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96화 (96/653)

96화

레이든이 이빨이 뽑힌 채 쓰러지고, 허공을 수놓던 불길이 잦아들고서도 연무장은 고요했다.

“와아아아아!”

“라온! 라오오온!”

“도련님!”

“이겼어요! 라온 도련님이 이겼다구요!”

그 침묵을 처음으로 깬 사람들은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이었다. 누구보다 마음고생을 했던 그녀들은 눈물을 터트리며 관객석에서 연무장으로 뛰쳐나올 기세였다.

“라온!”

“라온!”

“꺄아아아!”

직계나 방계들이 노려보아도 신경 쓰지 않고 비명이 섞인 환호성을 질렀다.

그 울림은 지금까지 그녀들이 받아온 억압을 깨부수는 듯 시원했고, 자유로웠다.

“라오오오온!”

“우와아아아아아!”

그 뒤를 잇는 함성은 연무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온과 함께 수련해온 수련생들의 목소리였다.

“라온 님!”

“라온!”

“이야아아아!”

직계, 방계, 봉신 가문 그리고 외부에서 온 추천생들까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그의 이름을 외쳤다.

“흐흠! 저, 저 정도는 해줘야지. 괜히 수석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버렌이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음부터 저놈이 이기리라 생각했어.”

“음, 그런 것치고는 소리를 꽤 많이 지르셨지 않습니까.”

버렌의 집사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 ‘라온. 여기서 지면 가만히 안 둘 거다. 넌 나한테 져야 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방금은 ‘싸워, 깨부숴! 저 새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라고 하셨고, 레이든 도련님이 쓰러졌을 때는 ‘우아아아아!’하고 함성도 터트리셨습니다.”

“그, 그만!”

버렌이 붉어진 얼굴을 팍 구겼다.

‘기,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흥분했었는지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꺾고 5연무장의 수석이 되었다면 저런 직계 같지 않은 놈팽이 따위는 쓰러뜨려야 옳다.

“나,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수련생 전부 라온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데….”

“흥. 자기 감정도 주체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니, 아직 젖먹이네.”

아래에 앉아 있던 마르타가 위를 힐끔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니까. 앞으로는 쪽쪽이나 빨고 다녀. 어디가서 아는 척 하지말고.”

“끅,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 아가씨.”

버렌의 집사가 마르타 앞의 난간을 가리켰다. 동그랗던 난간은 주먹으로 쥐어 찌그러져 있었다.

“그거 주먹으로 쥐신 거 아닌가요? 아가씨도 꽤 흥분하신 거 같던데요.”

“아, 아닌데? 무슨 개소리지?”

마르타는 고개를 맹렬하게 저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욕을 내뱉었다.

“이런 수준 낮은 검투 따위를 보는데 흥분? 하, 무슨 코흘리개도 아니고.”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머리를 튕겼다.

“마르타. 이제 와서 아닌 척 해봤자다. 나도 네가 욕을 내지르는 걸 들었으니까.”

“아닌 척은 네가 하고 있었겠지. 꼬우면 맞짱 뜨던가!”

“라온.”

싸울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버렌과 마르타는 아래쪽에서 들린 가는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라온.”

루난 슬리온이 양손으로 입 주변을 감싼채 계속 라온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라온.”

아무리 손을 모았어도 너무 작아 들릴리도 없건만 루난은 계속해서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하….”

“음….”

힘 빠진 듯하지만 확실하고 솔직하게 응원하는 루난을 보고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내렸다.

“쯧, 볼 필요도 없는 검투였어. 수준 낮기는.”

마르타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어이 동태눈깔들!”

그녀는 앞에 앉아있던 검사들의 의자에 발을 걸쳤다.

“아까 말했지? 재밌는 결과가 나올거라고.”

“아….”

“그, 그게….”

검사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며 어깨를 좁혔다.

“실력이 구리면, 눈치라도 빨라야지. 너희처럼 썩은 눈알로 살아남으려면 수련이라도 열심히 해야 할 거다.”

그녀는 검사들을 비웃고서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성질 하고는.”

버렌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일어섰다. 저 여자는 라온한테만 얌전할 뿐 다른 사람들 앞에선 이전보다 더 흉폭해진 상태였다.

“후….”

고개를 돌려 연무장의 중심에 선 라온을 보았다.

당당하게 등을 편 채 연무장 전체를 돌아보는 녀석을 보니, 홀로 광혈귀의 앞을 막았던 그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건 잊지 못하지. 평생을 두고도 갚아야 할 빚이다. 다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버렌이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라온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꼭 따라잡겠다.”

*     *      *

“음!”

글렌이 의자의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는 평소보다 컸고, 눈썹이 아래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감정과 표정의 변화가 옅은 글렌 치고는 굉장한 반응이었다.

“가, 가주님.”

로엔이 턱을 떨며 글렌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도련님이 가람보법에 섞어서 사용한 그거 태화보가 아닙니까?”

“…맞다.”

“허억!”

