보다 어떻게 검사가 되느냐가 중요하지.”

글렌도 공감했는지 눈을 내리감았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지금의 아이들에겐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시련이 필요합니다.”

리메르가 길쭉한 검지를 들어 올렸다.

“가문의 힘도, 교관의 도움도, 잘난 지그하르트의 이름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일은 아이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변했구나.”

글렌은 무릎 꿇은 채 당당한 눈빛을 발하는 리메르를 보며 살짝 입매를 올렸다.

“예?”

“아이들을 키워보겠다고 했지만, 그 일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준비도 대충대충이었지.”

“어, 음….”

찔리는지 리메르가 눈을 홱 돌렸다.

“아이들을 만난 이후 너는 그 아이들과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너와 지금의 네 표정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넌 알지 못할 거다.”

“으, 창피하게….”

“저도 동의합니다.”

기둥 옆에 서서 흐뭇하게 웃던 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 님. 표정이 정말 좋아지셨습니다.”

“내가 검 말고도, 애들 키우는 데 재능이 좀 있더라구요.”

리메르는 민망한 표정을 숨기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곧 있으면 가주님 다음의 왕을 제 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른바 킹메이커가 되는 거죠.”

“그게 라온이냐?”

“그거야 모르죠. 버렌이 될 수도 있고, 마르타나 루난이 올라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런가.”

글렌이 드물게도 확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때 가장 가까이에 서서 검을 휘둘렀던 리메르의 새로운 즐거움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로 아이들을 어디로 보내고, 어떻게 성장시킬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와라. 못 하면 없는 일로 하겠다.”

“그야 물론.”

리메르가 자신감 있는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 있던 서류철을 꺼냈다.

“이미 준비해서 왔습니다.”

*     *      *

라온은 십운단을 가지고 별관이나 숙소가 아닌, 북망산에 올랐다. 시원하다 못해 찬 바람을 맞으며 숯가마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여기가 편하다니까.’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를 처음 익힌 곳이었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연공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마나도 더 잘 느껴졌다.

이젠 터만 남은 숯가마 앞에 앉았다. 나무와 수풀이 바람에 스치는 선선한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기감을 쭉 펼쳐서 주변을 살폈다. 역시 근처에는 사람도, 동물도 없었다. 발칸이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은 것 같다.

“후….”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몸의 기운을 끌어 올린 뒤 눈을 떴다. 연공을 하기에 바람도, 시간도 딱 좋았다.

탁.

리메르에게 받은 목갑을 열자,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청아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50%인가.’

십운단은 50%의 영약이라 불린다.

다른 영약들이 가진 기운의 30%정도를 흡수한다면 십운단은 들어 있는 마나의 50%가량을 흡수할 수 있다.

뛰어난 흡수 효과와 순도 높은 기운 덕분에 십운단은 성장해나가는 무인에게 가장 좋은 영약 중 하나였다.

-그러면 뭣 하느냐. 안에 든 내용물이 티끌조차 되지 않는데.

라스는 영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물론 양은 적지.’

모든 것이 좋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십운단은 다른 영약에 비해 가진 마나의 양이 적었다.

다만 리메르가 전해 준 이 십운단은 십지초 두 개를 넣어 마나가 적다는 단점을 상쇄시켰다.

웬만한 중급 영약과 비슷한 수준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제대로 흡수한다면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라온이 영약을 손가락으로 쥐었다. 산에 부는 찬 바람과 반대되는 온기를 느끼며 신운단을 입 안에 넣었다.

영약은 혀에 닿자마자, 물처럼 녹아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자연의 마나를 뚝 떼다가 뱃속에 집어넣은 듯 배꼽 위에서 따스하고 순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만화공을 운용하여 끓어오르기 시작한 십운단의 기운을 휘돌렸다.

고오오오!

십운단의 기운은 어느 한 속성에 치우치지 않은 영약답게 마나 회로를 부드럽게 내달렸다.

영약의 기운이 파도처럼 솟아오르자, 마나 회로의 냉기가 녹아내리고, 그간의 전투에 남아 있던 탁한 기운들이 외부로 배출되었다.

‘밀도가 높아.’

십지초 두 개가 들어 있는 영약이라고 해도 마나의 양은 적었다. 하지만 그 안의 마나는 자연 그 자체처럼 순수했고,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만화공의 화기와 혹한의 냉기가 단전을 공유하는 불안전한 자신의 육체에는 딱 맞는 영약이었다.

라온은 화기와 냉기를 번갈아 끌어 올리며 십운단의 순수한 기운을 단전에 쌓아갔다.

모래성을 쌓듯 기운이 조금씩 모였지만, 마나 농도는 그 어떤 영약을 먹었을 때보다 정심했다.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선인호처럼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기운이 마나 회로를 달리는 희열을 즐기며 더 깊은 연공으로 빠져들었다.

*     *      *

북망산의 밤을 알리는 가느다란 새소리에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그의 눈동자가 화로의 불꽃처럼 황금빛 광채를 터트렸다.

‘전부 얻었어.’

일반적으로 영약을 먹을 때 그 기운의 40%만 받아들여도 대박이라 칭한다.

하지만 방금 자신은 십운단의 60% 이상을 단전에 쌓았다. 대박 수준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욱….”

라온이 눈을 감은 채 불의 고리와 만화공 그리고 혹한의 냉기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새로운 불의 고리가 연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5성에 올랐습니다.]

