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님. 저, 전 못 보겠어요.”
헬렌은 검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을 뜨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들처럼 대해온 라온이 살벌하기로 이름 높은 레이든과 검투를 한다는 것에 긴장되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봐야 해.”
실비아는 헬렌과 달리 눈을 부릅뜨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니까.”
헬렌이 슬쩍 눈을 떴다. 라온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에 조금 긴장이 해소되었다.
“하아, 그래도 떨리네요. 마님은 어떻게….”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난간이 흔들릴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마님….”
헬렌은 눈물이 꾹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실비아는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떨리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녀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언제쯤 행복해지실런지….’
실비아도, 라온도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능력만 있었다면 두 사람을 이곳에서 떠나게 하고 싶었다.
“괜찮을 겁니다.”
주디엘이 차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도련님은 밤낮없이 레이든의 연검술에 대비하셨습니다. 분명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경악할 모습을 보여주실 겁니다.”
“그, 그렇게 되면야 바랄 게 없지만….”
“맞아. 헬렌. 그렇게 생각하자. 고마워.”
실비아는 주디엘에게 고맙다며 눈인사를 보냈다.
“자, 손잡아. 손.”
“네?”
“손잡고, 라온이 이기길 기도하자고.”
실비아가 먼저 헬렌의 손을 잡았다. 헬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던 주디엘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별관 시녀들 모두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음….”
주디엘은 땀에 젖고, 떨리는 헬렌과 다른 시녀의 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데.’
라온은 괴물이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수많은 강자에 비하면 무력은 분명 약하다. 하지만 기질 자체가 다르다.
그날 밤 본 라온의 두 눈동자는 평생이 가도 잊을 수 없다. 공간을 지배했던 공포와 살기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오른다.
그는 진짜다.
저런 흉폭하기만 한 가짜에게 지고 싶어도 질 사람이 아니었다.
주디엘이 라온의 진면목을 보았던 그 날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사회자가 검투의 시작을 알렸다.
“흡!”
옆에 앉은 실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콰아아!
레이든은 시작하자마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연검술을 선보였다. 그 예리함과 다채로운 변화는 멀리 있는 이곳까지 전해져왔다.
라온은 그 화려함과는 반대로 정직하기 그지없는 연성검법을 사용하고, 가람보법을 밟았다.
그의 모습은 폭풍 속을 떠도는 꽃잎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음….”
“아아….”
실비아와 헬렌의 손이 덜덜 떨린다.
‘전부 잘못 알고 있어.’
주디엘이 입술을 핥았다. 라온의 눈빛은 자신을 짓눌렀던 그때와 같았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상태였다.
콰아아아!
레이든이 자랑을 하듯 화려한 검초를 선보였다. 장미 덩굴처럼 꼬인 검기가 라온을 덮치려는 찰나 그가 가람보법을 밟았다.
자신조차 알 법한 기본적인 보법이건만 그는 그 예리하고 다채로운 검술을 피해 레이든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레이든은 그걸 느끼지도 못한 듯 앞을 보고 있다가 그대로 목을 내주었다.
“이, 이겼어! 이겼어요! 마님!”
“꺄아아아악!”
헬렌과 시녀들은 레이든의 목젖 앞에 검을 둔 라온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우….”
실비아는 난간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긴 것보다 라온이 다치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
주디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길 건 알았지만, 저리 간단하게 저렇게 쉽게 승리할 줄은 몰랐다.
‘정말 대단… 어?’
감탄하고 있을 때 라온이 검을 내리고 레이든의 입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레이든이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튕겨 나갔지만, 전력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화만 돋은 듯 레이든의 오러가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대, 대체 왜!”
실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압도적으로 끝난 승부건만 풀어준 이유를 모르겠다.
레이든이 손목을 휘돌렸다. 연검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라온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으며 물러섰지만, 레이든의 연검은 추적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끝까지 라온을 쫓았다.
레이든의 검이 라온의 심장을 노리고 꿈틀거렸지만, 라온의 표정은 담담했다. 물에 뜬 연꽃처럼 흘러가 레이든의 왼쪽에 이르렀다.
처억!
라온은 이번에도 레이든의 목에 검을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두 번째다. 라온은 이길 수 있음에도 레이든을 두 번째 풀어주었다.