항상 미소를 유지하던 로엔의 거짓된 얼굴이 깨졌다. 그는 라온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으음….”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오늘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라온이 레이든을 압도적으로 꺾은 점이 아니다.

라온이 고작 2주일 전에 알려준 태화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태화보는 그가 마를 벗어나 초월에 단계에 오르고 나서 만들어낸 보법. 평범한 무인은 평생이 가도 익히기 힘들 고등의 무학을 이용했다.

‘하지만….’

라온은 익혔다. 그것도 2주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그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글렌이 감탄하고 당황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최소 반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글렌이 당당하게 선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빨라도 반 년은 지나야 라온이 태화보를 사용할 거라 예상했다.

‘2주라니.’

초월의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판단이 어긋났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뭐랄까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검술까지….’

라온은 마지막에 연성검법의 진의마저 끌어냈다. 이제 15살짜리가, 자격도 얻지 못한 수련생이 검술의 진의를 꺼내다니, 놀라지 않으려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대단합니다. 태화보에, 연성검법 그리고 마지막 불꽃까지….”

로엔은 아예 경악하여 제대로 말을 잇질 못했다.

“큼, 그 정도는 아니다. 태화보는 고작 1성. 그것도 초반에 입문했을 뿐이다. 연성검법도 아직 부족해. 레이든이 다른 연검술을 사용했다면 저리 쉽게 밀리진 않았을 거다.”

글렌은 놀란 표정을 감추고,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니라뇨. 가주님 표정이…흐.”

로엔이 능글맞은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가렸다.

“아니라니까.”

글렌은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요즘 리메르와 같이 다니니, 로엔의 성격도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거, 검투는 라온 지그하르트의 승리입니다!]

본인의 역할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사회자가 라온의 승리를 외치자 이곳저곳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우와아아아!”

“라온!”

“라오오온!”

아직 여물지 못한 목소리. 아이들이었다.

“저 아이들은….”

라온과 함께 수련하는 수련생들은 직계, 방계, 봉신가문 그리고 외부의 추천생까지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같은 함성을 질렀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아니, 모두가 방계를 응원하는 건 처음 아닐까요.”

“음….”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방계도 공을 세운 적이나, 대련에서 이긴 적은 많지만, 직계, 방계, 봉신가문, 추천생 모두의 환호를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신기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되게 되는 날이었다.

“다른 이들도 저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에 머리가 물들었을 무렵 이곳을 독재했던 자신에게 그런 건 무리였다.

무력 그리고 피로 나눠놓은 시대가 너무 길었고, 그걸 바꾸기에 자신은 너무 늙었다.

하지만 저기에 빛이 있었다.

라온이라면, 직계로 태어나, 방계의 부당함을 아는 저 녀석이라면 언젠가 이 가문을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가주님. 검투가 끝났습니다!”

사회자가 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 전체의 시선이 글렌을 향했다.

“음!”

글렌이 몸을 일으켰다. 검투의 승자를 칭송해줘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이 숭고한 전투를 방해한 협잡꾼을 처리하고 나서.

고오오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서쪽에 아래에 앉아 있는 발데르를 향했다.

*     *      *

라온은 기절한 레이든을 안은 사회자와 함께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살벌하군.’

글렌은 평소보다 더 표정이 없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주변에 냉혹한 기운이 맴돌았다.

‘내가 이겼기 때문인가. 아니면….’

글렌이 평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신상필벌만큼은 확신한 사람이다.

자신이 승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저렇게 대놓고 서늘한 기운을 품을 만큼 좀생이는 아니었다.

쿠구구구!

글렌이 일어서서 단상 앞에 서자, 연무장의 공기가 지독할 정도로 건조해졌다. 도서관이 된 듯 숨소리 하나 크게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 검투의 승자는 라온 지그하르트다.”

“우와아아아아!”

글렌의 선언에 수련생들에게서 이전보다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물론 연무장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직계와 방계는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이번 검투에 걸었던 조건을 밝히겠다.”

검투에서 각자의 검사들이 건 조건은 검투가 끝난 이후에 드러난다. 조건에 대한 궁금증에 사람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별관에서 문제를 일으킨 레이든이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에게 무릎꿇고 사과하고, 진무전이 별관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

“음….”

사람들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한 채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게 조건이었다고?”

“사과가?”

“허, 그것도 시녀들한테라니….”

보통 검투에 거는 조건은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이다.

자존심을 건 전투이니, 상대의 재산 혹은 가장 좋은 무기 아니면 팔이나 단전을 부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데 라온이 원한 건 고작 사과다. 그것도 라온 본인에 대한 사과가 아닌 그의 어미 그리고 보잘 것없는 시녀들에 대한 사과.

사람들은 그런 조건을 처음으로 보고 충격을 느꼈는지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검투에서 사과? 멍청한 놈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실비아의 아들 답네요.”

직계와 힘이 있는 방계는 그를 비웃었고.

“…….”

봉신가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며.

“라온 지그하르트라….”

중앙에서 밀려난 힘 없는 방계와 시작부터 미약했던 외부의 검사들은 라온의 이름을 뇌리에 깊게 새겨넣었다.

