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휴식이자, 회복 기간이 끝나고 다시 5 연무장이 열렸다.
라온은 훈련을 위해 오랜만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음?’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전이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했다면 오늘은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중간중간 호감이나, 적의가 깃든 시선도 있었다.
-그게 인간들의 특징이니라.
팔찌에 박혀 있던 라스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약하면 무시하고, 강하면 동경한다. 짐승만큼이나 힘에 좌지우지되는 게 인간이지.
‘요즘은 너랑 통하는 게 많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저들이 저런 시선을 보내는 건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시선만 있는 건 아니다. 질투나, 질시 혹은 그 이상의 원색적인 살의도 있었다.
‘마계는 어때? 더 심할 거 같은데?’
-궁금한가? 궁금하면 말해주도록 하지. 인간들의 상상과는 다른 곳이다. 물론 약하다면 가축 취급도 못 받는 곳인 건 같지만.
라스는 힘이 없는 자가 대접을 받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이번에 잘했다. 분노의 감정을 끌어모아 그 못생긴 놈을 완벽하게 깨부쉈지. 그놈의 아비까지 제압했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다.
‘그래?’
-그렇다. 딱 하나. 그놈을 죽이지 못한 게 조금 아쉽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건드리는 놈은 모조리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크게 흡족해합니다.]
[감각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만족하며 능력치가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웬 떡?’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기대도 안 한 보상에 새벽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망할 놈의 시스템! 왜 이럴 때만 본왕을 주인으로 여기는 거냐!
라스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를 노려보며 분노를 끌어 올렸다.
‘고맙다. 네 덕분에 성장이 더 빨라지네.’
-입 닫아라. 네놈이 기뻐하는 모습만 보면 화가 솟구치니까.
라스는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나온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분노를 터트리기 직전이 되었다. 성격파탄자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 난 좋은데?”
-이놈이 점점!
라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라스가 욕을 내질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음?”
연무장에 들어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단상 위에 여기에 없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리메르?’
평소 새벽 훈련 시간엔 오지도 않고, 오전 훈련에도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는 게으른 엘프가 단상에 앉아 있었다.
“오! 우리 복덩이! 라온 수련생 왔어?”
리메르가 양손을 펼치며 히죽 웃었다. 그의 긴 손가락에는 가지각색 보석이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팔목이나 목에도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가 걸린 상태였다.
‘뭐지?’
저 엘프가 저런 귀금속들을 걸친 건 처음 보았다. 딱히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비싼 보석일 뿐이었다.
‘거기다 복덩이?’
갑작스레 복덩이라 불린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검계현신을 쓴 대가로 맛이 갔다고 생각할 때 뒤에서 버렌이 다가왔다.
“도박이다.”
“뭐?”
“저 인간. 너와 레이든의 검투에서 대놓고 도박판을 벌였다고 하더군. 네 배율이 높아서 엄청나게 땄다는 소문이 있다.”
버렌은 말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팍 구겼다. 그는 리메르를 멋있게 보았던 자신의 눈을 뽑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또 저질렀군.’
라온이 피식 웃었다. 왜 저런 보석을 끼고 있나 했더니, 도박으로 딴 물건인 것 같았다.
도박에, 술에, 게으름까지. 평소 알고 있던 엘프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단한 인간이다.
-저 건방진 귀때기 놈.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넌 또 왜?’
-저 녀석만 보면 화가 난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네놈의 육체는 본왕의 것이었을 텐데….
‘아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혈귀에게 죽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난 리메르 덕분에 라스에게 몸을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라스는 원래 리메르를 건방지다고 싫어했지만, 이젠 혐오를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라온은 라스와 달리 리메르의 진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놀고먹는 한량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수련생 한명 한명을 살피고 적절한 수련을 지시한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자신을 이용해서 내기를 한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다.
“한심해.”
마르타는 양손의 반지를 자랑하는 리메르를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흥흥.
뒤에서 들린 콧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루난이 맹한 눈으로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라온이 연무장에 온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들이 연무장에서 응원하고 환호해준 것도 생각났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한 겨울 난로 앞에 앉은 것처럼 가슴이 따스하게 달아올랐었다.
별관만이 아니라, 5 연무장의 사람들도 나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 다 모였나?”
단상 위에서 졸부처럼 보석 자랑을 하던 리메르가 손뼉을 쳤다.