[육체의 격이 상승합니다.]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크게 상승합니다.]

[체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육체 능력치가 증가하자 손끝부터 시작된 기분 좋은 떨림이 어깨까지 이어졌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정신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감각이 크게 상승합니다.]

[기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기쁨을 즐기기 전에 두 번째 메시지가 올라왔다.

넓어진 단전과 마나회로를 정심한 오러가 흘러간다. 새로운 고리가 생겼기 때문인지 1.5배는 커진 것 같았다.

“후우우!”

라온이 들뜬 숨을 뱉어내며 일어섰다. 주먹을 움켜쥐고,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굉장해.’

육체의 반응과 오러의 반응이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지금이라면 광혈귀를 꺾지는 못해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농락당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연공하는 동안 힘을 빼앗길까 봐 조용히 있던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또 영혼의 격이 상승하다니! 네놈 대체 뭘 익히고 있는 거냐! 불의 고리가 대체 무엇이냐!

“글쎄?”

-본왕이 오기 전에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이냐!

라스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어찌 이런 일이….’

영혼의 격은 강자를 꺾거나, 위기를 이겨내거나 혹은 어떠한 업적을 쌓은 자만이 상승시킬 수 있다.

물론 단련으로도 상승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시간이라 표현할 수 없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이런 꼬마 놈이 연공으로 격을 상승시키는 건 마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려주겠냐?”

라온이 벌레를 쫓듯 휙휙 손을 저었다.

뿌드득!

라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러면 놈을 먹어 치우기 더 힘들어지는데….’

라온은 뛰어난 정신력과 무언지 알 수 없는 연공법 그리고 수속성 저항력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빙의를 막아냈다.

놈이 가진 영혼의 격이 상승했다면 분노를 받아들이기 전과 비슷할 정도로 놈을 제압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크으, 거만 떨지 마라! 어떤 노력을 하고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네놈의 영육은 결국 본왕의 것이 될 테니까!

“울지 말고 말해.”

-누가 울었단 말이냐! 본왕은 마계의….

“그래. 분노의 군주시지. 알겠다. 알겠어.”

-끄으으윽!

라온은 코웃음을 치며 먼지 붙은 옷을 털어냈다. 복장을 정리한 뒤 별관으로 돌아가려 할 때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영약 상자를 주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이지….”

누군가는 자신을 씹어 삼키기 위해 난리를 치고, 누군가는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다.

그중 누구를 보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날 집어삼키는 일은 아예 안 올지도 모르겠다.”

라온은 이를 가는 라스를 무시하고 북망산을 내려갔다.

*     *      *

다음날.

버렌은 가슴을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제 연공이 정말 잘 되어 십운단의 기운 중 절반 이상을 흡수했다.

단전이 꽉 차오르니, 하루 만에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라온을 이기긴 힘들어도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흠흠.”

버렌은 허리를 당당하게 편 채로 라온이 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감탄하는 눈빛을 보고 싶었다.

끼이익!

연무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던 라온이 아니라, 마르타였다.

‘저 녀석도 많이 흡수했군.’

마르타에게서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 역시 상당한 양의 기운을 흡수한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뭘 꼬라봐.”

“…….”

버렌은 기분 좋은 감정을 진흙에 처박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성질은 더럽지만, 실력은 확실해.’

마르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어제와 다르다. 자신만은 못하지만, 꽤 많은 기운을 흡수한 것 같았다.

끼이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걷는 듯한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라온과 루난이 확실했다.

“어디….”

버렌이 자신감이 차오른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유리장처럼 깨져나갔다.

‘저, 저놈 뭐야….’

라온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고수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매끄러움에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오러의 양, 육체 그걸 이루는 균형까지. 모든 게 어제와 달랐다.

이쪽이 5가 변했다면 저 녀석은 10의 변화를 이루고 돌아왔다.

‘괴물 같은 놈….’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놈에게 감탄을 느끼게 해주려 했는데 역으로 경악을 해버렸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으….”

인상을 찌푸리며 라온을 노려봤지만, 녀석은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의 노력도, 재능도 인정했지만,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보면 열받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라온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든, 얼마나 강해지던 놈을 뒤쫓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끝까지 달리는 게 자신이 생각한 지그하르트 검사의 모습이니까.

“자!”

앞에서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신경을 썼기 때문일까. 그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들 달라졌네.”

리메르는 단상 위에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고 씩 미소 지었다. 강해진 수련생들의 성취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거리낌 없이 시작해도 되겠어.”

“시작이요?”

“뭘 시작하신다는….”

“이제 이 생활도 끝을 내야 하니까.”

그는 손가락을 내려 연무장을 가리켰다.

“네?”

“끝이요?”

“그, 그게 무슨 말씀….”

수련생들은 갑작스럽게 들린 끝이라는 소리에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졸업 시험 쳐야지. 아무리 내가 좋아도 계속 수련생으로 살 수는 없잖냐.”

“어?”

“아하!”

“졸업 시험!”

시험이라는 것을 듣자, 수련생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이제 진짜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의 눈빛이 태양을 본 해바라기처럼 변했다.

“그리 좋아하긴 일러.”

리메르가 칫칫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수련생들을 보며 심술 맞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치러야 할 시험은 지금까지의 졸업 시험과는 전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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