“검투가 끝났으니, 그 조건은 바로 이루어져야겠지.”

“꺼헉!”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대자로 뻗어 있던 레이든이 피를 토하고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야. 어흑! 나, 난 여기에 왜….”

이빨이 나간 레이든의 발음은 구멍난 항아리처럼 줄줄 새고 있었다.

“실비아 지그하르트와 별관의 시녀들은 앞으로 나오라.”

글렌의 명령에 실비아와 헬렌, 별관의 시녀들은 척추를 곧게 세운 채 벌떡 일어섰다. 그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았다.

“연무장으로 내려와라.”

“아, 예!”

실비아가 고개를 꾸벅였다. 시녀들을 이끌어 연무장 아래로 내려왔다.

“아….”

“이, 이게 무슨 일이래.”

“마님. 떨려서 못 걷겠어요.”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그녀들은 쭈뼛쭈뼛 과할 정도로 눈치를 보며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라온은 뒤를 돌아 실비아, 헬렌, 시녀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괜찮으니, 눈치 볼 것 없이 오라고 눈으로 말했다.

“음….”

“모두 침착해. 우리가 잘못한 건 없어.”

“예. 마님.”

그 시선이 통했는지 실비아와 시녀들의 걸음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들은 라온의 옆에 서서 글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부르셨습니까.”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이든을 굽어보았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에? 아, 예!”

“검투는 네 패배로 끝났다.”

“아, 아아….”

그제야 본인의 패배를 깨달은 레이든이 턱을 덜덜 떨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검투를 시작할 때의 조건대로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라.”

“하, 할아버지!”

레이든이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무릎을 꿇었다. 실비아가 아닌 글렌을 향해.

“저, 전 검사 자격을 얻은 직계입니다. 방계도 아닌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으라니요!”

“약속은 내가 아니라 네가 했다. 검투에서 패했으니, 약속을 지켜라.”

“할아버지. 저, 저는….”

“공적인 자리다. 가주라 불러라.”

“가, 가주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다음에는 이길 수….”

“네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로서 스스로 한 말을 지켜라. 레이든 지그하르트.”

글렌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거칠었던 공기가 더 삭막해졌다.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으으….”

레이든은 그 기세에 짓눌려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버지인 발데르를 보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제, 젠장! 젠장!’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라온 때문이다. 저 개새끼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

‘죽인다. 무조건!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죽인… 억!’

일어서며 라온을 본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요동을 쳐 놈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끄윽….”

라온에게 얻어맞은 전신에서 통증이 일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폐가 우그러들었고, 겁이 나서 놈의 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고, 공포? 내가 저놈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것밖에 없었다.

“이익!”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라온과 눈을 마주친 순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든이 지금까지 익힌 모든 무학이 꺾이고, 힘으로마저 밀려 수없이 얻어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라. 가서 무릎을 꿇어라.”

“으….”

글렌보다 가깝고 섬뜩한 시선에 레이든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실비아의 앞에 걸어가 멈춰 섰다.

‘어떻게 해서든 전부 죽일 거야.’

레이든은 라온의 눈을 쳐다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그들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품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 미안하다. 사과하겠다.”

그는 이를 악문 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

“아….”

실비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주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라온이 만화공의 오러로 시녀들을 휘감았다. 겁을 먹었던 시녀들의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아….”

“라온.”

“라, 라온 님.”

“오늘은 사과를 받는 날이니까.”

라온이 실비아와 시녀들은 안정시키고 레이든에게 다가갔다.

“다시 해라. 레이든 지그하르트.”

“뭐, 뭐?”

“조건은 분명 무릎을 꿇고 사과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너 이 새끼 정말 보이는 게 없는 거냐. 이 일이 끝나고….”

“다시 해.”

“끅!”

라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레이든의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몸에 새겨진 라온에 대한 공포였다.

“으….”

레이든이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는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

레이든은 몇 개 없는 이로 입술을 짓씹은 채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하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밝혀라. 전부 알려주었을 텐데.”

맞다. 놈은 주먹과 검으로 때릴 때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밝혔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하나하나 모두 생각났다.

“나, 나는 거짓된 서신을 보내고, 키우던 꽃을 짓밟고, 손에 침을 뱉었고, 시녀들의 뺨을 차고, 발로 걷어차, 찼다. 이, 일방적으로 별관에 시비를 걸었다. 죄, 죄송했… 끄윽.”

레이든은 육체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포에 짓눌리고, 자존심이 상해 다시 정신을 잃었다.

“괜찮아.”

라온은 걱정으로 얼굴이 파래진 시녀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누구도 별관을 건드릴 수 없게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흐윽….”

“흑!”

그제야 시녀들이 글썽이던 눈물을 쏟아냈다.

“라온….”

실비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라온의 손을 잡았다.

“가주님. 제 조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직접 확인해주십시오.”

“물론이다. 다만 그 전에….”

글렌의 섬뜩한 눈동자가 발데르를 향해 쏘아졌다.

“숭고한 검투를 방해한 놈부터 처리해야겠지.”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