평소처럼 시선을 모으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있던 교관들이 철제 상자를 가지고 왔다.
쿵!
연무장에 상자를 내려놓자 쿵 하고 모래가 튀었다.
“이게 뭘 거 같나?”
“도박으로 딴 겁니까?”
“오, 정답!”
버렌의 대꾸에 리메르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구경할 만큼 했으니, 자랑 그만하시고, 훈련 시작하시죠.”
“아, 이건 너희 거야.”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상자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예? 저희 거라뇨?”
“그 상자가요?”
“그게 무슨 소리….”
수련생들은 리메르와 상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도박왕께서 내기를 두 개 걸었거든. 첫 번째는 이 돈! 이 엄청난 돈! 보석! 크하하하!”
리메르는 스스로를 도박왕이라 칭하며 손에 낀 반지들을 또 한 번 자랑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낄낄 웃으며 상자를 열자, 마음이 안정되는 청아한 약 향이 피어 나왔다.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상자를 보았다. 큰 상자 안에 작은 나무 상자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영약인가?’
나무 상자의 고급스러운 생김새와 새어 나오는 씁쓸한 향을 보니, 영약이 분명했다.
“영약이다.”
리메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련생들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었다.
“여, 영약이라구요?”
“이게 전부?”
“한 40개는 넘어 보이는데….”
수련생들은 영약이 들었다는 상자들을 살피며 입을 떡 벌렸다.
“그래. 그것도 십지초가 들어간 영약이지.”
“십지초!”
“그게 이렇게 많이?”
“우와아아….”
십지초는 잎이 열 갈래로 갈라진 약초로 어느 한 속성에 치우치지 않아 육체와 단전, 마나회로를 모두 정화 시킬 수 있는 귀한 영약이다.
십지초로 만든 영약은 균형이 좋아 가격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데 그게 40개가 넘게 있으니, 다들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너희들 거다.”
리메르가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뿌듯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딱 43개니까. 하나씩 가져가라.”
“엑?”
“지, 진짜요? 진짜 우리 거예요?”
“어?”
“음?”
수련생들은 당연하고, 버렌과 마르타조차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루난은 멍하니 서서 강아지처럼 영약의 냄새만 킁킁거렸다.
“아, 이것들이 속고만 살았나.”
리메르가 혀를 차고서 맨 위에 있던 영약 상자를 라온에게 던졌다.
탁.
라온이 얼떨결에 받은 영약 상자를 열었다. 성인 엄지 손가락만한 녹색 구슬이 들어 있었다.
“십운단이다. 많은 마나가 들어있지는 않지만, 날 것처럼 순수해. 너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다.”
리메르는 십운단에 대해 설명하며 수련생들에게 영약을 던져주었다.
“이거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버렌이 십운단을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영약은 돈이 있다고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다. 42개의 십운단을 어디서 구했는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땄다니까.”
“지, 진짜 이걸 도박으로 따셨다는 겁니까?”
“도박은 아니고 내기지. 내기.”
리메르가 손가락을 빙글 돌려 텅 비어버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대체 누구와 내기를 했길래….”
“진무전주랑.”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어?”
“지, 진무전주라면….”
“발데르 지그하르트!”
“어어억!”
진무전주의 이름이 나오자 수련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황하여 영약을 바닥에 떨어뜨린 수련생들도 있었다.
“아아, 괜찮아. 지금은 그쪽은 여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 아마 내가 다 팔아먹을 거라 생각할 테니, 너희들에게 해코지가 가진 않을 거다.”
리메르는 안심하고, 오늘은 돌아가서 영약을 먹고 오러 연공을 하라 지시했다.
‘하….’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글렌의 아들이자, 진무전주인 발데르에게 대놓고 내기를 걸어 영약 43개를 따오다니, 저 엘프는 자신만큼이나 정상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 라온은 고맙다고 말하며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교관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수련생들은 들뜬 표정으로 라온을 따라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응. 그래. 그래.”
리메르는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버렌은 평소의 뚱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고, 마르타 역시 영약을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내렸다.
저렇게 자기 색이 확실한 녀석들이 같은 반응을 하다니, 영약의 힘이란 참 대단했다.
“자, 그럼 모두 돌아가. 내가 숙취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고, 영약은 바로 먹어야 좋거든.”