이제 레이든은 분노에 가득 찬 한 마리 괴수가 된 듯한 눈빛을 발하며 연검을 휘둘렀다. 라온은 여전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검을 피해 앞에서 레이든을 제압했다.
뻐어억!
라온은 관중석까지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레이든의 얼굴을 걷어찼다.
헬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라온이 왜 레이든을 놓아준 건지 알았다.
‘복수를 해주는 거였어.’
라온은 레이든이 별관에 와서 부렸던 행패들을 차례로 갚아주고 있었다.
처음에 입을 때린 건 서신을 보냈다는 거짓말 때문이었고, 두 번째에 얼굴을 친 건 가래침을 뱉은 것, 방금은 꽃을 짓밟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아….”
참을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곳 지그하르트에서 피란 곧 힘. 직계는커녕 방계조차 되지 않는 자신들을 제대로 대우해준 사람은 실비아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 그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 차가운 대지에서 시녀들을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건 그녀뿐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한 명이 늘었다. 실비아의 아들이자,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라온.
그는 우리를 위해 직계와 싸우고, 직계를 박살 내고 있었다.
라온의 마음이 전해져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흐읍….”
헬린은 울음을 참는 듯한 신음에 고개를 돌렸다. 다른 시녀들도 라온의 뜻을 알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부 같은 감정을. 처음으로 자신들을 위해주는 사람에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입을 꽉 다문 채 자랑스러운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오러와 검술을 잃기 전의 그녀의 모습을 보는 듯 당당한 얼굴이었다.
다만 헬렌의 생각 이상으로 실비아는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도 스스로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 주눅이 든 채로 살았다. 직계이면서도 없는 사람처럼 냉대를 받았다.
아버지에게, 형제에게, 가문에게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건 이탈이었다. 그녀는 가문을 벗어나 자유를 택했다.
‘하지만.’
정답은 그게 아니었다. 이곳에서, 이 지독한 땅에서 힘으로 극복을 했어야 했다.
그걸 지금 자신의 아들인 라온이 말해준다.
누구보다 약한 채 태어나 지금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품은 아이가 등으로 보여주었다. 상대가 누구든 넘볼 수 없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라온….”
실비아는 끓어오르는 격동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뿌드득!
발데르가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검투의 승패는 레이든의 승리로 이미 결정이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연무장의 9할 이상이 모두 레이든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레이든은 라온에게. 그것도 하급 검술과 하급 보법을 사용하는 라온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만약 라온이 마음만 먹었다면 첫 격돌에서 전투가 끝났을 거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나고 있었다.
후우우웅!
라온은 방금도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을 그대로 사용하며 레이든이 펼친 결정연검의 마지막 초식을 갈라버렸다.
“저 미친….”
발데르는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흘렸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연성검법의 진의를 검에 담고 있었다.
검술의 진의란 이미 검에 나름의 의지를 담는다는 뜻.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저놈은….’
그걸 익스퍼트를 갓 입문한 놈이, 그것도 15살짜리가 이뤄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을.
이미 이성이 반쯤 나간 레이든은 절대 라온의 검을 뚫지 못했다. 이 검투는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예상과 아예 반대로.
‘천재. 아니, 그런 수준을 넘었어.’
대륙은 넓고 천재는 흔하다.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작은 무력 단체에도 천재라 불리는 사람은 꼭 한 명씩 있다.
지금의 라온은 그런 단어로 설명이 될 놈이 아니다. 천재를 잡아먹고 크는 괴물. 대륙의 정상에서 검을 휘두를 아귀 같은 놈이었다.
‘방계 따위가!’
실비아의 아들이라고 해도, 씨는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하등한 놈이 자신의 아들을 이긴다는 생각에 분노가 넘쳐흘렀다.
“저 새끼….”
“우와아아아! 대박 터졌다!”
기세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 옆에서 가볍다 못해 촌스러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리메르였다.
“인.생.역.전!”
그는 양손에 든 종이를 마구 흔들며 환호를 질렀다.
“좀 닥쳐!”
“어? 아이구, 미안합니다.”
리메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숙였다. 다만 눈빛은 싸움을 앞둔 전사처럼 살벌하게 빛났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습니까. 라온이 이길 거라고.”
그는 발데르의 옆으로 다가가며 씩 웃었다.
“내기 보상을 준비하려면 돈이고 시간이고 꽤 써야겠어요. 뭐, 그게 아니라도 한턱 단단히 벌었지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손에 든 종이들을 가리켰다. 여기저기서 내기를 건 증표들이었다.