리메르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자랑을 끝내니 숙취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만, 리메르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만큼은 리메르가 수련생들의 영웅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넌 남아.”
라온도 그들을 따라가려고 할 때 얼굴이 퍼렇게 변한 리메르가 어깨를 잡았다.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어으, 어제 좀 달렸거든.”
그러고 보니 리메르만이 아니라, 교관들의 표정도 퍼렇다. 저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신 것 같았다.
“그거 돌려줘.”
리메르가 라온의 손에 든 영약 상자를 가리켰다.
“네 건 이거니까.”
그는 품에서 새로운 영약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씁쓸한 향이 십운단보다 더 진하게 풍겨 나왔다.
“이건….”
“십지초를 두 개 넣은 단이다. 원래는 레이든이 먹어야 할 물건인데, 네가 가져가다니 세상은 참 신기하다니까.”
“저를 주셔도 되는 겁니까?”
“너 때문에 내가 부자가 됐으니까. 아무래도 난 도박에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야.”
리메르가 다시 한번 양손을 털었다. 반지와 팔찌들이 부딪치며 부티나는 소리가 울렸다.
‘얼마 못 가겠군.’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리메르가 곧 도박으로 저 재산들을 다시 날리리라 확신했다.
“십운단은 효율이 좋은 영약이다. 가진 마나의 50%는 흡수할 수 있지. 하지만 영약 자체의 마나가 적어. 너처럼 두 속성의 오러를 모두 가진 녀석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거다.”
리메르는 두 속성이라는 말을 할 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다른 십운단에 비해 두 배가량 마나가 많으니, 냉기와 화기 전부 키울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냥 영약을 주어도 될 텐데, 그 안에서 또 다른 배려를 해주니,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가라. 내일 보자.”
리메르가 손을 흔들었다.
“교관님. 너무 과음하지 마십시오.”
“오, 내 걱정해주는 거야? 아직 10년은 일러 인마!”
그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수석 교관실로 걸어갔다.
“음….”
라온은 리메르의 등을 보며 십운단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스승인가….’
전생에서 자신을 키운 건 교관이다. 그와의 관계는 사육사와 개 혹은 조련사와 늑대였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자신은 그를 죽이겠다는 악의만을 가슴에 새겼다.
‘여기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그하르트는 대륙에서도 악명이 높은 가문. 수련생들을 개처럼 육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간답게.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성을 유지 시키며 키워냈다.
예전 수련생 시험에서 떨어진 아이들 역시 버림받지 않고 6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지그하르트는 너무도 인간적인 곳이었다.
특히 리메르는 교관이라기보다 스승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이뤘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라온은 멀어지는 리메르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연무장을 떠났다.
* * *
리메르는 교관실에서 낮잠을 세 시간 때린 뒤 점심시간 무렵 가주전으로 찾아갔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로엔이 활짝 웃으며 알현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리메르는 씩 웃으며 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로엔은 관심이 없다는 듯 옅게 웃으며 알현실로 들어갔다.
“흠….”
이 빛나는 보석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로엔이 실망스러워 입이 튀어나왔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글렌은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세운 옥좌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리메르는 열 손가락에 손목까지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너는 나이를 먹을수록 한심한 짓만 하는구나.”
“허….”
리메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매를 찡그리며 일어섰다.
“아니, 부하가 돈 좀 땄으면 칭찬 좀 해주시죠. 오랜만에 호구 좀 털었는데.”
“그 호구가 내 아들인데 칭찬을 하라는 건가?”
“저한테 털려야 나중에 진짜 사기꾼에게 안 당합니다.”
“말은 잘하는군.”
글렌이 서늘한 눈빛으로 턱을 틀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아이들에게 십운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그런 영약을 정말 쉽게 넘기는군.”
“뭐라고 해야 할까. 애들이 생각 이상으로 성장해주니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더라구요. 이게 부모 마음인가.”
리메르가 낄낄 웃었고, 글렌은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일단 제 가르침이 어마어마한 것도 있지만, 수련생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다른 어떤 세대의 아이들보다도 강해졌습니다. ”
글렌도 동의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 수련은 전부 네게 일임했을 텐데?”
“수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리메르의 목소리에 진한 열기가 치솟았다.
“수련생들의 졸업 시험 내용을 바꾸도록 허락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