“내가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발데르의 분위기가 깎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결과가 나왔다는 건 아실 테니, 하나만 말하고 사라지죠.”
리메르는 발데르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오늘 이 시점으로 라온을 지켜보는 눈이 많아질 겁니다. 그 많은 눈을 피할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라온이나 별관을 건드리지 마십쇼.”
“너 이 새끼 감히….”
발데르가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리메르의 눈은 그가 광검이라 불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새끼를 건드린 아비 늑대를 보는 듯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나 말고, 가주님을 겁내라고요. 약속 안 지키는 거 정말 싫어하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는 서늘했던 기세를 단번에 꺼뜨리고, 낄낄 웃는 한량이 되어 떠나갔다.
‘저놈의 말이 맞아.’
오늘 라온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저놈도 별관도 건드리기 정말 힘들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들과 다른 직계 조카들은 라온의 그림자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저놈은 그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레이든!
발데르가 은밀하게 오러를 쏘아내 레이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변화와 예리함은 집어치워라! 힘으로! 힘으로 깨부숴라! 네가 유리한 점으로 싸워!
라온을 이길 수 있는 힌트를 전했다. 나중에 분명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기는 게 우선이다.
‘꺾어라!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 * *
‘음?’
라온이 살짝 눈매를 좁혔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레이든이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오러를 퍼뜨리지 않고, 평범한 검을 쓰듯 검 전체에 휘감았다.
‘그랬군.’
조금 전 불의 고리가 관객석에서 흘러나온 미약한 오러를 포착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발데드가 레이든에게 자신을 이길 방법을 알려준 것 같았다.
‘그 아들에 그 아비인가.’
라온이 뒤를 돌아 시치미를 떼고 있는 발데르를 보았다.
검투란 두 검사의 자존심과 무력을 겨루는 대결.
그 숭고한 대결을 방해한 주제에 부끄러운 표정은 없다. 내가 직계이고, 글렌의 아들인데 뭐 어쩔 거냐는 눈빛이다.
“크으….”
레이든은 멀리 보이는 발데르와 같은 눈빛을 발했다. 조언받은 대로 단전에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검에 응집시켰다.
고오오오!
결정연검이 아닌 일반적인 베기의 기수식을 취한 채 자신을 노려보았다. 꼴을 보니, 발데르의 추잡한 끼어들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레이든이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고 이를 드러냈다. 그의 연검이 빳빳하게 솟구치고, 강렬한 검기를 불태웠다.
“내가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네놈을 조졌어야 했다고!”
그 말은 사실이다. 레이든이 가진 오러의 크기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했으니까.
‘다만.’
강한 검술이 전부가 아니듯, 오러의 양이 승부를 결정하진 않는다.
“힘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네놈이 빈약한 오러 따위는 찢어주마!”
레이든이 땅을 박차고 연검을 내리쳤다. 대지를 반으로 가를 듯한 강렬한 검격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꾸욱.
라온이 검을 다잡았다. 검신의 끝에서 피어난 작은 불꽃이 다발이 되어 타올랐다.
쩌어어어엉!
대기를 녹이는 불꽃의 칼날과 녹색 오러를 휘감은 연검이 맞부딪쳤다.
“허억!”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충격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불꽃이 좀 늘어났다고 이런 위력이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 어떻게….”
“아직이다.”
라온의 눈동자가 그의 검처럼 시뻘겋게 타올랐다.
만화공 십화.
연신섬.
칼날을 타고 질주하는 붉은 꽃의 춤사위가 레이든의 오러를 불태우고, 연검을 꿰뚫었다.
캬아아앙!
연검이 모래처럼 바스러지고, 레이든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었다.
“아, 안 돼!”
“어딜 가려고.”
레이든이 도망치듯 뒤로 물러섰지만, 라온이 더 빨랐다.
“자, 잠깐! 내가 졌….”
“아직 두 번 남았다.”
라온은 검을 쥔 주먹을 레이든의 입속에 박아넣었다.
“끄으으….”
레이든의 이빨이 옥수수 알처럼 튀어나오고, 그는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나머지는 이걸로 퉁쳐주지.”
라온은 검을 털었다. 그의 검에서 불꽃이 꺼지는 것처럼 연무장 전체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